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제5차 헌법 개정(제3공화국 헌법)
❙5․16 군사혁명과 개헌 과정
4.19혁명 후 집권한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정치적, 사회적 혼란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겠다.’는 혁명공약을 내걸고 1961년 5월 16일, 박정희(朴正熙)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 세력이 <5.16 군사혁명>(후에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 군부세력은 곧이어 포고령을 내려 민의원과 참의원, 지방의회 등 헌법상 대의기관과 정당사회단체를 해산하여 정치활동을 완전히 금지하였다. 이에 헌정 중단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이들이 주축이 돼 구성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공포하였으며, 이 법은 헌법을 대신하는 기본법으로서 민정이양까지의 최고통치기관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법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부여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은 혁명과업 수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정하며, 제2공화국 헌법을 비상조치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효력을 인정한다고 규정하였다.
8월 12일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3년에 민정이양을 약속하였다.
이를 위한 사전작업으로서 1962년 7월 11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헌법 개정을 위해 제54차 상임위원회에서 최고위원회 안에 <헌법개정 특별심의위원회>를 발족하고, 7월 16일에는 <9인 소위원회>(위원 : 유진우, 한태연, 박일경, 이동호, 양병두, 김도창, 신직수, 문홍주, 이종극)를 구성했다.
이후 약 3개월간의 자료수집과 검토. 심의 끝에 1962년 11월 3일 <전문 5장 121조 부칙 9조>로 된 헌법개정안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1962년 11월 5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헌법개정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한 후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 명의로 발의 공고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30일간의 공고기간을 거친 후 개정안을 재적 위원 25명 중 22명 찬성, 3명 불참으로 통과시켰다.헌법개정안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헌법 전문(前文)을 수정하여 4.19의거와 5.16혁명이념을 새 헌법정신으로 하고, 연도표시를 단기(檀紀)에서 서기(西紀)로 변경한다.
2. 인간의 존엄성 조항 신설 등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강화한다.
3. 소급입법에의 의한 참정권의 제한 또는 재산권의 박탈을 금지한다.
4. 정당제도를 신설하고 복수정당제도를 보장한다.
5. 강력한 대통령제(1차 중임가능)와 국회 단원제를 채택한다.
6. 국회의원 공천제, 무소속출마 불허, 국회의원의 당적이탈 시 자격을 상실한다.
7. 위헌법률심사권과 위헌정당해산권은 대법원에, 탄핵심판권은 탄핵심판위원회에 권한을 부여한다.
8. 부통령제를 없애고 국무총리제를 취하며, 심의기관으로 국무회의와 자문기구로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경제.과학심의회의를 둔다.
9. 감사원을 신설한다.
10. 헌법개정은 국민투표로만 가능토록 한다.
11월 5일 개헌안 발의를 공고하고 30일간의 공고기간을 거쳐 12월 6일 개헌안을 통과시킨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민투표를 12월 17일에 실시하기로 의결하고 공고했다. 이어 12월 5일 정부는 국민투표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실시하기 위해 계엄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12월 17일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에는 유권자의 85.3%가 투표하여 이 가운데 78.8%가 찬성하였는데, 이 투표는 5.16 주체 세력과 군사정부에 대한 신임 투표적인 성격도 동시에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된 제3공화국 헌법은 1962년 12월 26일 공포되어 1963년 12월 17일부터 시행되었다.
❙주요 내용과 평가
제3공화국의 토대가 된 이 제5차 개정 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국회를 단원제로 하며, 국민의 기본권을 확대한 것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이전의 헌법보다 ‘대통령의 지위가 강화’된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내용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이며,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로 선출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1차에 한하여 중임이 가능하며, 긴급명령과 긴급재정․경제명령권, 계엄선포권 등의 권한을 갖는다.
그리고 국무총리 임명 때 국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국회가 국무총리나 국무위원의 해임건의권을 갖기는 하지만, 구속력을 갖지 않은 것으로 했다.
국회는 단원제로 하되, 그 구성원인 국회의원은 반드시 정당의 소속이어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며, 임기 중에 당적을 이탈․변경하거나 소속 정당이 해산된 경우에는 그 자격을 상실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정당정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집권자의 안정적인 집권과 소속 의원에 대한 단속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헌법재판소는 폐지하고 위헌법률심사권과 위헌정당해산권은 대법원에 부여하기로 하였다.
또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모든 국민이 갖는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보다 명확히 규정하였다. 또한 직업 선택, 주거, 양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추가로 규정하였다.
여기에다 감사원을 신설하고, 헌법의 개정에는 국회 의결 뒤 반드시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하도록 하였다.
제5차 헌법 개정으로 확정된 이 헌법은 미국식 대통령제에 가까운 제도를 취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민의 기본권이 크게 신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Ⅱ. 제5대 대통령 선거
1961년 5.16군사혁명을 일으켜 집권에 성공한 군부세력은, 국회를 해산하고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장악한 실세기구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그 후 대통령의 국민선출과 국회의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제5차 헌법개정안을 마련해 국민투표를 거쳐 공포하였는데, 그 후속 정치일정에 따라 제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때 제2공화국 시기의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를 내지 않은 가운데, 7개 정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출마시켰다. 그러나 그 중 2명이 사퇴하여 최종 후보는 5명으로 줄었으며, 3명은 큰 관심을 받지 못하여 사실상 선거전은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민정당 후보의 양강 구도로 전개되었다.
1963년 10월 15일 국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15만 6천 표 차이로 민정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 대통령 임기관련 참고사항
이후 1963년 12월 17일 취임한 제5대 박정희 대통령은 4년 뒤인 1967년 12월 16일 그의 임기가 만료되어야 하나, 당시 제5차 개정 헌법 부칙 제2조의 ‘이 헌법에 의한 최초의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거 및 최초의 국회의 집회는 이 헌법의 공포일로부터 1년 이내에 한다. 이에 의하여 선거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는 최초의 국회의 집회일로부터 개시되고 1967년 6월 30일에 종료된다.’는 규정에 따라 그보다 6개월 앞선 1967년 6월 30일에 임기가 종료되었다.
따라서 제6대 대통령 취임식은 그 하루 뒤인 1967년 7월 1일에 이뤄졌다.
❙제5대 대통령선거 경과
야권의 상황
당시 야권은 하나로 뭉쳐져 있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분열돼 있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당은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 이끌던 민정당, 허정(許政) 전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끌던 신정당, 이범석(李範奭) 전 국무총리가 이끌던 민우당, 박순천(朴順天) 전 의원이 이끌던 민주당, 김재춘(金在春)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끌던 자유민주당 등을 꼽을 수 있다.
제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정당, 신정당, 민우당 등은 ‘국민의당’으로 합당하고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으나 윤보선 측과 허정 측이 서로 양보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송요찬(宋堯讚) 장군은 박정희 후보의 군 선배이지만 오히려 박정희의 민정참여와 민주공화당 창당 등에 비판적이었다.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면(張勉) 박사가 정치활동 규제대상이 되자 제2공화국에 집권했던 민주당 신파를 계승한 민주당은 당초부터 후보를 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다.
야권 단일화 운동
윤보선 전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민정당, 허정 전 국무총리가 이끌던 신정당 등 보수 야권 정당들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군사 정권이 출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였다.
1963년 7월 5일, 윤보선 후보가 야권 통합을 위해 후보직을 사퇴한다고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야권의 통합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이로써 민정당, 신정당, 민우당 등은 ‘국민의당’을 결성하게 되었으며, 통합 야당 국민의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정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김병로(金炳魯)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이범석 민우당 고문 등은 불출마를 선언한 가운데, 국민의당의 후보 지명전은 신정당에서 내세운 허정 신정당 창당준비위원장과 김도연(金度演) 전 신민당 위원장의 양자 대결로 좁혀졌다. 그러나 대중적인 인지도 면에서나 지지도 면에서 허정에게 밀린 김도연은 불출마를 선언하였으며, 민정당은 다시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웠다.
이렇게 민정당과 신정당 양 당은 끝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결국 윤보선 후보와 허정 후보 둘 다 출마하여 야권 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대통령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며 선거 판세가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민정당 후보의 양강 구도로 진행되자 결국 허정 국민의당 후보는 10월 3일 야권 단일화를 위한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선거직전인 10월 12일에는 송요찬 자유민주당 후보도 사퇴를 선언하고 윤보선 지지를 선언해, 사실상의 야권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선거 초기에 기대를 모았던 허정 후보가 사퇴했음에도 이미 약세가 드러난 터라 단일화의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각 정당의 대통령후보 선출
제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집권세력에서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야권에서도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민정당을 필두로 창당대회를 갖고 대통령후보자를 선출했다.
◇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 1963년 5월 27일 전당대회를 열고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그는 8월 31일 다시 열린 당 전당대회에서 후보직을 수락하였다.
◇ 민정당(民政黨)
: 신민당 출신 인사들로 결성된 민정당은 1963년 5월 14일 창당대회를 갖고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하였으나, 그는 7월 5일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민정당은 야권 통합 운동에 참여했으나, 후보 단일화 협상이 결렬되자 9월 12일 전당대회를 열고 윤보선 전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다시 추대하였다.
◇ 국민의당
: 신정당과 민우당, 민정당 일부 등의 야권 세력들이 통합해 출범한 국민의당은 1963년 9월 14일 전당대회를 열고 허정(許政) 신정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거전 내내 윤보선 민정당 후보에게 크게 뒤지게 되자 10월 2일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 자유민주당
: 1963년 9월 5일 중앙상무위원회를 열고 송요찬(宋堯讚) 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하였으나, 10월 7일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 군소 후보
— 자유당 : 1963년 9월 8일 중앙위원회를 열고 장택상(張澤相) 전 국무총리를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하였으나 9월 13일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하여 후보직을 사퇴
— 정민회(正民會) : 1963년 8월 29일 창당대회를 열고 변영태(卞榮泰) 전 국무총리를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
— 추풍회(秋風會) : 1963년 9월 11일 전당대회를 열고 오재영(吳在泳) 전 의원을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
— 신흥당(新興黨) : 1956년 대통령 선거 당시 계룡산 산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대선 출마를 공언했으나 후보 등록을 하지 못했던 장이석(張履奭) 씨를 대통령 후보에 추대
❙선거 판세
제5대 대통령 선거의 판도는 주로 박정희 후보의 5.16군사정변 후 실시된 군정(軍政)과 정치적 노선에 대해 야권 후보들이 비판하고, 박정희 후보가 이를 방어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또 당시에 박정희 후보가 ‘정국(政局) 안정’을 내세운 반면에 윤보선 후보 등 야권후보들은 ‘군정(軍政) 종식’을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한편 야권 후보들 안에서도 5.16 군사정변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후보에 대해 “장면 전 국무총리 등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방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고, 이에 대해 윤보선 후보는 “장면 정권 하에서 데모와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으며, 자신은 결국 군사정부를 추인하지 않았다”고 방어하였다.
선거를 얼마 앞두고 야권 주요 후보였던 허정, 송요찬이 윤보선 후보를 지지하며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였고, 선거는 군사정변 세력의 박정희 vs 구(舊)정치인 세력의 단일후보인 윤보선 후보 간의 양자 대결 구도로 흘러갔다.
선거에서 후보가 갖고 있는 이미지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에 윤보선 후보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해 여러 고위 관직을 지낸 ‘보수적 이미지’를 띈 반면, 박정희 후보는 가난한 농사꾼 아들로서 일반 서민의 입장을 대변할 것이라는 ‘진보적 이미지’를 띄고 있었다.
❙사상 논쟁
선거 중반에 들어 허정, 송요찬 등의 야권 후보가 사퇴하며 지지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합양상이 계속되자 윤보선 후보 측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으며 색깔론을 제기했다. 투표까지 3주 정도 남았던 9월 23일, 박정희 후보 측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윤보선 후보를 향해 ‘가장된 민족주의’라고 공격했다.
이에 대응하듯 다음날 윤보선 후보가 유세 중 전주에서 “여순(麗順)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 박정희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는 발언을 하면서 선거 구도는 순식간에 ‘사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박정희 후보의 1940년대 말 남조선노동당 활동 경력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박정희 후보는 군정시절에 제2공화국에 몸담았던 구 정치세력을 사대주의적인 민주주의자로 공격하며 자신은 민족적 민주주의자라는 요지의 발언을 자주 하였는데, 이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면 그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게 설마 공산주의였던 것 아니냐”며 역공을 가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박정희 후보 측에서는 매카시즘 공세라고 비판하면서 지금은 확실하게 전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선거 5일을 앞둔 10월 10일에 변호사이자 달변가인 김사만(金思萬, 5대 국회의원)이 경북 영주에서 열린 윤보선 후보 찬조연설에서 박정희 후보의 사상문제를 거론하며 “대구, 부산에는 빨갱이가 많아요. 김일성이가 오면 만세를 부를 거예요.”라며 매카시즘 공세에 불을 질렀다.
이에 김사만은 “대구와 부산에는 빨갱이의 화를 입은 사람이 많다고 한 것이 언론에서 가운데의 ‘화를 입은 사람’이란 말은 빼고 ‘빨갱이가 많다’고 앞뒤만 보도했다.”고 해명했지만 이 같은 ‘빨갱이’논쟁은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당황한 민정당 측은 사과했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경상도 유권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투표 결과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 윤보선 후보 간의 양강 구도로 치열하게 전개된 제5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승리를 거두었다. 박정희 후보는 총 유권자의 46.64%에 달하는 4,702,640표를 얻어 윤보선 후보와는 15만 6천여 표(1.55%)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이 근소한 표차로 패배한 윤보선 후보는 부정선거로 인해 졌다며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정신적’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게 되었다.
아무튼 당시에는 수(手)개표로 진행하고, 출구조사가 없던 시절이라 굉장히 긴장감이 높은 가운데 개표가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중부지역과 도시지역에서 몰표를 얻은 윤보선 후보가 앞섰지만 막판 영남과 호남에서 몰표가 나오면서 박정희 후보가 우세했다.
이는 득표율이나 득표수 차이로 볼 때 역대 최저수준이라 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 역대 대선 중 가장 치열한 승부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강원도 평창군에서는 1위 박정희 후보와 2위 윤보선 후보 간 표차가 불과 12표에 불과했다. 이것은 역대 대선 시․군․구 단위 최소 표차로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박정희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 된다는 언론보도<사진/경향신문>
【제5대 대통령선거 투표 결과】
득표순위 | 기호 | 성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비고 |
1 | 3 | 박정희 | 민주공화당 | 4,702,640 | 46.64 | 당선 |
2 | 5 | 윤보선 | 민정당 | 4,546,614 | 45.09 | |
3 | 4 | 오재영 | 추풍회 | 408,664 | 4.05 | |
4 | 7 | 변영태 | 정민회 | 224,443 | 2.22 | |
5 | 1 | 장이석 | 신흥당 | 198,837 | 1.97 | |
- | 2 | 송요찬 | 자유민주당 | - | - | 기권 |
- | 6 | 허정 | 국민의당 | - | - | 기권 |
총투표인수(A) | 11,036,175 | |||||
총선거인수(B) | 12,985,015 | |||||
투표율(A/B) | 85.0% |
— 자료/위키백과
【제5대 대통령선거 시․도별 투표결과】(후보기호 순)
구분 | 장이석 | 박정희 | 오재영 | 윤보선 | 변영태 | 합계 |
서울 | 10,537 | 371,627 | 20,634 | 802,052 | 26,728 | 1,231,578 |
경기 | 27,554 | 384,764 | 54,770 | 661,984 | 34,775 | 1,163,847 |
강원 | 24,528 | 296,711 | 35,568 | 368,092 | 24,924 | 749,823 |
충남 | 23,359 | 405,077 | 47,364 | 490,663 | 26,639 | 993,102 |
충북 | 14,971 | 202,789 | 26,911 | 249,397 | 15,699 | 509,767 |
전남 | 22,604 | 765,712 | 51,714 | 480,800 | 17,312 | 1,338,142 |
전북 | 18,223 | 408,556 | 37,906 | 343,171 | 18,617 | 826,473 |
부산 | 3,419 | 242,779 | 11,214 | 239,083 | 7,106 | 503,601 |
경남 | 16,014 | 706,079 | 60,645 | 341,971 | 19,323 | 1,144,032 |
경북 | 34,622 | 837,124 | 58,079 | 543,392 | 31,113 | 1,504,330 |
제주 | 3,006 | 81,422 | 3,859 | 26,009 | 2,207 | 116,503 |
— 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키백과
굵은 숫자는 후보자가 시․도별 가장 많이 득표한 숫자임.
❙선거결과 분석
제5대 대통령 선거는 5.16 군사정변에 대한 심판 성격이 강했으며, 이 선거를 통하여 박정희 후보는 군사 정변을 통해 장악한 정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번 선거에서 양강 구도를 형성한 박정희 후보는 젊은 시절 동학란에 가담했던 경북 선산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서민 후보, 진보개혁세력, 신(新)정치세력의 이미지를 띄고 있었다.
반면에 윤보선 후보는 할아버지가 구한말(舊韓末) 군부대신 등을 지낸 명문가의 후예로서 영국에 유학까지 하였으며,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서울시장․상공부장관․제4대 대통령 등의 요직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그가 속한 민정당은 호남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데에서 표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뚜껑을 열어본 결과 유권자들의 투표 행태는 남여북야(南與北野)의 지역 대결구도와 여농야도(與農野都)의 특성을 나타냈다. 서울, 경기, 강원과 도시지역에서는 윤보선을, 영남과 호남, 제주와 농촌지역에서는 박정희를 압도적 표차로 지지하였다. 윤보선 후보의 고향인 충청과 부산에서는 두 후보에 대한 지지세가 비슷했다.
사상 논쟁 때문인지는 몰라도 윤보선은 휴전선과 가까운 경인․중부지역에서 많은 표를 얻었고 박정희는 주로 1956년의 대통령 선거 때 진보당의 조봉암이 다수를 차지한 지역에서 윤보선을 앞섰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 안보문제도 하나의 이슈로 등장했다. 남북 군사대결의 현실에서 안보 문제에 민감한 강원도 등 휴전선 접경 지역은 윤보선 후보가 승리했으나, 남쪽 지역은 전통적인 야당 강세 지역을 내어주게 된 것이다.
한국민주당의 아성으로, 제1․2공화국 내내 민주당계 보수 정당의 텃밭과도 같았던 호남에서 진보 개혁 세력의 지지를 받은 박정희 후보가 승리한 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는데, 이는 여수․순천 사건 등으로 ‘빨갱이’ 논쟁에 대한 반감에다 군사정권세력의 중농정책이 농업이 발달한 호남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는데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큰 무리 없이 치러진 선거였다는 게 당시 언론과 미국의 중평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