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빈무덤)
2024. 3. 31(부활주일 예배) 누가복음 24:1-6
1920년대는 우리나라가 자유연애를 꽃을 피운 시대이다. 일본식 옷에 반감을 품은 지식인들은 서양문물을 받아드려서 양복과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유교문화에서 벗어나 사랑과 연애를 적극적으로 받아드렸다. 그래서 1930년대 한 일간지의 기사에 이런 묘사가 있다.
아이스컵피(아이스커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청해 두 남녀가 대가리를 부비 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빠라 먹는다. 그래도 모자라서 혀끗을 빳빳히 펴서 아다시! 아이스고히가, 다이스키, 다이스키요!(전 아이스커피가 좋아요. 좋아!) 와시모네(나도 그래)! <조선일보, 1930년 7월 16일자>
1930년대 두 남녀가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켜서 빨대 2개를 꽂아서 함께 쪽쪽 빨아서 먹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공연하게 연애를 할 수 있었던 그 시대에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춘남녀는 편지를 썼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며 늘 우체통을 몇 번이나 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우편제도가 시작된 1895년에는 한 해 3만통 정도였는데, 1920년대 자유연애의 바람이 불면서 1925년에는 7천만통으로 늘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편제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연애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문물을 받아드려 청춘남녀가 연애를 하는 동안에 자살하는 자살률도 엄청나게 많이 늘었다. 그래서 1920년-1940년 사이에 동아일보 기사를 찾아보면 자살로 분류되는 기사가 8천건이 넘는다고 한다. 청춘남녀가 함께 아이스커피 사서 먹고, 또 편지를 쓰고, 사랑을 나누는 연애를 했는데, 그 연애에 실패하여 엄청나게 많은 청춘이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젊은 청춘은 왜 자살을 했겠는가? 다니엘 6장은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는 사건이다. 메데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다리오(카악사레스 2세)는 30일 동안 왕 외에는 아무에게도 절하지 못하는 금령을 발표한다. 그런데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고 무릎을 꿇고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였다. 어떤 젊은 청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연을 당한 것으로 목숨을 끊는데, 다니엘은 나라를 잃는 슬픔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데, 이번에는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다니엘은 믿음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저는 그 해답을 다니엘 9장에서 찾고 싶다. 다니엘 9장은 다리오가 왕으로 세움받은 첫 해(단 9:1)에 있었던 사건이다. 그때 다니엘은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70년이 지나면 유다가 회복될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음을 회개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제 진노를 멈추시고, 주의 진노가 예루살렘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하는 다니엘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다가와서 엄청난 메시지를 전한다. 그 메시지 중에 다니엘 9장 24절을 읽기 바란다.
(단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일흔 이레는 히브리어로 샤부임(Shabuylm) 쉬브임(shibuim) 이다. 이 말은 칠십의 칠이라는 뜻으로 490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기간을 말한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면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는 회복의 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다리오 왕 원년에 있었던 일이다. 다니엘은 다리오 원년에 회복케 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 하나님이 정한 때를 기다리는 소망의 삶을 산 것이다. 이러한 소망의 삶을 산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에게도 죄악으로 고통하는 나의 삶에 영원한 회복이 있음을 소망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에 사과나무를 최초로 식목한 선교사는 윌리암 스왈른이다. 1892년에 미국북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스왈른 선교사는 아내와 함께 장터에서 전도를 하다 김익두를 만난다. 아내 소안론 부인이 전도지를 주었을 때 김익두는 나보고 서양 귀신을 믿으라고 하면서 전도지에 코를 풀어 바닥에 던졌다. 이것을 보고 있던 스왈른 선교사님은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는다고 꾸중하고, 다시 전도지를 준다. 그리고 그날 밤 김익두는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는다는 말이 기억나서 다시 받은 전도를 읽었는데, 거기에는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벧전 1:24-25)는 말씀이 적혀있었다. 김익두는 이 말씀을 읽고 세세토록 이란 단어가 크게 다가왔다. 누가 무슨 말을 했기에 세세토록 영원하단 말인가? 이에 궁금증을 가진 김익두는 부흥회에 참여하여 스왈른 선교사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한다.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던 스왈른 선교사는 1905년 우리나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조선통감을 두어서 모든 한국의 외교를 관리하였다.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장지연은 황성신문 사설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을 실었고, 또 애국지사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이 잇따라 자결하였다. 이러한 때에 스왈른 선교사는 찬송가 493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번역하여 전파한다. 스왈른 선교사가 을사늑약으로 이 세상의 땅을 잃어버린 한국국민들에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소망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외교권이 박탈되고, 국민의 주권이 상실되는 상황에서 절망하는 한국민들에게 스왈른 선교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소망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왜 스왈른 선교사는 한국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려 하였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안식후 첫날 여인들은 새벽에 향품을 들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간다. 그때 여인들은 돌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지진이 일어나고 천사들이 돌문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임재하여 천사를 통하여 무덤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인들은 빈무덤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그런데 여인들의 놀라움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여인들은 빈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았을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를 보았는데, 그 천사는 여인들에게 2가지 소극적 책망을 한다. 두 천사가 어떤 책망을 하는지 누가복음 24장 5절,6절을 읽기 바란다.
(눅 24:5-6)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두 천사가 어찌하여 라고 하면서 소극적 책망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소극적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은 갈릴리에 계실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22, 9:44, 18:32-33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리신 후에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였고, 또 변화산 아래 벙어리귀신 들린 아들을 고치신 후에도 말씀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인들은 예수님의 빈무덤을 보고도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극적 책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러면 빈무덤의 의미는 무엇인가? 빈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증거이고, 또 한 빈무덤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빈무덤을 보면서 또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고 기록한다. 이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도 부활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빈무덤을 통하여 우리는 나의 무덤도 빈무덤이 되는 부활의 날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옥에 갇히기도 하고, 채찍에 맞기도 하고, 또 자신이 가진 소유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앙을 지킬 뿐만 아니라, 옥에 갇힌 형제를 돕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그들이 그러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히 10:34, 3월 28일(목) 한구절 묵상>
그런데 그것이 전부이겠는가? 우리의 인생은 안개와 같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모른다. 아니 우리 인생은 살아가는 동안에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개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의 부활하심은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는 지를 깨닫게 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게 하여 준다.
지금의 삶이 고난이라 한숨 쉬는 분이 있는가? 아니 인생이 너무 허무하여 왜 사는지 모르는 분이 있는가? 빈무덤의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여 말씀이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빈무덤의 예수를 통하여 나에게도 부활이 있음을 믿고 소망함으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