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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없는 것의 관계에 대하여
이 원 규 /(시인 ․ 방송대 경기지역대학 ‘글타래’ 창작동아리 지도강사)
필자가 원고를 넘겨받아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쓰던 날, 대한민국 역도선수 장미란(25세)이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인상 140kg과 용상 186kg, 합계 326kg을 들어 올리며 세계신기록을 수립,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센 '여자 헤라클레스' 로 등극했다. 그렇다. ‘장미란’ 이 들어 올렸던 둥그런 쇳덩이를 그저 둥그런 쇳덩어리로 보지는 말자.
모든 문학은 사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면 없는 문학은 사람에게 도움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늘 삶과 존재론적으로 부딪쳐서 나와야 하며, 상징적 영혼성과 현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혼성을 가지면 힘이 없어지고 현장성은 일회성이기 때문이다. 그 양자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고투하는 과정이 글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날 때 우리는 그 글을 읽고 감동한다. 그러나 욕심은 가식을 낳을 뿐이다.
참된 미적의지, 존재론적 체험이 없이 시의 형식만을 추구해서는 아무 감동이 없다. 나도 세계의 문을 열고 세계도 내게 문을 여는 것이 시적 교감이며, 그래야만 대상과 내가 전적인 합일을 이뤄 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김현승 시인의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있다”에서 플라타너스는 ‘꿈의 상징’ 으로 재탄생 한다. 내면 없이 외면만 가지고 씌어졌다면 ‘플라타너스’ 라는 나무를 통해 ‘꿈의 상징’ 이란 깊이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여름은 간 듯
그대
정겹습니다.
문득
문득
행복하니
당신은
아름다운 손님
- < 소나기 > 전문
허효순 시인이 표제 시로 앞세운 <소나기>의 전문이다. 2연 8행의 짧은 작품이지만, 문단에 들어와 활동한 지 15여 년이 지난 삶의 여정을 모두 담은 작품이다.
시가 생각처럼 써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격대로 성깔 있게 시를 쓰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들은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시는 마음 내키는 대로 그냥 쓰는 게 좋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시작(詩作)의 기호를 이루는 것은 시인이 가지고 있는 개성이다. 실제 작품 제작의 동기가 되는 것은 어떤 순간이 시인의 느끼는 황홀한 상태에 맞먹는 객관적 등가물을 찾아야 한다. 이때 시인의 긴장상태가 객관적 등가물에 의해서 해방되기까지 말들이 계기적으로 거듬의 형식을 취하면서 배열되는 것이다. 이 배열된 상태가 곧 시인이 지닌 정서의 형태화를 뜻한다. 그것은 정형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자유시 또는 단순한 민요적 시나 소네트가 되기도 한다. 그 주체가 바로 개성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개성이 자유분방한 상태를 지향하면서 이미 있어온 형태에 식상했을 때 작품은 유기적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기성질서에 대한 인식이 우세하고 규범을 지키려는 생각이 강할 때는 추상적 형태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형태가 착상을 꾸며내는 경우, 즉 착상이 하나의 단위로 간주될 수 있는 경우, 말을 바꾸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개의 심리적 긴장이 도사리고 있는 정도로 제한을 받는 겨우, 이때까지야말로 그 시는 단시라고 단정될 수 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심리상태가 그것을 몇 개의 분리된 조(組)로서 받아들이고, 마침내는 그들 가운데 얼마를 하나의 포괄적인 동일체로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착상이 복잡한 경우, 그 시야말로 바로 장시라고 단정될 수가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방법에는 설명, 묘사, 서사, 논증의 방법이 있다. 이 중에서 묘사의 방법이 바로 시 작법이다. 묘사란 곧 표현을 말하며,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설명을 하고 있다. ‘인연’ 이란 어떤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든가, ‘가로등’ 이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체험이라고 한다, 남은 못 보고 자기만이 본 것, 남은 못 듣고 자기만이 들은 것이 체험이다. 자기만이 본 것이 시각적 이미지고, 자기만이 들은 것이 청각적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의 기본인 ‘낯설게 하기’ 인 것이다.
비록 주제를 이끌어 가는 솜씨가 다소 거칠더라도 자기다운 개성으로 말을 부릴 줄 아는 능력, 시가 될 수 있는 것, 설명이 아니라 표현을 한 작품을 골라 몇 편 소개한다.
시란 대상이 지닌 사실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상상력과 더불어 표현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누구나 아는 꽃이 아닌 나만의 꽃을 피워 올려야 하는 것이다.
시 쓰기는 산문과 달리 말을 경제적으로 쓰면서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말을 적게 쓰되 압축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학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향하는 바와 깨달은 바를 문자로 표현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 행위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완결된 작품은 <최소의 단어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탄탄한 문장> 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강의 때마다 강조하고 있다..
얘네들은
도서관
책상위에
책들만 올려놓고
분분하게 유혹하던
봄날로 나갔다.
노란 민들레
낮은 소리로 웃고
나도
봄날로 간다.
- < 봄 ․ 1 > 전문
중국의 문학가 구양수는 글을 잘 쓰기 위한 비결로 ‘삼다(三多)’를 들고 있다. 즉, 우선 다독(多讀) -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다작(多作) - 글을 많이 쓰는 것이며, 다작보다는 다상량(多商量) - 깊이 헤아려 생각함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도서관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많은 정보가 있는 곳이다. 가끔씩 그곳에 가서 육체가 배고플 때까지 정신의 양식을 듬뿍 채워보시라. 좋은 문학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글을 쓰겠노라고 기왕지사 글밭에 나선 사람이라면 가까운 도서관을 내 집 드나들듯이 하라는 말씀을 간곡하게 드린다.
어찌되었든 작품은 풍부한 어휘를 활용하여 그것들이 형상화하려는 주제를 향하여 달려가게 해야 한다. 어휘를 풍부하게 확대하는 길, 역시 도서관 아니겠는가?
흔들리는 강가
은빛물결
꽃바람이듯
가볍게
다가서는 어둠
여기서
시작되었을 거야.
만남
그리고
안녕
- < 그리움 ․ 5 > 전문
어른들은 이론이나 이익에 매달려 전체를 보지 못하지만, 어린이들은 부분도 전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어른들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은 외국어 단어 중에서 철자 한 자만 빼먹어도 깜짝 놀란다.
무식하다고, 교양 없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런데 ‘한글’에서 받침이나 띄어쓰기쯤은 틀려도 대담하고, 문장이나 문법이 어긋나도 너그럽다. 의식하지 않는다.
“에이! 그럴 수 있지 뭐.”
“이해하고 대충 넘어가?”
‘친숙한 언어’ 이니 모국어(母國語), 자기 나라 말이다. 어머니로부터 맨 처음 배운 말이다. 우리글 우리말 우리 한글이 사랑받는 세상이 바로 우리들 세상이다. 생각조차 가식 없는 어린이는 순진하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엉뚱하고 난해하겠지만, 그 상상력이 어른들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는다. 절대로 시니컬하지 않다. 보는 눈이 따뜻하고 느끼는 마음 또한 포근하다. 그러하니 골치 아프고, 꽉 막혔을 때는 동시(동화)라도 읽어보시라.
기왕지사 뱉은 김에 속 좁은 소리지만 좀 하고 넘어가야겠다.
요즘 공중파를 통해 유행을 퍼트리는 개그나 코미디는 물론 사이버 세상에서는 정상적인 언어를 위반하고 비틀고 왜곡되어야 재미있다고 한다. 물론 재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재미를 느끼며 즐긴다면 문제는 커진다.
작품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적가치의 잣대는 변할 수 없다. 작가의 뚜렷한 주관과 개성만이 요구되는 것이 예술계이다. 이상스런 기교를 부릴 필요도 없다. 요상한 작품들이 잘 읽힌다고 다 좋은 작품은 아니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명작인가?
물론 평론가들조차도 그것들에 찬사를 보낸다. 왜? 돈이 되니까?
그러다보니 작가들조차 그러한 방향으로 간다. 작품이라고 읽다보면 누더기다. 여기저기 짜깁기했지만 구조 또한 튼실하다. 숨겨진 양심까지도 매우 두텁고 단단하다. 그러한 평론가들이 높게 평가한 작품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교양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우리나라는 서구의 비평이론을 무자비하게 수입했다. 내년부터는 보험, 은행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올 것이다.
뒤돌아보라. 주변을 살펴보라. 오래도록 국문학을 전공하고 연구하는 국문학자 중에서 ‘문학평론’ 으로 성공한 혹은 활발하게 평론하는 국문학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상당히 비약했다. 거듭 말하자면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을 전공한 학자들만으로 우리나라 문학평론집단은 대부분 형성되어 있다고 잘라 말할 수 있다. 그래야만 우리나라의 시인과 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외국의 실례를 들어가며 평할 수 있다.
그대가 오기 전
몰랐네.
내게 오는 그대
웃음으로 오는가.
아픔으로 오는가.
꽃가지 끝에라도
머물기다 가기
바람 곁에라도
스치어 보기
가슴 타고 오르는
꽃 된 그대
- < 꽃은 꽃으로 예쁜가 > 전문
당신의 책상에 ‘국어사전’ 은 있는 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문학에 뜻을 세우고 있는 분들은 한글사전부터 잘 간수하시기 바란다. 너덜너덜 할 때까지 국어사전을 넘기자.
아예 걸레를 만들었다면 그날에 비로소 당신을 시인, 소설가, 수필가로라 부를 것이다. 절대로 노여워하지 말 일이다.
역설은 아이러니와 아주 비슷한 시의 요소다. 역설은 근본적으로 아이러니와 달라서 말에 의존하는 면이 강하다. 거기에는 또한 청중 내지 관객에 해당되는 독자의 역할이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도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역설은 아이러니의 경우보다 덜 상황적이다. 그러니까 역설이 아이러니보다 좀 더 시와 문학성이 강하다는 이야기로 바꾸어 해석될 수도 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이야
갈 곳 있어 바쁘겠지만
보내는 사람은
남아 있는 아픔 크다.
바람은
불어서 잡지 못하고
사랑은
이름 없어 불러 세우지 못한다.
기약 없이 가는 눈빛
가만히
가만히 묶어 놓고
- < 이 별 > 전문
시는 언어를 최대한 절제하면서 함축과 온갖 수사적 표현이 따라야 한다. 자신의 생활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으며 시인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감과 함께 그 안정성이 더욱 큰 울림으로 독자를 향해 다가가야 한다. 시는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의 체험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 예리한 관찰력과 상상력을 확장시켜 나간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씽크대 앞에 서니
종이학 한 마리
종이배 위에 살포시 앉아 있네.
엄마, 사랑해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종이학은
내 마음속에 날고 있네.
아스라한 하늘을 마음껏 날고 있네.
- <예쁜 나라 - 나의 사랑 순관> 전문
아이러니란 일단 반어(反語)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 가운데는 겉으로 하는 진술과 다른 속뜻을 가지는 것들이 있다. 그 속뜻이 단순하게 감추어진 상태라면 그것은 함축적 의미에 그친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으로 화자에 의해서 이야기된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의 화법 자체를 아이러니라고 한다.
시의 언어는 관련대상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데 그 목적을 두지 않는다. W. 엠프슨(William Empson) 이 애매성에서 말한 첫째 경우인 ‘한 단어나 문장이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작용한다든가 효과를 미치는 경우’ 가 있는 것이다.
시어 선택이나 배열은 제재와 상황, 그리고 시인의 개성에 따라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비유는 시적 표상의 가장 기본이 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새로운 현상에 부딪히거나 독창적 세계를 제시하고자 할 때 그것은 물론 여느 방식의 언어표현으로는 잘 달성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새로운 언어를 제멋대로 만들어 쓸 수도 없다. 일상적 언어를 뒤바꾸어 놓으려는 시도 즉, 표준 의미에서 거리가 먼 비유, 곧 전이의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그 비유가 기능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말은 아름다운 영감에서 나온다고 한다.
아름다운 영감 역시 안정되고 성실한 자기생활의 성찰에서 비롯된다. 시어는 아름다우며. 멋지고 세련된 용어이다. 그러므로 시어는 아름다운 영감을 가지고 아름다운 생각과 자기와의 끝없는 성찰이 이루어질 때 탄생될 수 있는 자식입니다.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고 있는 그 자체가 그 사람은 아름다운 영감을 즐겨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인간의 오욕칠정의 순수한 감성에서 진(眞). 선(善) 미(美)를 언어로서 요리하는 요리사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감성은 사람이면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가 아름다운 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시인도 되고 사이비도 된다.
사람들은 <나는 시에는 소질이 없어> 라고들 말한다. 그것은 소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시적 감성을 개발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른바 한국시인은 우리말을 순화시켜 나가면서 맑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다.
산다는 게
이토록
따뜻하게 아름답고
차갑게 가슴 시릴까.
돌아가는
철길 모서리
촉수 낮은
가로등 빛
- < 찻 집 >
시의 말은 일상적인 경우와 동일한 선상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시에서도 그 말의 뜻은 일단 관련 대상을 정확하게 지시하는 면도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주변에서 정리되어 사전에 올라있는 것이다.
게오르규는 일찍이 시인이 괴로워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지적한 바 있다. 특히 자학과 자조 / 체험과 절망 / 대립과 갈등의 사회생활에서 시인은 단 하나의 절대재현을 거부한다.
'다양한 재현들'을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이성과 보편성을 찾으려 한다. 특히 시대보다 한발 앞서가는 시인은 예언자적 기질을 발휘하여 자신의 운명까지도 그 시 속에 담아 번뇌와 고민의 환상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작가는 뒤로 물러나고 작품 속의 인물들이 무대로 올라와 독백하는 '의식의 흐름' 형식으로 옮아간다.
과거 시인들의 불우한 삶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음악(특히, 흘러간 대중음악)에서도 더욱 극렬하게 나타나지 않았던가.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그의 삶 역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배 호 / 차중락 / 김현식 등이 그가 절규하던 노래처럼 삶도 매듭지어지기도 했다.
고슴도치 제 새끼털
부드럽다더니
햇빛에 맑게 비친
아들 귓바퀴
실핏줄조차
가슴으로 든다.
- < 실핏줄 > 전문
그 겨울
그 밤에
아내는
해삼이 먹고 싶었네.
손이 시리고
해삼은 얼었네.
따뜻한 물에서
녹아내리는 해삼
그 겨울
그 밤
누구에게나
따뜻한 것만이
정답은 아니었다네.
- < 행복 > 전문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을, 부부간의 사랑을 아주 간결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 누구나 다 알고 있어서 그래서 오히려 재미없는 소재인 고슴도치에 빗댔고, 누구나 한 번쯤은 다 먹어본 아주 지극히 서민적인 해산물이라서 조금은 새로울 것도 없는 ‘해삼’을 통해서 비유했지만, 읽을 수록 인간 삶의 관계의 한 양상을 깊게 깊게 되새기게 하고 있다. 이렇게 허효수은 평범한 일상에서 특유의 섬세함으로 공감대를 형성시키고 있다. 또한 과감할 정도의 일상저긴 언어를 도입하였지만 서민적인 삶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깃들어져 있어 그래서 오히려 우수마저 잔잔히 흘러나오고 눈물겨운 감동을 전달하고, 겉으로는 해학적인 듯 역설적인 듯 유머가 있는 표현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 잡고는 어느덧 그 보이지 않을 듯한 실핏줄마저, 따뜻함보다 모질게 다가왔던 시련의 시간이 오히려 사랑을 잇는 관계로 승화되는 시적 형상화와 그러면서도 시인은 슬쩍 자리를 비켜서서 시적 공간을 독자들에게 비워주는 섬세한 시적 연출들을 쏠쏠히 지적 재미를 주고 있다.
위의 <실핏줄>이나 <행복>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시가 써지면 당연히 시가 된다. 더 꾸밀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시의 언어가 정서적 용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예도 있다. 그리하여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무관한 상태에서 시의 언어가 쓰일 수 있는 양 생각해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 문학도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적 양식이다. 일정한 형태는 갖추어야 한다. 보기 싫어도 이론은 공부하자. 물론 이론이 쉽게 읽혀질 리 없다. 행간마다 한 줄 한 줄 밑줄 쫘~악 긋지 않는다면 오해의 소지도 다분하다. 물론 필자도 자주 실수하는 편이다. 그것은 아직까지 이론적 뼈대가 튼실하지 못한 당연한 소치이다.
때문에 잘못해서 스스로 함정으로 발을 내딛는 수도 있었다. 때로는 훌쩍 중요한 부분을 건너뛰기도 했고 나만의 주의주장 속에 스스로 갇히기도 했었다.
타인의 작품에 대해 잘못된 분석이나 오역으로 엉뚱한 길목에서 허둥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도록 이 길을 갈 것이다. 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겠지만 툭툭 털고 다시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정말 오랜 기간 문학에 대한 학습 과정을 거치면서 반복하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물도 꼭 생길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다.
글을 쓰는 측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좋은 책 많이 읽고 남다른 경험 많이 가지며 많이 써 보는데서 글 솜씨가 단단하게 여물어 가는 것이다. 글을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써야 감동적인 글로 살아나는 것이다. 없던 일 꾸미려고 애쓰는 글은 머리로 쓰는 글이요, 자신의 경험에 마음을 담아서 쓰는 글이 가슴으로 쓰는 글이라는 정도로 알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슈가 경제 문제에 대한 부정적 태도로 일관된 모습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들의 삶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소 가난했던 과거 어느 시절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는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생활이 더 행복해졌다고 말할 사람 또한 흔치 않을 것이다. 살림살이의 외형적인 물질적 규모가 커지고 좀 여유로워졌다고 해서 가난의 시대를 살았던 때의 살보다 정신적으로 행복해졌다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과거 가난 속에다가 행복을 회귀시키며 오늘의 어려운 삶을 달래고 있다. 이는 물신주의적 풍조가 사람들의 의식의 주인으로 자리 잡고, 부의 축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몰가치적인 삶의 방법들이 강조될 뿐 진정한 인간 관계로서의 삶은 무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분명 병든 사회다. 이렇게 병든 사회에서는 <나>와 <남>의 「관계」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있다 해도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다움의 관계는 없고, 물질적, 금전적 더하기만 요구되는 산술관계만이 존재한다. 각각의 내면 속에 한데 어울려 삶, 혹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가능케 해 주는 균형과 조화의 의식의 결핍 현상만을 드러낸다.
이 병든 사회 속에서 문학인이라면 과연 무엇으로 문학은 그 존재에 대한 의의를 삼을 것이며,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대한 대답을 허효순 시인의 시집 『관계』를 읽다보면 새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60 여 편이 좀 넘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관계』를 발표하는 허효순 시인은 사실 내게 있어 낯선 시인이다. 그 낯설음만큼 그의 시도 낯설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처음부터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다. 이렇게 허효순 시인과 나는 처음부터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관계로 만났다. 아마 그것은 이제까지 그의 모든 시적 사고와 작업에의 총체적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그의 첫 시집과 나 사이에서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공통의 주제 의식을 개인적 체험의 차원을 뛰어 넘어 누구나 느끼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에서 본 것이다. 이는 시인이 개인의 체험을 전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현실인식의 철저함과 상상력의 역동성을 한데 뭉뚱그려 개인으로서의 한 시인이 일상 세계 속에서 획득하는 경험적인 사실들을 <거시적 틀> 에 비추어 바라보고 새롭게 <현실을 창조> 하는 능력을 갖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그의 시적 관심의 협소성으로 나타나는 사사로운 <미시적 틀> 로 축소되는 결함을 노출시킬 수도 있는 작품들도 더러 있기에 이번 시집에서는 제외시킨 작품들도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허효순의 시 세계로 접근해 보자.
허효순의 시는 어느 정도 이미지적 요소와 모더니즘적 요소가 편린을 보여주면서 간혹 언어의 구조만이 공허하게 노출되어 시의 내용이 <미시적인 틀>로 축소되는 결함을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소박함과 진솔함이라는 무기가 장착되어 그러한 부분적인 것들을 압도해 가고 있다. 평범한 가정주부의 생활체험과 지극히 서민적인 삶에서 접하는 아주 작은 사소한 대상들을 통하여 그가 드러내는 것은, 그러나 결코 소박하거나 사소한 것만은 아니다. 뜻밖에도 그가 사소한 체험이나 대상에 천착하여 근원적인 삶의 귀중한 문제 - <관계> - 들과 연계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일견 평범한 듯 하지만 그 내부에 만만치 않은 시적 주제에 대한 탐색과 인식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허효순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락고 한다면 평범한 삶의 한 단편을 아주 예리하게 절단해 놓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범하게 변형시켜 놓은 듯 보이지만 그 안에 비수를 품고는 능청을 떨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우수를 지극히 긍정적인 시선으로 포착하여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형상화 하는 특별한 재능 또한 겸비하고 있다. 직접 그의 시를 통해서 살펴보자.
소리 없이
가고 오는 것이
저다지도 하얗게 빛나는
목련뿐일까 마는
4월의 바람이 스산한 밤
뒤로 할 수 없던
그대가 그립다.
힘겹게 웃던 아픈 당신
그대가 떠나던
마흔 둘의 나이
이제
나
마흔을 지나
속절없이 아픈 가슴
- < 관계 ․ 1 >
인간이 출생과 더불어 울음을 토하는 것이 인간 감성의 원초적 표현이라면 그 울음 속에 내재된 감성의 기본은 어머니의 편안했던 자궁을 빠져 나오는 동안 존재하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분화되지 않고 일시에 결합된 경이의 함성이 울대를 통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원초적 시적 감성의 표출이 아닐까?
다소 교과서적인 표현을 인용하자면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문자로 표현하는 일이다. 이때 생각은 사상, 느낌은 감정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그리고 사상을 표현하는 일은 대부분 논리로써 그 옳고 그름을 제시하거나 옳으면 왜 옳은 지, 그르면 왜 그른 지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따져나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논리가 없는 생각, 사상은 사상누각과 같은 말의 성찬에 불과하다.
세상의 사상(事象)은 때마다 변하고 사람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새로운 각도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사도 그렇다. 더구나 시 창작은 사물에 대한 평범한 선입견, 지각의 자동화에 빠지지 않는 순수한 관찰과 더불어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왕성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허효순에게 있어 관계 -<사랑>-는 그의 다수의 시편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시적 사고의 중요한 모티베이션을 이루고 있다. 「예쁜 나라」에서는 싱크대 위에 접어놓은 그 작은 어찌보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아들의 ‘종이학’ 한 마리와 사이의 관계에서 ‘사랑’을 느끼다 못해 하늘까지 마음껏 날아오르는 작중 화자가 아들에게서 느끼는 사랑의 관계가 간결하게 드러나고 -(그것은 독자들에게 있어 주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깊은 울림의 관계로 돌아오고) -「주관적 진실 3 ․ 4」등에서는 배꽃보다 하얗게 눈이 부셔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기쁠 때나 외로울 때나 함께 했던 영원한 인간들의 화두 어머니의 사랑과 그리움을, 이제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를 늘 하루가 다하는 저녁 석양 속에 묻어놓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그리워 하지 않을래도 그리워하는 그리움을 작가는 한 발 물러섯 바라보면서 독자들에게 끼어들 사유의 공간을 내어주고 있다.
「서글픈 세월」에서는 IMF 시절 누구나 다 어렵게 살았던 서민들의 삶을 <서로 / 마음 다치지 않고 / 살았으면 / 바라기는 마찬가지> 라는 공동체의 삶의 관계를 같이 아픔과 고통을 나누고 기원하기도 하고, 늘어만 가던 포장마차가 어느 틈에 하나 하나 없어지는 거리가 오히려 더 스산하다며, 어려운 삶일수록 깊고 진한 관계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소원해지는 무관심의 관계로 변화되는 현실적 관계의 아픔을 더 아파하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삶의 따뜻한 눈길이 능청스러울 정도로 진하고 섬세한 그의 시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관계로 발전되고 있다. 그의 시에 있어서 지극히 소시민적이면서도 따뜻한 눈길은 이처럼 애환과 그리움이 깃들여 있으면서도 긍정적인 덕목을 통하여 예상 밖의 삶의 우수와도 연결되어 시적 탄력을 또한 만들어 주고 있다. 이 평범한 삶의 체험이「임신한 아내를 위하여」와 「친구」에서는 좀 더 진솔하고 가족적인 따뜻한 관계의식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대 먹고 싶다던 말
생각나
양복 차림으로
까만 봉지 들고 들어서는 모습에
아내는
차마
남기지 못하고 다 먹는다.
임신할 수 없는 남자
임신한 여자 변덕 알길 없어,
다음날에도
순대 한 봉지 들고
웃을 때
아내는
또 샀어?
묻지도 못한 채
피식 웃고 만다.
그녀는
너무나도 멀어서
애닮은 거리에 있다.
정녕
산다는 것이 헤어짐이라면
어떤 질감으로 견뎌야 하나
가슴은
얼마나 넓기에
이다지 허허로운가.
- < 임신한 아내를 위하여> 전문
그녀는
너무나도 멀어서
애닮은 거리에 있다.
정녕
산다는 것이 헤어짐이라면
어떤 질감으로 견뎌야 하나
가슴은
얼마나 넓기에
이다지 허허로운가.
- < 친 구 > 전문
어느 날 유명한 화가인 드가가 상징주의 최고의 시인 말라르메에게 시 창작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무슨 짓이람! 하루 온종일 LFDJAJR을 소네트에 매달렸는데 한 발자국도 못나갔네. 하지만 생각이 모자라는 건 아니라네 … 그건 많이 있어 … 지나치게 많거든 ….”
그러자 말라르메가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드가! 시는 생각을 가지고 만드는 게 아니라, 말을 가지고 만드는 거라네.”
시는 특수한 계층(문단진출을 한 세칭 시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든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며 특수한 문학적 수업이나 체계적 학습이 없어도 문자를 알고 시적 감정을 일정한 외재적 또는 내재적 운율에 따라 어떠한 사상(思像)을 은유적으로 표현 한다면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평소 일반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 "시를 좋아 하느냐"라고 물어보면 십 중 팔 구는 머뭇거리다가 ‘시는 어려워서!’ 라고 말들 한다. 그 말은 시를 좋아 하기는 해도 시를 읽어보면 이해가 안 된다는 말로 들린다.
시인은 한 개인으로서 그의 정서적 체험과 그의 정신적 고통의 궤적을 <시적 언어> 속에 명징하게 표출시킴으로, 그의 경험들을 개인적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 시대의 삶에 동참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참삶의 진실과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시적인 감동을 유발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 언어’ 라는 말에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말은 어떠한 사물, 혹은 현실의 어떠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직설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적 언어’는 사물, 혹은 사실의 의도적인 왜곡과 변형을 통하여 그것을 대상으로 삼았을 때의 시인의 인식의 명증성을 보여주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허효순의 시에서도 사물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과 변형을 보여주고 있다. 「공원」이라는 작품은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나무 벤치 뒤
진분홍 철쭉 가득 핀
가지 사이로
구겨진 종이컵
보이고 싶지 않은
내속의 나
감추듯
숨은 종이컵
제 뱃속 채운 누구였을까.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세상
자취 없고
구겨져 쭈그리고 있나니.
‘종이컵’ 이라는 단순한 사물의 특성을 빗대어 외롭게 소외되고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처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종이컵이라는 사물의 외형적인 모습에서 <보이고 싶지 않ㅇ은 / 내 속의 나 / 감추 듯 / 숨은 > 종이컵처럼 고난과 아픔을 보이지 않고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바로 시인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 벤치 뒤 / 진분홍 청쭉 가득 핀 / 가지 사이로 / 구겨진 종이컵> 처럼 소외되고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곳에 관심을 갖는 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시인이기 때문인 것이다. 시인은 눈이 세 개라도 괴물이 아니다. 이러한 궤변은 필자가 우리 학교의 <글타래> 창작 강의 때마다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누가 뭐라 해도 시는 최후까지 살아남은 정신(精神)의 덩어리다.
다시 말하면 외부 세계의 충격에 대한 반응으로 작가는 시를 쓴다. 그때 작가는 단순히 수동적이 아닌 자아와 세계가 동일화된 능동태인 것이다. 자아와 세계가 일체감을 이루 었을 때 '아름답다' 한다. 즉 작가는 문장의 행간 사이에 보물을 감추고, 독자는 그 보물 찾기를 하며 즐기는 것이다.
때문에 작가는 창작을 통해 작품이 자아와 세계, 곧 인간과 사물과의 간격을 문학적 기 법을 통해 좁혀 줄 의무가 있다. 즉 어떤 것이 인간이고 어떤 것이 사물이라는 설명보다 는 미적으로 통일된 의식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데 왜 나에게서는 아름다운 글이 나 오지 않는 것일까?
작품은 작가의 분신이다. 글은 작가의 생각 그 자체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을 솔직하게 쓰지 않는다. 험한 세상을 살다보니 때가 묻었는지 다른 욕심이 있는지 자꾸 쓸데없는 가식만 늘어간다. 물론 가식도 대단한 테크닉일 수 있다. 테크닉은 어찌 어떻게 해야 좋다는 말을 듣는가?
누구나 자신이 의식하건 아니하건 간에 자주 반복되는 단어 혹은 이미지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되면 영영 고칠 수 없는 고정관념의 덩어리가 된다. 고정관념은 상징이다. 물론 완벽한 상징의 단계에 이르렀다면 개성 있는 선명한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도 하고 '감동’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저 혼자만 좋아하는 난해한 상징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헛된 짓이라면 여러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시인들이 쓰고 있는 시가 난해하다는 이야기는 시인들이 쓰는 시어들이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독자들이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시인의 세계에 접근할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 자기 기준에 따라 시를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오는 현상이다.
허효순의 시가 가지고 있는 매력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 주변에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늘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사소한 사물들을 예리한 시적 감수성으로 포착하여 삶의 보편성과 진리, 아름다움, 음영과 우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때 동원되고 있는 언어들이 일상적 어휘임에도 불구하고 시의 구문 속에 요소요소 적절히 박혀 빚어내는 시적 분위기의 친숙함을 맛 볼 수 있는 재미에 있다고 보겠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적 재능이 여지없이 빛을 내는 것은 작지만 작지 않은 < 사랑 - 관계 >를 교묘히 이루어 가면서 시적 화자가 드나들고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가끔은 그의 시가 체험의 구체성이 증발되어 언어의 구조만이 공허하게 노출되는 경우도 있었기에 이번 시집에서는 함께 넣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이것은 긍의 언어에 대한 다소의 편협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필자의 소견 좁은 생각으로 다음 시집에서 만나기를 기약하자는 뜻이었다.
바꿔 말하면 사람이 일상적인 삶의 틀 안에 갇히게 될 때 눈 앞의 필요 이외는 바라보지 못하게 되어 삶의 움직이는 실체와 영원한 본질을 놓쳐버리는 함정에 빠질 위험성도 초래된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꽃을 보거나 자연을 관광할 때 "와아! 좋다"라고 감격을 하면서도 그 다음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공통된 점이다. 분명 그들의 마음속에는 시적 감각이 동요 되고 있으면서도 막상 그것을 감탄사 이외의 다른 언어로서 표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은 평소의 언어생활에서 시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시적 언어란 진부하지 않고 새로운 감각을 지닌 세련된 언어라고 한다.
우리말은 예부터 형용사나 부사가 발달하여 아름답고 고운 언어를 다재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짜여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단조로운 탓인지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는 극히 제한되고 자기 중심적이며. 될 수 있는 한 언어를 축약하려는 경향이 짙다.
가령 주어와 수식어를 생략하고 술어로서만 의사소통을 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대개가 명령어로 되어 버려 상대방이 본인의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감정을 사기가 십상이다.
이보다 더한 축약된 언어로 창작하는 시인의 시어가 쉽게 독자들에게 납득될 리는 없다. 그래도 시어는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리고 시인의 의식에 의해서 나타난 영감과 더불어 체험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시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쳐 생산된 한 편의 시는 시인의 끝없는 퇴고(推稿)에 의해 세상 밖으로 튀어 나와야 될 것이다.
이제 허효순은 그의 첫 시집을 가짐으로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좀 더 냉철하게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항상 노력하는 그리고 잠재력을 충분히 갖고 있는 후배 시인이기에 믿음으로 이 평을 쓴다.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시적 모험을 통해 누구나 공감하고 깊은 감동을 안겨줄 수 있는 좋은 시들이 속속 탄생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관계없는 것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계를 맺기를 기대하면서 이번 시집의 읽기를 마친다.
강가에서 수석탐사를 해 보신 분들은 이해갈 것이다. 수석(壽石). 시는 수석이다. 드디어 한 여자가 문단의 강가로 무엇을 찾겠다며 맨발로 나타났다.
깊이
넓이 없는
파장으로
맡은 죄
서글픔 하나 안고
그렇게 왔다.
숨죽은
기억의 벽
살아
숨 쉬는 벽
그 남자
가
만든 벽
허물어지지 않는
벽….
- < 한 여자가 찾아왔다 >
관 계
허효순 시집, 2008
첫댓글 사실 이런글을 출력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