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들의 소리 / 사 59:15-21, 눅 19:28-40
오늘 읽은 신약 본문에서 40절을 다시 한번 일어드린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여기 돌들이 소리지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돌들이 어떻게 소리를 지를 것인가? 가령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이 돌들의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므로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쓰신 즉흥시의 한구절이라 볼 수 밖에 없다. 오늘 읽은 본문 40절에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시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시구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돌들의 소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 속에 담겨있는 한 사회상과 시대상을 보고 우리 자신의 할 일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나타난 정신은, 인간이 말하고 싶어하는 바른 말은 이 세상에 아무 것이라도 그 말을 막을 수 없다는 참 언론의 자유를 가르치고 있는 정신이다. 사람이 만일 바른 말을 하는 것을 겁내어 말을 못한다거나, 죽음의 세력들이 그 바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아버린다면, 길바닥에 깔린 돌들이라도 그 바른 말을 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의 말을 막아 바른 말을 듣지 못하게 하는 암흑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돌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통하여 그 바른 말을 듣게 한다는 것을 오늘 읽은 본문 40절이 가르치고 있다.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시 한 구절이 터져나오게 된 경위를 본문 앞뒤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자. 이 본문은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될 비극적인 사건을 앞에 두신 때,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일이 있다. 예루살렘은 그 나라의 수도였고, 그 당시 유대인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예수님의 일생은 항상 변두리에 사는 인생들을 위해 수고하셨다. 언제나 낙후된 문화의 뒷골목 사람들과 더불어 사셨다.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었던 가난한 어부들, 농민들, 지방에 떨어져 세도를 부리는 타락한 세리와 관리들에게서 날마다 비인간적인 대접, 수난과 수모를 당하고 사는 사람들, 병든 육체 때문에 신음하는 사람, 가난하기 때문에 소외 당하고 천대받는 무리들과 더불어 자기를 바치고 사신 분이 예수님이셨다. 요즘으로 말하면 정부의 각종 혜택에서 소외를 당하는 농민, 어민, 노동자들과 더불어 사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권력자와 부자들의 탐욕과 그들의 사치가 물결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실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예루살렘을 찾으신 일이 있다. 이때 예수님은 한 관광여행하는 자와 같이 수도 예루살렘에 며칠 유하다 떠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자기 생명을 바치는 순교의 죽음을 당하셨다. 예수님 자신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시대가 악했고, 그 시대가 불의에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한 것은 결코 어떤 상징적인 비유가 아니다. 그 시대가 바른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입은 막아졌고 말을 할 수 있다면 돌들만이 할 수 있다는 시대상을 탄식한 말이다. 그 사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을 때, 예루살렘 온 성이 크게 환영했다. 본문 36절 이하에 있는대로, 제자들은 예수님 가시는 길에 자기들이 겉옷을 깔았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꺽어다가 길에 펴고 예수님을 환영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고 하여,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와 있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루살렘 성밖으로 환영을 나갔다고 했다. 이런 기사를 종합해 보면, 이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일이 예수님 자신에게는 그의 목숨을 희생시킬 고난과 순교의 길이었지만, 제자들과 많은 군중들에게는 위대한 개선장군이나 나라의 이름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빛나게 해 준 어느 운동선수를 환영하듯 예수로 말미암은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외쳤다. 그 외친 노래는 예수님을 가다리던 메시야 왕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이 왕은 찬송을 받으실 분, 이 왕은 정치적 투쟁의 숭리를 얻어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가 미리 말한대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왕이라는 것과 그가 가져오는 것은 사람들을 자기의 정치 이념대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 만민에게 알리는 일을 하실 왕이라고 했고, 이 왕은 다윗의 자손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만민에게 복을 베푸는 분이요, 위로 하나님께는 영광과 평화가 있음을 알려주는 분이라고 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군중들이 소리질러 외친 이 노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과 그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과 또 그 예수님을 대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복이 있을 것을 솔직히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은 예수님을 일시적으로 기쁘게 하기 위한 아첨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무엇을 한 분이냐, 그를 따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함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을 왕이라 한 것은 예수의 권위는 모든 인간의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한다는 바울의 해석과 같이 최고의 권위를 밝힌 것이다. 이 예수님 앞에 모든 인간은 복종하고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소리질러 말한 것은 그들이 믿는 바를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 자기들이 살고 있었던 그 유대에는 빌라도란 총독이 가진 최고의 정치적 권위가 있고,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제사장들이 가진 최고의 종교적 권위가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민의 왕이라 고백하고, 그의 교훈의 감화로 만민에게 복을 주시는 분임을 말했다.
그런데 오늘 분문 39절에는 이러한 솔직한 신념을 고백하는 것과 자기의 소신을 정직하게 말한 무리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종교적 권위를 스스로 독차지했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께 이렇게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이는 제자들이 말한 그 진실의 소리, 그 양심의 소리가 듣기 싫고 비위에 거슬린다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스스로 권위를 가지고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은 자기의 정책이나 명령이나 지령이나 법을 복종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느끼고 믿고 말하는 양심의 소리를 그 권력으로 막아버리고, 사람들의 진실의 소리를 그 권위로써 눌러버리는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 제자들의 양심에서 우러나온 메시야 왕에 대한 진실의 고백을 말하지 말게 해달라는 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진 종교적 권위로서 말하는 자유를 억누루는 일이라 풀이할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은 메시야 왕이요, 그가 모든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신 분이요, 그가 복을 가져오고, 그가 평화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신다는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게 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확실히 언론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와 발표의 자유를 침해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자유의 침해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이 말씀은 사람들이 아는 것을 발표하고, 믿는 바를 고백하는 일을 어떤 권위도 누르거나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권력으로 그런 자유를 막아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고 해도 땅바닥에 묵묵히 박혀있는 돌들이 소리를 지르고야 만다는 것이다.
요즘 MBC 사장 연임사건도 언론을 정권의 나팔수로 만들겠다는 일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원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대통령 아들이 대선때 정치자금을 받아 쓴 것을 보도하자 법원에 소송을 냈는데, 부당하게 판결을 한 것도 현 정권이 문민정부라해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증거이다. 청와대 비서실의 장학노 뇌물 사건도 알아서 축소발표하는 것 등이 다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어떤 역사적 상황 속에서나,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위배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정의와 사랑의 원칙에서 떠난 것은 떠났다고 솔직히 말하란 것이다. 이러한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게 한다고 바른 말이 막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만일 바른 말을 못하면 돌들이 소리를 질러 바른 말을 대신해 준다고 예수님은 가르치고 있다. 돌들이 무슨 말을 할 것이냐 하겠지만, 실상 사람들의 입이 막혀 있어도 사람들은 마땅히 그 들어야 할 얘기는 다 듣고 있다. 세월이 조금만 지나면 다 밝혀진다,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들을 것을 못듣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무교회주이자요, 전 동경대 총장이었던 야나이하라 박사의 얘기를 하고자 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지배받는 것을 정면으로 반대한 가장 이름난 학자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3.1운동 직후에 조선을 방문하고 ‘조선통치론’이런 책을 써서 일본의 총독정치를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 책 속에서 그는 조선에서 느꼈던 소감 한 구절을 기록한 일이 있다. 그의 글에 “내가 조선에 가니 돌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왜 그대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느냐?’고 물었더니 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 순사가 잡아가니까 사람들은 부를 수 없고, 돌들은 아무리 독립만세를 불러도 순사가 잡아갈 수 없지 않느냐?’” 이 얘기는 당시 일본의 정권이 얼마나 조선의 독립의지를 묵살하고 박해하고 있었느냐를 알려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즉흥적으로 말씀하신 시 한구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한 말씀은 오늘 우리 믿는 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준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그가 우리들에게 어떻게 새 삶을 가르쳐 주었는가를 담대하게 외쳐야 한다. 불신자들과 교회 밖의 사회가 바른 말을 꺼리고 진실에 대하여 침묵을 지킬지라도 우리 교회와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할 수 있 어야 하겠다. 그러나 만일 이 ‘예’와 ‘아니요’를 양심대로 말하지 못할만큼 언론의 자유가 없고, 그 바른 말한 일 때문에 갇히고 고문 당하고, 국민으로서의 권리가 박탈당한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비관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말을 못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설교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신앙을 기초로 하는 용기가 있는 그리스도인이거든 바른 말을 하라. 고문을 당하고 옥에 갇힌다 해도 바른 말을 하라. 그러나 바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이 막혀지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에 힘입어 언제나 담대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자. (1996-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