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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을 수행하는 사람은 한마음의 모습[相]을 얻으니,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問曰:“修行禪人,得一心相,云何可知?”
얼굴빛이 화열(和悅)하고 윤기가 나며, 천천히 다니고 조용하고 단정하여 한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눈은 색에 집착하지 않는다.
신령한 덕과 선정의 힘으로 명예와 이익을 탐내지 않고 교만함을 격파하며, 그 바탕은 유연하여 독해를 품지 않으며, 또한 인색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곧게 믿어 마음이 청정하고 논의하여 다투지 않으며, 몸에 속임이 없어서 함께 말하기 쉽다. 부드럽고 부끄러워하여[慙愧] 마음이 항상 법에 있으며, 정성스럽게 수행하고 정진하며 지계를 완전하게 갖추었다
.答曰:“面色悅澤,徐行靖正,不失一心,目不著色,神德定力,不貪名利,擊破憍慢,其性柔軟,不懷毒害,無復慳嫉,直信心淨,論議不諍,身無欺誑,易可與語;柔軟慚愧,心常在法,懃修精進,持戒完具。
경전을 암송하여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이 법행(法行)을 따르며, 마음은 항상 기쁨에 넘쳐 성낼 곳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네 가지 공양 중에서 청정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으니, 청정한 보시면 받고 양을 알아서 만족할 줄 안다.
잠깨어 일어나면서부터 이익을 가벼이 여기며 능히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행하고 인욕으로 삿됨을 제거한다. 논의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더라도 말수는 매우 적으며, 겸손하고 삼가해서 상ㆍ중ㆍ하의 자리를 공경하고, 훌륭한 스승과 선지식을 항상 가까이하고 따른다.
음식은 절제할 줄 알고 좋은 맛에 집착하지 않으며, 혼자 있는 고요한 곳을 즐기며,괴롭거나 즐겁더라도 마음으로 참아 동요하지 않으며, 원망이나 다툼도 없고 다투는 소송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한마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誦經正憶,念隨法行,意常喜悅,瞋處不瞋;四供養中,不淨不受,淨施則受,知量止足;寤起輕利,能行二施,忍辱除邪,論議不自滿,言語尟少;謙恪恭敬上中下座,善師善知識常親近隨順;飮食知節,不著欲味,樂獨靜處,若苦若樂,心忍不動,無怨無競,不喜鬪訟。如是等種種相,得知一心相。”
이 각(覺)과 관(觀)1)의 두 가지 일이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니, 마차 물이 맑고 고요한데 파도가 일렁이면 흐려지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이미 안으로 한마음인데도 각과 관으로 번민하게 되니, 마치 목적지에 이르면 휴식을 얻고 졸리면 편안함을 얻는 것과 같이 이때 차례대로 각도 없고 관도 없어서 청정한 선정을 일으키고, 내(內)ㆍ정(淨)ㆍ희(喜)ㆍ낙(樂)2)해서 2선(禪)에 들어갈 수 있다.
此覺、觀二事,亂禪定心,如水澄靜,波蕩則濁,行者如是,內已一心,覺觀所惱,如極得息,如睡得安。是時次第無覺無觀,生淸淨定,內淨喜樂,得入二禪。
마음은 고요하고 묵연(黙然)해서 본래 얻을 것이 아닌데, 이제 이 기쁨[喜]을 얻으니, 이때 마음의 관(觀)은 기쁨으로 근심을 삼음이 앞에서 말한 각과 관과 같다.
기쁨이 없는 법[無喜法]을 행하여 마침내 기쁨의 경지를 여의고 성현들이 말씀하신 바의 즐거움[樂]을 얻으며, 한마음으로 자세히 알아 생각하고 보호해서 3선에 들어갈 수 있다.
心靜默然,本所不得,今得此喜。是時心觀,以喜爲患,如上覺觀,行無喜法,乃離喜地,得賢聖所說樂,一心諦知念護得入三禪。
이미 기쁨을 버렸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서 기억하고 즐겨 보호[護:捨]한다. 성인은 즐겨 보호할 것을 말하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버리기[捨]가 어려우며, 즐거움 가운데 최고이니 이것보다 더한 다른 즐거움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들은 일체의 청정한 경지 중에서 인자함[慈]이 최고의 즐거움이 됨을 설하였다.
즐거움은 곧 근심이니, 이유가 무엇인가?
제일의 선(禪) 중에서는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느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있으면 곧 변화가 있으며, 변화가 있으면 곧 괴로움이 생기니, 그러므로 3선에서는 즐거움으로 근심을 삼는다.
또한 선묘(善妙)로써 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니, 먼저 근심과 기쁨을 버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마음을 제거하며, 청정함을 호념하여 제4선3)의 불고불락호청정념(不苦不樂護淸淨念)의 한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최고의 청정함을 보호하는 것을 제4선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已棄喜故,諦知憶念樂護,聖人言樂護,餘人難捨,樂中第一,過此以往,無復樂也。是故一切聖人,於一切淨地中,說慈爲第一樂。樂則是患。所以者何?第一禪中心不動轉,以無事故,有動則有轉,有轉則有苦,是故三禪以樂爲患。復以善妙捨此苦樂,先棄憂喜除苦樂意,護念淸淨得入第四禪。不苦不樂護淸淨念一心,是故佛言:“護最淸淨第一,名第四禪。”
제3선에서는 즐거움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하여 괴로움[苦]이라 하니, 그러므로 4선에서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제거하여 없애서 그것을 이름하여 동요하지 않는 곳[不動處]이라고 한다.
점차 공처(空處)4)를 관조하여 안팎의 색상(色想)을 깨뜨리고, 유대상(有對想)5)을 없애며, 여러 가지 색상을 생각하지 않고, 무량공처(無量空處)6)를 관한다.
항상 색(色)의 허물을 관하고, 공처정(空處定)의 최상의 미묘한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공처정에 도달할 수 있다.
以第三禪樂動故,名之爲苦,是故四禪除滅苦樂,名不動處。漸觀空處,破內外色想,滅有對想,不念種種色想;觀無量空處,常觀色過;念空處定上妙功德。習念是法,逮得空處。
무량한 식처(識處)를 생각하고 공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량한 식처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식처정(識處定)에 도달할 수 있다.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생각하고 식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무소유처정을 얻는다.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을 생각하되, 만일 일체의 생각에 그 근심이 매우 많다면 병이든 종기든 무상(無想)이든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곳[愚癡處]이니, 그러므로 비유상비무상정은 제일 안온한 좋은 곳이므로 무소유처정의 허물을 관조하고, 비유상비무상의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비유상비무상처정을 얻는다.
念無量識處,觀空處過,念無量識處功德。習念是法,逮得識處。念無所有處,觀識處過,念無所有處功德,習念是法,便得無所有處。念非有想非無想處,若一切想其患甚多,若病若瘡,若無想,是愚癡處。是故非有想非無想,是第一安隱善處。觀無所有處過,念非有想非無想功德,習念是法,便得非有想非無想處。
혹 어떤 수행자가 먼저 초지(初地)에서부터 상지(上地)에까지 이르고, 다시 상지에서 자심(慈心:자무량심)을 익혀 행한다면, 먼저 스스로 즐거움을 얻어서 성냄의 독을 파괴하고, 다음으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는다.
비심(悲心:비무량심)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가엾게 여기고, 능히 고뇌를 파괴하여 널리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비심삼매(悲心三昧)를 얻는다.
능히 기쁘지 아니한 것을 깨뜨리고 무량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희열을 얻게 하면, 이때 문득 희심(喜心: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或有行者!先從初地乃至上地,復於上地習行慈心,先自得樂破瞋恚毒,次及十方無量衆生。是時便得慈心三昧。悲心憐愍衆生之苦,能破衆惱,廣及無量衆生。是時便得悲心三昧。能破不悅,令無量衆生皆得喜悅。是時便得喜心三昧。
능히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뜨리고 곧바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관하면, 이때 문득 호심(護心: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2선(禪) 역시 이와 같으며, 3선과 4선에서는 기쁨[喜]을 제거한다.
다음으로 5통(通)을 배우니, 몸이 능히 날아다닐 수 있고 변화가 자유자재하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욕정(欲定)ㆍ정진정(精進定)ㆍ일심정(一心定)ㆍ혜정(慧定)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몸을 관찰하고, 항상 가볍다는 생각을 지어서 날아다님[飛行]을 완성하고자 한다.
크든 작든욕정이 지나치면 큰 것이 되고, 욕정이 덜하면 작은 것이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근심이니, 정진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항상 한마음으로 사유하여 가볍다고 관할 수 있다.
마치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원숭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더라도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몸에 고통과 걱정이 없는 것과 같이, 이것도 마찬가지여서 욕력(欲力)ㆍ정진력(精進力)ㆍ일심력(一心力)ㆍ혜력(慧力)으로 그것을 넓고 크게 하면 몸이 더욱 작아져 문득 몸을 움직일 수 있다
.能破苦樂,直觀十方無量衆生,是時便得護心三昧。二禪亦復如是,三禪四禪除喜。次學五通,身能飛行變化自在。行者一心欲定、精進定、一心定、慧定。一心觀身,常作輕想,欲成飛行,若大若小以欲定過爲大,以欲定減爲小,此二俱患,精進翹懃,常能一心,思惟輕觀,如能浮人,心力强故,而不沈沒;亦如猿猴,從高上墮,心力强故,身無痛患。此亦如是,欲力、精進力、一心力、慧力,令其廣大,而身更小,便能運身。
또한 몸의 공계(空界)를 관하고 항상 이 관을 익히면 욕력ㆍ정진력ㆍ일심력ㆍ혜력이 지극히 넓고 커져서 곧 몸을 들어올릴 수 있으니, 커다란 바람의 힘이 무거운 것을 보내어 먼 곳에 도달하게 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처음에는 마땅히 스스로 시험하여 땅에서 떨어져 한 자, 두 자 그리고 점차 한 길[丈]에 이르고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니, 마치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배우고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같다.
사유하여 스스로 살펴서, 마음의 힘이 크면 반드시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復次觀身空界。常習此觀,欲力、精進力、一心力、慧力極爲廣大,便能擧身。如大風力,致重達遠,此亦如是!初當自試,離地一尺二尺,漸至一丈,還來本處。如鳥子學飛,小兒學行,思惟自審,知心力大,必能至遠。
4대(大)를 배우고 관하되, 지대(地大)를 제거하고 다만 나머지 3대를 관하여 심념(心念)이 흩어지지 않으면 문득 자재할 수 있으니, 몸이 걸림이 없어서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다. 마땅히 다시 배우고 익혀서 멀더라도 가깝다는 생각을 하면, 가까운 것이 먼 것을 없애버리게 된다.
또한 여러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나무를 땅의 일종이라고 관하고 나머지 종류는 없애버리면 이 나무는 문득 변하여 땅이 되니, 왜냐하면 나무는 땅의 요소의 성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ㆍ불ㆍ바람ㆍ허공ㆍ금ㆍ은ㆍ보물도 모두 다 이와 같으니, 왜냐하면 나무에는 여러 가지 요소의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신통(初神通)의 근본이다.
學觀四大,除卻地大但觀三大,心念不散,便得自在,身無罣㝵,如鳥飛行。當復學習,遠作近想,是故近滅遠出。復能變化諸物,如觀木地種,除卻餘種,此木便變爲地。所以者何?木有地種分故。水、火、風、空,金銀寶物,悉皆如是。何以故?木有諸種分故。是初神通根本。
4선에는 14가지 변화하는 마음이 있다.
초선(初禪)은 2과(果)이니, 첫째는 초선이고 둘째는 욕계(欲界)이다.
2선은 3과이니, 첫째는 2선, 둘째는 초선, 셋째는 욕계이다.
3선은 4과이니, 첫째는 3선, 둘째는 2선, 셋째는 초선, 넷째는 욕계이다.
4선은 5과이니, 첫째는 4선, 둘째는 3선, 셋째는 2선, 넷째는 초선, 다섯째는 욕계이다.
나머지 신통은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四禪有十四變化心:初禪二果:一者、初禪。二者、欲界。二禪三果:一者、二禪。二者、初禪。三者、欲界。三禪四果:一者、三禪。二者、二禪。三者、初禪。四者、欲界。四禪五果:一者、四禪。二者、三禪。三者、二禪。四者、初禪。五者、欲界。餘通如『摩訶衍論』中說。
세존의 제자들은 다섯 가지 법문을 익히고 배워서 뜻을 세워 열반을 추구하니,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선정이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겁기[快樂] 때문이요, 지혜가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근심과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선정이 많은 사람은 먼저 선법(禪法)을 배우고뒤에 열반을 배우며, 지혜가 많은 사람은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니,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였고, 또 아직 선(禪)도 얻지 못한 것이다.
온 마음을 다 기울여 흩어지지 않고 곧바로 열반을 구하여 애착 등 모든 번뇌를 초월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尊弟子習學五法門志求涅槃,有二種人:或好定多,以快樂故。或好智多,畏苦患故。定多者,先學禪法,後學涅槃。智多者,直趣涅槃。直趣涅槃者,未斷煩惱亦未得禪,專心不散直求涅槃,越愛等諸煩惱,是名涅槃。통합뷰어몸은 진실로 무상(無常)ㆍ
고(苦)ㆍ부정(不淨)ㆍ무아(無我)이나, 몸을 뒤바꿔[顚倒] 생각하기 때문에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라 여기니, 이것 때문에 일마다 그 몸을 애착하므로, 이것이 바로 최하의 중생이다.
수행자는 뒤바뀐 것을 타파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땅히 4념지관(念止觀)7)을 익혀서 몸에는 갖가지 모든 괴로움과 근심이 많다는 것을 관해야만 한다.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고(苦)이며, 몸에는 36가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부정(不淨)하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니, 이와 같이 관함을 익혀서 내신(內身)을 관하고 외신(外身)을 관하며, 나아가 내외신(內外身)을 관한다.
이와 같은 관법을 익히면, 이것을 일러 신념지(身念止)라고 한다.
身實無常、苦、不淨、無我,以心顚倒故常、樂、我、淨。以是故事事愛著其身,是則底下衆生。行者欲破顚倒故,當習四念止觀:觀身種種,多諸苦患。從因緣生故無常,種種惱故苦,身有三十六物故不淨,以不得自在故無我。習如是觀,觀內身、觀外身、觀內外身,習如是觀,是謂身念止。
몸의 실상(實相)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바뀐 견해를 일으켜 이 몸을 애착하는가?
몸 주변의 즐거움과 고통을 자세히 사유하고 생각하라. 즐거움과 고통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몸에 집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즐거움과 고통은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해야만 한다.
어째서 얻을 수 없는가?
옷과 음식 때문에 즐거움에 이르나 즐거움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생기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종기의 고통을 근심하면 약을 발라서 치료하고, 통증이 멈추면 즐거운 것과 같이, 커다란 괴로움 때문에 작은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다.
또한 옛날의 괴로움을 괴로움[苦]으로 삼고, 새로운 괴로움으로 즐거움[樂]을 삼으니, 마치 무거운 것을 메고 있다가 어깨를 바꾸면 새로운 무거움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아서, 진실하고 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마치 불의 성질은 뜨겁기 때문에 잠시도 차가운 때가 없는 것과 같이, 만일 이것이 참다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즐겁지 않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身實相如是!何故於此,而起顚倒愛著此身?諦思惟念,身邊樂痛,以愛樂痛故著此身,當觀樂痛實不可得。云何不得因衣食故致樂?樂過則苦生,非實樂故。如患瘡苦,以藥塗治,痛止爲樂。以大苦故,謂小苦爲樂,非實樂也。復次以故苦爲苦,新苦爲樂,如檐重易肩,而以新重爲樂,非實常樂也。如火性熱,無暫冷時。若是實樂,不應有不樂。
혹자가 말하기를, 바깥의 일은 즐거움의 인연이지만 반드시 즐겁지만은 않으니, 어느 때는 즐거움의 원인이고 어느 때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만일 심법(心法)과 애착을 서로 응하게 한다면 그때는 즐거움이며, 성냄과 서로 응한다면 그때는 괴로움이며, 어리석음과 서로 응한다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다.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즐거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或曰:“外事是樂,因緣不必是樂,或時樂因、或時苦因。若使心法與愛相應,爾時是樂;與恚相應,爾時是苦;與癡相應,不苦不樂。以此推之,可知有樂無樂。”
대답하기를 “없다”라고 하였다.
음욕은 마땅히 즐거움이 아니니, 왜냐하면 만일 음욕이 안에 있다면 바깥에서 여색을 찾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여색을 찾음이 마땅히 음욕의 괴로움임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음욕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때때로 버려서는 안 되며, 만일 버린다면 마땅히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커다란 괴로움 속에서는 작은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마치 사람이 죽어 마땅한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채찍을 받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答曰:“無也。婬欲不應是樂。何以故?若婬欲在內,不應外求女色,外求女色當知婬苦。若婬是樂,不應時時棄,若棄不應是樂。於大苦中,以小苦爲樂也。如人應死,全命受鞭,以是爲樂。
욕심이 불타오르면 욕망으로 즐거움을 삼지만, 노년에는 욕망을 싫어하고 욕망이 즐거움이 아니란 것을 아니, 만일 진실로 즐거움의 모습[樂相]이라면 마땅히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 즐거워하고자 하는 모습이지만 실재로는 얻을 수 없다. 즐거움이 사라지면 바로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움의 고통은 마땅히 괴로움이라고 관해야 하고, 괴로움의 고통은 마땅히 즐거움이라고 관해야 한다. 마치 화살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서, 마땅히 생기고 없어져 무상(無常)하다고 관해야만 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일러 통념지(通念止)라 한다.
欲心熾盛,以欲爲樂,老時厭欲,知欲非樂。若實樂相,不應生厭。如是種種,因緣欲樂相,實不可得,樂失則苦。佛言:‘樂痛應觀苦,苦痛應觀樂,如箭在體,不苦不樂應觀生滅無常。’是謂痛念止。”
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받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좇아 생기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인식이 대상에 일치하고 대응하여 일어나기[相似生] 때문에, 다만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라고 말할 뿐이니, 본래는 현재의 존재[今有]도 없고 과거의 존재[已有]도 또한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물질이 있음을 볼 수 있고 기억해서 보고자 하니, 이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마치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가 있고 구슬이 있으며, 마른 풀과 쇠똥이 있어서 뭇 인연이 화합하여 여기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을 얻을 수 없지만 연(緣)이 합하여 불이 있다.
當知心受苦樂、受不苦不樂。云何心?是心無常,從因緣生故。生滅不住,相似生故,但顚倒故,謂是爲一。本無今有,已有還無,是故無常。觀知心空。云何爲空?從因緣生,有眼有色,可見憶念,欲見如是等,和合眼識生。如日愛珠,有日有珠,有乾草牛屎,衆緣和合,於是火生。一一推求,火不可得,緣合有火。
안식도 또한 그러해서,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두 가지 중간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이 있지 않으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깨비와 같고 요술과 같으니, 현재의 마음으로 과거의 마음을 관하면 혹은 괴로움이고, 혹은 즐거움이며, 혹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욕심이 있든 욕심이 없든 역시이와 같아서,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관하든 밖의 마음을 관하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관하든 역시 이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심념지(心念止)라고 이름한다.
眼識亦爾,不住眼中,亦非色中住,不兩中閒住,無有住處,亦復不無。是故佛言:“如幻如化”。現在心觀過去心,或苦、或樂、或不苦不樂,心各各異各各滅,有欲心、無欲心亦如是,各各異各各滅,觀內心、觀外心、觀內外心亦如是。是名心念止。
또한 마음은 누구에 속한다고 관하는가?
상(想)ㆍ사유(思惟)ㆍ염(念)ㆍ욕(慾) 등의 여러 가지 마음이 서로 응하는 법[心相應法]과 서로 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을 관하고, 그 주인을 자세히 관하여도 주인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고, 주인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마음의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특별히 관하였으니, 이제 다시 4념지(念止) 중에서도 주인을 얻을 수 없으며 이곳을 여의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을 총체적으로 관한다.
復次觀心爲屬誰?觀想、思惟、念欲等諸心相應法不相應法,諦觀其主,主不可得。何以故?從因緣生故無常,無常故苦,苦故不自在,不自在故無主,無主故空。前別觀身、痛、心法不可得,今更摠觀四念止中主不可得,離此處求亦不可得。
만일 항상함[常]을 얻을 수 없다면, 무상(無常)도 역시 얻을 수 없다. 만일 항상하다면 마땅히 항상 괴롭고 항상 즐거워서 역시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항상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살뇌죄(殺惱罪)가 없고 역시 열반도 없으며, 만일 육신이 바로 정신이라면 무상한 몸이 없어지면 정신도 역시 없어져야만 하며, 또한 후세도 없고 죄와 복도 없다.
이와 같이 두루 주인이 없음을 관하면,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공이며 자재하지 못해서,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기고 인연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인연이 화합하여 법이 되니, 이것을 법념지(法念止)라고 한다.
若常不可得,無常亦不可得;若常應當常苦常樂,亦不應忘;若常有神者,無殺惱罪,亦無涅槃;若身是神,無常身滅,神亦應滅,亦無後世,亦無罪福。如是遍觀無主,諸法皆空不自在,因緣合故生,因緣壞故滅,如是緣合法,是名法念止。
만일 수행자가 법념지를 얻는다면 세간의 공(空)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법을 싫어하여 도무지 조금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공한 법에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마땅히 열반의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하며, 정진의 힘을 세워서 깊은 사마타(舍摩陀)를 얻는다.깊은 사마타라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적절히 표현할 이름이 없다. 이때 깊은 사마타를 얻어서 제4의 법념지 가운데 머문다.
모든 존재[諸法]의 모습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 진실이요 나머지는 거짓말이니,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하늘이 아니며, 시간이 아니고 티끌이 아니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 속에서 생기니, 이 번뇌와 업이 이 괴로움을 발생시킨다.
若行者得法念止,厭世閒空老病死法,都無少許常樂我淨,我於此空法復何所求?應當入涅槃最善法中住。建精進力,得深舍摩陁故深舍摩陁者,住心一處名也,此土無是名。是時得深舍摩陁,住第四法念止中,觀諸法相,皆苦無樂,無樂是實,餘者妄語。苦因愛等諸煩惱及業,是非天、非時、非塵等種種妄語中生,是煩惱及業出生,此苦是苦。
이 괴로움은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색계도 무색계도 세계시(世界始)도 아니니, 세계시외도는 일체 유위법의 처음을 세계시라 하며, 열반이라 말한다. 이 처음이 있다는 것이 만물을 만들어내므로 곧 조화(造化)라고 말한다.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은 능히 이러한 괴로움을 없앨 수 없으며, 정견(正見) 등의 8정도가 바로 열반의 길이요, 나머지 외도의 고행(苦行)이나 갖가지 공지계(空持戒)ㆍ공선정(空禪定)ㆍ공지혜(空智慧)는 열반의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 가운데 계(戒)ㆍ정(定)ㆍ혜(慧)의 세 가지 법이 합하여 행해져야 열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평지에 서서 좋은 활과 화살을 가져야 원수인 적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것과 같이, 세 가지 법을 합하여 행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계율을 평지로 삼고, 선정을 훌륭한 활[快弓]로 삼으며, 지혜를 예리한 화살로 삼아 세 가지 일이 구비되어야 능히 번뇌의 적을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외도의 무리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入涅槃時一切滅盡,非色、無色界及世界始世界始,外道謂一切有法之初,色爲世界始,外道謂涅槃也。以此有始,能化作萬物,卽名造化也等種種妄語,能滅此苦。正見等八直是涅槃道,非餘外道苦行,種種空持戒、空禪定、空智慧。何以故?佛法中戒、定、慧三法合行能入涅槃,譬如人立平地,持好弓箭,能射殺怨賊,三法合行亦如是!戒爲平地,禪定爲快弓,智慧爲利箭,三事備足,能殺煩惱賊,以是故外道輩不得涅槃。
수행자는 이때 네 가지 법연(法緣)을 만들어 연(緣)을 관하는 것이 활쏘기 놀이와 같다.
괴로움[苦]을 관8)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요, 몸과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에 고(苦)이며, 얻을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공(空)이요,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습(習)을 관9)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번뇌와 유루업(有漏業)이 화합하기 때문에 집(集)이며, 상사과(相似果)가 생기기 때문에 인(因)이며, 이 가운데서 일체의 행(行)을 얻기 때문에 생(生)이고, 상사과가 아닌 것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연(緣)인 것이다.
行者是時作四法緣,觀緣如射博。觀苦四種:因緣生故無常,身心惱故苦,無一可得故空,無作無受故無我。觀習四種:煩惱有漏業和合故集,相似果生故因,是中得一切行故生,非相似果相續故緣。
진(盡)을 관10)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일체의 번뇌를 덮고 있기 때문에 폐(閉)이며, 번뇌의 불길을 제거하기 때문에 멸(滅)이고, 일체의 법 가운데서 최고이기 때문에 묘(妙)이며, 세간을 지나가기 때문에 출(出)인 것이다.
도(道)를 관11)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능히 열반에 도달하기 때문에 도(道)이며,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정(正)이고, 일체의 성인께서 간 곳이기 때문에 적(跡)이며, 세간의 근심과 고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離)이다.
觀盡四種:一切煩惱覆故閉,除煩惱火故滅,一切法中第一故妙,世閒過去故出。觀道四種:能到涅槃故道,不顚倒故正,一切聖人去處故迹,得脫世愁惱故離。
이와 같이 관하면 무루(無漏)의 상사법(相似法)을 얻으리니, 이름하여 따뜻한 법[煖法]12)이라 한다.
무엇을 따뜻하다 하는가?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에 따뜻한 법이라 이름하며, 모든 번뇌의 장작을 무루지(無漏智)의 불로써 태우니, 불이 나오려고 하는 처음의 모습을 이름하여 따뜻한 법이라 한다.
비유컨대 불을 모으는데 처음 모을 때연기가 나면 이것을 따뜻하다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열반도(涅槃道)의 첫 모습이다.
如是觀者得無漏相似法,名爲煖法。云何名煖?常懃精進故名煖法。諸煩惱薪,無漏智火燒,火欲出初相,名爲煖法,譬如鑽火,初鑽煙出,是名煖,是爲涅槃道初相。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한마음으로 선정을 구하기를 매우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유루도(有漏道)이며, 두 번째는 대부분 애착을 제거하고 참다운 지혜를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곧 바로 열반으로 향하여 따뜻한 법 가운데 들어가며, 따뜻한 모습[煖相]을 지닌 사람은 깊이 한마음을 얻는다.
참다운 법의 거울이 무루계(無漏界)의 가장자리에 도달하면거울 가운데 모습은 표면의 세계와 비슷하며, 가장자리는 가운데가 아니므로 이렇게 비유했다., 수행자는 이때 크게 안온함을 얻어서 스스로 ‘나는 선정으로 마땅히 열반을 얻으리니, 이 도(道)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니, 마치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축축한 진흙에 도달하면 틀림없이 오래지 않아 물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적을 격파하여 적이 이미 물러나 흩어지면 스스로 승리했음을 알고 마음속이 안온해지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기 위해서 마땅히 먼저 막대기로 몸을 두드려 시험해 보되 만일 은은하게 진맥이 일어나면 이 사람은 따뜻함이 있으므로 반드시 살 수 있다고 아는 것과 같다.
佛弟子中有二種人:一者、多好一心求禪定,是人有漏道。二者、多除愛著好實智慧,是人直趣涅槃入煖法中。有煖相者深得一心,實法鏡到無漏界邊鏡中像似面,界邊非中故以爲喩。行者是時大得安隱,自念:“我定當得涅槃。見此道故。”如人穿井得至濕泥,知當得水不久;如人擊賊賊已退散,自知得勝意中安隱;如人怖死,人欲知活不?當先試之以杖打身,若隱胗脈起者,知是有煖,必可得活。
또한 법을 듣는 사람이 사유하되 기뻐서 마음으로 집착하면 이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이, 수행자는 이와 같이 따뜻한 법을 지니기 때문에 ‘따뜻함이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며,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선근법에는 열여섯 가지가 있어서 4제(諦)의 인연을 행하며, 6지(地)13) 중 하나인 지혜는 일체 무루법의 기반이다.
야인(野人)이 능히 안온함을 행하니무루에서 소원(疎遠)하기 때문에 야인이라고 한다. 범본(梵本)에 살펴보면 범부인(凡夫人)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이다., 이것을 따뜻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
亦如聽法人思惟喜悅心著,是時心熱,行者如是有煖法,故名爲有煖,亦名能得涅槃分善根。是善根法有十六行四諦,緣六地中一智慧一切無漏法基,野人能行安隱於無漏疏,故名爲野人,案梵本爾,先言凡夫人,非,是名有煖法。
증진하여 더 올라가면 다시 정법(頂法)14)이라고 하니, 마치 젖이 변하여 낙(酪)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법의 실상을 관하여 내가 마땅히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마음으로 이 법을 좋아하니, 이것은 참다운 법[眞法]이어서 능히 갖가지 괴로움과 근심 그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
增進轉上,更名頂法,如乳變爲酪。是人觀法實相,我當得苦脫,心愛是法是爲眞法,能除種種苦患及老病死。
이때 생각하기를, ‘이 법은 누가 설했는가? 바로 부처님 세존이시니, 이것을 좇아 불보(佛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만일 이 법이 없다면 일체의 번뇌를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법보(法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나는 마땅히 어찌해야 진실한 지혜를 조금이라도 밝혀 이로부터 법보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큰 환희심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일 내가 불제자의 무리들과 좋은 짝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마땅히 참다운 지혜의 약간의 밝음이나마 얻을 것인가?’라고 하면, 이를 좇아 승보(僧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크게 환희심을 얻으며, 이 세 가지 보배 속에서 한마음의 청정함을 얻어 참다운 지혜에 계합한다.
이것이 정상(頂上)의 선근이니, 또한 정법(頂法)이라 이름하고,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파라연경(波羅延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是時,思惟此法誰說?是佛世尊!從是得佛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若無此法,一切煩惱誰當能遮?我當云何得實智慧少許明?從是得法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若我不得佛弟子輩好伴,云何當得實智慧少許明?從是得僧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是三寶中得一心淸淨合實智慧,是頂善根,亦名頂法,亦名能得涅槃分善根。如『波羅延經』中說:
불보ㆍ법보ㆍ승보에 대하여
누구라도 조금만 믿음의 청정함이 있다면
이를 정상의 선근이라 이름하리니
그대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니라.
佛寶法僧寶,
誰有少信淨;
是名頂善根,
汝曹一心持。
어째서 약간의 믿음[少信]이라 하는가?
부처님ㆍ보살ㆍ벽지불ㆍ아라한 등의 주변에는 적은데[少] 야인의 주변에는 많기[多]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파괴할 수 있고 잃어버릴 수 있으니, 그러므로 ‘적다’고 한 것이다.
『법구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云何爲少信?於佛、菩薩、辟支佛、阿羅漢邊爲少,於野人邊爲多;復次,此可破可失,是故名少。如『法句』說:
파초는 열매를 생산하면 죽고
대나무도 열매를 생산하면 역시 그러하며
노새는 새끼가 있으면 곧 죽고
소인(小人)은 봉양을 받으면 죽는다.芭蕉生實死,
竹生實亦然!
騾有子則死,
小人得養死。
잘못을 타파해도 이롭지 않으므로
소인은 명예를 얻으려 하니
청정의 원인[白淨分]을 모두 잃어버리고
마침내 정법(頂法)에서 떨어진다.
破失非利故,
小人得名譽;
白淨分失盡,
乃至頂法墮。
또한 아직 여러 결사(結使:번뇌)를 끊지 못했다면 아직 무루의 무량한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적다’고 말한다.
復次,未斷諸結使,未得無漏無量慧心,以是故名少。
또한 부지런히 정진해서 한마음으로 열반의 길로 들어가 다시 5음(陰)ㆍ4제(諦)ㆍ16행(行)을 분명하게 관하면, 이때 마음이 위축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며, 물러서지도 않으며,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인(忍)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인선근(忍善根)이라고 한다.
인(忍)은 무엇인가?
4제를 따라 행하면 이것을 인이라고 한다.
이 선근에는 세 가지 상ㆍ중ㆍ하의 3시(時)가 있으니, 어째서 인이라고 이름했는가?
5음의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관하고, 마음으로 견디어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인(忍)이라고 한다.
復次。懃精進一心入涅槃道中,更了了觀五陰、四諦十六行。是時,心不縮不悔不退,愛樂入忍,是名忍善根。忍何等?隨四諦觀行,是名爲忍。是善根三種:上、中、下三時。云何名忍?觀五陰無常、苦、空、無我,心忍不退,是名忍。
또한 일체의 세간은 모두 고ㆍ공이요 즐거움이 없으니, 이 괴로움의 원인은 습(習)과 애착 등 여러 가지 번뇌이며, 이 습은 지혜의 연(緣)을 없애버린다.이것을 상법(上法)이라 하니, 다시 위[上]가 있지 않으며, 8정도(正道)는 능히 수행자로 하여금 열반에 이르게 하니, 다시 그 이상은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신심(信心)으로 후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참는 것을 인(忍)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 다시 참음이 있어서 갖가지 결사(結使)와 갖가지 번뇌와 의심과 후회가 마음속에 들어오더라도 능히 파괴할 수 없게 하니, 비유컨대 돌산은 갖가지 바람과 물에도 떠다니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忍)이라고 하니, 이 일로써 진실하고 훌륭한 야인(野人)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법의 구절 가운데서 설하신 것과 같다.
復次,觀諸世閒盡苦空無有樂,是苦因習愛等諸煩惱,是習智緣盡,是名上法,更無有上。八直道能令行人得至涅槃,更無有上。如是信心不悔不疑,忍是名忍。是中更有忍,種種結使、種種煩惱疑悔,來入心中不能令破,譬如石山種種風水不能漂動,是故名忍,是事得名眞好野人。如佛說『法句』中:
세계의 정견(正見) 위에서
누군가 많은 것을 얻는 자가 있다면
마침내 천만 년에 이르더라도
끝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리.
世界正見上,
誰有得多者?
乃至千萬歲,
終不墮惡道。
이 세간의 정견을 이름하여 인선근(忍善根)이라 하니, 이 사람은 많이 증진하여 한마음으로 지극히 세계행(世界行)을 싫어하고, 4제(諦)의 모습을 분명하게 하여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와 같이 한마음의 가운데를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이라고 한다.
일시에 4행(行) 즉, 무상ㆍ고ㆍ공ㆍ무아에 머물러 첫 번째 진리[諦]인 고법인(苦法忍)15)을 관하니, 고제(苦諦)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왜 욕계 5수음(受陰)의 무상ㆍ고ㆍ공ㆍ무아를 관하는가?
이 가운데서 심인(心忍)으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심(心)과 심수법(心數法)에 상응하니, 이것을 고법인(苦法忍)이라고 한다.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마음에 상응하지 않은 여러 가지 행(行)과 현재ㆍ미래세의 일체 무루법의 초문(初門), 이것을 바로 고법인이라 한다.법은 무루법이며, 인은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是世閒正見,是名爲忍善根。是人多增進,一心極厭世界行,欲了了四諦相,作證趣涅槃,如是一心中,是名世閒第一法。一時住四行:無常、苦、空、無我,觀一諦,苦法忍共緣故。何以故?觀欲界五受陰,無常、苦、空、無我,是中心忍入慧,亦是相應心心數法,是名苦法忍。身業、口業及心不相應諸行,現在未來世一切無漏法初門,是名苦法忍法無漏法忍信受也。
차례대로 고법지(苦法智)16)를 내니, 고법인은 결사(結使)를 끊고, 고법지는 깨달음을 이룬다.
비유컨대 한 사람은 베고 한 사람은 묶는 것과 같으며, 또한 예리한 칼로 대나무를 쳐서 베어내되 바람을 맞으면 곧 쓰러지는 것과 같다.
인(忍)과 지(智)로 공부하기 때문에 이 일은 욕계의 번뇌[欲界繫]17)를 구별할 수 있고, 괴로움을 보고 열 가지 결사(結使)를 끊으니, 그때에는 등지(等智)와 달리 무루지(無漏智)를 얻어서 아직 얻지 못한 무루혜(無漏慧)를 얻는다.이때 하나의 지(智)를 성취한다.등지는 미래에 성취한다.次
第生苦法智。苦法忍斷結使,苦法智作證。譬如一人刈,一人束,亦如利刀斫竹得風卽偃,忍智功夫故,是事得辦。欲界繫見苦,斷十結得得,爾時異等智得,無漏智未得,無漏慧得。是時成就一智等智未來成就。통합뷰어두 번째 마음속에서 법지(法智)와 고지(苦智), 등지(等智)를 성취한다.
세 번째 마음과 네 번째 마음을 지나서 네 가지 지혜18) 즉 고지(苦智)ㆍ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등지(等智)를 성취한다.
습(習)ㆍ진(盡)ㆍ도(道)의 법지(法智) 가운데서 하나하나 지혜가 늘어나서, 욕망을 여읜 사람은 지타심지(知他心智)19)를 성취하여 늘어난다.
고비인(苦比忍)과 고비지(苦比智)는 18가지 번뇌를 끊는다.
이 네 가지 마음으로 고제(苦諦)를 증득할 수 있다.
第二心中成就法智、苦智等智,過第三心、第四心成就四智:苦智、法智、比智、等智。習、盡、道法智中,一一智增,離欲人知他心智成就增;苦比忍、苦比智斷十八結,是四心苦諦能得。
습법인(習法忍)과 습법지(習法智)로 욕계의 번뇌인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습비인(習比忍)과 습비지(習比智)로 색계와 색계의 번뇌인 열세 가지 번뇌를 끊는다.
진법인(盡法忍)과 진법지(盡法智)는 욕계의 번뇌인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진비인(盡比忍)과 진비지(盡比智)는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인 열두 가지 번뇌를 끊는다.
도법인(道法忍)과 도법지(道法智)는 욕계의 번뇌인 여덟 가지 번뇌를 끊으며, 도비인(道比忍)과 도비지(道比智)는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인 열네 가지 번뇌를 끊는다.
도비지를 수타반나(須陀般那)하자상자(下子上子)20)라고 한다.
진실로 모든 법의 모습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열여섯 가지의 마음의 능함[能]이다.
열다섯 가지 마음속의 날카로운 근기를 수법행(隨法行)이라고 하며, 아둔한 근기를 수신행(隨信行)이라고 하니, 이러한 두 사람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였으므로 초과향(初果向)21)이라고 한다
.習法忍、習法智斷欲界繫七結;習比忍、習比智斷色、無色界繫十三結。盡法忍、盡法智斷欲界繫七結;盡比忍、盡比智斷色、無色界繫十二結。道法忍、道法智斷欲界繫八結;道比忍、道比智斷色、無色界繫十四結。道比智是名須陁般那下子上子,實知諸法相。是十六心能,十五心中利根名隨法行,鈍根名隨信行。是二人未離欲,名初果向。
먼저 아직 번뇌[結]를 끊지 못하고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 것을 수타반나라고 한다.
만일 먼저 6품(品)의 번뇌를 끊고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었다면 식기타가미(息忌陀迦迷)진(秦)나라 말로는 일래(一來)이다.22)라고 한다.
만일 먼저 9품의 번뇌를 끊고서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다면 아나가미(阿那迦迷)진나라 말로는 불래(不來)이다.23)라고 한다
.先未斷結,得十六心,名須陁般那。若先斷六品結,得十六心,名息忌陁伽迷秦言一來。若先斷九品結,得十六心,名阿那迦迷秦言不來。통합뷰어먼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고 88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수타반나라고 하며, 또한 무루과(無漏果)의 선근을 얻었으므로 수타반나(須陀般那)라고 한다.
예리한 근기를 견득(見得)24)이라 하고, 둔한 근기를 신애(信愛)25)라고 한다.
사유의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나머지 일곱 번 세상에 태어나며,26) 만일 사유의 번뇌 세 가지를 끊으면 초과(初果)와 2과(果)의 중간에 있는 성자[家家]로 세 번 세상에 태어난다.27
)先未離欲,斷八十八結,故名須陁般那;復次無漏果善根得得,故名須陁般那。利根名見得,鈍根名信愛,思惟結未斷,餘殘七世生,若思惟結三種斷,名家家三世生。
성스러운 길 8분(分)과 37품(品)을 흐름[流]이라고 하니,열반을 향해 흐른다는 뜻이며, 이것을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수타반나라고 한다. 이것이 부처님 첫 공덕의 씨앗이 되며, 악도를 벗어날 수 있다.
세 가지 번뇌를 끊어 세 가지 독을 엷게 하는 것을 식기타가미(息忌陀迦迷)라고 한다.
또한 욕계의 번뇌는 아홉 가지[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ㆍ중상ㆍ중중ㆍ중하ㆍ하상ㆍ하중ㆍ하하]로 견제(見諦)로 끊고 사유(思惟)로 끊는다.
聖道八分、三十七品名流,流向涅槃,隨是流行,故名須陁般那,是爲佛初功德子。惡道得脫,三結斷,三毒薄,名息忌陁伽迷。復次欲界結九種上上、上中、上下、中上、中中、中下、下上、下中、下下,見諦斷、思惟斷。
만일 범부인 사람이 먼저 유루도(有漏道)로써 욕계의 번뇌인 여섯 가지 번뇌를 끊고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으면 식기타가미라고 한다.
만일 여덟 가지를 끊어 견제도에 들어간다면 열여섯 가지 마음 가운데 한 가지인 식기타가미 과(果)에서 아나가미(呵那伽迷)로 향한다28).
若凡夫人,先以有漏道,斷欲界繫六種結,入見諦道十六心中,得名息忌陁伽迷。若八種斷,入見諦道第十六心中,一種名息忌陁伽迷果向呵那伽迷。
만일 부처님의 제자가 수타반나를 얻으면 단순하게 세 가지 번뇌를 끊고 식기타가미를 얻고자 한다. 이것은 사유하여 끊는 것으로, 욕계의 번뇌인 아홉 가지 번뇌를 여섯 가지로 끊으면 이것을 식기타가미의 여덟 가지 끊음이라고 하며, 한 가지 식기타가미의 과(果)가 아나가미로 향한다고 한다.
若佛弟子得須陁般那,單斷三結,欲得息忌陁伽迷,是思惟斷欲界繫九種結、六種斷,是名息忌陁伽迷八種斷;是名一種息忌陁伽迷果向阿那伽迷。
만일 범부인 사람이 먼저 욕계의 번뇌인 아홉 가지 번뇌를 끊고 견제도에 들어간다면 열여섯 가지 마음 가운데 아나가미라고 한다.
만일 식기타가미를 얻고 나아가 세 가지 사유의 번뇌를 끊는다면 아홉 번째의 해탈도29)인 아나가미라고 한다.
若凡夫人先斷欲界繫九種結,入見諦道第十六心中,名阿那伽迷;若得息忌陁伽迷進,斷三種思惟結,第九解脫道,名阿那伽迷。
아나가미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지금 세상에서 반드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중음(中陰)에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태어난 뒤에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간절하게 찾아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간절하게 찾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최상의 행(行)으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아가니타에 이르러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무색정(無色定)에 도달하여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몸으로 깨닫는 아나가미, 아라한을 향해 가는 아나가미이다
.阿那伽迷有九種:今世必入涅槃阿那伽迷,中陰入涅槃阿那伽迷,生已入涅槃阿那伽迷,懃求入涅槃阿那伽迷,不懃求入涅槃阿那伽迷,上行入涅槃阿那伽迷,至阿迦尼咤入涅槃阿那伽迷,到無色定入涅槃阿那伽迷,身證阿那伽迷行向阿羅漢阿那伽迷。
색계와 무색계의 아홉 가지 번뇌가 있으니, 아홉 번째의 무애도금강삼매(無礙道金剛三昧)로써 일체의 번뇌를 타파한다.
아홉 번째 해탈도(解脫道)에서 지혜를 다하여 일체의 선근을 닦으면 이를 아라한과라고 하는데, 이 아라한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퇴법(退法)ㆍ불퇴법(不退法)ㆍ사법(死法)ㆍ수법(守法)ㆍ주법(住法)ㆍ필지법(必知法)ㆍ불괴법(不壞法)ㆍ혜탈(慧脫)ㆍ공탈(共脫)이다.
유지(濡智)30)로써 부드럽게 나아가 다섯 가지 법을 행하되 물러나면 이것을 퇴법(退法)이라고 하며, 영리한 지혜[利智]로 영리하게 나아가 다섯 가지 법을 행하되 물러남이 없으면, 이것을 불퇴법(不退法)이라고 한다.
色、無色界九種結,以第九無㝵道金剛三昧破一切結,第九解脫道盡智修一切善根,是名阿羅漢果。是阿羅漢有九種:退法、不退法、死法、守法、住法、必知法、不壞法、慧脫、共脫。濡智濡進行五種法退,是名退法。利智利進行五種法不退,是名不退法。
유지(濡智)로 부드럽게 나아가되 영리하게 사유하는 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몸을 죽이는 것을 사법(死法)이라고 하며, 유지(濡智)로 크게 나아가 스스로 몸을 지키는 것을 수법(守法)이라고 한다.
중지(中智)로 적당하게 나아가 더함도 덜함도 없이 가운데를 차지하여 머무는 것을 주법(住法)이라고 하며, 조금 영리한 지혜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을 필지법(必知法)이라 하며, 영리한 지혜로 크게 나아가 처음으로 무너지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는 것을 불괴법(不壞法)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선정에 들어가지 않고 아직 경지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여러 가지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 선정을 얻고 또한 멸선(滅禪)과 여러 가지 누진(漏盡)을 얻는 것을 공해탈(共解脫)이라고 한다.
濡智濡進利,厭思惟自殺身,是名死法。濡智大進自護身,是名守法。中智中進、不增不減處中而住,是名住法。少利智懃精進,能得不壞心解脫,是名必知法。利智大進,初得不壞心解脫,是名不壞法。不能入諸禪,未到地中諸漏盡,是名慧解脫。得諸禪亦得滅禪諸漏盡,是名共解脫。
어떤 아라한은 일체의 유위법을 언제나 충분히 만족하여 다시 공덕을 추구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열반에 들어가고, 어떤 아라한은 4선(禪)ㆍ4무색정(無色定)ㆍ4등심(等心)ㆍ8해탈(解脫)ㆍ8승처(勝處)ㆍ10일체입(一切入)ㆍ9차제(次第)ㆍ6신통(神通)ㆍ원지(願智)ㆍ아란야나삼매진(秦)나라 말로는 무쟁(無諍)이라고 한다. 아란야(阿蘭若)란 무사(無事), 혹은 공적(空寂)이라고도 한다. 옛적에 말하기를 “수보리가 늘 공적행(空寂行)을 행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로부터 무쟁행을 실천할 뿐이니, 무쟁이란 장차 중생들을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에 대하여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할 뿐이다.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사리불과 목련이 밤에 도공(陶公)의 집에 들어가 자는데 구가리(拘迦離)가 와서 다툼을 일으킨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ㆍ초월삼매(超越三昧)ㆍ훈선(熏禪)ㆍ3해탈문(解脫門)ㆍ방사(放捨)방사라는 것은 3해탈문의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이다. 공ㆍ무원ㆍ무상은 12문을 생각하되 도리어 집착하는 것이다.를 구하여 다시 이지(利智)를 지어 부지런히 정진한다.
이와 같이 여러 선정의 공덕에 들어가면, 이것을 불퇴법(不退法)과 불괴법(不壞法)을 얻었다고 한다.
有阿羅漢,一切有爲法常厭滿足,更不求功德,待時入涅槃。有阿羅漢,求四禪、四無色定、四等心、八解脫、八勝處、十一切、入九次第、六神通,願智阿蘭若那三昧秦言無諍。阿蘭若言無事,或言空寂。舊言須菩提常行空寂,行非也,自是無諍行耳!無諍者將護衆生,不令起諍,於我耳起諍,如舍利弗、目連夜入陶屋中宿,致拘迦離起諍者是也,超越三昧熏禪三解脫門及放捨放捨者,三脫門,空、無願、無相、空無願無相,卽十二門念,反著者也,更作利智懃精進入,如是諸禪功德,是名得不退法、不壞法。
만일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지 않아서 불법(佛法)이 없으며제자가 없는 때라면, 이때는 욕망을 여읜 사람인 벽지불(辟支佛)이 출현한다.
벽지불은 세 가지가 있으니, 상ㆍ중ㆍ하이다.
하(下)란 본래 수타반나를 얻었으나 식기타가미와 같다.
이 수타반나는 일곱 번째 세상에서 사람 가운데 태어났지만 이때는 불법이 없어서 제자가 될 수 없었으나 다시 여덟 번째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이때 벽지불이 된다.
만일 식기타가미가 두 번째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때는 불법이 없어서 제자가 될 수 없으나 다시 세 번째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이때 벽지불이 된다.
若佛不出世,無佛法無弟子時,是時離欲人辟支佛出。辟支佛有三種:上、中、下。下者本得須陁般那、若息忌陁伽迷。是須陁般那於第七世生人中,是時無佛法,不得作弟子;復不應八世生,是時作辟支佛。若息忌陁伽迷二世生,是時無佛法,不得作弟子;復不應三世生,是時作辟支佛。
어떤 사람이 벽지불이 되기를 원하여 벽지불의 선근을 심을 때는 불법이 없어도 선근이 익으니, 이때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나와 도를 얻으면 벽지불이라고 하며, 이것을 중벽지불(中辟支佛)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길을 찾아서 지력(智力)으로 나아감에 힘이 모자라 인연으로 물러나니예컨대 사리불과 같은 경우이다., 이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지도 않았고 불법도 없으며 제자도 없으나 선근의 행이 익어서 벽지불이 된다. 특징이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니,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나와 도를 얻었기에 이것을 상벽지불(上辟支佛)이라고 한다.
有人願作辟支佛,種辟支佛善根,時無佛法,善根熟,爾時厭世出家得道,名辟支佛,是名中辟支佛。有人求佛道,智力進力少,以因緣退如舍利弗是也,是時佛不出世,無佛法亦無弟子,而善根行熟,作辟支佛,有相好若少若多,厭世出家得道,是名上辟支佛。
모든 법 가운데 지혜가 얕아 들어가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하며, 중간 정도로 들어가는 것을 벽지불이라고 하며, 깊게 들어가는 것을 부처님이라고 하니, 마치 멀리서 나무를 보면 가지를 분별할 수 없지만 조금 가까워지면 가지를 분별할 수는 있으나 꽃과 잎사귀는 분별할 수 없으며, 나무 아래에 도달해서는 모두를 분별할 수 있어서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와 꽃과 열매를 아는 것과 같다.
성문(聲聞)은 일체의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며, 일체의 모든 법은 주인이 없어서, 오직 열반만이 가장 안온한 것임을 안다.
성문이 능히 이와 같이 관할 수 있다 해도, 분별하여 깊숙하게 들어가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벽지불은 약간은 분별할 수 있더라도 깊숙하게 들어가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부처님께선 모든 법을 알고 분별하여 통하고 깊이 들어가 깊게 아신다.
於諸法中智慧淺入,名阿羅漢;中入名辟支佛;深入名佛。如遙見樹,不能分別枝;小近能分別枝,不能分別華、葉;到樹下盡能分別知樹枝、葉、華、實。聲聞能知一切諸行無常,一切諸法無主,唯涅槃善安隱。聲聞能如是觀,不能分別深入深知;辟支佛少能分別,亦不能深入深知;佛知諸法分別究暢,深入深知也。
바라내(波羅奈)의 국왕이 뜨거운 여름에 높은 누각 위에 살며7보로 꾸민 평상에 앉아 청의(靑衣)로 하여금 우두전단향(牛頭栴檀香)을 갈아 몸에 바르게 하였는데, 청의가 팔뚝에 많은 팔찌를 차고 있어서 왕의 몸을 문지를 때마다 팔찌 소리가 귀에 가득하였다. 왕이 그것을 매우 근심하여 차례대로 벗게 하였더니 팔찌가 적어지자 소리도 희미해졌고, 오직 팔찌가 하나일 때 고요하여 소리가 없었다. 왕이 그때 깨닫고 말하기를, “국가의 신하ㆍ백성ㆍ궁인(宮人)ㆍ채녀(婇女)가 일이 많으면 번뇌가 많은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즉시 욕망을 버리고 외로운 곳에서 사유하여 벽지불을 얻으리라”고 하고는, 수염과 머리를 스스로 깎고 자연의 옷을 입고 누각에서 떠나, 자신의 신족력(神足力)으로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갔으니, 이와 같은 인연은 중품(中品) 벽지불이다.
如波羅奈國王,夏暑熱時處高樓上坐七寶牀,令靑衣磨牛頭栴檀香塗身,靑衣臂多著釧,摩王身時釧聲滿耳,王甚患之!教次第令脫,釧少聲微,唯獨一釧寂然無聲。王時悟曰:“國家、臣民、宮人、婇女,多事多惱亦復如是!”卽時離欲獨處思惟,得辟支佛。鬚髮自落、著自然衣,從樓閣去,以己神足力出家入山。如是因緣,中品辟支佛也。
만일 수행자가 부처의 길을 찾아 선정에 들어가면, 먼저 마땅히 마음을 묶어 시방 삼세의 여러 부처님의 생신(生身)을 오로지 생각해야만 하지, 땅ㆍ물ㆍ불ㆍ바람ㆍ산ㆍ나무ㆍ초목을 생각해선 안 되니, 하늘과 땅 사이에 형체가 있는 무리나 그 밖에 나머지 존재를 다 생각하지 말고, 다만 여러 부처님의 생신이 허공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컨대 큰 바다의 맑은 물 중앙에 금산왕수미(金山王須彌)와 같고,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불을 태우는 것과 같으며, 커다란 사당 가운데의 7보 깃발과 같이, 부처님의 몸도 이와 같아서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지니며, 항상 무량하고 청정한 광명이 허공의 푸른 색깔 속에서 나온다.
항상 부처님의 몸과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으면 수행자는 곧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의 눈앞에 있다’는 일체실견삼매(一切悉見三昧)를 얻는다.
若行者求佛道入禪,先當繫心專念十方三世諸佛生身,莫念地水火風、山樹草木、天地之中有形之類,及諸餘法一切莫念。但念諸佛生身處在虛空,譬如大海淸水中央金山王須彌;如夜闇中然大火;如大施祠中七寶幢。佛身如是,有三十二相、八十種好,常出無量淸淨光明,於虛空相靑色中,常念佛身相如是,行者便得十方三世諸佛悉在心目前一切悉見三昧。
만일 마음이 한가하여 대상에 머물면 다시 거두어서 머물게 하고 생각을 부처님의 몸[佛身]에 두니, 이때 문득 동쪽 3백천만억 가지의 무량한 일체의 부처님을 보며, 이와 같이 남쪽ㆍ서쪽ㆍ북쪽 4유(維)와 위아래로 생각하는 바의 방향에 따라 일체의 부처님을 본다.
마치 사람이 밤에 별자리를 보되 백천 가지의 무량한 별을 모두 보는 것과 같다.보살은 이 삼매를 얻어 무량 겁의 두터운 죄를 제거하고 엷어지게 하며, 엷어진 것은 없어지게 한다.
이 삼매를 얻고 나서 마땅히 부처님의 갖가지 무량한 공덕과 일체의 지혜와 일체의 이해(理解)와 일체의 견해와 일체의 덕을 생각해야만 대자대비의 자재함을 얻는다.
처음 무명의 알에서 나와서는 4무외(無畏)ㆍ5안(眼)ㆍ10력(力)ㆍ18불공법(不共法)으로 능히 무량한 괴로움을 제거하여 늙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구제되어 늘 즐거운[常樂] 열반과 함께한다.
若心餘處緣,還攝令住念在佛身,是時便見東方三百千萬千萬億種無量諸佛。如是南方、西方、北方,四維、上下,隨所念方,見一切佛。如人夜觀星宿,百千無量種星宿悉見。菩薩得是三昧,除無量劫厚罪令薄、薄者令滅。得是三昧已,當念佛種種無量功德,一切智、一切解、一切見、一切德,得大慈大悲自在,自初出無明㲉,四無畏、五眼、十力、十八不共法,能除無量苦,救老死畏,與常樂涅槃。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갖가지 무량한 공덕을 지니신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나서 스스로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언제 부처님의 몸과 부처님의 공덕을 얻어서 높고 높음이 이와 같을 것인가?”라고 하고, 다시 큰 서원을 세우기를, ‘과거 일체의 복과 현재 일체의 복을 모두 지니고 부처님의 길을 추구하되 나머지 과보를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佛有如是等種種無量功德,作是念已自發願言:“我何時當得佛身、佛功德,巍巍如是?”復作大誓:“過去一切福、現在一切福,盡持求佛道,不用餘報。”
다시 생각하기를, ‘일체의 중생들은 매우 가엾고 불쌍하다. 여러 부처님의 몸과 공덕은 높고 높아서 이와 같은데, 중생들은 어찌하여 다시 나머지 업을 구하고 부처님을 찾지 않는가?’라고 하니, 비유컨대 고귀한 집의 눈먼 아들이 크고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배고프고 고단하고 괴로워하며 똥과 진흙을 먹으니, 아버지가 그것을 매우 가엾게 여기고 방편을 찾아서 깊은 구덩이에서 그를 건져내고 훌륭한 음식을 먹이는 것과 같다.復作是念:“
一切衆生甚可憐愍,諸佛身功德巍巍如是,衆生云何更求餘業而不求佛?”譬如貴家盲子墮大深坑,飢窮困苦食糞食泥。父甚愍之,爲求方便,拯之於深坑,食之以上饌。
수행자가 생각하여 말하기를, “부처님의 두 가지 몸과 공덕의 단이슬[甘露]은 이와 같지만 여러 중생들은 생사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먹는구나.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내 마땅히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고 생사의 언덕을 건너게 하며, 부처님의 갖가지 공덕과 법의 맛[法味]으로 모두 배부르게 하리라”라고 한다.
일체의 불법(佛法)은 원하면 모두 얻을 수 있으니, 듣고 외워 지니며 질문하고 관하며 행하여 과(果)를 얻는 것으로 사다리를 삼고, 크고 요긴한 서원을 세워 세 가지 서원의 갑옷을 입으며, 바깥으로는 마군의 무리를 격파하고 안으로는 번뇌의 도적을 깨뜨려서, 곧바로 윤회하지 않는 경지[不迴]에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서원을 무량한 여러 가지 서원과 비교하여 서원을 모두 머무르게 하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서원하면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염불삼매(念佛三昧)이다
.行者念言:“佛二種身功德甘露如是,而諸衆生墮生死深坑,食諸不淨。以大悲心,我當拯濟一切衆生,令得佛道度生死岸,以佛種種功德法味悉令飽滿,一切佛法願悉得之。聞誦持問、觀行得果,爲作階梯,立大要誓被三願鎧,外破魔衆內擊結賊,直入不迴。如是三願比無量諸願,願皆住之,爲度衆生得佛道故。”如是念、如是願,是爲菩薩念佛三昧。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3독 가운데서 만일 음욕이 치우치게 많으면 먼저 스스로 몸을 관한다.
뼈와 살 피부ㆍ근맥(筋脈)ㆍ흐르는 피ㆍ간ㆍ폐ㆍ장ㆍ위ㆍ오줌ㆍ똥ㆍ눈물ㆍ침 등 서른여섯 가지 물건과 9상(想)31)의 더러움에 마음을 기울여 안으로 관하고 생각이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마치 사람이 촛불을 들고 잡곡 창고에 들어가서 갖가지로 분별하되 콩ㆍ보리ㆍ조 등을 모르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行菩薩道者,於三毒中若婬欲偏多,先自觀身:骨肉皮膚、筋脈流血,肝肺腸胃、屎尿涕唾,三十六物、九想不淨,專心內觀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如人執燭入雜穀倉,種種分別豆、麥、黍、粟無不識知。
또한 몸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관하니, 단단한 것은 땅의 성분이고, 축축한 것은 물의 성분이며, 뜨거운 것은 불의 성분이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분이며, 구멍은 허공의 성분이고, 아는 것은 식(識)의 성분이다.
또한 도살한 소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서 몸과 머리, 사지가 각각 다른 것과 같다.
몸에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어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며, 가죽주머니에는 똥이 담겨 있으니, 항상 이와 같이 관하여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復次觀身六分:堅爲地分、濕爲水分、熱爲火分、動爲風分、孔爲空分、知爲識分。亦如屠牛,分爲六分,身首四支,各自異處。身有九孔,常流不淨,革囊盛屎,常作是觀,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
만일 한마음을 얻어서 마음에 싫어함이 생겨 이 몸 여의기를 구하고, 재빨리 사라져 일찍 열반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때는 마땅히 대자대비심을 일으켜서 커다란 공덕으로 중생들을 구제해야만 하니, 앞의 세 가지 서원을 일으키길, ‘모든 중생들이 부정(不淨)함을 알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잘못과 허물을 일으키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단이슬의 땅에 올려 놓으리라. 또한 욕계의 중생들이 청정하지 못한 것에 즐겨 집착하는 것이 마치 개가 똥을 먹는 것과 같으니, 내 마땅히 제도하여 청정한 도에 이르게 하리라’고 한다.
若得一心,意生厭患,求離此身,欲令速滅,早入涅槃。是時當發大慈大悲,以大功德,拔濟衆生,興前三願:“以諸衆生,不知不淨,起諸罪垢,我當拔置於甘露地。復次,欲界衆生樂著不淨如狗食糞,我當度脫至淸淨道。
또한, ‘나는 마땅히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諸法實相]은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으며,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다는 것을 배워서 찾으리라. 나는 왜 이 부정한 것에 집착하는가? 부정함을 관하는 지혜는 인연을 좇아 생기니, 나의 법과 같은 이는 마땅히 참다운 모습을 구해야만 하리라. 어떻게 몸속의 부정함을 싫어하고 열반을 취하는가?마땅히 마치 큰 코끼리가 빠르게 흐르는 물을 건너기 위해 시내의 밑바닥 끝까지 다하듯이 참다운 존재의 모습을 얻어서 열반에 들어가야 한다. 어찌 원숭이나 토끼처럼 빨리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서둘러 스스로 몸을 제도할 것인가? 내 이제 마땅히 배우되 보살법과 같이 하리라. 부정관(不淨觀)을 실행하여 음욕을 제거하고, 널리 중생들을 교화하여 욕망과 근심을 여의게 하되, 부정관에 매몰되지는 않으리라.
復次,我當學求諸法實相,不有常不無常、非淨非不淨,我當云何著此不淨?觀不淨智從因緣生,如我法者當求實相,云何厭患身中不淨而取涅槃?當如大象度駛流水窮盡源底,得實法相滅入涅槃,豈可如獼猴諸兔畏怖駛流趣自度身?我今當學如菩薩法,行不淨觀除卻婬欲,廣化衆生令離欲患,不爲不淨觀所厭沒。”
또한 이미 깨끗하지 않음을 관하였으면 곧 생사를 싫어하여, 마땅히 정문(淨門)을 관하되 마음을 세 곳 즉 코끝ㆍ미간ㆍ이마 위에 묶어놓아야 하니, 마땅히 이 속에서 한 마디의 가죽을 열어 피와 살을 청정하게 제거하고, 마음을 백골에 묶어서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세 가지 연(緣)에 집착해서 항상 마음과 더불어 싸우나니,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씨름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만일 마음을 이기자면 곧 그것을 제압하여 머물게 하는 것 만함이 없으니, 이것을 한마음이라고 한다.
復次,旣觀不淨則厭生死,當觀淨門繫心三處:鼻端、眉閒、額上。當於是中,開一寸皮,淨除血肉,繫心白骨,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著三緣中,恒與心鬪,如二人相撲,行者若勝,心則不如,制之令住,是名一心。
만일 싫어하는 것으로 크게 대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면, 이 빈 뼈다귀 때문에 열반을 멀리 여의고 3악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여러 가지 공덕을 지어 중생들을 교화해서 신상(身相)의 공함을 이해하게 하리라. 뼈는 가죽으로 덮여 있으나 사실은 부정(不淨)한 것을 모은 것이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이 모든 법의 모습을 분별해야 하리라’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청정하다는 생각이 있으면 마음에 애착을 일으키고, 부정하다는 생각이 많으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존재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참다운 존재를 낳는다.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 속에는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또한 닫힘도 없고 나옴도 없어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관하여 무너뜨릴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이것을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라고 한다.나한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若以厭患,起大悲心,愍念衆生,爲此空骨,遠離涅槃,入三惡道,我當懃力,作諸功德,教化衆生,令解身相空,骨以皮覆,實聚不淨,爲衆生故,徐當分別此諸法相。有少淨想,心生愛著;不淨想多,心生厭患;有出法相,故生實法。諸法實相中,無淨無不淨,亦無閉亦無出,觀諸法等,不可壞不可動,是名諸法實相出過羅漢法也。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만일 성냄이 치우치게 많으면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행하고, 동쪽의 중생을 생각해야 한다. 인자한 마음으로 청정하여 원망함도 없고 성냄도 없으며 넓고 커서 헤아릴 수 없으면, 모든 중생들이 눈앞에 있음을 보리니, 남쪽ㆍ서쪽ㆍ북쪽의 4유(維)와 위아래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통제하고 인자함을 행하며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다른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하니, 마음의 눈으로 일체의 중생들을 관하면 모두가 분명하게 눈앞에 있음을 본다.
行菩薩道者,若瞋恚偏多,當行慈心,念東方衆生,慈心淸淨,無怨無恚,廣大無量,見諸衆生,悉在目前。南西北方、四維上下,亦復如是。制心行慈,不令外念;外念異緣,攝之令還。持心目觀,一切衆生,悉見了了,皆在目前。
만일 한마음을 얻으면 마땅히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열반의 진실하고 청정한 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여 참다운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고 해야 한다.
자삼매(慈三昧)를 행하는 마음이 이와 같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도이다.
자삼매에 머물러서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관하면 맑고 깨끗해서 무너지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니, 발원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의 이익[法利]을 얻게 한다.
이러한 삼매로 동쪽의 일체 중생들을 인자하게 생각하여 부처님의 즐거움을 얻게 하며, 시방도 또한 그러해서 마음이 구르고 어지럽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자삼매문(慈三昧門)이라고 한다.
若得一心,當發願言:“我以涅槃,實淸淨法,度脫衆生,使得實樂。”行慈三昧,心如此者,是菩薩道。住慈三昧,以觀諸法,實相淸淨,不壞不動,願令衆生,得此法利。以此三昧,慈念東方一切衆生,使得佛樂,十方亦爾!心不轉亂,是謂菩薩慈三昧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