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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연합군의 침공과 백제의 멸망1 (백제말기의 정치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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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백제말기의 정치상황
출처: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6권'
제1절 의자왕 말기의 정치상황
1. 군대부인의 집권
의자왕대는 15년부터 후기로 설정되고 있다. 그것은 이 무렵에 들어와서 정치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A-① 3월에 왕이 궁인과 더불어 음황 탐락하여 술을 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16년).
② 영휘 6년 을묘 9월에 유신이 백제로 들어가 도비천성을 쳐서 이겼다. 이때 백제는 군신이 사치하고, 음일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이 원망하고 신령이 노하여 재변괴이가 여러 번 나타났다. 유신이 왕에게 아뢰기를 “백제가 무도하여 그 죄가 걸과 주보다 더하니 참으로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조문하고 죄를 칠 때입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권42 열전 2 김유신전 중).
③ 5월에 적색마가 북악의 오함사에 들어와 울면서 불사를 돌기 수일에 죽었다『(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15년).
『삼국사기』의 의자왕 본기에서는 의자왕이 정치를 그르치기 시작한 시기로 왕 16년 3월을 언급하고 있다. 왕이 궁인과 더불어 음란하며 술을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자세한 상황을 설명
하고 있는『삼국사기』의 신라 측 기록인 김유신전에서는 의자왕 15년 9월로 나오고 있다. 백제의 군신이 사치하고 음란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김유신이
언급하고 있는 괴이한 일이 백제에서 15년 5월에 비로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적색마가 오함사에 들어와 울다가 죽었던 것이다. 또한 김유신에서 당시 백제의 사정과 중앙과 지방에 대한 정보가 논의되고 있는 점도 그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의자왕이 재위 15년에 이르러 이러한 상태로 바뀌게 된 원인은 자세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듯이, 의자왕의 전제왕권 확립에 대한 자신감의 반영으로 생각되고 있다. 2월에 태자궁의 화려한 수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태자의 왕위계승을 확립시켜두겠다는 것으로, 그의 정치적 위치를 더욱 부각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왕궁의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다. 이 역시 대규모의 토목공사라는 점에서 의자왕이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15년 9월에 들어오면서 의자왕이 더욱 강력한 전제정치를 행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이제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의자왕이 자신의 왕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으로 의자왕의 전제왕권 행사는 의자왕대에 새로운 정치적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의 정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의 중국 측과 일본 측 기록을 통해서 짐작
할 수 있다.
B-① 밖으로는 직신을 버리고 안으로는 요부를 믿었는데 형벌이 미치는 것은 오직 충량이며 총애가 더해가는 것은 반드시 도행이었다.( `당평백제비')
② 혹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고 말한다. 군대부인 요녀의 무도로 말미암은 것으로 요녀가 국가의 권세를 마음대로 하여 현량을 주살한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부른 것이었다.(『 일본서기』권26 제명기 6년).
당과 고구려 승려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일본 측 기록에 비슷한 사실이나오고 있다. 이것은 매우 신빙성이 높은 기록으로 의자왕대의 정치를 살피는 좋은 단서가 된다고 하겠다. 위의 기록에서 언급되는 요녀가 누구인지, 요녀 혹은 요부로 불리는 군대부인은 누구일까. 요녀가 군대부인으로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의자왕의 왕비로 생각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팔찌의 명문에서 보여주듯이 대부인은 왕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C- 백제의 의자왕, 그의 처 은고, 그의 자 융 등을 비롯하여, 그 신하인 좌평 천복, 국변성, 손등 등 모두 50여인이 가을 7월 13일 소정방 장군에게 잡혀 당으로 보내졌다( 『일본서기』권26 제명기 6년 10월).
『일본서기』의 제명기는 백제가 멸망한 후 소정방에 의하여 당으로 끌려간 구체적인 인물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다. 이때 은고는 의자왕의 처로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 의자왕의 왕비가 은고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군대부인 은고가 등장하는 시기는 대체로 의자왕 15년 무렵으로 생각된다. 의자왕 대에서 이러한 변화를 찾을 수 있는 시기는 바로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16년(646)에 들어와서 의자왕이 직신을 버린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좌평 성충이 극간하니 왕이 노하여 옥중에 가두었다. 이로 인하여 감히 간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말라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상서하기를(하략)『(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16년 3월).
왕이 궁인과 더불어 황음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자, 좌평 성충이 극간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투옥되었던 것이다. 그의 투옥 이후 신하들이 의자왕에게 간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성충이 군대부인의 집권과 함께 백제의 정치가 무도해졌음을 비판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상황전개는 의자왕의 왕비인 은고의 활동과 함께 이러한 정치적 변화가 함께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은고의 집권 시기는 대체적으로 의자왕
15년 9월 무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은고의 등장이 가지는 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은고의 등장과 함께 백제가 의자왕 후기에 들어와서 전제왕권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최근의 논의에 의하면 전기는 귀족세력과 왕권이 타협하는 시기였으며, 후기에 들어가서 의자왕이 왕권강화에 반발하는 귀족세력을 대거 제거함으로써 권력의 일방 독주가 가능한 강렬한 왕권을 구축했다고 본다. 즉 의자왕 15년에 들어와서 지배세력의 교체와 더불어 국왕을 축으로 하는 일대세력의 재편성기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의자왕 15년에서 황극기의 정변에서 찾고 있는 것이어서 따르기는 어렵다. 은고의 등장 내용과 정변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호관련성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 황극기 정변 : 『일본서기』 권24 天豊財重日足姬天皇皇極天皇 원년 (642)
춘정월 乙酉
봄 정월 을유(29일). 백제에 사신으로 갔던 大仁 阿曇連比羅夫(다아즈미노무라지히라부)가 筑紫國에서 역마를 타고 와서 “백제국이 천황이 崩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사를 파견했는데, 臣은 그 조문사를 따라 함께 筑紫國에 도착하였습니다. 臣은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먼저 혼자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大亂이 일어났습니다.”라고 하였다.(『三國史記』에는 武王사후에 백제에서 大亂이 일어났다는 기사가 없다)
2월 丁亥朔戊子
2월 정해삭 무자(2일). 阿曇山背連比羅夫·草壁吉士磐金(쿠사카베노키시이와카네)·倭漢書直縣(야마토노아야노후미노아타이아가타)을 백제 조문사가 있는 곳에 보내어 그쪽 소식을 물었다. 조문사는 “百濟國主(의자왕)가 臣들에게 ‘塞上(塞上: 塞城이라고도 한다. 白雉元年 2月條에 부여풍인 豊璋의 동생으로 나온다)은 항상 나쁜 짓을 한다. 귀국하는 사신에게 딸려 보내 주기를 청하더라도 天朝에서는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제 조문사의 從子등이 “지난해 11월 大佐平 智積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崑崙(인도차이나 및 말레이반도 인근) 사신을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금년 정월에는 國主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弟王子와 자식 翹岐, 누이동생 4명, 內佐平 岐味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의자왕의 정치가 이와 같이 변화하게 된 것은 '이때서야'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의자왕은 무왕대의 전제왕권을 바탕으로 전기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더욱 강력한 왕권을 추구해왔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자왕 15년의 정치적 변화는) 의자왕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자신감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자신의 의사대로 왕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의자왕 후반기의 정치적 변화가 B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백제 내부의 분열, 다시 말해서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왕비가 왕의 전제왕권 행사를 틈타서 권력을 오로지 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전제왕권의 내부붕괴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의자왕 15년 무렵은 의자왕의 강화된 전제왕권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그것은 권력의 분산과 왕권의 약화라는 정치의 파행으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의자왕 후반기는 통합의 시기보다는 분열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2. 달솔 신분의 정치적 성장과 왕족들의 재등장
전제왕권을 확립한 의자왕이 환락에 빠지고 안으로는 요녀를 가까이 함으로써 나타난 변화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세력변동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서 보여주듯이 군신이 사치하였다는 말은 성충과 같이당시 의자왕의 정치에 협력하는 인물들이 물러나면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음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의자왕 전기에 활동하던 인물의 축출과 제거를 살펴보자. 좌평 성충의 투옥과 사망이 잘 말하여준다. 그것은 좌평 흥수의 유배로 이어졌다.
흥수가 오래 동안 유배 중에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의 말을 쓸 수가 없다『(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20년).
의자왕 20년의 기사를 보면 당시 좌평 흥수는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에 유배되어 있었다. 흥수가 유배된 시기나 그 배경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성충이 의자왕에게 간언을 올린 이후에서 얼마 경과되지 않은 시기에 유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투옥과 유배 역시 군대부인에 의하여 단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의자왕이 총애한 군대부인 요녀가 정치상의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현량·충량·직신으로 표현되는 인물들이 제거하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좌평 임자의 예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좌평 임자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전에 상세히 기록되고 있다.
이에 앞서 조미곤 급찬이 부산현령으로 있었던 바, 백제에 사로잡혀 가서 좌평 임자의 집종이 되었는데, 일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정성껏 하여 태만한 적이 없었다. 임자가 가긍히 여기어 의심치 않고 마음대로 출입하게 하였다. 이에 그가 도망해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김유신에게 아뢰었다. 유신은 조미곤이 충정하고 쓸 만함을 알고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임자가 백제의 일을 전담한다 하니, 함께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계제가 없었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서 말하라.”하니 대답하기를 “공이 나를 불초하다 않으시고 시키시니 죽더라도 뉘우침이 없겠습니다.”하였다. 그리고 다시 백제로 들어가서 임자에게 아뢰기를 “제 스스로 생각에 이미 국민이 되었으니, 국속을 알아야 하겠다 하여 나가 놀기를 여러 10여 일 동안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니,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다시 왔습니다.”하였다. 임자가 믿고 책망하지 아니하였다. 조미곤이 틈을 타서 보고하기를 “전번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인즉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유신이 나에게 일러 다시 가서 그대에게 고하라 하며‘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는 일이니, 만일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가 우리나라에 의지하고, 우리나라가 망하면 내가 그대의 나라에 의지하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임자가 듣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조미곤이 황공하여 물러와 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어 달 만에 임자가 불러서 묻기를 “네가 전번에 말한바 유신의 말이 어떤 것인가.”하였다. 조미곤이 놀라고 두려워 전에 말한 대로 대답하니, 임자가 “네가 전한 말을 내가 잘 알았다. 가서 알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미곤이 와서 말하고 백제의 다른 중앙과 지방의 일도 상세하게 말하니 여기서 신라는 더욱 백제를 병탄할 모의를 급히 하였다( 『삼국사기』권42 열전 2 김유신전 중).
김유신이 임자에게 관심을 가진 시기는 의자왕 15년 9월이다. 백제의 군신이 국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백제 침공을 태종무열왕에게 건의를한 바로 직전의 일이다. 여기에는 임자의 집종이었던 조미곤이 백제의 사
정을 김유신에게 알린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임자가 좌평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백제에서 중요한 정치적 위치에 있었던 인물임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임자의 지위가 매우 불안하였던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유신은 임자를 회유하려고 하였던 것이며, 임자는 두어 달이라는 기간 동안 상당히 고민하였다. 마침내 임자는 김유신에게 그의 의견을 따를 것임을 조미곤을 통하여 알리게 되었다. 이것은 좌평 세력의 소외를 알려주는 것이며, 동시에 군대부인의 집권 이후 백제 내부의 분열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백제의 사정은 자세히 신라에게 전달되었으며,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군대부인의 집권 이후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받았던 인물들은 좌평 신분층(성충이나 흥수, 그리고 임자 모두 좌평이었다)이었으며, 좌평 세력의 정치적 몰락은 군대부인의 집권과 함께 달라진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군대부인의 집권과 함께 등장한 세력은 어떠한 세력일까. 역시 의자왕 20년의 군신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때 의자왕에게 그들의 의견을 관철시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D-① 달솔 상영 등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당나라 병사는 멀리서 와서 속전할 의욕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할 것이요. 신라인은 앞서 아군에게 여러 번 패하였으므로 지금은 우리의 병세를 바라보고 두려워할 것이다. 오늘의 계획은 당나라 병사의 길을 막아 그 군사의 피로함을 기다리고,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를 꺾은 후에 적당한 때를 엿보아 합전하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주저하여 어느 말을 따를 지 알지 못하였다『(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20년).
② 이때에 대신들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오랫동안 유배 중에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쓸 수 없다.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소로를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이때를 당하여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하니 왕이 그렇게 여겼다(동상).
위의 사료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오자 의자왕이 이를 듣고 군신회의를 소집해서 방어 대책을 논의한 것이다. 첫 번째 사료는 좌평 의직이 대당 선제공격(당나라 군대를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 역시탄현을 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을 주장하자, 그것을 반대한 내용이다. 이것을 주장한 사람들은 상영 등이라고 되어 있다. 상영은 이때 달솔 신분이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상영의 의견을 듣고 나서 결정을 주저하고 만다. 이에 마침내 유배 중이었던 좌평 흥수의 의견을 구하게 되었다. 그만큼 상황이 긴박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흥수의 의견은 성충 및 의직의 견해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의 의견 역시 의자왕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신들이 그의 의견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대신들은 아마도 상영과 관련되는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좌평 신분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달솔신분의 의견이 채택된 것이다. 당시 군신회의에서 이들 달솔신분의 세력이 강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달솔은 본래 군신회의 구성원이 아니었다. 따라서 달솔에 속하던 인물들이 군신회의에 참여하게 된 것은 좌평의 정치적 지위가 그만큼 상대적으로 낮아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달솔 관등에 속한 인물들이 군대부인의 집권과 함께 새로이 대두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 세력은 군신회의에 참여하여 좌평신분을 대신하여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 세력(달솔)은 좌평 신분으로 승진하였다. 그것은 황산벌 전투의 결과를 설명해주고 있는 신라 측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백제의 군사가 대패하여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 상영 등 30여인은 사로잡히었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년 7월).
상영이 좌평으로 언급되고 있다. 달솔에서 좌평으로 승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군신회의에서) 대신라 선제공격을 주장한 달솔 상영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상영은 좌평으로 승진하여 황산벌 전투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좌평신분의 쇠퇴와 달솔신분의 성장'과 함께 맞물리는 정치적 변화는 왕족들의 재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의자왕 17년(647)에 단행된 왕서자 40여인에 대한 좌평 책봉에서도 살필 수 있다.이것은 그 인원이 5명으로 수적으로 엄격한 제한이 있던 좌평의 지위에 커다란 변화를 준 일대사건으로, 당시 좌평의 정치적 역할을 그만큼 쇠퇴시킨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때 좌평에 임명된 왕서자들에게는 식읍이 함께 수여되었다. 이들에게 정치적 지위만이 아니라 경제적 기반도 함께 보장해준 것이었다. 이 역시 군대부인 은고의 집권으로 일어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왕자들의 활동 역시 백제 멸망기에 들어와서 집중적으로 찾아진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 시 왕자들은 좌평과 함께 실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년 7월.) 왕자가 좌평으로 하여금 소정방에게 퇴병을 바라는 글을 보내고, 또한 상좌평을 시켜 음식을 보낸다든지, 다시 왕서자가 6인의 좌평과??함께 죄를 빌었다든지 하는 예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태자 이외의 이모제를 포함한 다른 왕자들의 대거 등장은 한편으로 왕족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왕족들의 활동이 의자왕 15년 이후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있다. 왕족들의 활동은 백제의 대왜외교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의자왕 2년에 일어난 (황극기) 정변의 결과 왜로 쫓겨난 왕제들의 활동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백제 왕족들은 대화연간을 거치면서 단절된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를 복원시키는 등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655년 백제를 주도하던 정치세력의 교체와 맞물리면서 더욱 진행되었다. 이러한 왕족들의 모습은 부여풍이 백제부흥운동에서 활동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자왕 15년 군대부인의 집권이후 의자왕 초기의 정치를 이끌던 인물들과는 다른 새로운 세력이 주도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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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자의 교체
의자왕 후반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나타난 또 다른 변화는 태자의 교체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는 40여인의 왕서자를, 『일본서기』제명기에서는 의자왕에게 13인의 왕자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의자왕의 아들로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효·태·융·연·용·부여강신 등이다. 무왕과 마찬가지로 의자왕에게도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 왕자들의 상호관계는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태의 경우 둘째 아들로 언급되고 있는데, 일본학계는 융과 태, 효와 연 형제가 서로 모계가 다른 인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은고의 집권을 고려할 때 적어도 효와 융의 경우 이모형제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경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효와 융의 두 사람이 태자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의자왕대 과연 몇 명의 태자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복수의 태자로 동시에 두 명을 존재하였음을 상정하기도, 그렇지 않고 교체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한명만이 존재하였다고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두 명이 존재하였으며, 그들 사이에 교체되었다고 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는 또한 누가 첫 번째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그것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태자 교체의 시기에 대하여는 의자왕 15년 군대부인의 집권 이후로 상정된다. 15년 2월 태자궁의 수리 이전인 정월로 생각하는 해석이 있다. 당시 태자가 교체되었기 때문에 태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하는 작업이 뒤따랐던 것으로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자 교체의 시기는 태자궁의 수리(의자왕 15년) 이후 왕서자의 좌평 책봉(의자왕 17년) 이전으로 보인다. 태자궁의 수리를 통한 태자의 정치적 위치의 강화는 왕서자의 지위하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군대부인 은고는 집권 이후 태자의 교체를 요구했을 것
이며, 왕서자의 정치적 위치를 높이는 작업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첫 번째 태자는 누구일까의 문제가 대두된다. 필자는 효가 첫 번째 태자로 이후 융으로 바뀌었으며, 그 때 융의 어머니는 은고였다고 이해하면서 당시의 정치변동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융이 첫 번째 태자이며, 이후 효로 바뀌었으며, 효의 어머니가 은고라는 것이다.(해석이 있다) 현재 융이 첫 번째 태자라는 점을 여러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이 점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의자왕대의 태자기록은 매우 복잡하다. 때문에 여러 다양한 해석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복잡한 사료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대체적인 모습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1차 자료부터 그
사료적 가치와 신빙성여부를 검토하면서 단계적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백제 멸망기를 이해하는 일차적인 자료로서는 「당평백제비(정림사지 5층석탑 기공문)」·「유인원기공비」 그리고『일본서기』제명 6년조에 인용된 「이길련박덕서」 등이 있다. 「당평백제비」는 소정방이 백제에 세운 비이다. 「유인원기공비」도 같은 예에 속한다. 모두 전역의 당사자로서의 체험을 토대로 하고 있는 당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이길련박덕서」는 '이길련박덕'이 자기의 공적을 전하기 위하여 684년 이후에 기록한 것인데, 백제멸망과정을
월·일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들 기록은 모두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융이 태자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백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반영해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까닭에『구당서』·『신당서』등의 중국
측 정사기록에서도 융을 태자로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 제4차 견당사의 일원이었던 伊吉連博德이 당을 오가며 겪은 일 및 여정을 작성한 개인기록물이다. 『日本書紀』齊明紀에만 分註의 형태로 3군데(제명 5년 7월조, 同6년 7월조, 同7년 5월조)에 걸쳐 인용되고 있다. 그 내용은 왜국의 제4차 견당사가 제명 5년(659) 7월에 筑紫에서 출발하여 제명 7년(661) 5월에 귀국하기까지의 왕복과정 및 당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것이다. 내용 중에는 한반도 원정을 앞둔 당이 왜국의 사신단을 長安에 가둔 사실이나 耽羅가 왜국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게 된 경위 등 중국이나 한반도 자료에는 볼 수 없는 내용도 전하고 있어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 齊明天皇5년(659) 추7월 丙子朔戊寅
가을 7월 병자삭 무인(3일). 小錦下840) 坂合部連石布(사카이베노무라지이와시키), 大仙下 津守連吉祥(츠모리노무라지키사)이 唐國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에 道奧蝦夷남녀 2인을 당의 천자에게 보였다. <*`伊吉連博德書)에는“同天皇(齊明) 치세에 小錦下坂合部連石布와 大山下津守吉祥連등이 2척의 배로 吳唐의 길을 이용하여 사신으로 갔다. 己未年 7월 3일에 難波의 三津浦(후쿠오카 하카다)에서 출발하였다. 8월 11일에 筑紫의 大津浦를 출발하였다. 9월 13일에 백제의 南端에 있는 섬에 이르렀는데 섬의 이름은 명확히 알수 없다. 14일 寅時(오전 3시부터 5시)에 두 배가 연이어 대해로 접어들었다. 15일 해가 질 무렵에 石布連의 배가 역풍을 만나 남해의 섬에 표류했는데 섬의 이름은 爾加委이었다. 그때 섬사람들에게 살해당하였다. 東漢長直阿利麻(야마토노아야노나가노아타이아리마)와 坂合部連稻積(사카이베노무라지이나츠미) 등 5인은 섬사람의 배를 훔쳐 타고 도망하여 括州(중국 절강성의 麗水)에 이르렀다. 州縣의 관리가 洛陽京(후문의 동경)으로 보내주었다. 16일 한 밤중에 吉祥連의 배가 越州會稽縣須岸山에 도착하였다. 북동풍이 불었는데 바람이 갑자기 매우 심해졌다. 22일에 행렬이 餘姚縣에 도착하였다. 타고 온 큰 배와 여러 調度物은 그곳에 남겨 두었다. 윤 10월 1일에 越州관아에 이르렀다. 10월 15일 역마를 타고 입경하였다. 29일 달려가 東京에 이르렀다. 천자는 동경에 있었다. (중략) 일을 마치자 칙지가 있었는데 ‘국가는 내년에 반드시 海東을 정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 왜의 사신들은 동쪽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마침내 西京856)에 머물러 특별한 곳에 유폐되었다. (중략) 이로 인해 해를 거쳐 고생하였다. (후략)”고 하였다.>
◇ 齊明天皇6년(660) 추7월 庚子朔乙卯
가을 7월 경자삭 을묘(16일). 고구려 사신 乙相賀取文857) 등이 돌아갔다. (중략) <*고구려 沙門道顯의 `日本世記'에 “7월에 운운. 春秋智(신라의 金春秋)가 大將軍 蘇定方의 손을 빌려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가 스스로 망하였다고 한다. 妖女인 君大夫人이 무도하게 권력을 장악하고 현량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화를 자초한 것이다.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注에 “신라의 春秋智는 內臣 蓋金(고구려의 蓋蘇文)에게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자 당에 사신으로 가서 신라의 의관을 버리고 천자에게 아첨을 떨며 도움을 청하여 이웃나라에 화를 입히고 그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伊吉連博德書'에 “庚申年8월 백제가 이미 평정된 후, 9월 12일 사신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일에 西京(長安)에서 출발하였다. 10월 16일 東京(洛陽)에 돌아와 비로소 阿利麻 등 5명을 만나 볼 수 있었다. 11월 1일에 將軍 蘇定方 등이 사로잡은 백제왕 이하 태자 隆 등 여러 왕자 13명, 太佐平 沙宅千福, 國辨成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조정에 진상하였다. 바로 천자에게 데리고 가니 천자는 恩勅을 내려 앞에서 바로 풀어주었다. 19일에 위로를 받고, 24일에 東京에서 출발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융이 의자왕의 첫 번째 태자임을 주장하는 견해에 의하면 '중국측 자료들은 당이 융을 퇴위시키고 새로이 책립된 은고의 아들 효를 태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정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당은 웅진도독부의 수반으로 백제를 멸망하게 한 장본인으로 규정한 은고의 아들인 태자 효가 아니라 그와는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으면서 일종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융을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한다.
E-① 왕자 융을 세워 태자로 삼고 대사하였다(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4년 5월).
② 당나라 병사가 승전하여 성으로 육박하니 王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쓰지 않고 이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하고, 드디어 태자 효와 함께 북변으로 달아났다. 정방이 그 성을 포위하니 왕의 차자 태가 자립하여 王이 되고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 효의 아들 문사가 왕자 융에게 이르기를 “왕과 태자가 밖으로 나갔는데 숙부가 자의로 왕이 되니, 만일 당병이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이 안전할 수 있겠는가.”하며 드디어 좌우를 거느리고 줄에 매달려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르자, 태가 말릴 수가 없었다. 이에 왕 및 태자 효가 제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정방이 왕 및 태자 효, 왕자 태·융·연 및 대신 장사 88명과 백성 1만2천8백7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내었다(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20년).
이에 의하면 의자왕의 첫 번째 태자는 융이며, 효가 태자가 되면서 융이 왕자로 격하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해석상 약간의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먼저 중국측 기록만 아니라 일본측 기록인 `이길련박덕서'에서 융을 태자로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왜의 경우 오히려 당과 달리 서술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중국 측 기록의 경우 `당평백제비'에서 백제멸망의 원인, 즉 은고의 등장과 그것이 파생시킨 결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 융이 태자로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역시 당시의 정치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 탕평백제비 : (중략)...요해처에 있는 구이(九夷)는 만리에 뚝 떨어져 있어서 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감히 천륜(天倫)을 어지럽혀 동쪽으로는 가까운 이웃을 쳐서 가까이 중국의 (밝은) 조칙(詔勅)을 어기며, 북쪽으로는 역수(逆?)와 연계되어 멀리 효성(梟聲)에 응한다. 하물며 밖으로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 요망한 계집을 믿어 오직 충성되고 어진 사람한테만 형벌이 미치며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이 먼저 총애와 신임을 받아 표매(標梅)에 원망을 품고 저축에 슬픔을 머금는다
....(중략)...그 왕(王) 부여의자(扶餘義慈) 및 태자(太子) 융(隆) 이외 왕자(王子) (餘)효(孝) 13인은 대수령(大首領) 대좌평(大佐平) 사탁천복(沙?千福), 국변성(國辯成) 이하 700여 인과 함께 이미 궁궐에 들어가 있다가 모두 사로잡히니 말가죽을 버리게 하고 우거(牛車)에 실어다가 잠시 있다가 사훈(司勳)에 올리고 이에 청묘(淸廟)에 드렸다....(중략)
효와 융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구당서』소정방전이다. 소정방전에서는 의자왕의 적손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손으로서 문사를 언급하고 있다. 문사는 태자 효의 아들이다. `부여융묘지명'을 통
해서도 융과 문사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이 드러난다. 이것은 태자 효가 의자왕의 첫째 아들로서, 적자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만일 융이 이때 첫 번째 태자였다고 한다면, 두 번째 태자인 효가 의자왕과 함께 웅진으로도망갔을 때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궁금해진다. 융이 아무런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 사실은 그가 두 번째 태자로 당시의 현실에 상당한 정치적 책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까닭에『삼국사기』의 백제본기 기록에서 융을 셋째 아들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 구당서 소정방전 : 달아나는 자들을 추격하여 [도성의] 곽(廓)으로 진입하니, 그 왕 의자(義慈)와 태자 융(隆)은 북쪽 지역으로 달아나고, 소정방은 나아가 그 성을 포위했다. 의자의 차자(次子) 태(泰)가 스스로 왕으로 즉위하니, 적손(嫡孫)인 문사(文思)가 말하기를, “왕과 태자께서 비록 성을 빠져나가셨지만 몸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런데도] 숙부께서 병마를 통할하고 함부로 왕이 되시니, 만약 당군(唐軍)이 물러가면 저희 부자는 당연히 [자리를]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면서 마침내 그 측근들을 거느려 성을 포기하고 내려왔다. 백성들이 그를 따르는 것을 태는 제지하지 못했다. 소정방은 병사들에게 명하여 성에 올라 깃발을 올리도록 하니, 이에 태는 문을 열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대장 이식도 의자를 데리고 와서 항복했으며, 태자 융도 뭇 성주(城主)들과 함께 정성을 올렸다. 백제는 모두 평정되고, 그 땅은 6주(州)로 나누었다. 의자 및 융·태 등을 포로로 잡아 동도[즉 낙양]로 헌상하였다.
중국 측 기록에서 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견해 역시 재고할 필요가 있다. 효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그의 정치적 위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당평백제비'에서는 효를 외왕으로, 『구당서』에서는 소왕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때 융이 태자로 효와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효가 당시 태자였던 융에 버금가는 일정한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태자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태자 다음의 위치로 생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은고의 아들이 효인지, 융인지의 문제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C의 기록(백제의 의자왕, 그의 처 은고, 그의 자 융 등을 비롯하여, 그 신하인 좌평 천복, 국변성, 손등 등 모두 50여인이 가을 7월 13일 소정방 장군에게 잡혀 당으로 보내졌다)은 의자왕과 은고와 융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사실 효는 기록을 보면 융 및 다른 왕자들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가 간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아버지인 의자왕과 왕비 은고가 융과 함께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은고와 효의 관계 보다 오히려 은고와 융이 혈연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즉 은고와 융의 관계를 모자관계로 헤아려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C에서 기록하는 인물의 정치적 위치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모두 당시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다. 우선 의자왕이나 당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은고가 먼저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천복의 경우
13일에 의자는 좌우근신을 데리고 밤에 도망하여 웅진성으로 피난하고 의자의 아들 융은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년 7월).
융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그는 대좌평으로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융과 함께 당에 대한 항복을 주도하였다. 그렇다면 그 역시 대좌평으로서 의자왕 후기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던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여러 마리 여우가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한 마리의 하얀 여우가 상좌평의 책상 위에 앉았다『(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19년 2월).
우가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한 마리의 하얀 여우가 상좌평의 책상 위에 앉았다
백제 말기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재이 기사의 하나이다. 위의 재이 기사가 보여주는 의미는 당시 대좌평이었던 천복이 백제 내부의 분열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과 함께 등장하는 융의 경우에도 일정한 정치적 위치를 갖고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때 사택천복의 등장은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은고의 영향력 아래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
다면 융 역시 상당한 정치적 비중을 가진 인물로서 태자의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 융과 은고의 관계는 모자관계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점에서도 융이 의자왕의 첫번째 태자로 임
명되었다는 설명은 따르기 어렵다. 그러므로 제명기에서 언급된 백제의 인물들은 의자왕 후기의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을 적어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이 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한 배경 역시 그와 같이 단순히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중국으로 끌려간 부여융이 다시 웅진도독으로 임명된 것은 당이 융의 정치적 성격을 충분히 고려한 것이 아닐까 한다. 융이 첫 번째
태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당에 곧바로 항복하였으며, 당의 백제고지 지배정책에 협력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을 유리하도록 정책결정을 하였던 달솔 상영이 다른 인물들과 함
께 신라에 의하여 우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융의 웅진도독 임명은 치열한 백제부흥운동과 그것을 주도하였던 정치세력 및 백제고지에 대한 신라의 정책에대한 당의 견제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도 부여 융에 관한 가장 중요한 1차 자료인 `부여융묘지명'에서 그의 태자경력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은 사실이 주목된다. 다른 중국 측 기록에서 거의 모두 언급하고 있으며, 그의 정치적 경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인 태자경력을 누락시켰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부여융묘지명'에서 융의 조와 부가 기록되면서도 태자책봉 기록에 대한 언급이 없다든지, `흑치상지묘지명'에서도 흑치상지의 임금으로까지 언급되는 부여융의 위치를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오히려 융의 태자책봉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의자왕의 셋째아들로서 정변을 통하여 이루어진 그의 짧은, 비정상적인 태자 책봉과정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의자왕의 정치이념과 관련된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의자왕은 유교적 전제정치를 추구하면서, 특히 효를 강조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효란 충과 곧바로 관련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태자의 이름이 효라는 점이 크게 주목된다. 의자왕은 스스로 해동증자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첫째 아들에게도 이러한 효와 관련된 이름을 부여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이를 통해 이러한 효 사상이 그의 아들에게 이어지며, 더 나아가 백제 사회로 더욱 확산되기를 바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자왕의 다른 왕자들의 이름이 태 혹은 융 등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효 사상을 바탕으로 성장한 백제의 국가적 발전이 더욱 크게, 그리고 융성하게 일어남을 계속적으로 바랐던 사실을 드러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첫 번째 아들에서 효를 강조하며, 두 번째와 세 번째에서 태와 융을 사용하였던 것은 아닐까 한다. 이 경우 융을 세 번째 아들로 기록되고 있는 의미를 그와 같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도 의자왕의 첫 번째 태자는 효로 이해하는 것이 순리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4. 백제의 내부 분열
그런데 의자왕 후기 군대부인의 집권이 의자왕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백제가 멸망의 길로 들어간 것이었다. 군대부인의 집권 이후 정치가 파행으로 계속해서 치달은 결과 당시 백제의 지배층 안에는 심각한 분열과 대립을 일으켰다. 따라서 백제의 정치에 대한 귀족들이나 백성들의 불만은 상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가 파행으로 운영되면서 경제적 파탄도 일어나게 되었다. 우선 의자왕 전기 이래로 대신라전을 집중적으로 전개하면서 나타난 경제적 궁핍이다. 이런 가운데 후반기에 새롭게 등장한 국왕과 지배귀족
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결국 국가재정을 탕진하고 필연적으로 과도한 민력의 수탈을 수반하게 되었다.
아울러 외교정책의 변화도 낳았다. 이 시기의 대외관계에서 백제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변천을 살펴보건대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용병에는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중략) 왕이 돌보지 아니하였다(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16년 3월).
성충은 백제와 나당연합군의 전쟁이 일어남을 예견하며 그 방비를 제의하였으나, 의자왕은 그것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그만큼 백제를 둘러싸고 급변하는 시세의 변천에 둔감하였던 것이다. 군대부인의 집권과 함께 일어난 백제 내부의 분열은 국력을 흩어지게 하였을 것이며, 그만큼 대외관계의 변화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 결과 어수선한 백제사회는 멸망의 징조를 보이게 된다.『 삼국사기』의자왕 본기에는 의자왕 15년부터 20년까지 재이에 관한 기록이 16개가 있어 주목된다. 특히 그것은 19년 이후 집중되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귀신 하나가 궁중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속으로 들어갔다(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19년 6월).라고 하여, 백제의 멸망이 필연적인 사실임이 공공연하게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의자왕대의 재이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불교사원에 관한 기록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비도성과 궁에 집중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구체적으로 기록된 부분은 왕궁·태자궁과 상좌평의 책상이다. 이것으로 보아 재이의 대상이 되는 곳이 왕궁·태자궁, 그리고 상좌평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백제의 통치자인 의자왕을 비롯한 태자·상좌평 등 당시 정치담당세력의 부도덕과 실정을 비판한 것이라 하겠다. 즉 의자왕 15년 이후 군대부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백제 내부의 분열은 결국 백제를 멸망의 과정으로 이끌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