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회 한국수필작가회 동인작품상에 염혜순이 '홑'과'겹' 사이 선정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수상자 : 염혜순
수상작 : '홑’과 ‘겹’ 사이
노을 속에서 분꽃이 핀다. 홑겹이다. ‘홑겹’! ‘홑’은 하나고 ‘겹’은 하나가 아닌데 ‘홑겹’은 한 단어다. 홑도 겹일까? 생각해 보니 겹은 홑이었다. 홑이 모여 겹이다. 홑도 이미 겹의 일부인가? 분꽃은 얇은 꽃잎을 파르르 떨며 하늘과 바람으로 겹을 이룬듯하다.
멀리 바라보니 산이 겹겹이고 하늘엔 구름이 겹이다. 그러나 산은 가까이 가보면 홑이고 구름도 바람에 흩어지면 홑이다. 거리의 사람들 또한 겹인 듯 걸어가지만 혼자가 모였다. 여럿이 모였다고 다 겹은 아니다. 산이 이어져야 산맥을 이루고 사람은 서로 이어져 애틋한 마음이 머물러야 겹이다. 문득 나는 홑이면서 겹이란 생각이 든다.
첫아이 때였다. 아기가 낯을 가리기 시작하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안으면 마구 울었다. 말도 못 하는 어린 것이 나를 찾느라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아기가 제 껍데기를 찾는다고 어서 와서 안아주라며 나를 불렀다. 아기는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나를 보는 순간 활짝 웃으며 온몸을 뻗어 안겨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나를 안다. 내 속에서 열 달 자라 세상에 나온 생명이 제 어미를 알아본다는 그 신비로웠던 감동은 아직도 선명하다.
어른들의 ‘껍데기’라는 말이 낯설면서도 오래 남았다. 껍데기는 겹의 가장 밖이다. 무르기만 한 내가 누군가의 껍데기라니. 신기하도록 사랑스러운 내 알맹이를 꼭 끌어안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킬 것이라고. 나의 알맹이가 되어 내 몸을 통해 세상에 온 생명이다. 나는 기꺼이 단단한 껍데기가 되어 말랑거리는 여린 것을 감싸 안으리라. 세상에 하나뿐인 끈으로 이어져 겹이 되는 전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결혼할 무렵 나를 둘러싼 ‘껍데기’를 벗고 홑인 듯 부모 곁을 떠났다. 그리고 한 남자와 겹을 이루어 새롭게 살아가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알맹이를 공유하는 껍데기가 되어 서로의 무른 부분을 덮으면서 살았다. 때로는 이미 굳어버린 서로에게 긁혀 아프기도 했지만, 부족한 대로 우리 안의 아이들에게 찬바람 들세라 온몸으로 그들을 안았다. 어미와 아비라는 이름의 ‘껍데기’는 겉으로는 바람과 햇살에 삭아가며 차츰 굳어 단단하고 거칠어졌다. 속으로는 여린 것들을 보호하는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태어나 무엇을 인식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겹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알맹이였다가 언제부터인가는 껍데기가 되었다. 껍데기로 서로를 보듬어 안을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흩어지고 마는 모래더미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어진 마음으로 흘러가 포근히 안으면 겹은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나는 때로 세상에 나 혼자만 서 있는 듯 뼛속까지 시리기도 하지만 전해오는 겹의 온기에 안도한다. 사랑이란 이름은 마음이 따스해지는 이어짐으로 새 힘을 얻는 나만의 퀘렌시아다.
그곳에서 ‘껍데기’는 언젠가 벗겨져 떠나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나의 가장 바깥을 감쌌던 아버지도 남편도 오래전에 떠나갔지만 기억 속에선 언제나 마음의 울타리로 남아있다. 구순이 넘은 엄마는 말라가는 몸과 마음으로 아직 우리 곁에 계신다. 주름진 얼굴과 흔들리는 기억으로 엄마의 자리에서 오래된 그곳을 지키며.
엄마를 부축하고 병원 가던 날 엄마는 몇 발짝 겨우 걷더니 휠체어에 주저앉으셨다. 나를 낳고 기른 엄마가 이제 걷기도 힘든 시간을 지나신다. 사그라드는 몸과 힘없는 미소가 홑겹으로 흔들렸다. 내가 울면서 찾다가 온몸으로 안겼을 젊은 엄마는 기억 어딘가 깊이 내려앉은지 오래다. 아니, 나의 시간 속에 엄마는 켜켜이 쌓였을 것이다. 휠체어를 밀며 생각했다. 나도 서서히 삭아가며 내 딸의 기억 어딘가에 켜를 이루며 남을까. 껍데기로 스러지는 엄마를 밀고 가는 저녁을 딸애가 지켜보고 있다. 그 눈빛에 가득한 말 없는 언어가 내게 스며왔다. 나는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엄마에게서 나에게로 그리고 딸에게로 이어지는 겹이 보이는 듯했다.
분꽃 까만 씨앗을 땅에 묻었다. 흙에 덮여 씨앗은 제 껍질 속의 알맹이를 부여안고 꿈을 꾸었다. 알맹이는 땅 위에 봄 햇살이 도톰하게 쌓일 때쯤 싹을 틔웠다. 여름 어느 저녁 분꽃이 피었다. 꽃은 결코 혼자 피지 않는다. 인내의 시간을 겹겹이 두르고 말없이 꽃을 밀어 올린 뿌리와 씨앗의 껍데기가 꾸던 꿈이 함께 피기 때문이다. 봄도 여름도 짙은 향기로 화사한 색으로 겹겹이 쌓여 꽃이다. 해가 뉘엿할 무렵에야 피는 분꽃은 어두워지는 세상을 맞는 두려움 속에서도 홑겹으로 꿋꿋하다. 향기롭게 퍼지는 꽃의 시간을 보니 그 속에 내 시간이 겹쳐온다. 그 아득한 시간 속에 바람이 불어 젊은 엄마에게서 나던 코티분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지금’은 수없는 어제가 쌓여 겹이고 ‘나’는 마음이 닿았던 사람들과의 이어짐으로 겹이다. 내가 분꽃처럼 당당해야 할 이유는 꽃향기처럼 가득하다. 나도 분꽃도 홑이지만 겹이다. 홑겹. 겹은 흩어진 것은 갖지 못한 따스함과 단단함으로 어둠 속에서도 향기가 된다.
‘홑’과 ‘겹’ 사이 다져진 시간과 말 없는 믿음과 우러나는 응원과 따뜻한 이어짐으로 꽃이 피는 저녁이다. 꽃과 어우러지는 내 저녁하늘엔 구름을 붉게 적시며 노을이 진다. 이슥한 세월 속에서 나도 노을이 된다. 홑과 겹 사이 어디쯤에서.
첫댓글 염혜순 선생님 제13회 동인작품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