제 13강 네 번째 증명(1) 세례란 무엇인가?(갈3:26-29)
이제 4번째 증명이 시작됩니다.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에 구원이 속한다는 논증입니다. 이 증명은 4장 11절까지 이어지는데, 이 대목을 다시 3가지로 나누면, (1)세례논증, (2)상속자 (3)다시 노예로 구분됩니다. 이 네 번째 논증은 “그리스도교 전승의 시작”이라고 큰 이름을 붙이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다른 지를 논증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3:26)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주장할 때, 바울의 대응은 자신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내세우는 증거가 율법이라면, 바울이 내세우는 증거는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유대인들의 제 1원칙이 가려지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더 높은 그리스도교의 원칙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라고 자신을 내세울 때, 그리스도인들은“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라고 맞대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세는 율법을 중개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혈통적인 중개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직접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는 말 속에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justification through faith) 신학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세례를 받을 때에 요구되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세례의식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위에서 행해진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당신들이 세례를 받은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고, 그래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 율법은 이미 그 역할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입은 옷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3:27)
이 대목의 번역도 이해를 돕는 의역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 원문에는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았다.”(You are baptized into Christ)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세례를 베풀 때에 머리에 물을 흘리는 관수례(灌水禮)를 행합니다. 하지만 뱁티즘은 원래 요단강 물에 잠기는 것입니다. 아마 최소한의 옷만 걸치고 다른 옷들을 다 벗어버리고 물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물속으로”(into the water)라는 세례의식이 “그리스도 안으로”라는 말 속에서 연상되지 않습니까?
겉옷들을 벗어버린다는 것의 의미는 옛 사람과 옛 사람의 행실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나>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새번역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고 번역했고, 개역성경에서는 “그리스도와 합하였다.”고 번역하였습니다. 만일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면, 누구의 정신이 더 강하게 남아있겠습니까? “나”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일까요?
실상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은 날마다 나의 욕심과 싸움을 벌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합하였는데, 내 속에서 그리스도와 내가 싸운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저는 “솔직하게” 그리고 “예민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 받는다는 교리적인 과정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을 착각하며 살기 쉽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다 그리스도 덕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과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서 싸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은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명령 때문에 항상 노심초사하며 살게 됩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언제나 양보하고 손해 보는 일이 많고, 자기를 희생해야하는 일도 생기며, 정직하고 솔직한 것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이 마음에 남아서 늘 반성하는 마음이 크게 남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정의로우면서 동시에 자비롭기는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내게는 힘이 없는데, 권력 앞에서 당당하면서도 겸손하기는 또 얼마나 힘듭니까? 예수는 그렇게 살았고, 우리를 그 길로 따르라고 하시는데 말입니다.
세례 받고 물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과거의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었다.”고 표현합니다. “옛 사람을 그리스도라는 옷으로 가렸다.”고 보는 것이 실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종종 과거의 모습이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을 가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보호하는 것도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보호자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다른 것으로부터 보호받기를 바라면서 살지요. 그것도 우리의 현실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압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워서 절망하고 실족하려할 때, 결국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다시 용기와 희망 그리고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차별 없는 믿음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3:28)
28절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차별”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여성과 종 그리고 이방인은 유대사회에서 차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믿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중 바울의 관심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인데, 그 차별의 기준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을 가졌느냐? 아니면 무율법이냐?의 구별이 세례로 말미암아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자기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고수하려고 하였으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리스도교는 보편적인 종교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유대교로 편입되어 사라져 버렸거나, 아니면, 유대교의 한 분파 예를 들면 “나사렛파” 또는 “예수파” 정도로 남았겠지요.
여기서 종과 자유인의 구별도 없다고 한 말은 사실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만한 표현입니다. 물론 여기서 바울이 단순히 “노예해방”을 선언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골로새 3장 22절에 보면. “종으로 있는 여러분, 모든 일에 육신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라고 표현 한 것으로 보아도, 아직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신분관계가 존재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종과 자유인의 구별이 없다는 이 <선언>은 “해방”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에 남부의 교회는 노예제도를 지지하고 소유한 반면에, 북부의 교회들은 노예폐지를 찬성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남북교단이 분열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노예”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시대변화의 흐름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그 흐름에 따라 흘러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고 군림하고 종처럼 부리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아직도 여성목사안수를 금지하는 교단들이 제법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 안에 여성 담임목사의 수는 매우 적습니다. 교단총회 1500명의 대표 가운데에도 여성의 숫자는 미미합니다. 전체 교인 가운데 여성이 훨씬 더 많고, 봉사활동도 더 많이 하는데 말입니다.
4. 세례는 상속자격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입니다.”(3:29)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의 조건절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이라는 내용입니다. 원문은 만일(if)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제게 이렇게 다가옵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소유라고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이라고 말입니다.
사제서품을 받을 때 사제가 되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하는 말로 나옵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을 소유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요구만하는 기도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이니, 긍휼히 여겨주십시오.”라는 기도 외에는 말입니다.
“상속자”가 된다는 말로 29절은 끝납니다. 도대체 무엇을 물려받는다는 것인지는 4장에 들어가서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24년 7월 21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