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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주권적 관점에서 본 『삼국유사』 삼위태백의 역사공간 고증
― 돈황 삼위산 전승과의 관계 및 동일성 가능성에 대한 문헌사적 검토 ―
A Historical-Sovereignty Study of Samwi-Taebaek in the Samguk Yusa
- A Textual and Historical-Geographical Examination of Its Possible Relationship with the Sanwei Mountain Tradition of Dunhuang
출처: AI이용 필자 작성
국문초록
본 연구는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경)에 나타나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의 역사공간을 문헌사적으로 검토하고, 특히 삼위(三危)가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과 연결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의 사료적 근거를 갖는지를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의 핵심은 삼위태백 전체를 돈황 삼위산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태백이라는 표현을 삼위와 태백이라는 두 공간적 요소로 구분하여 각각의 역사적 기능과 지명전승을 검토하는 데 있다.
『삼국유사』는 환웅서사에서 “父知子意(부지자의) 下視三危太伯(하시삼위태백) 可以弘益人間(가이홍익인간)”이라고 기록하고, 이어 “雄率徒三千(웅솔도삼천) 降於太伯山頂(웅솔도삼천 강어태백산정)”이라고 기록한다. 이 문맥에 따르면 삼위태백은 환웅이 인간세계로 진출할 공간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공간표지이며, 태백산은 실제 강림공간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삼위와 태백을 하나의 지명으로 기계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복합적인 공간표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돈황 삼위산의 역사적 실재는 비교적 강하게 입증된다.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806)는 돈황현(敦煌縣) 남쪽 30리에 삼위산이 있으며 세 봉우리 때문에 삼위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이어 “尚書竄三苗于三危(상서 찬삼묘우삼위) 即此山也(즉차산야)”라고 하여 이를 『상서(尙書)』의 삼위와 직접 연결한다.
더욱 주목되는 자료는 당대 돈황 문헌이다. 대력(大曆) 11년(776)에 성립한 것으로 연구되는 P.3608의 『대당농서이부군수공덕기(大唐隴西李府君修功德記)』에는 “敦煌之東南(돈황지동남) 有山曰三危(유산왈삼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돈황 삼위산이라는 지명이 806년의 『원화군현도지』보다 앞선 8세기 후반 돈황 지역 문헌에서 이미 확인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돈황 삼위산은 후대의 지명비정에 의해 만들어진 대상이 아니라 적어도 8세기 후반부터 돈황의 역사공간 안에서 확인되는 지명이다. 또한 806년 『원화군현도지』에서 이를 『상서』의 삼위와 연결하였다는 점은 돈황 삼위산과 고대 삼위 전승 사이의 역사지리적 연결이 당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이러한 자료를 종합하여 『삼국유사』 삼위태백의 삼위가 돈황 삼위산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삼위 지명전승과 연결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삼위태백=돈황 삼위산”이라는 완전한 지리적 동일성으로 확정하지 않는다. 『삼국유사』의 태백산은 환웅의 강림공간으로 별도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일연(一然)의 주석에서 태백을 묘향산(妙香山)과 연결하는 전승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는 삼위태백 가운데 삼위가 돈황 삼위산의 역사적 지명전승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러한 해석은 현대의 영토주권을 고대에 소급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조선의 역사서사와 동아시아 역사지리 문헌에 나타난 지명전승을 비교하여 역사공간을 재구성하는 역사주권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를 갖는다.
주제어: 삼위태백, 환웅서사, 돈황, 삼위산, 역사공간, 역사주권, 『삼국유사』, 『원화군현도지』, 흑수, 지명전승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historical space represented by Samwi-Taebaek(三危太伯) in the Samguk Yusa(三國遺事), compiled around 1281, with particular attention to the possibility that Samwi(三危) was historically connected with Sanwei Mountain(三危山) in Dunhuang(敦煌), Gansu. Rather than equating Samwi-Taebaek as a whole with Dunhuang Sanwei Mountain, this study separates the two spatial components, Samwi and Taebaek, and examines their respective textual and geographical functions.
The Samguk Yusa records that Hwanung's father looked down upon “下視三危太伯(하시삼위태백)” and judged the place suitable for “可以弘益人間(가이홍익인간).” It subsequently states that Hwanung descended upon the summit of Taebaek Mountain. This textual structure suggests that Samwi-Taebaek functioned as a complex spatial expression rather than necessarily denoting a single geographical location.
The historical existence of Sanwei Mountain in Dunhuang is well attested. The Yuanhe Junxian Tuzhi(元和郡縣圖志), compiled in 806, records Sanwei Mountain thirty li south of Dunhuang County and explains its name by its three peaks. It further states that this was the Sanwei mentioned in the Shangshu(尙書).
Even more significant is the Dunhuang manuscript P.3608, the Da Tang Longxi Li Fujun Xiu Gongde Ji(大唐隴西李府君修功德記), dated to the late eighth century. It states that southeast of Dunhuang there was a mountain called Sanwei. This demonstrates that the Sanwei Mountain toponym was already established in the Dunhuang historical landscape before the compilation of the Yuanhe Junxian Tuzhi.
On the basis of these sources, this study concludes that the Sanwei component of Samwi-Taebaek has a relatively high possibility of being connected with the historical Sanwei Mountain tradition of Dunhuang. However, this does not justify the categorical equation of Samwi-Taebaek with Dunhuang Sanwei Mountain. Taebaek Mountain occupies a distinct function as Hwanung's descent site in the Samguk Yusa.
The study therefore proposes a historically cautious but positive conclusion: Samwi in Samwi-Taebaek may be connected to the Dunhuang Sanwei tradition with a relatively high degree of historical plausibility. This interpretation is approached from a historical-sovereignty perspective, not as a projection of modern territorial sovereignty onto antiquity, but as an attempt to reconstruct historical spatial memory through comparative examination of textual and geographical traditions.
Keywords: Samwi-Taebaek, Hwanung Narrative, Dunhuang, Sanwei Mountain, Historical Space, Historical Sovereignty, Samguk Yusa, Yuanhe Junxian Tuzhi, Heishu, Toponymic Tradition
Ⅰ. 서론
1. 연구 목적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경)의 환웅서사는 고대 조선의 역사적 기원과 인간세계의 형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서사이다. 이 가운데 “下視三危太伯(하시삼위태백)”이라는 표현은 환웅서사의 공간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동안 삼위태백은 주로 환웅의 강림장소인 태백산과 관련하여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원문을 세밀하게 보면 삼위태백과 태백산은 동일한 문맥에서 동일한 기능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삼위태백은 환웅이 인간세계로 진출할 장소를 내려다보는 단계에서 나타나며, 태백산은 실제 강림이 이루어진 공간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삼위태백의 삼위가 어떠한 역사적 지명전승과 관련되는지를 독립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돈황에는 역사적으로 삼위산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였다. 『원화군현도지』(806)는 이를 돈황현 남쪽 30리의 산으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상서』의 삼위와 직접 연결하였다. 더 나아가 8세기 후반 돈황 문헌에서도 돈황 동남쪽에 삼위라는 산이 있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에 본 연구는 다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삼국유사』의 삼위태백에서 삼위와 태백은 어떠한 공간적 기능을 갖는가.
둘째, 고대 및 당대 역사지리 문헌에서 삼위는 어떠한 공간으로 기록되었는가.
셋째, 돈황 삼위산의 지명전승은 『삼국유사』의 삼위와 어떠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넷째, 흑수(黑水)와 삼위의 관계는 돈황설을 지지하거나 제한하는 어떠한 자료적 의미를 갖는가.
다섯째, 이러한 비교를 역사주권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2. 사료와 연구방법
본 연구는 문헌비교와 역사공간 분석을 기본방법으로 한다. 핵심 사료는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경), 『상서(尙書)』, 『수경주(水經注)』, 『수서(隋書)』(636년),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806년)이다.
또한 당대 돈황 자료인 P.3608 『대당농서이부군수공덕기(大唐隴西李府君修功德記)』를 보조사료로 활용한다. 이 자료는 돈황 동남쪽의 삼위산을 직접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돈황 삼위산의 역사적 실재를 검증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후대 자료로는 『사고전서(四庫全書)』(1782년)와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1931년)을 활용한다. 다만 후대 자료는 고대 지명의 최초 성립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니라 역사적 지명전승의 지속 여부를 확인하는 보조자료로 사용한다.
특히 『삼국유사』의 경우 사료의 편찬시기와 현존 판본의 간행시기를 구분한다. 본 연구에서는 일연(一然)의 『삼국유사』를 1281년경 편찬된 사료로 파악하면서, 실제 인용의 주요 현존 판본은 이계복(李繼福)이 중종 7년(1512)에 개간한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정덕본(正德本) 계열임을 명시한다. 규장각 소장본 역시 1512년 이계복 간행 목판본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판본적 구분은 본 연구의 사료비판에서 중요하다. 1281년경은 『삼국유사』의 편찬시기를 가리키고, 1512년은 현존 완질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계통의 개간시기를 가리키므로 두 연대를 동일한 의미로 취급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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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삼국유사』 삼위태백의 문헌구조
1. 삼위태백 원문의 의미
『삼국유사』는 환웅서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父知子意(부지자의) 下視三危太伯(하시삼위태백) 可以弘益人間(가이홍익인간) 乃授天符印三箇(내수천부인삼개) 遣往理之(견왕리지).”¹
이 기록의 구조는 명확하다. 환웅의 의지를 파악한 존재가 삼위태백을 내려다보고, 그곳이 인간을 모두 이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판단한 다음 천부인을 주어 내려보낸다.
여기에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임기추의 연구를 참고하여 “인간을 모두 이롭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임기추의 연구는 홍익인간 사상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면서 “우리 모두의 이익”이라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해당 논문은 KCI 등재 논문으로 확인된다.²
따라서 삼위태백은 환웅서사에서 단순한 산 이름으로 보기 어렵다. 그것은 인간세계와 환웅의 활동공간을 연결하는 역사공간적 표지로 기능한다.
2. 삼위태백과 태백산의 구분
『삼국유사』는 이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雄率徒三千(웅솔도삼천) 降於太伯山頂(강어태백산정) 神壇樹下(신단수하) 謂之神市(위지신시).”³
여기에서 직접적인 강림장소는 태백산(太伯山)이다.
따라서 삼위태백의 삼위와 태백산을 반드시 동일한 지명으로 보아야 할 문헌적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문장구조상 삼위태백은 환웅의 인간세계 진출을 판단하는 공간이고, 태백산은 실제 강림공간이다.
이 구분은 본 연구의 핵심이다. 돈황 삼위산설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태백산이 돈황인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삼위태백의 삼위가 어떤 역사적 지명전승을 갖는가”를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Ⅲ. 고대 삼위와 돈황 삼위산
1. 『상서』의 삼위
삼위(三危)는 『상서』의 「우공(禹貢)」과 「순전(舜典)」 계통에서 확인되는 고대 지명이다.
그러나 『상서』 자체만으로 삼위의 현대적 위치를 돈황으로 확정하는 것은 어렵다. 고대 삼위의 위치에 대해서는 후대 주석가와 역사지리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였다.
따라서 돈황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상서』에 삼위가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후대의 역사지리 문헌이 실제 돈황에 존재하는 삼위산을 『상서』의 삼위와 어떻게 연결하였는가이다.
2. 돈황 삼위산의 당대 기록
이 점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가 P.3608 『대당농서이부군수공덕기』이다.
이 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敦煌之東南(돈황지동남) 有山曰三危(유산왈삼위).”⁴
이는 “돈황의 동남쪽에 삼위라는 산이 있다”는 뜻이다.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원화군현도지』가 806년에 삼위산을 기록하기 이전에 이미 8세기 후반 돈황 지역의 문헌에서 삼위라는 산명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연구자료에 따르면 이 문헌은 대력(大曆) 11년(776년)에 성립한 자료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돈황 삼위산의 지명전승은 적어도 8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 『원화군현도지』의 삼위산
『원화군현도지』(806)는 돈황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三危山(삼위산) 在縣南三十里(재현남삼십리) 山有三峰(산유삼봉) 故曰三危(고왈삼위).”⁵
즉 돈황현 남쪽 30리에 삼위산이 있고 세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삼위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설명한다.
더욱 중요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尚書竄三苗于三危(상서 찬삼묘우삼위) 即此山也(즉차산야).”⁶
이는 이길보(李吉甫)가 돈황 삼위산을 『상서』에서 말한 삼위와 동일한 산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구별해야 한다.
첫째, 돈황에 삼위산이 실재했다는 것은 역사지리적 사실이다.
둘째, 그것을 『상서』의 삼위와 동일시한 것은 당대 역사지리학자의 해석이다.
따라서 후자의 판단까지 『상서』 자체의 직접적인 지리정보로 소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806년 당시 돈황 삼위산과 『상서』 삼위를 연결하는 역사지리적 전승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한 사료이다.
Ⅳ. 돈황 삼위산과 삼위태백의 비교고증
1. 지명 대응
『삼국유사』의 삼위태백과 돈황 삼위산 사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확인되는 대응은 “삼위(三危)”라는 지명이다.
그러나 동일한 두 글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동일한 장소라고 할 수는 없다.
역사학적으로는 지명 일치에 더하여 시간적 선후관계, 공간적 구체성, 문헌전승, 주변 지리정보가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돈황 삼위산은 이러한 조건 가운데 상당 부분을 충족한다.
8세기 후반 돈황 문헌에서 삼위라는 산명이 확인되고, 806년 『원화군현도지』에서는 돈황현 남쪽 30리라는 구체적인 위치가 제시되며, 동시에 『상서』의 삼위와 연결된다.
따라서 돈황 삼위산은 단순한 지명 유사성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지속된 지명전승의 대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흑수와의 관계
삼위와 함께 검토해야 할 요소가 흑수(黑水)이다.
『상서』의 「우공」에는 흑수와 삼위가 같은 지리적 서술체계 안에서 등장한다. 이 때문에 고대 삼위의 위치를 고증할 때 흑수의 위치와 흐름을 함께 검토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흑수의 비정에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며, 후대 문헌에서도 서로 다른 흑수와 삼위가 혼합되어 논의되었다.
실제로 청대의 역사지리 자료에서도 돈황 삼위산설을 지지하는 논증과 반대 논증이 함께 존재한다. 일부 자료는 돈황 삼위산을 『상서』의 삼위로 인정하지만, 다른 자료는 『우공』의 수계와 지리조건을 근거로 이를 부정한다.
따라서 흑수는 돈황설을 단독으로 확정하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본 연구에서는 흑수를 “보조적 지리검증 요소”로 규정한다.
3. 돈황설의 강점
돈황 삼위산설의 가장 큰 장점은 지명이 추상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돈황에는 실제로 삼위산이 존재하였고, 당대 문헌이 그 위치를 기록하였다.
특히 776년경 돈황 문헌과 806년 『원화군현도지』가 서로 다른 자료계통에서 삼위산을 확인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따라서 돈황 삼위산의 역사적 실재 자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확실성을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곧 『삼국유사』의 삼위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Ⅴ. 반론과 재고증
1. 일연의 태백산 주석 문제
돈황설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반론은 『삼국유사』 자체의 태백산 주석이다.
일연은 태백산을 묘향산과 연결하였다.
따라서 삼위태백 전체를 돈황 삼위산과 동일시하면 일연의 주석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반론은 “삼위”와 “태백”을 분리하면 상당 부분 해소된다.
즉 본 연구는 태백산을 돈황으로 비정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태백의 삼위가 돈황 삼위산의 역사적 전승과 연결될 가능성을 검토한다.
2. “삼위태백=돈황”이라는 동일성 명제의 한계
“삼위태백=돈황 삼위산”이라는 명제는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으로는 지나치게 강한 주장이다.
그 이유는 첫째, 『삼국유사』가 삼위와 돈황을 직접 연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원화군현도지』 역시 돈황 삼위산을 『상서』의 삼위와 연결했을 뿐 『삼국유사』와 연결하지 않는다.
셋째, 『삼국유사』의 태백산에는 별도의 주석전승이 존재한다.
넷째, 삼위의 고대 위치에 관해서는 돈황설 외에도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따라서 학술논문에서는 “동일성 확정”보다 “역사적 연관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이 타당하다.
3. 돈황설의 상대적 개연성
그럼에도 돈황설을 단순한 추측으로 취급하기도 어렵다.
돈황 삼위산은 8세기 후반 문헌에서 확인되고, 806년 역사지리 문헌에서 구체적인 위치와 명칭의 유래가 기록되며, 『상서』의 삼위와 직접 연결된다.
이는 다른 단순 지명비정보다 훨씬 강한 자료구조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돈황 삼위산이 『삼국유사』의 삼위일 가능성이 높다”는 표현보다는 다음과 같은 단계적 판단을 제시한다.
『삼국유사』 삼위태백의 삼위는 돈황 삼위산을 포함하는 삼위 지명전승과 연결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이것이 현재의 사료조건에서 가장 방어력 있는 결론이다.
Ⅵ. 역사주권적 관점의 해석
1. 역사주권과 영토주권의 구분
역사주권은 현대 국가의 영토주권과 동일하지 않다.
본 연구에서 역사주권은 특정 역사공간의 기억과 지명전승을 어느 문헌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돈황 삼위산을 삼위태백의 삼위와 연결한다고 해서 현대의 영토주권을 고대에 소급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문헌에서 동일한 지명체계가 어떻게 기록되고 전승되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2. 고대 조선의 역사공간과 삼위태백
환웅서사는 한반도 내부의 특정 장소만을 전제로 구성된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삼위태백이라는 표현 자체가 동아시아 고대 지명체계와 비교될 수 있는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돈황 삼위산은 당대 문헌에서 독립적인 역사공간으로 확인되고, 『상서』의 삼위와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삼위태백을 연구할 때 돈황 삼위산을 비교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오히려 문헌사적 검토범위를 지나치게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
3. 홍익인간과 역사공간
환웅서사에서 삼위태백은 “可以弘益人間(가이홍익인간)”이라는 목적과 연결된다.
본 연구에서는 홍익인간을 “인간을 모두 이롭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이 해석은 홍익인간을 단순한 도덕적 구호가 아니라 인간사회에 대한 실천적 지향으로 파악하는 연구와 연결된다. 임기추의 KCI 등재 연구는 홍익인간 사상의 현대적 실현을 우리 모두의 이익과 연결하여 논의한다.
따라서 삼위태백은 환웅서사에서 단순한 산악지명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질서와 관련된 역사공간으로 기능한다.
Ⅶ. 결론
본 연구는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경)의 환웅서사에 나타나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대상으로 삼위(三危)의 역사공간을 문헌사적으로 검토하였다. 특히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과 삼위태백의 삼위가 역사적 지명전승의 측면에서 연결될 가능성을 고증하였다.
첫째, 『삼국유사』의 원문은 “下視三危太伯(하시삼위태백)”과 “降於太伯山頂(강어태백산정)”을 구별하여 기록한다. 이에 따라 삼위태백과 태백산을 하나의 단일 지명으로 처리하기보다는 삼위와 태백이라는 두 공간적 요소로 분석하는 것이 문헌구조에 부합한다.
둘째, 돈황 삼위산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지명이다. 8세기 후반 돈황 문헌인 P.3608 『대당농서이부군수공덕기』에는 “敦煌之東南(돈황지동남) 有山曰三危(유산왈삼위)”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는 돈황 삼위산이라는 지명이 8세기 후반 이미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셋째, 『원화군현도지』(806)는 돈황현 남쪽 30리에 삼위산이 있다고 기록하고, 세 봉우리에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尚書竄三苗于三危(상서 찬삼묘우삼위) 即此山也(즉차산야)”라고 하여 돈황 삼위산을 『상서』의 삼위와 직접 연결하였다.
넷째, 이러한 자료는 돈황 삼위산이 후대에 임의로 비정된 지명이 아니라 적어도 8세기 후반부터 돈황의 역사공간에서 확인되는 지명임을 보여준다.
다섯째, 그러나 돈황 삼위산의 역사적 실재와 『삼국유사』 삼위태백의 삼위가 동일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현재 확인되는 자료에는 두 지명을 직접 연결하는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삼위태백=돈황 삼위산”이라는 완전한 동일성은 확정할 수 없다.
여섯째, 그럼에도 돈황설은 단순한 명칭 유사성에 기반한 추측보다 높은 문헌적 개연성을 갖는다. 돈황 삼위산은 구체적인 위치가 기록되어 있고, 당대 돈황 문헌에서 확인되며, 『상서』의 삼위와 직접 연결된 역사적 지명전승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흑수(黑水)는 삼위의 고대 위치를 검토하는 중요한 보조자료이지만, 흑수의 비정 자체에 여러 견해가 존재하므로 돈황설의 결정적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오히려 흑수 문제를 둘러싼 이설은 삼위의 위치에 관한 역사적 논쟁이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본 연구의 최종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삼위태백의 삼위(三危)는 감숙성 돈황의 삼위산(三危山)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삼위 지명전승과 연결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그러나 이 결론은 “삼위태백 전체가 돈황 삼위산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삼위는 돈황 삼위산과의 역사적 지명전승 관계를 검토할 수 있는 공간요소이며, 태백은 환웅의 강림공간으로 별도의 기능을 갖는다.
이러한 구분은 본 연구의 학술적 의미를 높인다. 즉 돈황 삼위산설을 무리하게 확정하지 않으면서도, 8세기 후반 돈황 문헌과 806년 『원화군현도지』라는 실증자료를 통해 삼위태백의 삼위와 돈황 삼위산 사이의 역사적 개연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접근은 역사주권적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역사주권은 현대의 영토개념을 고대에 소급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공간에 대한 지명과 기억의 전승을 문헌에 근거하여 복원하고 해석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 연구에서는 세 가지 과제가 남는다. 첫째, 『삼국유사』의 1512년 중종임신본과 현존 초기 판본 사이의 삼위태백 자형과 문자를 대조해야 한다. 둘째, 『원화군현도지』 이전의 삼위 관련 문헌과 돈황 문헌을 더욱 폭넓게 조사해야 한다. 셋째, 삼위와 흑수의 관계를 『상서』의 수계 및 고대 역사지리학의 관점에서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이 세 과제가 추가로 수행된다면 삼위태백의 삼위와 돈황 삼위산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단순한 지명 유사성 논쟁을 넘어 동아시아 고대 역사공간의 전승과 변용을 연구하는 문헌사적 연구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일연(一然),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경), 권1, 「기이(紀異)」, 「고조선(古朝鮮)」조. 본 연구의 인용 텍스트는 현존 중요 판본인 이계복(李繼福) 중간(重刊)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정덕본(正德本) 계열을 기준으로 한다. 규장각 소장본은 1512년(중종 7) 이계복이 간행한 목판본으로 확인된다.
임기추, 「홍익인간 사상의 현대적 실현 및 적용가능성 모색」, 『인문사회과학연구』 30-2, 세명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22, 324-351쪽. DOI: 10.22924/jhss.30.2.202205.014. KCI 등재 논문으로 확인된다.
일연, 앞의 책, 권1, 「기이」, 「고조선」조.
『대당농서이부군수공덕기(大唐隴西李府君修功德記)』(776년경), P.3608. “敦煌之東南(돈황지동남) 有山曰三危(유산왈삼위).” 해당 문헌은 대력 11년(776) 성립 자료로 연구되고 있으며, 돈황 동남쪽 삼위산을 직접 언급한다.
이길보(李吉甫),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806년), 권40, 사주(沙州) 돈황현(敦煌縣)조. “三危山(삼위산) 在縣南三十里(재현남삼십리) 山有三峰(산유삼봉) 故曰三危(고왈삼위).”
이길보, 앞의 책. “尚書竄三苗于三危(상서 찬삼묘우삼위) 即此山也(즉차산야).”
『원화군현도지』와 돈황 지리문헌의 비교자료에는 『원화군현도지』 권40의 “三危山,在縣南三十里”와 P.3608 『농서이씨수공덕기』의 “敦煌之東南,有山曰三危”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삼위의 위치에 관해서는 돈황설 외에도 여러 역사지리설이 존재한다. 후대 역사지리 자료에서도 돈황 삼위산설을 지지하는 견해와 『우공』의 흑수·수계 등을 근거로 이를 비판하는 견해가 병존한다.
『삼국유사』 1512년 판본은 이계복이 중간한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으로, 일반적으로 정덕본(正德本)이라고 부른다. 국가유산 자료는 이를 현전 완질본 가운데 간행시기가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설명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은 장려화(臧勵和) 등 편, 상해(上海)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1931년 간행으로 서지정보가 확인된다. Virtual Shanghai는 출판지 상해, 출판사 상무인서관, 1931년, 1,650쪽으로 기록한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디지털 스캔에는 판본에 따라 총 쪽수가 1,727쪽 또는 1,810쪽으로 표시되는 사례도 있어, 투고본에서 특정 항목의 쪽수를 직접 인용할 때에는 실제 사용 판본을 확정하여야 한다.
참고문헌
1. 1차 사료
『상서(尙書)』.
『산해경(山海經)』.
『수경주(水經注)』.
『수서(隋書)』(636년).
『대당농서이부군수공덕기(大唐隴西李府君修功德記)』(776년경), P.3608.
일연(一然),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경), 이계복(李繼福) 중간(重刊), 중종 7년(1512),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정덕본(正德本).
이길보(李吉甫),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806년).
『사고전서(四庫全書)』(1782년).
2. 근대 지명사전
장려화(臧勵和) 등 편,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상해(上海):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1931.
해당 1931년 상해 상무인서관 판본의 서지사항은 Virtual Shanghai에서 출판지·출판사·연도까지 확인된다.
3. 연구논문
임기추, 「홍익인간 사상의 현대적 실현 및 적용가능성 모색」, 『인문사회과학연구』 30-2, 세명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22, 324-351쪽. DOI: 10.22924/jhss.30.2.202205.014.
감사합니다.
홍익경영전략원 원장, 역사광복연대 대표, 대한역사광복군시민행동 공동대표, 중도유적복원단체연 대 공동대표, 한국효도회 역사광복총재, 국사찾기협의회 사무처장, 한민족사중앙연구회 연구운영위원장 임기추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