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9 | Re:아브라함 콤플렉스...박준규님은 | 22 |
홈피 god-walk.pe.kr를 운영하시며 다음에 조정희님처럼 고정칼럼란을 갖고 있습니다. 박준규님의 해석은 기존해석에 더한 깊이와 뒤집음에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 합니다. : : : 아래의 두 글은 우주현님이 자신의 칼럼 "Ezra Woo, 바이블 업그레이드"에 "<제3호> : 아브라함은 순종했을까?"는 제목으로 쓰신 글과, 그에 대한 박준규님의 답글입니다. : 박준규님의 답글은 10월17일 이석규님이 "바이블 업그레이드"의 독자 한마디 난에 : 올려주셨습니다. : : 이 두 글은 한국 그리스도교인의 "아브라함 콤플렉스"를 아주 효과적으로 다룬 글이라고 : 생각합니다. 저도 전부터 그 내용을 한번 써보고 싶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아주 잘 된 글을 : 보게 되어서 그 생각을 접었습니다. 제가 이보다 더 잘 쓸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 : 한번 읽어 보시지요. : : 조정희 드림. : : =========================================================================== : : Ezra Woo, 바이블 업그레이드 : <제3호> 아브라함은 순종했을까? 2000년 08월 15일 : :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몇 가지의 컴플랙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붙인 이름이지만 : 대표적인 경우로 저는 '바울 컴프랙스'와 '아브라함 컴플랙스'를 들고 싶습니다. : : 바울 컴플랙스는 바울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인 소명을 받지 못한 것에서 오는 컴플랙스 : 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바울처럼, 어느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 자신을 : 보여주시면서 "내가 하나님이니까 단단히 보고 이제부터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나를 위해서 : 살아라! " 뭐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목숨 내 놓고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 : 있을 것 같은데, 나에게는 전혀 그런 것 -소위 말하는 체험- 이 없다는 것에서 오는 : 컴플랙스입니다. 모태 신앙으로 자란 분들이나 저 같은 사역자들에게 그런 경향이 많다고 :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또 하나는 '순종의 사람'으로 우리를 주눅들게 하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 하시니까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알지 못하고 당장 보따리 싸서 길 떠나는 아브라함, 아들을 : 바치라고 하시니까 100살에 얻은 아들도 바치겠다고 칼을 빼어 드는 아브라함의 순종의 :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나도 그래야지' 하고 결심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주눅 들게 :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나는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순종하지 못할까? 컴플랙스를 느끼게 : 합니다. : : 그래서 적당히 취하는 타협점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워낙 순종의 사람이니까 : 그렇지 나 같은 피라미에 날라리 신자가 도저히 따라 갈 수는 없다고 결정짓고, 우리는 :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적당한 선에서만 순종의 가이드 라인을 정하고 삽니다. 그리고 : 마음 한 구석에는 제대로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을 지니고 사는 게 아주 :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 : 그러나 아브라함의 순종이 과연 그렇게 우리가 따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순종이었을까요? :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언제나 그렇게 어렵고 힘든 결단이 :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을 : 의미합니까? : : 우리가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 오해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창세기 : 12장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는 준비하고 있는 글이 : 있으므로 그 때에 좀 더 자세히 창세기의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아브라함 : 이야기, 특히 12장 1-4절을 좀 더 전후 문맥과 비교해 살펴봄으로 아브라함 순종의 본질에 : 다가서 볼까 합니다. : : 아브라함 이야기는 창세기 12장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11장 27절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11장 27절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 아브라함에 대해 : 조금은 왜곡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과연 순종했을까? 그는 처음부터 그렇게 : 순종의 사람이었을까? : : 성경을 다시 한번 볼까요? 창세기 11장 27절부터 32절까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를 : 중심한 그 가족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데라에게는 세 아들이 : 있었습니다. 앞절인 26절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이름의 순서로 보아 아브라함이 장남이고 : 그 밑으로 나홀과 하란이 있었습니다. : : 그리고 지금 11장 27-32절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있었던 : 사건들입니다. 참고로 여호수아 24장 2절을 보시면,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사도행전 7장 2절, 느헤미야 9장 7절, 창세기 15장 7절을 보시면 : 하나님께선 메소포타미아 땅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창세기 12장의 이야기는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하란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 즉 :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 : 첫 번째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 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11장의 이야기가 그 :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7, 28절에서 우리는 먼저 충격을 받게 됩니다. 세 번째로 이름이 : 언급되고 있기에 막내로 보아야 할 것 같은, 하란이 롯을 낳았다는 기록 그리고 그 하란은 :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아비보다 자식이 먼저 : 죽는 기록은 지금까지의 성경 기록에서 살인당한 아벨을 제외하곤 처음입니다. 즉 하란은 :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기록상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 뿐만 아니라 그 전에 그는 롯을 낳아 가지고 왔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당시의 : 신문이 있었다면 사회면 톱기사를 아마 한 일주일은 장식했었을 법한 사건이었을 겁니다. : 엄격하고 경건한 셋의 후손이요 셈의 후예 가문에서 -실지로 11장의 족보가 강조하는 것은 : 아브라함이 셋의 후예, 셈의 자손이다는 사실입니다- 결혼도 안한 막내가 혼외 정사로 : 아들을 낳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우리말의 '먼저' : 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면전에서' 입니다. 즉 아버지 데라의 면전에서 하란이 : 죽었다고 원어는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러자 아버지 데라는 부랴부랴 : 아브라함과 나홀을 결혼시키고 있습니다(29절). : : 히브리어는 성,수,격이 분명한 언어입니다. 그래서 동사에도 성,수,격이 있어서 29절 같은 : 경우는 아브라함이 장가들었다 그리고 나홀이 장가 들었다라고 써서 결혼하는 주체가 두 : 명이면 동사도 두 번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29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나홀이 장가를 : 들었는데 동사인 장가들다는 한 번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치 합동 결혼식을 연상시키는 : 듯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하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데라가 부랴부랴 두 : 아들을 급하게 장가들인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 :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메소포타미아 땅 갈대아 우르는 고고학적 유적의 발굴과 : 당시의 기록들에 의하면 당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원지며 수도와 : 같은 곳으로 당시 최고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서 잘 살기 위하여 데라는 조상인 : 셈으로부터 물려받은 종교마저 포기하고 그 사회에서 잘 살아보려고 아둥바둥대며 최선을 : 다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마 데라는 이 일이 있고 나서 그가 섬겼던 달의 : 여신 -당시 우르 지역은 달의 여신을 그 도시 전체가 섬기고 있었습니다- 에게 더욱 정성을 : 들이기도 했을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사주를 다시 확인하거나 조상의 묫자리를 바꾸듯이... : : 그런데 액운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데라를 장가 들였는데, 또 문제가 : 생겼습니다. 장남인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래의 : 불임으로 인한 문제는 이미 11장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데라의 가정이 흔들이고 :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의 한 가운데는 아브라함이 서 있었습니다. : :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을 아버지 : 데라에게 알렸으며, 데라와 함께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었습니다. 31절을 보면 :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만 하더라도 그 주체가 데라 중심이었습니다. 데라가 떠났습니다. : 그런데 그들은 사실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쏟아지는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을 견디며 : 살기는 아마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래도 자녀를 놓고 그럭저럭 살 수 있었던 : 둘째 나홀은 함께 떠나지 않은 지도 모릅니다. : : 갈대아 우르를 떠난 데라와 아브라함은 하란에 머무르다 하란에서 데라가 죽었다고 성경은 : 전합니다. 왜 하란이었을까요? 지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 유프라데스 강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면 그 끝이 바로 하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 아니라 하란은 같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최변방이 바로 : 하란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서울을 떠나 만주까지 가라고 하셨는데 신의주쯤에 : 머문 격입니다. : : 즉 충분히 추측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아브라함과 데라는 하나님의 : 계시도 있었고, 또 어차피 거기서 살 수도 없었기에 그들은 길을 떠나긴 떠났습니다. 그러나 : 그들은 사실 가나안까지 갈 마음은 없었습니다. 유프라데스 강을 따라 갔으니 그 비옥한 : 지역을 -그 지역은 세계사 시간에 '비옥한 초생달 지역' 이라고 아마 배우셨을 겁니다- : 벗어나지 않았고, 또 하란은 같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이었기에 그리 큰 모험이 필요한 곳도 : 아니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데라가 하란으로 이주한 것은 그야말로 이사간 것이지 그 : 이상의 의미는 사실상 거의 찾기 힘듭니다. : : 그러다가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습니다(11장 32절). 그리고 데라가 죽고나자 비로소 : 아브라함은 원래의 목적지였던 가나안을 향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께서 다시 :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나서입니다. : 창세기 12장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이 이 말씀에 순종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본토는 이미 본의 아니게 떠날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이제 죽었고, 친척은 롯을 데리고 : 계속 다녔으니 순종하지도 못했고… : :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왜 그토록 롯을 계속 데리고 다녔으며 또 롯이 붙잡히자 : 사병을 동원해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롯을 구출하고 또 소돔성에 있던 롯을 위하여 그토록 : 간절히 기도했는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생 하란이 남겨놓고 간 아들 롯은, 장남인 : 아브라함에겐 자신의 아들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 : 야튼, 결국 아브라함이 제대로 한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 본토를 떠난 것도 아비를 떠난 것도 친척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 말씀하십니까? 히브리서에 의하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 나갔다"고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칭찬하고 계십니다. 실지로 곰곰히 따져보면, : 아브라함이 한 것은 어쩔 수 없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아버지를 앞세워 떠났으며, 그나마 : 물 좋은 땅만 골라 다니다 제법 살만했던 땅인 하란에 정착해서 미그적대고 한 동안 잘 : 살았고, 아버지 데라가 죽고 나서야 다시 나타나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본격적으로 : 길을 나선 것 뿐이었습니다. : :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은혜의 눈으로 보아주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순종했다고 평가해 : 주시는 것입니다. : :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시는 책이지 잘난 아브라함을 보여 주시고 싶은 :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아브라함의 :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불순종하여 이방신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불쌍히 : 여기셔서 그를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시고 그의 삶에 간섭하셔서 마침내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 만들고 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 : 그래서 우리는 12장 5절에 있는 '마침내' 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 히브리어 성경에는 '마침내'가 없습니다. 이건 한글 성경 번역의 승리라 생각합니다. '마침내' : 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인생은 22장에 이르러 정말 마침내 믿음의 조상다운 : 믿음, 순종의 사람다운 순종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처음부터는 아니었습니다. : 우리가 처음부터 아니었고, 지금도 여전하듯이.... : : 아브라함은 순종했을까? 사실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다고 하십니다. 누가 : 뭐래도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다고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 우리 가운데 아무도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잘나서 그렇다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선 :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작정하심이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 :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 손에 붙잡혀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큰 반항하지 않고 그대로 가는 것을 사실은 : 의미합니다. 그냥 우리는 주어진 환경을 보며 때로는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서 행동하고 : 때로는 내 욕심을 따라서 행동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 믿고 하루 하루 성실히 사는 것이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 : 물론 언제나 환경에 이끌리고 욕심에 이끌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 처음의 아브라함, 우리가 하나님께 처음 부르심을 입었을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 환경으로 또 내 생각도 괜찮다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그 이후부터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 지배하기를 물론 요구하십니다. : :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왜 우리는 지나치게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 미화시켜 왔을까요? 첫째는, 성경 본문의 문맥을 잘 살피지 못하고 좀 더 꼼꼼하게 보지 :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설교자들의 잘못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을 교회와 : 목사에 대한 순종의 본으로 제시하기 위하여 지나치게 아브라함의 순종을 미화하고 심지어는 : 순종을 강요했던 설교들이 많았습니다. : : =========================================================================== : : 2001/10/04 (11:41) from 211.54.99.166' of 211.54.99.166' Article Number : 430 : 朴 俊 珪 (jk_park1128@hanmail.net) Access : 9 , Lines : 182 : : 기독교의 논리와 이론, 내지는 흐름을 주장하는 분들이 현직 목사님들입니다. 그분들에게 :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성도들이 교회에 충성하고 목사인 자신의 말에 : 순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충성과 순종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 쓰이는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이야기이고 이런 순종을 가장 완벽하게 說明하려다보니 :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과장되고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 그러다 보니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장소가 하란인데도 이것을 우르에서 받은 것으로 : 착각하게 하는 경우도 있고 언제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命令에만 움직였고 자신의 의지로는 :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대하여 부분적으로는 잘 알고 있으나 : 전반적인 부분에서는 많은 오해를 가지고있을 수밖에 없고 또 모리아 산의 제사가 :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초점인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 : 물론 순종이라는 측면으로 보면 모리아 산의 제사가 클라이막스임에는 분명하고 아브라함의 : 믿음이 가장 완전하게 나타난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 살펴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시려는 이야기와 이삭을 통해서 보여주시려는 : 이야기가 있는데 그 두 이야기의 분기점이 모리아산의 제사인 것입니다. : : 즉 아브라함을 보여주시려는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신앙 성장과정을 보여주시려는 의도였고 : 그 다음의 이삭의 경우에는 이삭을 예수님의 예표로 세우시고 그런 예수님과 같이 되기 :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걸어온 길을 성도들도 걸음으로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제사를 : 드리듯이 온전하 성도가 되고 그런 온전한 성도가 이삭과 같은 使命을 감당하여 하나님이 : 이루시려는 뜻을 이루라는 意味에서의 과정을 보여주는 예표와 같은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 : 이런 意味의 이야기의 초점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우목사님이 말했듯이 창11장27-31의 : 우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 목사님의 글에서 조금은 : 다른 부분을 보는 시각을 볼 수는 있으나 그 당시의 상황을 매우 인간적이며 현대적인 : 상황에 맞춰서 이해를 하려하는 부분으로 인하여 무리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 있습니다. : : 그것은 롯의 아버지 하란에 대한 결혼이 혼외정사로 롯을 낳았을 것이라는 추측과 그런 : 집안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부랴부랴 아브라함과 나홀을 합동결혼식을 올렸을 것이라는 : 것, 그리고 그들이 그런 수치를 피하기 위하여 우르를 떠났을 것이라는 추측은 지금의 : 사회에 맞추어본 무리한 시각입니다. 지금은 결혼이라는 것을 매우 성스럽고 중요한 일로 : 보고있고 어떠한 규례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있지만 과연 지금과 같은 결혼관례가 그 : 당시에도 있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그 당시의 결혼은 매우 자유로운 가운데 : 본인이 하고자하면 언제라도 아내를 맞을 수 있고 또 그 아내의 수도 능력만 있으면 : 얼마든지 거느릴 수 있었던 時代였으며 여자에 관한 개념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 큰 차이를 가지고있는 時代로써 여자와 종을 같은 개념으로 보았던 時代였던 것입니다. : : 그리고 나홀의 아내로 등장하는 밀가는 하란의 딸로써 밀가가 나홀의 아내로 들어올 수 있는 : 나이를 20세 정도로 본다면 하란이 결혼한 때는 나홀의 결혼보다 20년 전의 일이 : 되어야하므로 하란의 혼외정사로 아이를 낳는 일로 인하여 부랴부랴 아브라함과 나홀을 : 결혼시켰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며 또 그들이 그런 수치 때문에 우르를 떠났다는 것도 : 시간적으로 맞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 :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것도 데라가 죽은 후로 말하고있는데 이것도 나이를 비교해 : 볼 때 문제가 있는 추측으로 데라가 아브라함을 낳은 것이 70세였고 죽은 것은 205세, :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나이가 75세로써 이 때의 데라의 나이는 145세로 아직 : 살아있었으며 이 후 60년을 더 살았으므로 데라가 죽을 때 아브라함은 135세로 이삭이 : 결혼하기 5년 전이었고 이 해에 사라도 죽었던 것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 살고있었고 이 때 즈음에 데라는 하란에서, 또는 밧단아람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 : --------------데라----아브라함-----이삭 : 아브라함 출생---70세------0세 : 우르 출발------141세-----71세----------------(예측) : 하란 출발------145세-----75세 : 이삭 출생------170세----100세-------0세 : 데라 죽음------205세----135세-------35세(사라 125세로 죽음) : : 이런 점을 볼 때 우 목사님이 보는 시각이 남다르기는 하지만 이런 부분을 자세히 보지 : 못하고있고 그러므로 인하여 오는 결론적인 부분에도 다소의 문제를 안고있는 것입니다. : : 그러나 서두에 말했던 아브라함의 순종이라는 부분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모든 부분을 : 아브라함이 실행한 것으로 보는 잘못된 시각을 지적하는 부분이나 우르를 떠난 것이 : 아브라함의 주장이 아니고 데라의 주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정확히 본 시각이며 성경이 : 주는 意味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노력 또한 매우 진취적이라고 봅니다. : : 그러나 이 석규님이 이 글을 올려준 이유는 서두에 언급한데로 새로움에 반해서라기보다는 : 내가 논하는 내용과의 상이점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하여 이 글을 올려주었을 것으로 볼 때 : 새로운 시각에는 인정하지만 그 전개하는 내용에는 많은 문제를 안고있는 것이 사실이며 : 보는 시각도 지금의 입장에서 풀고있는 점과 너무 인간적인 부분에 집착되어있는 부분들에 : 대한 지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說明하다만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주는 : 초점은 순종이라는 부분보다는 아브라함이 성장하며 걸어간 세 단계의 : 과정(78세<--(7년)--> 85세 <--(7년)--> 92세 <--(7년)--> 99세)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 초점이며 우 목사님이 지적하였듯이 순종의 극대화를 위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모순의 : 지적은 저 자신도 늘 말하는 바입니다. : : 그리고 컴프렉스로 說明한 바울이나 아브라함과 같은 이야기도 동의하는 바로 흔히 : 아브라함이나 바울은 특별한 사람으로써 하나님께서 쓰임 받은 것으로 알고있으나 실상은 : 성도 누구라도 그와 같은 길로 가면 아브라함과 같이 될 수 있고 또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이야기가 주는 意味를 정확히 모르므로 그들과 나는 : 다른 존재로 알고 담 너머의 일로 일관하고 자기 자신이 설정한 선 안에서 신앙을 : 유지하려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現實인 것입니다. : : 즉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을 가면 자신도 아브라함처럼 모리아산의 제사를 드릴 수 있고 : 따라서 그 다음의 이야기의 초점인 이삭의 생과 같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삶으로써 :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이야기를 통해서 예시하고있는 것입니다. : 물론 바울이 세 가지 육체에 가시에 대한 기도를 드렸듯이 인간은 욕망이라는 덧을 벗지 : 못하므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처럼 지금 나를 괴롭히는 욕망이라는 사탄과의 : 싸움을 이기려고 노력하면서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대로 욕구를 : 이기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도 있습니다만 콤플렉스가 될 이유는 없는 : 것입니다. : : 오히려 성경이 주는 意味를 자세히 알고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갈 때 성령께서는 役事할 : 것이고 자신도 아브라함과 같이 되고 바울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님이 되시기를 : 바라며 또 어떠한 글을 읽든지 주관을 가지고 판단하시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님이 : 되시기를 바랍니다. : : 朴 俊珪 드림 : : =========================================================================== : : 저는 좀 오래 전에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집을 통해서 비슷한 말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 아마 책 제목은 "하나님의 설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완전했던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 훈련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사람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 : 우주현님의 글은 박영선 목사님의 글과 거의 비슷한 내용입니다. : 제가 아주 놀란 것은 박준규님의 성경 내용을 분석하시고 종합하시는 능력이 : 탁월하시다는 점이었습니다. : 이런 장로님들이 한국 교회에 많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 어쨌든, 박영선님, 우주현님, 박준규님의 의견과 결론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 믿음은 하나님의 설득과 훈련의 결과이며, 따라서 : 우리는 아브라함 때문에 콤플렉스 가질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될 것이니까요. : : 두 글이 아브라함 콤플렉스 (혹시 있으셨다면) 극복하시는 데에 :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 : : 조정희 드림. : (성경의 한국 개념 살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