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우리나라가 작다고, 땅이 좁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그런 주장에 반박하는 지론을 하나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지형은 산맥들의 주름치마이기 때문에 비록 좁아 보일지라도 쫙 펼치면 넓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주름치마를 펼쳐보라, 그러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지도상에 똑같은 면적으로 표시되었다 해도 그게 평평한 천으로 만들어진 치마인 다른 나라와 촘촘하게 주름 잡힌 천으로 만들어진 치마인 우리나라는 표면적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는 꽤 큰 나라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나 눈을 들어 밖을 보면 산이 보인다. 우리의 서식지는 대개 산자락이나 산 밑이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산들의 모습은 마치 국악기들의 소리 같다. 낮은 앞산은 소고小鼓 소리 같고 조금 높은 뒷산은 북소리 같다. 좀 멀리 있는 남산은 징소리 같고 근방에서 가장 높은 산은 범종소리 같다. 산마루에는 더러 바위 봉우리가 뾰족뾰족 솟아 있어서 마치 꽹과리 소리 같고,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산맥의 흐름은 대금 소리 같다. 간혹 육자배기 가락처럼 이어지기도 한다. 그 굽이치는 모습이 마치 살풀이 춤사위 같기도 하다. 이건 세계 다른 어디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지형이고 자연 환경이다. 이런 지형이 연주하는 이런 음악 소리가 다른 어느 나라에서 들리겠는가?
네팔이나 페루는 명실상부한 산악 국가이다. 하지만 각각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히말라야 산맥이나 안데스 산맥은 그들에게 무서운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범접할 수 없는 숭배의 대상이다. 그에 비해 우리가 그 자락에 기대어 살아가는 야산은 자애로운 어머니 같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산을 좋아하고, 이런 저런 경우에 마음 내키면 그 품에 약속도 없이 찾아가 안긴다. 우리는 괴로우면 산을 찾는다. 산에 뭔가 마음을 달래주는 안정제가 있나 보다. 의지를 다질 일이 생겨도 산에 오른다. 거기에 마음의 강장제가 있나 보다. 가을이면 단풍 들었다고 마음이 들떠, 겨울이면 눈 내렸다고 눈길이 흔들려, 봄이면 진달래 피었다고 가슴 설레어 산에 간다. 여름이면 녹음 그늘과 계곡물을 찾아 산에 간다. 초중고등 학생 때는 산으로 소풍가고, 청년 시절에는 딴 데 정신이 팔려 조금 뜸하다가, 중년이 되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다시 산에 간다. 아무튼 산이 높을수록, 그 계곡이 깊을수록 안달복달 북적대는 일상생활의 고달픔으로부터 그만큼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나 보다.
사람들이 산을 찾아가게 되는 데는 산 정상에 올랐을 때 느끼는 정복감도 한몫하는 것 같다. 웬만큼 높이가 있는 산을 오르려면 두어 번은 고비를 넘어야 한다. 그래서 높은 산에는 종종 ‘깔딱고개’라 불리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을 오르다 보면 다리 근육이 찢기는 듯 아프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하늘이 노랗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참아내며 한걸음씩 내디딘다. 그리고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서면 발아래 펼쳐진 세상과 머리 위에 열린 하늘을 동시에 얻은 듯한 느낌을 경험한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인생길에서도 그런 성취가 있기를 기대한다. 그 고된 과정의 결과로 느끼는 황홀한 성취의 경험이 인생 역경을 극복하는 데도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게 인생 역경 극복으로 오롯이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몸의 힘과 마음의 힘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작용하기는 하지만 인생 역경은 근육의 고난이라기보다는 정신의 고난이기 때문이다. 가슴 터질 듯한 정상 정복의 쾌감은 사실 우리가 오르기 전에 그리고 오르는 동안에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감격이다. 감격은 미리 예상하지 못했을 때 그만큼 커진다.
산은 단순히 높은 땅이 아니다. 산은 신비를 품은 땅이다. 그 신비감은 거기 사는 생명체들, 주로 식물들의 조화에서 생겨난다. 울창한 숲과 기운찬 나무들, 우거진 풀숲과 고요히 왁자지껄한 가지들, 겸손한 야생화들과 촉촉한 융단 이끼, 초록 잎들과 붉은 독버섯들, 신록과 단풍, 그 모든 생명의 숨결과 입김, 냄새와 아우라가 산의 신비를 자아낸다. 식물들이 이루는 생태계는 각각의 개체들이 벌이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지만, 그것들의 욕구는 결코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는 법이 없다. 그것들은 불평도 자랑도, 심지어 아무 말도 없이 날 때 나고 살 때 살고 갈 때 간다.
두껍고 포근한 숲의 옷을 입은 산에는 늘 신비가 깃든다. 저 관목 수풀이나 저 침엽수나 활엽수 숲의 안쪽, 그리고 석양빛 거둬들이는 저 산허리 뒤쪽이나 안개 면사포 쓴 저 능선 너머에 우리의 눈길이 꿰뚫을 수 없는 비밀스러움이 있다. 그 신비가 우리의 호기심 어린 눈길과 발길을 산으로 이끈다. 그 신비의 보고에 비하면 산신령이 점지해 준다는 100년 된 산삼의 영험함도 모조 보석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는 어떤 산을 멀리서 바라보든 가까이 다가가서 쳐다보든 그 속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든, 결코 그것의 전모를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민둥산에 찾아가고 싶지 않고, 그런 산에 오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숲이 우거진 산의 품속에, 그 신비감의 가슴 한복판에 유명 사찰들이 자리 잡고 있나 보다. 우리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져만 가는 욕망에 시달리다가 그 짐을 잠시라도 부려놓고 싶어서 산을 찾아간다. 산을 오르며, 숲길을 걸으며, 나무나 풀들을 바라보며, 자연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서 욕망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돋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산속과 산꼭대기, 그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그 숲과 수풀의 신비로부터 우리는 인간 사회에서 달궈진 욕망의 불길을 누그러뜨리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운다.
첫댓글 제 생각엔 치마의 주름같은 k산은 인간 사회에서 달궈진 욕망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는 '건강'을 주고 호연지기같은 '의지'를 주는 것이 겠습니다.
에세이스트로 등단하셔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