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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MDL 노랑선 딛고 평양으로 향하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한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지난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3일간 평양에서 열렸다.
우리 현대사에서 두 번째로 가진 남북 정상 간의 만남이었다. 그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 남북정상회담이 2000년 6월에 한 번 있었다.
이 회담을 위한 대통령의 환송식과 환영식이 당시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주관으로 경기도 파주시 관내 도라산역(都羅山驛)과 인근의 군사분계선(MDL, Military Demarcation Line)에서 열렸는데, 무엇보다도 노무현 대통령이 평화를 상징하는 노란 색으로 장식한 분계선을 딛고 평양으로 향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되어 크게 주목을 끈 바 있다. 일반적으로 외국을 오갈 때는 ‘출입국(出入國)’이라고 하며 공항과 항구에서 출입국관리사무소와 세관을 통과하나, 특수지역인 북한 땅을 오갈 때는 ‘출입경(出入境)’이라고 하며, 통일부 남북출입사무소의 통제를 받는다.
아무튼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 내에서 아주 이례적으로 열린, 이 행사를 담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준비과정과 실제 행사 모습 등을 정리해 본다.
청와대 관계부처 실무회의에 참석
이 역사적인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은 당초 2007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열릴 계획이었다. 그 이전에 북한 핵(核) 문제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남북한과 이를 둘러싼 미국 ․ 중국 ․ 러시아 ․ 일본 등 6개 나라가 참가하는 다자회담인 ‘6자 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북한이 2006년 7월 미사일 발사 실험에 이어 10월 초에 핵실험을 하자 회담이 벽에 부딪혔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는 당사자로서 북한과 직접 접촉해 뭔가 돌파구를 마련할 목적으로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이 나서서 접촉을 가진 결과, 남북정상회담이 어렵사리 성사된 것이다. 이에 따라 8월 10일경 청와대 행사기획비서관 주재로 첫 관계부처 실무책임자 회의가 긴급 소집되었다. 행정자치부 의정팀장(현 의정담당관)을 맡고 있던 필자도 당연히 참석 멤버가 되었다. 평소 대통령의 해외순방, 국빈방한 환영식 등의 국가행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매우 촉박했다.
이 회의에서 청와대 행사기획비서관은 대통령의 북한 방문에 따른 환송 ․ 영 행사를 행정자치부가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필자는 “DMZ라는 특수한 지역이고, 또 출입 문제 등의 어려움이 따르므로 행정자치부가 맡기는 곤란하다.”며 일단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행사기획비서관은 “행사 장소로 봐서는 국방부 소관이나 지금으로서는 시기가 촉박한 편이라 행사 경험이 풍부한 행정자치부가 담당할 수밖에 없다.”며 맡기를 강력히 요구했다. DMZ에서 열리는 이같은 특수한 행사는 선례가 없던 터라 필자는 돌아가 내부 검토를 거쳐 회신하겠다고 답변한 후, 사무실로 돌아와 장관까지 보고하는 과정에서 결국 이 행사를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당초 예정했던 8월 25일이 가까워오자 북한 측에서 수해(水害) 피해가 심해 복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10월 2일부터 4일까지 연기를 요청해왔다. 우리 정부에서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어 회담은 자연스럽게 연기되었다. 어쩌면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행사를 준비하는데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지답사 결과 도라산역을 행사장으로 결정
그해 8월 15일은 제62주년 광복절이었다. 이날 오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3부요인, 광복회장과 광복회원, 각계인사 등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복절 경축식을 거행하였다. 이 큰 행사를 마치자마자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오후에 행사 담당인 김원석 서기관(현 경북도의회 의원)과 함께 청와대, 통일부, 국방부 요원 등 관계기관 합동으로 임진각휴게소, 판문점, 도라산역 등 주변 일대에 대한 현장 답사에 나섰다. 육로로 평양을 갈 경우를 대비해 이들 지역을 다시 한번 답사하며 지형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 후 합동회의를 열어 도라산역에서 환송 ․ 영 행사를 거행하자는데 실무적으로 합의를 보았다.
여기서 평양으로 향하는 두 길에 대해 의미를 달리 부여했다. 기존의 판문점을 통해 가는 길은 왕복 2차선으로 노폭이 좁고 굴곡이 심해 ‘과거의 길이요, 분단의 길’로, 이에 반해 도라산역과 개성공단을 통하는 길은 왕복 4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려있어 ‘화합과 번영으로 가는 미래의 길’로 각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행사는 새로 개설한 도라산역에서 거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청와대는 노무현 대통령이 출발 때는 별도 환송식 없이 도보로 MDL(군사분계선)을 건너가는 것으로 하되, 귀로에는 3부요인, 통일관련 단체장, 실향민, 파주지역 인사 등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환영식을 갖는 것으로 방침을 세운 후 언론에 브리핑했다.
이렇게 육로로 가는 방안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때 항공기를 이용했던 점도 참고가 되었다.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은 특별기를 타고 서울공항을 출발해 약 1시간 뒤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따라서 항공기를 이용하는 데 따른 불편함을 없애고, 또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활발하게 운영되던 개성공단을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격려할 수 있다는 점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행사장의 꽃 ‘화동(花童)’을 현지에서 선발
도라산역에서 환송영 행사를 담당하는 행정자치부는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환영식에서 역사적인 이 회담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대통령 내외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는 순서를 포함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화동은 가급적 통일촌(統一村) 내의 초등학교 3~5학년 가운데 선발하되, 학생 수가 너무 적은 탓에 차선책으로는 비교적 넓은 지역인 문산(文山) 읍내 학교에서 선발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화동에 선발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지만 화동에 선발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꽃다발을 받을 노무현 대통령과 영부인 권양숙 여사의 키에 우선 어울려야 하고, 이목구비가 정연하며, 특히 웃을 때 치아가 가지런해야 하고, 인상도 밝아야 하는 등 조건이 꽤 까다로운 편이다.
당시 DMZ(비무장지대) 내의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인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에 「군내초등학교」라는 아주 작은 규모의 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선 이 학교의 홈페이지를 통해 3~5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생들을 한명 한명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어울리는 한 쌍을 발견하게 되었다. 5학년 남학생과 3학년 여학생이 화동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전체 학생이라야 30여 명에 불과한데도 마치 대어(大魚)를 낚은 느낌이라 할까.
다음날 그 학교를 방문해 교장실에서 해당 학생을 직접 불러 확인한 결과, 키, 얼굴 모습과 표정 등에서 화동으로 썩 어울려 보이는 한 쌍이었다. 이들은 문산의 한 한복집에서 한복을 맞춰 차려입은 후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환영식장에서 노무현 대통령 내외에게 꽃다발을 드리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노랑선 딛고 평양으로 향하다
드디어 10월 2일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아침 청와대에서 국무위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한 후 평양으로 향하는 승용차에 올랐다. 공식수행원과 특별수행원을 대동하고 평양으로 향하던 대통령 내외의 탑승 차량이 파주의 통일대교와 도라산역을 거쳐 드디어 MDL 50ⅿ 앞에 멈춰 섰다. 노무현 대통령은 차에서 내려 천천히 MDL을 향해 걸어가다 그 MDL 앞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소감을 밝혔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禁斷)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그런 뒤에 영부인 권양숙 여사와 손을 잡고 평화를 상징하는 노랑색을 칠한 MDL을 통과해 북한지역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전 세계의 전파를 탔다. 이 극적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 군사분계선(MDL)에 설치된 노랑선을 딛고 북측으로 향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
오랫동안 국토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휴전선을 어떤 상징적인 방법을 통해 통과하느냐가 우리 준비팀의 과제였다. 우리 준비팀이 한미연합군사령부의 협조를 받아 비무장지대를 사전 답사한 결과, 실제로 MDL에 해당하는 도로의 양옆에는 2ⅿ정도 높이의 흰색 쇠막대가 세워져 있을 뿐 특별한 표식이 없었다.
그야말로 개념상의 선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이 휴전선을 대통령 내외가 통과할 때 어떤 상징적인 행사를 하느냐에 초점을 맞춰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우리 준비팀은 DMZ 내에서 이러한 행사를 치러본 적이 없던 터라 청와대에서 김영배(金永培) 행사기획비서관(현 21대 국회의원) 주재로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하던 중, 청와대 측 제안에 따라 ‘평화’를 상징하는 노란색을 도로에 칠한 다음 대통령 내외가 그 위를 딛고 가게 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 방안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보고되고, 북한 측에도 알려 동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실제 준비과정에서 1회성 행사인 점을 감안, 도로 폭만큼의 길쭉한 검정 고무 패널에 노란색 페인트를 칠해 행사를 마친 후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수거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이렇게 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MDL을 넘어 평양으로 향하는 이 극적인 장면은 국내외에 집중 조명을 받는 역사적 행사로 기록되었다.
우리가 사전답사를 할 때나 실제 노랑선 바탕을 까는 작업을 할 때 가까운 곳에서 북한 당국자가 입회하였고, 또 북한 병사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우리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남북 간 분단을 실감할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160㎝ 정도에 불과한 작은 키에 바짝 여윈 북한 병사를 보면서 180㎝ 정도로 튼튼하게 자라는 요즈음 남한의 청년들과 너무나 비교돼 마음이 좀 아려왔다.
함께 동행했던 대통령경호실의 경호관들과는 체격에서 비교가 되질 않았다. 한 명의 우리 경호관이 여러 명의 북한 병사와 싸워도 능히 당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 행사의 중요성에 비춰 행사장 부근에 배치된 북한 병사는 그나마 체격이 비교적 양호한 사람으로 선발했을 텐데도 말이다.
한편, 이날 행사장이 DMZ 내인 만큼 행사장에 입장하지 못하는 많은 일반 국민과 지역주민들이 임진각 부근에 나와 평양으로 향하는 대통령 일행을 환송하였다. 또 임진각 통일대교에는 실향민들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파주지역 주민들이 별로로 대통령 내외의 장도를 축하하고, 또 전국에서 보내온 ‘남북화해와 번영을 염원하는’수많은 노란 리본들이 바람에 흔들며 만들어낸 노란색 물결이 장관을 이루었다.
▲ 시민들의 환송 속에 파주의 통일대교를 거쳐 평양으로 향하는 노무현 대통령 일행
개성공단 방문으로 2시간 늦게 열린 환영식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으로 떠난 둘째 날인 10월 3일은 제4339주년 개천절이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한덕수(韓悳洙) 국무총리를 비롯해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축식을 마친 후 최양식(崔良植, 후에 경주대 총장. 경주시장) 차관을 중심으로 행정안전부에서는 황인평(黃仁平, 후에 제주특별자치도 행정부지사) 의정관, 필자, 김원석 서기관과 직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통일부, 한미연합사 요원들과 합동으로 도라산역에 도착해 환영식 진행 절차, 이동 동선, 시설 및 물품을 점검하는 등 세부적인 행사 준비를 마무리했다.
드디어 10월 4일이 다가왔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회담을 마친 후 평양을 떠나 개성공단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격려한 뒤 도라산역 환영식에 참석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개성공단 체류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환영식을 담당하는 우리 측에서는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성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지만 날씨가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데다 노무현 대통령 일행의 개성 출발시간이 언제가 될지 몰라 불안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야간에도 행사를 할 수 있는 무대장치를 설치해 놓아 다소 안심이 되었다. 만약을 위해 야간 무대장치를 설치해 놓았던 것이다. 이와 함께 환영식장에 미리 참석한 인사들에게는 서울에서 준비해 간 빵과 우유를 나눠 드렸다. 이로 인해 행사 지연에 따른 참석자들의 불평불만도 수그러들지 않았나 싶었다. 이 무대 야간 조명시설과 빵 우유가 신의 한 수였던 셈이다.
3부요인을 비롯해 전 국무위원, 정당과 국회 인사, 이북5도지사와 실향민, 파주지역 주민 등 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환영식은 당초 예정보다 2시간가량 늦게 시작했다. 어둠 속이지만 행사장은 조명을 환하게 밝힌 터라 대낮처럼 밝았다.
환영식은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2007 남북정상회담」결과를 국민들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3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그 이튿날인 10월 4일, 6·15남북공동선언에 기초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약칭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한 바 있다.
이날 노 대통령은 도라산역 행사장에 도착한 후 화동으로부터 환영의 꽃다발을 받고,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이란 영상을 시청했다. 이어 노 대통령이 회담 준비과정에서부터 평양 정상회담에서 느꼈던 고충과 자부심, 합의 내용의 의미와 한반도의 미래 비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뒤 어린이합창단과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는 것으로 모두 마무리했다.
이 환영식에서 만약 야간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시설과 대형 전광판(LED), 그리고 빵과 우유를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 아무튼 DMZ라는 특수지역에서, 아주 이례적인 성격의 이 행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 도라산역 환영식에서 노 대통령이 북한의 평양 방문 결과를 국민에게 보고하고 있다.<사진/노무현 재단>
임진각부터 도라산역까지 가로에 태극기가 나부껴
행사 준비를 위한 어느 날 청와대 회의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의 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파주 통일대교에서 행사장인 도라산역까지 도로 양측에 가로기를 게양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날 청와대 행사기획비서관실에서는 남북화해를 상징하는 한반도기(韓半島旗)를 게양하고, 행사장 참석자들에게는 한반도기를 배포하자고 주문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필자는 한반도기는 공식적인 법령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남북 간 스포츠 행사나 민간단체 교류 시에 사용한 적이 있으나 국가 공식행사에는 사용한 적이 없다는 논리로 대응하였다. 당시 청와대의 요구가 워낙 강한 편이라 혹시라도 필자의 최고위 상관인 박명재(朴明在, 후에 19 ․ 20대 국회의원) 행정자치부 장관을 통해 한반도기를 게양하라는 지시를 내릴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한반도기 500매를 은밀히 제작한 다음 도라산역 행사장까지 이동시켜 놓기까지 하였다.
행정계통의 위계질서 상 직속 최고 상관인 장관의 지시라면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국은 필자가 의도한 대로 대통령의 평양 방문기간 동안 파주 통일대교에서 도라산역까지 이르는 가로변에는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가 자랑스럽게 나부꼈다.
▲ 태극기가 펄럭이는 통일대교를 지나 평양으로 향하는 노무현 대통령 일행
한편, 노 대통령은 MDL을 건너 평양에서 개최된 이 특별한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하는 표지석 하나를 남겼다. 큰 화강암에다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는 친필 아래 작은 글씨로 ‘2007년 10월 2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라 새겼는데, 오늘도 경의선 도라산역에서 개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며 하루빨리 남북 간의 평화적 통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개성으로 향하는 DMZ 남방한계선 입구의 노무현 대통령 친필 기념표지석
평양에서의 노무현 대통령 환영식을 보는 관점
필자는 환송식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TV를 통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평양에서의 실황방송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노무현 대통령 환영식이 열리는 평양의 「4 ․ 25 문화회관」 광장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먼저 모습을 드러낼 때 참석한 군중들이 양손에 꽃을 흔들며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행사장 입구의 레드카페트 위에서 상당한 시간 동안 혼자 서서 노무현 대통령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이 기다리는 시간을 재어보니 5분 정도가 되었다.
행사장에서 주빈(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저렇게 아무 역할도 없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는 것은 의전상 실례인데…”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상대 손님(노무현 대통령)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주빈을 안내해 영접선에 서게 하는 것이 하나의 원칙이다. 기다리는 시간을 가급적 짧게 하자는 취지이다. 이로 인해 북한당국의 의전 책임자가 나중에 문책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동병상린(同病相隣)의 걱정이 앞섰다.
또 노무현 대통령이 김영남(金永南)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오픈카를 타고 환영식장인 「4 ․ 25 문화회관」광장에 도착한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 있는 위치로 노 대통령이 약 10m를 걸어가서 악수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동등한 지위에서 상호주의 원칙하에 서로가 상대방에게 다가가서 악수하는 모습이 연출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 같은 행동은 아마도 김정일이 연출한 고도의 정치적 제스처가 아닐까 싶었다.
한편, 이 환영식장에서 공식 수행원이던 당시 김장수(金章洙) 국방부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그보다 앞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할 때 고개를 크게 숙이며 악수를 했던 국가정보원장과는 달리, 4성 장군 출신답게 올곧은 자세로 악수한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 국내 언론으로부터 ‘꼿꼿 장수’라는 닉네임을 받고, 많은 국민들 간에 회자된 일이 있었다.
아주 의미 있는 두 가지 선례 남기다
아무튼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는 중에 두 가지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고 본다. 회담의 성격이 정치적인 점을 빼고서 말이다.
첫째는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이 평양 현지에서 실황방송을 했다는 점이다. 우리 국민들이 안방에서 TV를 통해 그동안 폐쇄된 평양의 거리 모습을 생생하게, 아무 여과 없이 볼 수 있게 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둘째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 승용차 앞에 태극기와 대통령 봉황기를 달고 평양 시내를 운행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적대시해왔던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를 대통령 탑승 차량에 게양하고서 평양 시내를 누볐다는 사실 또한 그 의미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end
- 출처 : '정현규의 의전노트, 제주에서 DMZ까지(2024. 도서출판 예중,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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