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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궁합을 보러가며
나는 베이비부머 세대 중에서도 가장 많이 태어났다는 58년생 개띠다. 그래서인지 유독 굴곡지고 치열한 삶을 살아온 듯한 58년 개띠는 대학 캠퍼스 생활도 늘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얼룩져 암울했다. 학생들은 공부보다 유신과 군부독재, 통일과 민주화 등과 같은 사상적 논쟁에 휩싸였으며, 남녀의 사랑 또한 외면적인 현실에 지배당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편협한 여자의 사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의 나는 “학생운동이라는 것이 꼭 목숨 걸 듯 투쟁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 화염병의 파편들과 뿌연 최루탄 가루가 덮인 전쟁터 같은 캠퍼스를 걷노라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등이 솟구쳐 오르기도 하였지만, 난 애써 외면했었다.
그리고 보면 난, 시류에 동참하지 못한 아웃사이더였다. 말단 공직에 계셨던 아버지가 “절대로 데모에 가담하지 말라!”고 귀가 따갑게 이야기 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업보와 같은 나의 생물학적 결함으로 인한 과민반응이자 움추림이었다고도 보여 진다.
슬프게도 나는, 생물학적으로 RH(-)A라는 혈액형을 지니고 태어났다. RH혈액형 중에도 최악이다. 한번 다치기라도 한다면, 수혈할 피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다. 그런 까닭에 나는 어려서부터 “과격한 놀이를 해서는 안된다”는 소리에 세뇌 당해왔고, 그 결과 나의 행동은 능동적인 어울림보다는 수동적인 나 중심으로 흘러왔었다.
사실 여자인 내가 “떼를 써서라도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은, 나 자신 또한 그러한 나의 모습이 싫었었고, 대학은 그러한 나를 자유롭고 활기찬 신여성으로 거듭나게 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수를 거쳐 힘겹게 들어 간 대학에서의 생활은, 따돌림 받는 “미운 오리새끼”이자 답답하고 꿀꿀한 나날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러한 나에게 신변의 바람이 인 것은 격동의 10.26사태가 다소 가라앉고 정치적으로도 “서울의 봄”이 온 듯한 3학년 초 어느 봄날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동아리에 가입했던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이성의 떨림을 느꼈다. 상대는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선배였는데, 수려한 외모에 군대를 마쳐서 인지 의사표시와 행동거지가 매우 남달랐었다.
그때 나는, “사랑에 꽂히면, 모든 생각과 오감은 상대에게로 향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득했다. 허나 그것은 나만의 가슴앓이였을 뿐 그는 어떠한 미동도 틈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으며, 이후에 나는 그가 나와 같기를 최면 걸 듯 해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캠퍼스는 물이 오른 듯 꽃과 신록이 만발하였지만 나의 마음은 바싹바싹 타들어 간 채 두어 달이 흘렀다. 그러던 중, “비밀스러운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던 6월 어느 날. 동아리는 북한강이 흐르는 청평으로 MT를 떠났고, 그는 “지성이면 감천”인 듯 나의 최면에 걸려들었다.
모두가 저녁식사와 함께 막걸리를 걸치고 캠프파이어장에 몰려 들 때였는데, 그는 홀린 듯 내 옆에 다가와 앉았고 나는 행여 꿈인 듯했다. 게다가 상큼한 풀향기와 아카시아 꽃향기가 신비롭게 어우러져 몽롱하게 온 몸에 스미어들고, 레크레이션 진행자 또한 혼을 빼놓듯이 흥을 북돋아 주는지라, 그는 불꽃 향연 속에서 더욱더 나의 최면 속으로 빨려드는 듯했고, 나 또한 그 교감 속에서 깨어나기가 싫었다.
그리고 캠프파이어에 불씨만 남을 무렵,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쉬운 여운으로 강을 따라 걷다가는, 한적한 곳에 이르러 강을 바라보며 앉았다. 강은 여기저기서 물안개가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만월이 시리도록 현란한 별들의 호위를 받으며 춤추듯 흐르고 있었다. 동아리 MT라서 남들 이목도 있고 다음날 일정도 있었던지라 밤을 꼬박 새울 수는 없었지만, 그와 나는 서로를 확인하기에 충분한 밤을 함께 보냈다.
어찌됐든 그날을 계기로 하여 나는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와 조금이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도서실과 어학원은 물론 술자리까지 늘 함께 했던 나는, 애정표현에 있어서도 그가 민망해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결혼할 커플이라는 것에 이견을 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그 역시 대외적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게 새로운 이성의 접근이 대외적으로 원천봉쇄 되었다는 것을 의미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자유로워야 할 젊은 날의 사랑이 너무나도 빨리 굳어져 버린 설익은 정체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와 나의 사랑이, 뜨겁거나 견고하거나 원만히 흘렀었던 것도 아니었다. 마음의 쏠림과는 달리, 나를 둘러 싼 사회적·생물학적 여건은 우리가 결혼에 이르기까지 걸림돌로 작용하였으며, 관능적인 육체적 사랑마저도 움츠리게 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서른이 다되도록 가벼운 입맞춤과 포옹 이외는 사랑의 전위를 가진 적이 없다. 겉으로는 요란하였지만, 속으로는 실속 없는 속빈 강정인 셈이었다.
그는 손이 매우 귀한 고위 공직자 집안의 남매 중 장남으로, 나름대로는 반듯하게 자라온 면도 있었지만 반면에 보수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특히 남녀의 관계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는데, 군대까지 마치고 와서인지 그는 “아는 여자와의 육체적 관계는 곧 결혼”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했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은 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나 역시 성에 관한 두려움이 항상 따라 다녔었다.
중학교 생물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은 혈액형에 대해 가르치면서, “RH(-)형은 한 아이만 낳을 수 있고 이후는 낳을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첫 임신이 행여 유산이라도 된다면, 그 또한 아이를 출산한 것이 되어 영원히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다쳤을 때 피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의 그 말은 내게 있어서 충격을 넘어 공포였다. 당시 나는, 또래보다 조숙한 160cm의 키에 빠르게 멘스를 시작하고 있었던 터라 더욱 그랬다. 게다가 멘스 때마다 빈혈증세가 나타나, 나는 피와 관련하여 과민할 정도로 피해망상적인 두려움 같은 것이 있어 왔었다.
어찌됐든 혈액형과 관련한 생물학적 나의 단점은 그의 집안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악조건이었으며, 나로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이를 출산해 주기 위해서는 몸가짐을 철저히 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곤 했었다. 그리고 선배 역시, 그러한 악조건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탓인지, 그와 나의 대학생활은 늘 함께였으나 그렇다고 특별히 내세울만한 기억 또한 없다. 객관적인 시각으로는 나 홀로 사랑이라는 것에 홀려 들 떠 있었을 뿐, 그는 격동의 시기에도 본연의 틀 속에 충실한 범생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무난히 취직하였고, 반면에 나는 교원자격시험에 합격은 하였지만 임용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내가 전공으로 선택한 불어의 경우는, 제2외국어로서 가르치는 곳도 선생이 공석인 경우도 적어 좀처럼 발령이 나지 않았다. 졸업 후 2년여가 다갈 즈음에 모 사립학교에서 콜이 한번 오긴 하였지만, “정식교사로 채용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기부금을 내야 한다”고 하여 포기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박봉으로 어렵게 졸업할 수 있었던 나로서는 “돈을 벌기는커녕, 또 다시 학교에 돈을 갖다 바쳐야 한다”는 지난날의 관행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동참할 경제적 여건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런 상황도 모르신 채, “힘들게 대학 졸업시켜 놨더니 빈둥거리며 노냐?”며, “중매를 통해 시집이나 가라!”고 나를 종용했다. 나 역시 지루한 상황이 하루하루 지속되다보니, “결혼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물컥물컥 밀려와, 선배를 만날 때마다 “왜? 나를 건드리지 않느냐?”며 투정어린 화풀이를 하곤 했었다.
허나 선배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너의 순결을 보호해 주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색은 안하지만, 행여 건드려 임신이라도 된다면 RH(-) 혈액형으로 야기되는 여러 것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진전과 대책도 없이 막연히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보니 졸업후 4년여가 다 지나갈 즈음에 있어서의 우리의 만남은 “직장일이 산적해 있다”는 핑계 등으로 확연히 줄어들었고, 나의 공허와 조바심은 늘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하에서의 설익은 여자의 직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다른 여인들과 육체적 관계까지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건장한 남자로서 왕성한 육체적 욕구를 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록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술 집 등에서의 엔조이였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구걸하듯 하여 겨우겨우 그를 만날 양이면, 불만어린 투정과 함께 술을 마시어 댔고 그 양 또한 점차 늘어만 갔다. 병리학상 알코올 중독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에 있어서의 술은 이미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으며, 정신은 말짱한 듯 하였지만, 혀가 꼬일 정도의 술주정과 함께 몸을 가누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런 나의 모습이 측은 하였던지, 그는 큰맘 먹고 그의 부모에게 나를 정식으로 인사시켜주기에 이르렀다. 대학을 졸업한지 4년여가 훨씬 지났을 때의 일이였다. 하지만, 상황은 정말 엉뚱한 곳에서 그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좋지 않은 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삶을 사노라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앞을 딱 가로 막고 투정을 부리듯 생떼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가도 싶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가 집 근처에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는 그의 어머니는 내 인상이 썩 내키지 않아 사귀는 것조차 항상 불만이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당신 주변에 괜찮은 집안의 처자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나 같이 내 세울 것 없는 여자와 사귀냐는 식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모는, 아들이 작심하고 나를 데리고 온지라 소문난 역술인을 찾아 궁합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생뚱맞게 “둘 간에는 자식이 없는바, 결혼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고 한다. 터무니없는 미신 같은 것이라고 간과할 수도 있지만, 내심 내가 맘에 내키기 않았었던 그의 부모님은, 비록 배움이 있는 분들이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불변의 진리인양 받아들였고, 나에게는 그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딴에는 그분들도 재차 검증을 위해 한두 곳 더 궁합을 보았다고는 하는데, 표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모두가 한결같이 “속이든 겉이든 궁합이 맞지 않은 짝”이라고 했다고 한다.
상황이 그러했던지라, 그는 나에게 결혼에 대한 확답을 주지 않았다. 거기에는 단지 궁합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부모가 생각하는 “집안이 서로 맞지 않다”거나, 그가 인지하고 있는 “나의 생물학적 결함”도 한 몫 했었겠지만, 어찌됐든 이런 연유 등으로 하여 우리의 다툼은 더욱 더 심화되어 갔고, 6년간 지속되었던 나의 ‘일편단심 민들레’는 허물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안 좋은 상황은 그 쪽에서만 일어났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토록 애지중지 해왔었던 나의 성이 제3의 남자에게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다. 정말이지 돌이키고 싶지 않은 끔직하고 역겨운 일이지만, 굳건한 철옹성이라고 믿어왔던 나의 성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게 무너지고 갈기갈기 찢겨져 버렸다.
상대는 여고 모 은사였다. 우연히 버스에서 만나게 되어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었는데, 내가 “교사임용이 늦어지고 있다”고 하자 그는 “사립학교를 알아봐 주겠다”며 연락처를 요구했고,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었다.
그리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 “비정규직이지만, 조만간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곳을 소개해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었던 나로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나갔다. 솔직히 나는 그렇게 신경을 써주는 그가, 그동안 내가 가슴에 쌓아 두었던 말 못한 고충이나 고민까지 스승의 입장에서 다 받아 줄 것만 같았다. 허나 그것은 안일하게 생각하고 냉철하게 행동하지 못한 나만의 착각이었다.
전날도 나는 선배와의 말다툼으로 술을 과하게 마셨었는데, 당시에 난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한 패닉 상태였다. 그것은 철석같이 믿어왔던 선배와의 결합이 어쩌면 나만의 망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됨에 따른 것으로, 그것은 점점 더 작아져가는 나 자신에 대한 상대적 빈곤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하소연인지 투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날 저녁 또한 술이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 때 기억이 중간 중간 지워져 생각나지 않는다.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맘놓고 마시며 쫑알댄 모양이었다. 그동안은 몸을 가누지 못할지언정 아무리 마셔도 정신은 말짱하다 싶었는데 처음이었다.
허나 그 선생이라는 작자는 그러한 나를 제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나를 여관으로 끌고 가서는 겁탈했다. 나는 아무런 반항도 못한 채 당해야만 했다. 그가 혀를 내밀어 입을 맞추고, 가슴을 빨고, 깊은 숨을 몰아쉬며 관계를 맺어도, 나는 마네킹처럼 미동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느낌 또한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아침이 되어 정신을 차렸을 즈음, 나의 음부는 처녀막이 찢어 진 탓에 통증이 밀려왔고 침대는 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내가 망연자실하자, 그는 “처녀인지 몰랐다”며 애써 변명했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살고 있으니 책임질 마음도 있다”고도 했다.
나로서는 어의가 없었다. 나이가 찬 여자는 한결같이 처녀성을 잃었을 것인바 한 번 더 따먹은들 하등 문제가 없으며, 설사 천연기념물 같은 노처녀가 있다 하더라도 “궁상떨지 말고, 억울하면 자식까지 있는 늙은 자신에게라도 시집오라!”는 꼴이니 역겨워 모든 것을 토해낼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뺨을 갈기고는 모텔을 빠져 나왔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어떻게 지켜온 처녀성인데,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무너졌다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를 고발하고도 싶었지만, 나 자신에게만 상처를 남길 것만 같아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슬픈 옛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당하는 건 항상 여자였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나는 며칠 밤낮을 방안에만 쳐 박혀 있었다. 그러한 나에게 엄마와 아빠는, 걱정 반 짜증 반 잔소리를 퍼 대셨다. 하지만 난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선배를 어떻게 대할 수 있을지 걱정만이 들었다. 행여 임신이라도 된다면 나로서는 정말이지 큰일이었다.
순간 나는 역술인의 말을 떠올렸다.
“둘 간에는 자식이 없다!”
정말이지 그것은, 당하는 자에 입장에서는 도저히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잔인한 말이었다.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며칠 밤낮을 웅크리고 있자니, 입술은 말라 헤질 데로 헤지고 경기로 식은땀은 또 얼마나 흘렸던지 옷과 이불에서는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묻어 나왔다. 하필이면 내가 왜? 유산을 포함하여 단 한 번의 아이밖에 낳을 수 없는 RH(-) 혈액형을 지니고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울분도 터져 나왔다.
“하느님! 도대체 왜요?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요?”
하지만, 그러한 울분과 넋두리가 토해지면 질수록, 나는 더욱더 공황속으로 빠져 들었다.
내가 그러한 칠흑의 터널을 지나, 몸을 추스리고 문밖을 나선 것은 3주가 흐른 뒤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멘스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정자가 체내에 머물러 있다가 임신이 되는 것은 아닌가?”하여 공포에 떨어야 했었던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나는 피폐한 마음에, 선배와 어떤 형태로든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결혼에 대한 확답을 재촉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한 건 여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나를 강하게 짓눌렀다. 허나, 서른한 살의 나이임에도 그는, “부모를 설득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나로서는 선배와의 결혼이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만 믿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도 언제까지 부모 집에 얹혀살며 용돈을 타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동안 날 가둬놓은 듯한 교사임용과 결혼이라는 옹색한 틀 속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돌파구가 내게는 필요하다 싶었다. 그래서 잡은 책이 공무원수험서였다.
이유는 공부를 하다보면 잡념도 사라지고, 노후에 연금까지 나오는 아버지를 보니 그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허나 나는, 아르바이트를 겸했던 까닭에 삼세판 만에야 지방직 9급에 합격하였고, 서른의 나이에 동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선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채 위태로운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나의 공무원으로서의 첫 업무는 주민등록 등초본 발급과 전출입에 따른 보조 업무였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후부터 온갖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특히, 수백 명에 달하는 모 공사의 주소지 확인은 나를 더욱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툰 탓도 있었겠지만, 선풍기 하나 없는 8월의 서고는 후덥지근한 종이냄새로 가득 차 숨이 꽉 막혀왔다. 게다가 땀에 화장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리는 나의 모습은 노르웨이의 화가 에르바르트 뭉크의 “절규”의 그림을 보는 듯하여 “도대체 내가 뭐하는 것인지…?”라는 푸념과 함께 선배에 대하여 다시금 화가 치솟아 올랐다.
그렇다고 부임 첫날부터 나의 기분을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가관이었던 것은 주소지 확인을 의뢰한 20대 중반의 공사직원이었는 데, 그는 첫 대면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짜고짜 반말로 대했다. 직원 누군가가 “첫 출근 한 여직원”이라고 귀띔해준 까닭도 있었겠지만, 나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솔직히 짜증도 났었다.
특히 난, 전날에도 선배랑 한바탕하여 심기가 불편해 있었던 터라 더욱 그랬다. 이유야 어찌됐든, 선배를 만날 때마다 다툼이 더해졌던 것을 보면, 나 또한 노처녀 히스테리가 예외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 유별났던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공사직원의 행동이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싶었다. 그럼에도 내색 없이 꾹꾹 참아 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선배는 서른세 번째 생일을 넘기는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부모는 나와의 결혼에 대하여 “절대 불가!”라는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던 터라,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무척이나 피곤한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그를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우유부단해 보이는 그가 밉고 화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결단을 내리라며 그를 보챘다. 그러고 보면 그러한 나의 모습은, 대학교 때 마음 설레던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은 아니었었다.
특히 임용을 20여일 앞두고 나의 조바심은 극에 달하였는데, 술을 과하게 걸쳤던 나는 “이제는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듯이 그를 모텔로 끌고 가서는 옷을 벗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행위를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알몸이 된 나는 창피함을 넘어 치욕스러움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손을 이끌어 한 손은 가슴을 다른 한 손은 히프를 만지도록 안내하고는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탐했다. 허나 그는, 예전에 내가 선생에게 처음 당했을 때처럼 마네킹 같았고, 마지못해 나의 손에 이끌려 가슴과 히프를 만지고 입술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란, 서로가 마음이 동하였을 때 불타오르는 듯 싶다. 비몽사몽 중에 처녀성을 잃었을 때처럼 나 또한 느낌이 없었으며, 그 또한 내게 삽입하자마자 1분여도 안되어 싸 버렸다. 너무나도 허탈하여 시간을 두고 다시 시도를 하여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그는, 나와의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많은 것들을 떠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와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역술인 말과는 달리 아이를 가질 수는 있을 지, 가질 수 있다면 무사히 순산할 것인지, 생물학적 특정상 하나일 수밖에 없는 아이는 딸인지 아들인지, 더 나아가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로 자라날 수 있을 것인 지 등등이 복잡하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는, 내가 “처녀막을 상실하고 없다”는 것 또한 인지하였을 것이다. “결혼할 때까지 지켜주고 싶다”고 누차 말해왔던 그였던지라, 실망감과 허탈감 또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으로도 보인다. 허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훗날 나는 “운동으로 그것이 찢어 졌었노라”고 변명해 보았지만, 그가 그것을 사실로 믿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현재까지 알 길이 없다.
어찌 됐든, 성스러운 영역으로 남겨두었었던 그와의 육체적 사랑이 그렇게 성사는 되었지만, 우리의 관계는 오히려 극을 치닫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나와의 육체적 관계를 통하여, 나의 “처녀막 상실”에 대한 실망감보다 역술인들의 “속궁합 또한 맞지 않다”는 말에 더 민감했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술인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 온 그의 부모에게, “더 이상 반론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그 스스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에서 인지 그는, 내가 임용되기 전날의 만남을 통하여 “부모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선을 보았다”고 내게 고백했다. 물론 나는 “나와 관계를 맺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행동하냐?”고 대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내가 오히려 짜증난다는 듯이 “이제는 날 놓아주면 어떻겠니?”하며 노골적으로 선을 긋듯 말했다.
나로서는 오직 그만을 바라보며 버텨왔는데, 참으로 황당하고 어의 없고 분했다. 갈 때까지 간 듯한 그의 말에 우리는 다시 한바탕 말다툼이 오고 갔고, 분을 삭이지 못한 나는 길바닥에서 펑펑 울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측은하였던지 나를 부축하여 인근의 모텔로 데려가서는 화해의 의미인 듯 나의 몸을 덮쳤다. 하지만 나는, 전처럼 느끼지 못하였으며, 그의 사정 또한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동사무소에 출근을 하였다. 솔직히 몸과 마음이 뒤숭숭한 상태에서의 첫 출근이자 업무였다. 어찌 됐든, 화장이 떡칠이 되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주소지 확인업무를 하고 있는 나에게, 공사직원은 미안했던지 슬며시 다가와 농담 반 진담 반 “저녁식사를 대접해주고 싶다”고 했다.
심신이 지치고 갈증 또한 났던 터라, 나는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할 겸 “그렇게 하라!”고 답했다. 처음부터 반말로 대하는 그가 무척이나 얄미웠음에도 흔쾌히 그의 초대에 응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귀신에 홀린 듯한 희한한 날이자 나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돌출 행위였다.
그때 나는, 그러한 나의 행위가 정말이지 이상한 곳으로 치닫게 되리라고는 미처 알지 못했다. 특히 남녀의 관계라는 것은 “멈추기를 거부한 브레이크 없는 열차와도 같다”는 것을….
나는 퇴근을 하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당시 유행했던 칸막이가 있는 레스토랑이었는데, 사무실에서처럼 그는 초면임에도 동생 대하듯 나를 대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그가 왠지 밉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골탕을 먹일까?” 생각했었는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지금도 난, 그때 그의 모습이 선하다. 내가 비싼 고급 양주를 시키자 당황해 하는 모습이며, 내 나이를 알고는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날 정도로 귀엽다. 그는 비록 나보다 세 살이 아래였지만, 날 매혹시키는 묘한 그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손끝에 나의 몸이 반응을 한다는 것이었다. 선배처럼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잘생긴 것도 아닌데, 그의 손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나의 허리를 감싸 쥘 때, 난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 놈의 술이 또 엉뚱한 말썽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특이한 경험이었다.
순간 나는, 머릿결을 할퀴며 스쳐 지나가는 악마의 소리를 들었다.
“너와 네가 사랑하는 선배와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그것은 어느새 나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역술인의 말이기도 했다.
나로서는 불안했다. 만약 그것이 맞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선배와의 결혼이 물거품이 된다면, 유별났던 나의 ‘일편단심 민들레’는 주변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회자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예민한 반응일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도 그렇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것들을 잃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빼앗기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은 사랑보다, 욕심보다, 자존심보다, 오기에 관한 문제였다.
특히, 실연의 사유가 나의 행실에서 비롯된 것 보다는 “궁합이라든지, 혈액형이 RH라든지, 집안 간에 차이가 난다든지, 인상이 별루라든지”와 같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적인 것들에 의한 것이라면 나로서는 용납하기 힘들었다.
정숙해야 할 여자가 “술을 마신다든지, 남자를 존중하지 않고 대든다든지, 이유야 어찌 됐든 처녀성을 잃었다든지”와 같은 방정치 못한 행실들을 꼬트리 잡으면 할 말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당시의 유교적 관점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행실들은, 현모양처로서의 자질은 분명 아니었을 테니깐….
어찌됐든, 그의 부모는 나를 며느리 감에서 완전히 배제하였으며, 중매를 통해서라도 선배의 결혼을 강행하고자 했다. 특히, 여동생이 “오빠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던 터라, 그것은 단지 시기상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선을 봤다”는 것은 이미 예상됐던 것으로 그리 놀랄 일만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막상 현실로 나타나자 나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탄식과 함께 선배에 대한 배반감으로 패닉상태로 빠져 들었다.
어찌 보면, 선배에 대한 나의 첫 육탄공격은 그러한 알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취한 조치로서, 긴박한 상황 하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던 나만의 자구책이자 선제공격일 수도 있었다. 방법상에 있어서 다소 서툴고 껄끄럽고 미흡한 부분이 있었긴 했지만 말이다. 특히, 서툴고 미흡했던 것 중 하나가 그와의 육체적 첫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배란기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치밀한 계획보다는 다소는 돌발적인 조급함에서 행하여진 일이기도 했지만, 나의 솔직한 심정은 “아이는 결혼 후에 잉태하더라도 일단 육체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서 ‘나를 책임지라!’”는 무언의 압력을 그에게 심어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찌 됐든, 우여곡절 끝에 그와의 첫 육체적 관계를 맺긴 하였지만 그때에는 배란기가 아니었으며, 선배에 의해 본의 아니게 다시 관계를 맺은 전날의 경우에는 배란기가 막 시작되는 시기로서 임신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하나뿐인 아이라면 성스러운 의식을 치루고 싶었었는데, 생각할수록 모든 게 뒤숭숭한 날이었다. 그런 까닭에 공사직원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마음은 왠지 산만하고 찝찝했었다.
그러한 마음 탓이었을까? 비싼 양주 탓이었을까? 아니면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 분위기 탓이었을까? 술은 거침없이 들어갔고, 흐트러진 나는 그 직원에게 “혈액형이 무어냐?”고 물었다. 정말이지 나 자신도 전혀 생각지 못한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내면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악마의 치밀한 의도에 의해 내뱉어진 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O형이라고 답했고, 악마는 그것을 미끼로 여지없이 나를 낚아챘다. 남편과 같은 혈액형이었다.
나는 그날, 몸이 허락하는 대로 따랐다. 이것저것 따짐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였다. 술기운이 오르자 그의 옆자리로 다가가 술을 주고받았던 나는, 온 몸이 전율로 휘감아 도는 듯한 짜릿한 입맞춤과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오르는 듯한 숨 가쁜 포옹과 예민한 몸의 악기를 다루는 듯한 그의 현란한 손놀림에 자지러지고 한없이 무너졌다.
그리하여 달아 오른 듯한 몸과 눈빛은 서로를 인근의 모텔로 이끌었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신들보다도 벅찬 사랑을 나눴다. 보다 확실한 배란기로 접어드는 시점에서의 향연이었다. 그는 뱀의 혓바닥 같은 날카로움으로 머리카락에서 발끝까지 수차례 나를 유린했으며, 숨이 멋을 듯한 벅차고 뜨거운 그의 생명물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반복적으로 내 몸 깊숙이 밀려들었다. 솔직히 “그냥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거리는 내 생에 최고의 날이기도 했다.
그 일 이후 우리는, 거의 매일 시간을 내어 함께 했다. 첫 관계가 너무나 격렬했던지라, 만날 때마다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싶은 욕망이 항상 용솟음쳤지만, 정작 우리는 그러하지 않았다. 외람되지만, 공원에서 장난삼아 본 궁합이 내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장난삼아 보았다기보다는 육체적 관계를 가진 그와의 궁합이 자못 궁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역술인은, 연상연하의 우리를 고까운 시선으로 힐끈 바라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겉궁합이 아니네요! 누구는 속궁합만으로도 산다고들 하지만, 글쎄요?… 자식 운을 보니, 아들 하나는 있겠군요!”
그 말에 나는 뜨끔했다. 그것은 마치 역술인을 통해 신이 나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듯했다. 속궁합인 그와의 육체적 관계를 맺으면서 결혼까지도 생각했었던 나는, 병든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등 그의 열악한 환경이 솔직히 마음에 걸렸었다. 나로서는 제발이 저린 셈이었다. 그런 까닭에 육체적 끌림과 정신적 포근함과는 달리, 나의 행동은 저울질로 경직될 수밖에 없었고, 그 역시 나의 의중만을 살피는 듯했다.
어찌 됐든, 보름여가 지나자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매달 찾아와야 할 마법의 날이 그냥 지나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신이었다.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결론은 선배에게 달려가 나의 임신을 알리는 거였다. 그는 매우 놀라워했고 “내가 유전적으로 필히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모에게 설득함으로서 우리의 결혼은 급진전 되었다.
이것이 나의 결혼담이다. 누군가가 “그런 결혼이 후회 없고 행복하였는가요?”라고 묻는다면 딱히 답하기가 뭐하다. 결혼이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고 하지 않는가? 나 또한 그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신혼생활은 내가 시부모 마음에 든 것은 아니어서, 분가하여 친정집 옆에서 시작했다. 다행이도 아들을 순산하여 굳어있던 시부모의 마음이 다소 유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서먹한 관계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과는 나의 결혼 사실을 알려준 후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다가, 아이 백일이 지난 후 한 번 더 만나 관계를 맺었다.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그와 함께 아이를 무사히 순산함에 따른 향연의식 같은 것을 치루고 싶었다. 그는 내가 유부녀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 했지만, 나는 요부 릴리트(Lilith)의 유전인자를 받은 듯 상위체위를 통해 또 한 번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죄스러움에 그와의 이별을 고하였으며, 아직까지 그를 본적이 없다.
지금 나와 남편은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궁합을 보러 간다. 형식적인 절차일 수도 있지만 기분이 묘하다. 솔직히 나는 아들이 누구의 핏줄인지 알지 못한다. 남편을 닮은 듯도 하지만, 성품으로 보면 그 사람을 닮았다. 오늘따라 그가 무지무지 보고 싶다. 이제는 하나뿐인 아들을 딸 가진 집으로 양보해야만 하는 허탈감 때문일까? 지금 차창 밖으로는 그가 다녔던 모 공사의 본사건물이 위용을 뽐내며 스쳐간다. -End-
첫댓글 RH-형은 자식을 하나밖에 못낳는 것인가????
그것도 아들만 낳을 밖에 ~~~~~
그리고 잼나게 읽어봐네........
오섭이가 밴드뿐만 아니라 카페에서도 친구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해주는구나
친구들의 많은 호응도 함께해주길 바라고 또한 오섭친구의 건강과 앞날의 발전을 기원하며...
앞으로 태현이도 기대하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