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합격 후 신참 의례
조선시대 신참으로서의 시련은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과거합격자의 집에서는 관에서 '방군(榜軍)'이라는 말단심부름꾼을 보내어 합격소식을 알렸는데, 문 앞에서 고성을 질러대며 소란을 피운다.
때로는 집안에 떼로 몰려들어와 한 상 크게 차려내라고 아우성을 치기도 한다.
합격했으니 '행하(行下)'로 한 턱 내라는 것이다.
집주인은 술과 음식을 내어 잘 대접하고 돈이나 쌀을 주어 보냈는데, 만약 대접이 시원치 않으면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이 풍습은 고려 말에 권세가의 나이 어린 자식들이, 권력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기고만장하는 콧대를 꺾어 놓고자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나중에는 무관직, 군대는 물론 아전들, 심지어는 종들도 이와 비슷한 풍습을 가지게 되었다.
방군이 이러하니 선배, 생원, 진사들이야 오죽하랴.
'접방례(接榜禮)'를 청탁해서 후배 집에 쳐들어가 뜯어먹는다.
생원 진사가 성균관에 들어가면 다시 '신방례(新榜禮)'를 치르는데,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션배들을 대접하고 온갖 희롱과 모욕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
신방례를 끝내고 나서도 규율을 잡으려는 선배들 등쌀에 유생들이 성균관 기숙사 입소를 기피하는 풍조까지 있었다고 한다.
신래(新來) 불리기
과거에 급제했다고 해서 곧 정식관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신은 예문관, 성균관, 교서관, 승문원 등 4관(館)으로, 무신은 내금위, 선전관청, 훈련원 등에서 임시직인 권지(權知)라는 직책으로 배속되어 정식 관직을 받을 때까지 수습기간을 거쳤다.
이때부터 고달픈 신참생활이 시작된다.
대과라 부르는 문과에 합격한 사람은 새로 왕의 은혜를 입었다 해서 '신은(新恩)'이라 불렀는데, 우선 배치된 부서의 관리들 앞에서 '신래불리기(唱新來)'라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때는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구경꾼들 앞에서 선배 두 사람이 신참의 양옆에 1명씩 붙어서 복두(복頭)에 어사화를 꽂은 신은의 겨드랑이를 끼고 북소리에 맞추어 앞으로 당겼다 뒤로 끌었다를 되풀이하다가, 얼굴에 먹물로 고양이를 그리는 묵희(墨戱 : 먹장난)를 하였다.
이를 거부하면 합격 후에 하는 유가행진(遊街行進)도 못하게 했다.
허참례(許參禮) 및 면신례(免新禮)
'허참례'는 처음 관청에 나갈 때 치르느 예비신고식이고 '면신례'는 정식신고식이다.
허참례가 끝나기 전까지는 동료관원으로 끼워주지 않아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했다.
또 면신례를 거치기 전까지는 관직 이름도 부르지 않고 무조건 '신래(新來)'라고 불렀다.
조정에서는 신래라는 말이 '신출내기'라고 조롱하는 말투라 여러 차례 그 말을 쓰지못하게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관례가 되어 신래라고 불러주지 않는 것을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허참례와 면신례 때에 신래는 '선진(先進)'들에게 크게 주연을 베풀어야 했다.
이 때 차리는 잔치음식을 그들끼리의 은어로 '용두봉미(龍頭鳳尾)'라 불렀는데 용두는 생선을, 봉미는 닭을 말한다.
술은 청주면 성(聖)이라 하며 탁주면 현(賢)이라 하며 그 수량도 한이 없었다.
또 여러 신래들로부터 거두어 모은 재물은 철 따라 대규모로 술파티를 벌이는데 썼으니, 봄에는 교서관에서 홍도음(紅桃飮)을, 초여름에는 예문관에서 장미음(薔薇飮)을, 여름에는 성균관에서 벽송음(碧松飮)을 치렀다.
허참례에는 고관이라도 예외가 없다.
관직이 아무리 높아도 처음 다른 부서에 가면 한턱을 내기 전에는 아랫사람들이 예도 갖추지 않고 함부로 이름을 불러댔다.
허참례와 면신례 중간에 수시로 연석(宴席)을 베풀었는데 중일연(中日宴)이라 하였다.
허참례 때는 선임자들에게 술잔치를 크게 내야 했으며 어떤 때는 돈을 거두었다가 회식을 하기도 하였다.
매번 연석에는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성대한 음식을 시켰고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아무리 고관이라고 하더라도 새로 부서를 옮기면 한턱을 내야 대우를 받았다.
처음 허참례를 치르고 면신례를 치르기까지는 짧게는 10일, 길게는 50일이 걸렸는데 만일 불만을 품고 공손히 굴지 않으면 면신 날짜만 늦춰지게 되었다.
면신례를 마쳐야 완전한 동료로 인정해 주는데, 면신례는 내부규율이 엄하기로 이름난 예문관이 사관 중에서도 가장 심했다.
예문관에서는 서열이 다르면 같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했고 선배에게 조금이라도 버릇없이 굴면 매를 쳤다.
그러니 면신례도 가장 혹독했다.
선배들에게 크게 잔치를 벌여 각기 기생을 하나씩 안기고, 고참 관원들에게는 기생을 둘을 안겨서 좌우보처(左右補處)라 하였으니 부처님 양옆의 좌우협시보살을 두고 있는 것을 빗댄 것이다.
선임자들은 신래에게 한 손으로는 기생 손목을 잡고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상관 이름을 부르는 게임을 시켜 이를 호종례(呼鐘禮)라 했고, 뒷짐을 진 채 서서 머리를 숙이고는 머리에 쓴 사모를 쳐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직속상관의 직함과 성명을 외우게 하여 이를 예수(禮數)라 했는데 게임에 지거나 관등성명을 틀릴 때마다 벌을 주었다.
그 외에 신래자를 괴롭히는 유형은 아래와 같은 것이 있었다.
시궁창의 오물을 얼굴에 칠하고는 중국의 향내 나는 분(당향분, 唐香粉)이라고 불렀다.
관(冠)과 의복을 찢고는 더러운 물 속에 밀어 넣어 뒹굴게 함으로써 사람이 차마 못 볼 귀신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사현부에 말단 감찰이 들어오면 우선 홀들기(경홀, 擎笏)라 하여 서까래만 한 기둥을 들게 하는데, 들지 못하면 맨 윗사람부터 차례로 아랫사람의 무릎을 주먹으로 때리니 이를테면 줄빳다인 셈이다.
연못에 밀어넣어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서 물고기 잡는 놀이를 하게 하였다.
또 거미잡기놀이라 하며 검댕투성이 부엌 벽을 손으로 문지르게 하고 그 물에 손을 씻게 한 뒤 그 물을 마시게 했다.
음란한 이야기를 하며 하루 종일 춤추게 하고는 이를 ‘맑은 노래에 예쁜 춤(청가묘무, 淸歌妙舞)’이라고 하였다.
명함 돌리기(回刺)
면신 전까지 신래는 매일 밤 선배들 집을 돌며 회자(回刺)를 해야 했다.
회자란 명함을 돌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 명함은 두터운 종이조각에 이름을 쓴 것으로 대개 명자(名刺)라 불렀는데 때로는 자서(刺書), 자지(刺紙), 명함(名銜)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옛날의 명자는 상대방을 만난 자리에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집을 찾아가 면회를 청할 때나, 정월초하루 세배갈 때 그 집 청지기 종을 통해 안에 들이미는 것으로 이를 통자(通刺), 투자(投刺), 납자(納刺)라 하였다.
결국 회자란 두루 돌아다니며 인사를 드린다는 말이다.
밤늦게까지 회자가 계속되기 마련이다보니 밤중에 부서진 관에 낡고 찢어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니 꼬락서니가 귀신몰골이라 이들을 '신귀(神鬼)'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시대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있었지만 순라꾼도 신귀는 붙잡지 않았다 한다.
짓궂은 선배들은 신귀를 서리들이 집무하는 장방(長房)에 가두어 출입을 못하게 하고는 저녁 늦게야 풀어주곤 하였다.
또 숙직하는 명부인 성기(省記)에 매일 신래 이름을 적어넣어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게 해서 길면 한 달 까지 끌었으니 이를 '초도(初度)'라 했다.
그런데, 회자에도 비용이 제법 들어갔는데 명자 석장 만드는데 무명 한 필이 드는 최고급 명자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일도 있었다.
또 신귀들이 납자를 할 때면 그 집 종까지 수고비를 요구해서 말썽이 일곤 했다.
1553년(명종 8) 윤 3월 4일에는 명함돌리는 폐가 많으니 그 횟수를 줄이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회자도 단순히 잘못된 관례가 아니라 신참들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중요한 행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영조 때 회자를 거부한 한유와 안식의 경우, 안식을 굴복하여 별 탈이 없었지만 유독 한유만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은 유배당하고 말았다.
허참례, 면신례의 풍습은 <고려사>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말 우왕 때 권세가 집안의 젖비린내 나는 어린 자제들이 부형(父兄)의 권력에 기대어 과거에 합격하자, 그때의 과거를 어린 아이들이 분홍옷을 입는 것에 빗대어 홍분방(紅粉榜) 또는 분홍방(粉紅榜)이라고 비아냥대었는데, 기성관원들이 이 철모르는 어린 것들의 기를 꺾어놓겠다고 시작한 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풍습이 계속되면서 별별 새로운 면신절차들이 덧붙여져서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면신례 시키지 마라, 못하겠다.
면신례는 수많은 신참 관원들을 고달프게 해서 아예 관직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집까지 팔아 가산을 탕진한 자도 있었으며, 부자 장사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크고 작은 말썽도 끊임없이 일어나 중종 때에는 의정부 관원들이 신래를 닦달하여 소를 잡아 삶다가 불이 난 일도 있었고 대궐 안 선전관청에서 관원들이 신래에게 술을 얻어먹고는 거꾸로 매달아놓고 발바닥을 때리다가 한밤중에 비명소리가 왕의 귀에까지 들려 처벌을 받은 일도 있었다.
때로는 신래다루기가 도를 넘어서서 병약한 신래들이 기절하고 죽는 사태도 벌어졌다.
국초부터 면신례를 법으로 금지하여 간혹 선배 관료들이 탄핵을 받고 파직되는 사례도 있었다.
효종 때는 군대에서느니 면신례에 대해 규제를 가해 면신례를 핑계로 술과 음식을 토색하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려 곤장을 치게 하였으며, 숙종 때 강릉에서는 새로 들어온 군졸들에게 화지가(畵紙價)라는 명목으로 꿀과 쌀을 받아낸 기총의 목을 베어 군중(軍中)에 효수한 일도 있었다.
한편, 중종 때 현량과롤 급제한 조광조 일파 젊은이들이 썩은 훈구파 기성관료들의 조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으로 면신례를 거부하자 사관(四館)의 관원들이 이들에게 관서 배정을 해주지 않아 정치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9번 장원을 했다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이름을 날린 율곡 이이도 처음 승문원에 배속되었는데 이 두뇌명석한 선비가 면신례를 추잡한 풍속이라 거부했다가 쫓겨나고 말았다.
퇴계 이황은 이 소식을 듣고는 뭐 그럴 것 까지 있느냐고 율곡 이이의 행동을 은근히 꼬집기도 했다.
율곡은 벼르고 벼르다 훗날 홍문관 교리가 되어 왕에게 상소를 하여 면신례를 못하게 했고, 병조판서에 오르자 병조에서만은 신래를 괴롭히는 풍습을 사라지게 했지만, 그저 그때 뿐이었다.
케케묵은 악습은 끝내 사라지지 않아
고종 때 간행된 <대전회통>에도 면신례 금지조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첫 벼슬은 패가의 관문
면신례를 치르고 나서도 목돈 들어갈 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당시 첫 벼슬인 초입사(初入仕)를 초년에 패가한다 하여 '초년패(初年敗)'라 불렀다.
지방관직에 제수되면 예복을 입고 대궐에 들어가 왕과 왕비가 계신 곳을 향해 4배를 올리고 세자가 있는 곳에 재배를 올리는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해야 하는데 그때 차려입는 관복 흑단령이나 허리띠인 오각대, 머리에 쓰는 사모, 신발인 흑화 따위는 나라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서 처음 관직을 받을 때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영조 때 이름을 날린 황윤석은 나이 38세에 가까스로 종9품 능참봉 자리를 얻었는데 강원도 영릉의 장릉(莊陵 :단종릉) 참봉에 배정되어 사은숙배를 하러 전라도 흥덕에서 서울에 올라와 관복을 살 돈이 없어 겨우 수소문하여 빌려입게 되었다.
그러나 겨우 구한 사모는 머리가 유난히 커서 맞지 않아 간신히 머리에 얹은 꼴이라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면 자꾸 벗겨지므로 사모에 끈을 매달아 턱 밑으로 묶고 대궐에 들어가야 했다.
숙종 때 서필원도 과거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에 임명되었는데도 교대 근무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아 처벌을 받게되었는데 알고보니 발이 너무 큰 탓에 빌려올 만한 신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왕이 상의원에 명을 내려 커다란 신발을 만들어주었다고 전한다.
지방으로 관직을 나가게 되면 그래도 빚을 조금 지지만, 여기저기 얼굴 내밀 일이 많은 서울의 관료생활은 아예 빚더미에 앉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일찍이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준마는 외방으로 보내야 하고 선비는 서울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지금은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로 약간 뒤바뀌었지만, 그 유래를 살펴보면, 지방 선비는 미리미리 서울에서 터를 닦아두어야지 그렇지 않고 갑자기 서울에 올라와서 벼슬살이를 하려다가는 겪어야 할 고난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방의 수령이 사은숙배를 하러 대궐에 들어가면 대전별감이나 승정원 사령이 예전(禮錢)을 뜯어내는데 만약 주지 않으면 욕지거리를 퍼붓기도 했다.
재상과 판서들에게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신원조회라 할 수 있는 서경(署經)을 한 사헌부, 사간원 관리들에게도 인사를 하면서 종이값 지채(紙債)를 바쳐야 했으며,
또 인사권을 담당하고 있는 이조 또는 병조의 관리 등등 여러 관서에 예물을 올려야 한다.
이런 것들로는 필채(筆債), 예목(禮木), 포진채(鋪陳債), 조사채(朝仕債) 등이 있는데 뇌물이 아니라 정식으로 내야하는 예물로서 총액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므로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경향(京鄕)간의 연락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경저리에게 청탁하여 빚을 얻어쓰게 되니 이를 저채(邸債)라 하였는데, 저채가 많아지면 결국은 고을 백성들로부터 돈을 긁어내서 메꾸어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