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성에 근무하는 큰딸이 자기는 홍역을 앓았냐고 SNS로 알려달란다. 지금 그곳에는 홍역이 유행해서 방역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1960년대 이야기지만 나는 큰딸의 홍역 앓은 일은 너무 잘 기억하는 사실이다. 어릴 때 홍역에 걸려서 체온이 높아 울기만 하니 낮에 두 번이나 다녀왔지만, 밤이 되니 더 보채며 울었다. 내가 농사일로 너무 피곤해 잠든 사이 밤 중에 두 번이나 이웃 돌팔이 의사에게 다녀왔다고 한다. 농촌이라 밤중에 돌팔이 의사에게 의존하는 방법밖에 도리 없는 일이었다. 의사가 부족한 당시에는 농촌의 돌팔이 의사가 많은 생명을 구한 일이다. 그때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병역미필자로 강제퇴직 당하자 병원 조수로 배운 실력으로 의료행위를 하는 형편이다. 의사 면허증이 없어서 그렇지 응급처방은 믿을 수 있는 김 선생의 실력이다. 어린이 홍역에는 초기에 체온조절만 신경 쓰면 후유증 없이 자연치료 되는 병이었다.
그 후 아이 여섯 명을 기르자니 상비약으로 해열제는 반드시 준비하는 목록에 들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퇴근해보니 큰아들이 홍역 증상으로 앓고 있었다. 밤중이 되니 울음을 그치지 않고 매우 위급함을 느끼게 되었다. 낮에 읍내 병원에 다녀왔는데도 또 그런다고 한다. 나는 상비약에서 아스피린을 하나 여러 조각으로 쪼개기 시작했다. 당시는 어린이용 아스피린이 없을 때라 어른 체중과 비교로 작은 조각을 숟가락 두 개를 포개 갈아 젖에 녹여서 먹였다. 조금 후 약효가 발휘했는지 새근새근 잘 자는 일이 신기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지나도 잠만 자기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잘못해 약의 과잉처방인가 걱정이었다. 다시 체온계로 체온을 점검해도 정상이고 그 이후로는 괴로운 표정이 사라졌다. 나중에 확인한 일이지만 어린이 홍역에는 체온 조절이 가장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이다.
어린이 홍역은 6.25 전쟁 전에는 아주 극심한 전염병이었다. 전쟁 후 70년대까지도 농촌에는 의료혜택이 미치지 못하여 후유증이 심했다. 특히 태평양전쟁을 겪을 때까지 수많은 어린이 생명을 삼켜버린 병마였다. 이를 증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말한다. 뒷산에 소먹이 가면 묘지마다 구멍이 축구공 들어갈 만큼 크기로 곳곳에 있었다. 도대체 이 구멍이 뭘까? 하고 고민하다가 어른들에게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어른 말씀에 여우 굴이라 한다. 즉, 여우가 생활하는 주택이라는 말이다. 세상에 여우가 얼마나 창궐했으면 여우의 집이 이렇게도 많았을까 싶었다. 그 많은 여우가 무엇을 먹고 자랐을까 의문이다. 사람도 양식이 모자라 소나무 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던 시절이다. 내가 발견했을 당시에는 여우는 보이지 않았다. 간혹 여우를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구경하면 개처럼 생긴 여우를 청년들이 잡아 온 것을 보았다. 이때가 여우가 멸종에 드는 시기였다.
여우는 개처럼 생겼으나 잡식성이고 썩은 고기도 잘 먹는 습성이다. 그래도 내성이 생겨서인지 썩은 동물의 사체를 먹어도 병이 없어서 잘 번식한다. 여우가 번식의 호황기를 누림은 어린아이들이 앓는 홍역의 원인이었다. 홍역은 호흡기병으로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 한 마을에 홍역이 나타났다 하면 그 마을에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을이 조용할 때가 이르렀다 싶으면 어린아이는 간혹 살아남게 된 일이다. 홍역의 증상은 기침을 시작으로 고열이 지속한다. 이 고열의 체온을 견디지 못하고 생명을 잃게 되는 현상이다. 해열제 아스피린만 있어도 죽지는 않을 병이지만 당시는 아스피린이 귀했다.
아스피린의 역사를 보면 1900년 2월에 미국에서 특허를 받아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스피린은 해열 진통효과가 좋은 약이다. 해방 전 출생한 우리 친구들은 자기의 본래 나이보다 두 살씩 많은 사람이 더러 있다. 형이 홍역으로 죽으니 사망신고를 즉시 하지 않고 미루다가 그대로 출생신고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이를 열 명도 더 낳았지만 두 아이만 겨우 키운 집이 허다했다. 200호가 넘는 우리 마을에 나와 동갑내기는 겨우 세 사람뿐이다. 많은 동갑 친구가 홍역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증거다. 우리 셋 동갑 친구는 가장 질긴 생명력을 지닌 셈이다.
6.25 전쟁으로 미군이 참전하고 미군들이 사용하는 해열제가 사회에 흘러나와 많은 생명을 구했다. 당시 페니실린이 특효약의 대명사를 누린 일처럼 해열제가 어린이 홍역 후유증을 없앤 크나큰 효험의 공헌을 발휘했다. 미군의 참전에 의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이지만, 선진 의약품이 도입되어 많은 생명을 살린 일도 소중한 일이다. 당시 나라 사정으로 정상적인 의료 약품을 수입할 처지가 아니었다. 배고픔을 해결해 줄 식량 도움이 더 급한 일이었다. 정부가 무슨 돈으로 의료 약품을 군대처럼 흔하게 사용할 시대가 아니었다. 전쟁을 겪고 나니 어린이 사망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홍역이 할퀴고 간 마을에 어린이 시신처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일 말이다. 대충 돌 몇 개와 흙 몇 삽으로 배고픈 힘이 다하지 못한 매장이었다. 나중의 처리는 여우의 차지가 되니 여우는 포식을 느끼며 전성기를 맞았던 일이다. 전쟁으로 의료혜택이 주어지자 여우는 먹이를 잃고 사라지고 말았다.
여우는 어린이 홍역으로 전성기를 맞았지만, 새로운 해열제 때문에 먹이를 잃고 멸종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먹이가 단절된 여우는 쥐를 잡아먹기에 이른다. 야생고양이처럼 사람들에게 접근도 어려운 생태다. 여우가 생명을 건지기 위한 먹거리 수단은 쥐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한국전쟁 이후 식량 증산 대책의 일환으로 쥐잡기 운동이 여우의 멸종을 앞당겼다. 집집이 무상으로 배부되는 쥐약으로 쥐가 대부분 사라지자 여우도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한국에는 홍역도 없어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 일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요즘 서양에서 다시 홍역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 또한 인체의 내성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아기를 낳기만 했지 키우지 못한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일이다. ( 글 : 박용 2019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