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31. 수요일
아외로워
축구팬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많은 시즌동안 많은 경기를 보게 된다. 많은 경우 시간이 가면 까맣게 잊혀지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시즌과 경기가 있다.
전북FC의 팬인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은 2006년이었다. 그 중에서도 상하이 센화 와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8강전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전북은 상하이 원정에서 0:1로 패했고, 홈에서 2점차 이상의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이 경기에서 전북은 무려 4골을 몰아넣으며 4:2로 승리했다. '역전의 명수' 전북이 탄생한 경기였고, '전북극장' 이 개봉한 경기였으며, '강희대제'가 등극한 경기였다. 이 역사적인 경기에서 골을 넣은 선수 중에 정종관이 있었다. 그의 골이 없었다면 전북의 영광스런 2006년도 없었을 것이다.
어제 정종관 선수가 자살했다. 승부조작에 연루되어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故정종관
그는 2007년 말에 터진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병역비리 파동때 전북을 나갔다. 모르긴 몰라도 전도유망한 선수가 단박에 실업자 처지가 되면서 승부조작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나 싶다. 그의 사망소식이 처음 기사에 오르면서 전북 구단과 팬들은 술렁였다. 정종관 선수가 전북 선수인 것으로 기사가 나갔기 때문이다.
요즘 프로축구가 승부조작으로 한참 시끄러운데다 구단마다 자신들이 '승부조작 청정지대' 임을 부르짖는 때인지라 전북 팬들은 정종관과 전북 간에 연관이 없다고 선을 긋기 위해 노력했다. 혹자는 전북구단이 언론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야 한다고도 했다.
사실 검색엔진에 '정종관' 검색만 해도 그가 2007년 말, 전북을 나와서 서울유나이티드(챌린저스리그에 참가하는 아마구단)에 입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마당에, 일부 몰지각한 언론사들이 정종관이 전북 소속인양 기사를 내보낸 것은 소름 돋을 만큼의 무성의-무지의 소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종관과 선긋기가 일면 씁쓸한 것도 사실이다. 그가 비록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전북을 떠나긴 했지만 그는 2005년부터 시작된 '전북 신화'의 초반부를 써나간 당당한 주인공이었다. 오늘날 전북이 신흥 명문으로 떠올라 아시아 최강의 팀이 된 데에는 정종관의 공로도 크다.
정종관은 미드필드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몫을 해내는 선수였다. 염기훈 같이 주목받는 선수도 아니었고, 제칼로처럼 쇼맨쉽이 있는 악동도 아니었다. 최진철같은 국가적 레전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최강희감독의 의도와 전술을 성실하고 정확하게 필드에서 실행했다. 팀의 승리와 영광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던 선수였다. 나는 그의 전북시절 활약에 아직도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선수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심지어 자신이 헌신했던 팀의 팬들은 '너는 우리 팀과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인간으로써의 목숨과 함께 선수로써의 목숨도 잃었다. 그 누구도 그를 '우리 팀의 일원' 으로 여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물론 정종관선수와 전북구단은 현재 직접적인 연관도 없고, 전북팬의 반응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승부조작은 명백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의 상황은 축구에 평생을 헌신한 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비극적이다.
그렇다. 승부조작은 끔찍한 비극이다. 승부조작과 연루된 팀 팬들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겼다. 이번 사태에 8명의 선수가 조사 받고, 4명이 구속된 대전시티즌 팬들은 지금 패닉에 빠져있다. 대전은 열악한 시민구단으로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대전시티즌의 팬들은 팀이 꼴찌를 했을 때도, 연패를 할때도 당당했고 구단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지금 처음으로 오욕감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

대전 시티즌의 엠블렘
지난 일요일 대전의 경기는 비극의 단면이었다.
일각에는 K리그를 폄훼하는 이들도 있지만, 경기장에서 느껴지는 선수들의 투지와 열정은 월드컵 못지 않다. 이 날 경기에서 대전 선수들의 투지는 비장함을 넘어 슬펐다. 그들은 대전의 백전노장 골키퍼 최은성의 말마따나 '살기위해 뛰었다.'
경기 상대는 올 시즌 리그 선두이며, 아시아의 바르샤라 불리는 전북이었다. 이 날 경기에서 대전은 대단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대전의 황진산은 전북 수비수 두 명을 제치고 그림같은 골을 성공시킨 뒤, 자기 가슴에 있는 대전 시티즌의 엠블럼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는 자신의 골이 대전 구단의 명예를 되찾는데 도움이 되길 원했다.
그리고 벤치에서 현수막을 건내받았다. 거기에는 하얀 천에 손으로 쓴 조악한 글씨로 '신뢰로 거듭나겠습니다' 라고 쓰여있었다.
페널티킥으로 두 번째 골을 넣은 대전의 주장 박성호는 골을 넣은 뒤 대전 서포터석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대전의 선수들은 상처받은 팬들에게 승리로 보답하고 싶어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승리를 원했다. 대전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미친듯이 뛰어다녔다.
그러나 전북은 강했고 대전은 2:3으로 역전패했다. 대전 선수들은 후반 45분에 역전골을 허용하고 필드에 절망적으로 쓰러졌다. 내가 기억하기로 선수들이 이정도로 실망하는 모습을 본 것은 월드컵 이후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들려오는 바에 따르면 대전의 선수들은 경기후 라커룸에서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고 한다.

"신뢰로 거듭나겠습니다"
포탈사이트들을 살펴보면 가관이다. 굶주린 언론들은 어떻게 하면 이번 건으로 기사 하나 더 쓸까 고민하고 있고, 몰지각한 이들은 '케이리그 누가 본다고 계속 하냐, 없애버리자' 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스포츠의 본질을 모른다.
프로농구 전자랜드에서 뛰는 서장훈 선수는 수비농구가 재미없다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경기에 패하면 당장 라커룸이 초상집이 되는데 재미가 무슨 소용인가. 이기는 게 곧 재미있는 농구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경기에 지면 당장 초상집이 되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모두가 매 경기 목숨을 걸고 뛴다. 경기장에서 선수들을 지켜보는 팬들도 그것을 안다. 알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대구FC나 강원FC같은 약팀에 팬이 있을 수 없다. 매 경기가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포츠에 미친다.
승부조작이 흉악한 범죄인 이유는 스포츠 토토를 통해 부당한 이익을 취해서가 아니다. 수많은 선수들, 팬들이 가진 순수한 열정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단 한번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모조리 쏟아붓는 선수들과 거기에서 희망을 얻는 사람들을 한 순간에 바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경기에서 대전이 보여준 것은 승부조작이 가져온 비극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축구를 지속해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보고 케이리그 팬으로 남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프로축구에 승부조작이 얼마나 심각하게 퍼져있었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돈과 폭력을 동원한 승부조작을 비극적인 범죄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순수한 열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가 승부조작을 발본색원해야 할 이유는 이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도박의 룰을 준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난 일요일 경기에서 대전시티즌은 그 순수함을 보여줬다.
이 끔찍한 사건을 통해 신이 난 것은 몰상식한 언론사와, 한국 축구를 전부터 탐탁치 않게 여겼던 몇몇 비뚤어진 타 종목 및 해외 스포츠 팬들이다. 이들은 축구의 승부조작에 신이 났다. 축구의 가치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단언컨데 이들은 스포츠의 진정한 감동을 느껴보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승부조작에 관여한 선수들은 철저히 가려내서 처벌해야 할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턱대고 물어뜯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팀과 팬들을 배신하지 않은 선량한 선수들은 자신의 인생을 바쳐 우리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을 줬다.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2002년의 영광도 맛볼 수 있었다.
승부조작으로 배신감을 느낀 것은 어쩌면 팬보다 동료 선수들일 것이다. 승리를 위해 함께 하는 줄 알았던 동료가 알고보니 우리의 패배를 위해 뛰고 있었던 것이다. 지독한 고통을 안고 선수들은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 아무 죄 없이 팬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그라운드에 쓰러져 눈물 흘리던 대전 선수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이 선량한 선수들을 버릴 수 없다. 나는 갖은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팀과 팬을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는, 이 착해빠진 선수들을 변함 없이 사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