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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 정신의 향기
동춘 윤흥식
얼마 전 집안 아저씨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은 강항 선생과 동토 윤순거 선생을 모신 용계서원 관련 문서를 구했으니 서울 인사동에서 만나자는 거였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즉시 그러자고 했다.
‘용계서원 통문(龍溪書院 通文)’은 전지에 초서로 씌어 있었다. 알리는 글이니 당연히 초서로 썼겠지만, 한자에 까막눈이라 한숨부터 나왔다.
“아저씨, 이 통문 가지고 약 올리려는 거예요?”
“아니, 무슨 말씀을? 나는 조카님이 좋아할 것 같아 어렵게 구했는데.”
“그건 고맙지만, 내가 이걸 읽을 수 없잖아요. 청맹과니인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내 그래서 여기 탈초(脫草)본을 가져왔잖아요.”
“아이고 죄송해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통문 복사본과 탈초본을 받은 후 맥주집으로 향했다.
“아저씨, 통문 내용 좀 대충 설명해 주세요.”
“용계서원 운영이 어려우니 후학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 정상화하자는 내용이에요.”
“용계서원 운영이 어렵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요.”
“내용을 살펴보고 판단하세요. 그리고 내산서원 관계자와 의견도 나눠보고요.”
집에 돌아와 통문 내용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정자로 옮긴 내용이지만 해석이 매우 힘들었다. 옥편을 뒤적이며 끙끙대다 손을 놓고 말았다. 한학자인 집안 아저씨께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아저씨는 내 부탁을 쾌히 승낙했다. 메일을 통해 하루 만에 보내왔다. 기뻤다. 그러나 안타깝기도 했다. 내 선조를 모신 서원이 그렇게 어려울 때가 있었던가 해서다. 1919년이면 일제가 극성을 부릴 때다. 아마 서원에서 민족의식을 고취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까 해 훼방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문중 서당인 종학도 일제에 의해 폐문을 당했다. 1910년엔 초학 과정만 허락하더니, 1919년엔 그마저도 못 하게 해 완전히 문을 닫고 말았다. 아마 용계서원도 일제가 서원전(書院田)을 강제로 압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서원 관계자 만나 궁금증을 해소하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였다.
수은 강항 선생의 수제자인 동토 윤순거는 자신의 고향에 문중 학교인 ‘파평윤씨 종학당’을 건립 운영했다. 종학당은 1660년 첫 대과 급제자를 시작으로 1892년까지 약 230년간 문과 42명, 무과 53명을 배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러한 종학당의 중심 건물로 교실인 2층 누각 정수루(淨水樓)에는 ‘향원익청(香遠益淸)’ 현판이 걸려있다. 향원익청은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서 유래했으며, 향기가 멀리까지 퍼지는데, 그 향기는 더욱 맑다는 뜻이다.
동토 윤순거가 정수루에 향원익청 현판을 건 목적은 무엇일까? 바로 종학에서 배출한 선비들의 학문과 덕행이 영원토록 빛을 발하라는 뜻일 것이다. 동토의 이런 혜안은 누구의 교육 덕분일까? 아마도 수은 강항 선생 영향일 것이다.
동토의 행력을 살펴보면 학문은 성문준, 예는 김장생, 시는 강항에게 배웠다고 한다. 윤순거 문집인 동토집에는 674수의 시가 실려있다. 동토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17세기 중반 유명 학자들은 보통 200여 수의 시를 남긴 데 비해,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수은 강항 선생의 가르침이 아닌가 한다.
스승 수은 강항의 정신을 이어받은 동토 윤순거는, 자신이 세워 운영한 교육기관의 정신이 영원하길 바라는 뜻에서 ‘향원익청’의 현판을 내건 게 아닌가 한다. 종학에서 바른 교육을 받아 관리의 길에 들어서면, 수은 정신인 우국충정과 배려심으로 무장해 옳은 길을 걸으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생각이다.
동토는 지행합일의 실천자였다. 스승 수은의 정신을 계승해 바르게 실천했다. 의령 현감으로 나가 추강 남효온 선생 재사를 건립하고,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덕곡서원을 창설했다.
영월군수로 나가선 노능이 황폐함을 보고 가슴 아파하며, 수호 암자인 지덕암을 건립하고 스님으로 하여금 묘소를 돌보게 하였다. 아울러 노릉지를 편찬해 단종과 사육신 그리고 생육신의 신원복관 단초를 제공했다.
금구 현령으로 나가선 스승 강항의 일본 포로 생활기인 ‘간양록’을 편찬했고, 수은 강공 행장을 지어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모의 정을 잊지 않았다.
‘용계서원 통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문으로 알리고자 하는 것은 아아 슬프도다! 어찌 차마 말씀 올리랴! 용계서원을 말씀 올리 자면 수은 강 선생과 동토 윤 선생 두 분의 영혼을 편안히 모시는 곳으로 원래는 봄가을에 두 분만의 제사를 다반(차와 뫼)만으로 올리는 행사에 이미 근래에 들어와서 서원 농지 장부인 사(沙), 복(伏), 결(結)이 삭감되어 이르는바 정기 수입이 전무하고 수지에 이르러 채무에 이르게 되고 행사에 그 하나 둘 셋 모두가 본전에서 부채에 이르게 되었으며 지금에 이르러 부채가 수백여 량으로 불어났으니 춘추의 향사를 형편상 손을 놓게 되고 채무는 드디어 팔도 감영의 지급보증이 무덤이 되고 이번에 경성이 파산되고 왜의 세력이 커짐으로 하나같이 향리 서원의 수습 차원으로 공론에 부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본손 및 방손들도 계획에 허락들 하시고 통문을 보내고 좋은 목걸이 연결하듯 서원 문생들도 연결해서 행사를 논의하는 집(서원)으로 연결해서 분담을 골고루 나뉘고자 함이지 않겠느냐?
근래에 와서 이와 같이 통문으로 의논을 일으켜 혹 춘추 행사를 다반(茶飯) 식으로 하든 아니면 사사로운 방식에 따르던 이에 금명간 해야 함은 재론이 불필요함에 이와 같이 엎드려 복원하옵니다. 서원의 모든 회원은 저번의 지난날을 생각하셔서 늦게나마 고향의 일에 참여하여 의논케 되었음을 안타깝게도 큰 다행이옵니다.
우 통문은 기미년 1919년 8월 20일 발문합니다.
정진용 유심행 기중진 이일환 이교신 강재오 강재수 정병기 이인환 김재전 유지현 강계흠
김성수 강재례 최기형 나세신 이기룡 오시천 이태영 정기현 김종현 유진철 이돈문 윤주은
김혜경 강문회 정영석 강영한 유재연
수은 선생과 용계서원 통문!
아버지가 빛나려면 자식을 잘 두어야 하고, 스승이 빛나려면 제자를 잘 둬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수은 선생은 제자를 잘 둔 게 분명하다. 수은과 사승 관계로 맺어진 인연이 끊임없이 이어져 하나의 학통을 이루었나니, 그 증거가 바로 ‘용계서원 통문’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바다.
예전엔 고명한 스승을 찾아 문하에 드는 게 보통이었다. 수은 선생은 기호 유학의 종장 중 한 분인 우계 성혼 선생을 찾아 학문을 갈고닦았다. 영광에서 스승이 계신 파주까지 먼 길 마다치 않고 찾았다. 내 14대조부이신 팔송 윤황 선생도 충남 노성에서 우계 선생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다시 말해 수은 강항 선생과 동토 부친 팔송 윤황 선생은 다 같이 우계 문인인 것이다.
수은 선생께서 향리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할 때, 팔송 윤황 선생이 영광군수로 부임했으며, 바로 두 아드님을 강항 문하에 들게 했다. 둘째 동토 윤순거 선생은 열다섯 나이에 강항 문하에 들어 고족제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수은과 동토의 아름다운 사승 관계는 사은의 표상으로 후학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따라서 내산서원 아니 당시 용계서원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 오던 중,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궐사 위기까지 몰렸었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겠는가? 이를 보다 못한 후학들이 들고 일어났다. 서로서로 뭉치고 뭉쳐 어려움을 해결하자고 발 벗고 나섰다. 아름다운 전통의 시작이었다.
학문이 짧은 내 입장에선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 가을 강항 문화축제 시 영광에 내려가 내산서원 임원들 만나 용계서원 통문 내용 펼쳐놓고, 이야기 나누겠다. 정말로 내산서원 운영이 어려웠는지 알아보겠다. 발의자 중 지역민은 없는지 조사하겠다.
수은 강항 정신과 향원익청!
수은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300여 년이 지난 1919년에 지역유림들이 발의해 돌린 통문은 바로 수은 정신의 향원익청을 증명하는 예라고 본다. 선생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선생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온 증거라고 본다. 여기서 통문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건 발의자들의 위치 때문이다. 즉 29명의 면면을 살펴보아도 이름 높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왕조실록을 살펴도 해당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지역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학문을 닦는 유림들이 뜻을 모아 통문을 돌렸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나는 수은 강항 정신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그 첫째가 우국충정이다. 수은 선생이 일본에 끌려가 목숨 걸고 올린 상소는 우국충정의 발로였다. 둘째로 배려심이다. 뒤떨어진 왜인들을 성리학의 세계로 이끌어 인격을 도야하고, 바른 행동을 하도록 제자를 가르쳤다.
왜에서 돌아온 강항 선생은 향리에서 오로지 제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동토 선생도 아버지 임지인 영광에 따라와 수은의 제자가 되었다. 당연히 제자들은 수은 정신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통문은 그러한 수은 정신의 향원익청이라 하겠다. 후학들이 수은의 가르침을 익혀 실천함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을 것이다. 수은의 정신이 3세기를 뛰어넘어 아름다운 정신으로 향기롭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시골의 백면서생 29명은 선생을 모신 용계서원이 어려움을 겪는 걸 알고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스승 강항의 우국충정과 배려의 정신이 시공을 뛰어넘어 오래오래 멀리멀리 전파되어 빛날 것을 기대한다.
오늘날의 내산서원은 타 서원의 모범이 되고 있다. ‘내산서원 보존회’, ‘수은 선생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서원의 발전과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일본에도 수은 선생 기념사업회 일본연구회가 구성 되어있다. 매년 9월에 개최되는 강항 문화축제는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적인 행사로 발돋움하고 있다. 특히 한복 축제는 많은 사람의 관심과 참여 속에 제자릴 잡아가고 있다.
나는 두 번 강할 로드에 참여했다. 올해도 참여할 계획이다. 첫 기착지 나가하마 해변, 탈출해 은신한 야쿠시타니 계곡, 수은 선생께서 생활한 오즈성, 가슴 설레는 홍유 강항 현창비, 스님 만나 대화를 나눈 출석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이타지마 형장 오모이야리 지장상 등을 찾아 수은 선생 고난의 길을 살폈다.
일본을 방문하며 사토 신지로히메 국장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다. 사또 국장은 이예주수 좌도(伊豫州守 佐渡 : 도도다카토라)의 후손이다. 수은 일가를 바다에서 생포한 신칠랑의 주군이 바로 좌도다. 사또 국장은 바른 의식의 소유자로 일본 내 강항 연구가다. 선조의 과오에 대해 조금이라도 사(赦)함을 받고자 수은 선양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작년과 올해 두 번 그를 보았지만, 정말 인상 좋고, 친절하며 예의 바른 사람이라 생각한다. 한․일 행사에 사회를 보며, 오즈에서의 답사길 안내도 도맡아 했다. 사또 같은 젊은이 있어 한․일 관계의 앞날은 밝고도 밝으리라.
지난 7월 17일에는 수은 친필 ‘종오소호’현판 기증식이 내산서원 기념관에서 열렸다. 나도 거기 참석해 종오소호의 참뜻을 되새겼다. 수은 선생께서 지인에게 써준 글씨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잠자고 있었는바, 강항 기념사업회 일본 측 전 회장이 소유하고 있다가, 우리 측 명예회장인 이낙연 전 총리에게 기증한 걸 내산서원에 기증하는 기념식이었다.
수은 선생의 수제자인 동토 선생의 14세 손으로 자긍심 가지고 열심히 참여하겠다. 수은 선생과 동토 선생의 아름다운 향기를 맡으며 바른 생활인이 되겠다. 스승을 위해 통문을 돌린 유림들의 아름다운 활동이 향원익청으로 삭막한 우리 사회에 밝은 빛이 되길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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