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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산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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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용인산사랑 앨범 스크랩 내 고향 용인(조병오)
이제학(백두) 추천 0 조회 126 13.02.10 13: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누구나 ‘고향故鄕’ 하면 수많은 추억들이 떠오를 것이다.
대부분 좋은 기억들이겠지만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나쁜 기억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제 나이 들어 생각해보면 모든 게 아름답고 그리운 추억으로만 남게 되는 것 같다.


용인龍仁은 내가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며,
어린 시절 나에게 꿈과 심신을 단련시켜준 곳이니 나의 고향이란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닦여진 기초체력 덕택에 어려운 일을 잘 극복하고 세상을 원만히 잘 살아왔음에
고향 용인을 그리워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40여년 객지생활 후에 기회가 좋아 모교의 동문회 활동을 하게 되었고
사는 곳마저 용인시 수지로 옮기게 되었으니 ‘인간 연어’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어린 시절 용인은 경기남부에서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
농지가 부족하고 인구밀도가 낮은 가난한 시골이었다고 생각된다.
지금은 사통 팔달 교통의 요지이면서, 인구 100만에 수많은 대학, 골프 8학군과 이름 있는 관광지,
수도권 최고의 베드 타운 역할 등 도농都農의 대표적인 도시로 엄청난 변화를 이루었다.
시쳇말로 골프에서 호쾌하게 공을 날려 좋은 자리에 안착되었을 때
‘용인군수(시장) 자리다.’라고 말할 정도로 훌륭한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한 세월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며,
지역사회에서 용인 발전에 기여하신 많은 분들의 수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최근의 용인의 모습(사진을 클릭하시면 사진 10여장을 스라이드로 시간조절 하시면서 보실 수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용인의 산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엄청난 도시의 변화에도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산하로구나를 느끼게 되었다.
나 혼자서가 아니고 그동안 용인이 발전하는데 역할과 과정을 지켜본 몇몇분들과 함께하니
얼마나 유익하고 즐거운 일이었겠는가?
그들과의 동행으로 용인의 모든 것을 압축 공부하게 되었으니 큰 행운을 잡게 되었다.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어린 시절 멀리서만 바라봤고 객지생활 시절에 소홀히 했던 고향의 산을 다시 찾으면서

감개무량했다. 아직은 둘러보는 과정에 있지만 조만간 용인의 산 모두를 섭렵한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금까지 저는 ‘죽어 용인 死居龍仁’이란 말을 그렇게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장점이 아닌 죽은 자의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말은 “용인의 빼어난 산세와 풍광에 걸맞게 생긴 말이구나.”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지요.
음택(산소자리)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심신을 단련하여 기초 체력을 튼튼히 하는데
활용하도록 하여야겠다.

너울길로 명명된 용인의 산하가 이렇게 멋졌나 새삼스런 느낌은 감동하기에 충분했다.

얼마전부터 제주의 올레길, 지리산과 북한산의 둘레길, 강원도의 바윗길 등
등산이 수직 개념에서 수평적으로 천천히 즐기면서 걷는 변화를 보여왔다.
너울길은 용인의 산봉우리를 오르고 주변의 산세와 계곡을 돌아보게 되어
수직과 수평을 병행하게 된다.

용인산의 정상 모습(너울길 후보지로, 사진을 클릭하시면 사진 10여장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용인의 이름 있는 명산을 중심으로 10개 정도가 계획되어 있단다.
지금은 만들어 가고 있는 과정에 있으며, 금년 봄에 우선 3개가 열릴 예정이란다.
용인의 산은 산세가 부드럽고 유하게 생겨 등산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양한 등산객을 모실 수가 있을 것이다.
용인의 너울길을 걷는 것은 신체를 단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용인의 산과 들에 있는 작은 돌, 풀 한 포기까지를 잘 살펴보게 될 것이며,
용인의 변천사, 전통문화, 어르신들의 구전이야기, 자연생태를 어우르는

명품 도보길이 될 것이다.

고향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려고 하니 우선 가슴이 벅차고 흥분부터 된다.
한편으로 내가 용인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이미 전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용인을 어떤 내용으로 표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걱정이 되고 정리가 잘 안 된다.

그동안 너울길을 함께한
동반자들에게 들은 산하山河 중심으로 정리하여 본다.

- 용인 지명의 유래

용인龍仁은 본래 용구현龍駒縣과 처인현處仁縣을 합치고
용구龍駒에서 용자와 처인處仁의 인자가 합쳐져 용인현龍仁縣이라고 칭하다가
후에 양지군陽智郡을 합쳐서 오늘의 용인시龍仁市가 되었다.


용인지방은 부족국가시대 이래 광주지방廣州地方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이후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로 변화가 있었으며,
용인지방이 용구현이란 명칭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것은
서기 475년(고구려 장수왕 63년)이며, 이것이 최초이다.

- 용인의 산세

먼저 용인 팔경을 소개드립니다.(사진을 클릭하시면 사진 10여장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도 한수 이남의 산악지대로 산지가 용인시 면적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용인의 산세는 산의 높이가 최고봉이 600m를 넘지 않으며 부드럽고 완만한 산세의 산릉이다.
용인의 진산 석성산을 중심으로 타 시군의 경계가 산릉으로 이루어졌다.
북서쪽에서 뻗어 내려온 바라산, 백운산, 광교산, 응봉으로 수지, 기흥으로 연결되며,
북동쪽에는 광주산맥의 중심 산인 대화산, 노고봉, 정광산, 벌떡산, 휴양림봉(큰산), 마락산,
말아가리산, 용화산은 모현면, 포곡읍 양지면으로 이어진다.

용인 중심을 가로 지르는 향수산, 할미산, 석성산, 부아산, 문수봉. 독조봉, 건지산으로
또 문수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봉산, 쌍령산이 있으며,
남쪽에는 삼봉산, 시궁산, 갈미봉, 묘봉 등이 나의 삶터 용인의 골격같은 산릉이다.
이런 용인의 산릉 중에 우리나라의 산맥의 일부가 한남정맥이다.

* 한남정맥

우리나라의 산맥을 우리 고유의 마루금으로 백두대간과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구분한다.
정맥은 북한에 5개, 남한의 8개 중 한남정맥이 용인을 통과한다.
한남정맥이란 한강의 남쪽의 능선(마루금, 산맥)을 말하며, 김포 문수산에서 안성 칠현산까지의

130km 정도로 용인의 백운산, 광교산, 석성산, 부아산, 함박산, 문수봉, 구봉산, 가현산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으로 한남정맥의 중심이 된다.
겨울에는 서울, 수원보다 기온이 2~3도 낮고, 여름에는 2~3도 높은 것을 보면
용인이 지대가 높고 내륙의 산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용인에는 하천의 발원지가 많은 것이다.

- 용인의 7개 하천 발원지

* 경안천은 문수산에서 발원하여 팔당댐 상류인 한강으로 유입된다.
* 탄천은 사기막(법화산-향수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서울 삼성동 한강으로 유입된다.
* 오산천은 동백동 향림동산 내 동백저수지에서 발원하여 아산만을 통해 서해로 유입된다.
* 진위천은 시궁산 시궁샘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유입된다.
* 한천(목신천)은 문수봉 능선 줄기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유입된다.
* 청미천은 삼성물산 북쪽골짜기 처녀샘에서 발원하여 남
한강으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 추계천은 독조봉 청수년수련원에서 발원하여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용인의 7개 하천인 경안천, 탄천, 추계천, 청미천은 한강의 지천이며,
오산천, 한천은 진위천의 지천으로 서해로 유입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남부의 대부분의 하천의 시작은 용인이다.(사진을 클릭하시면 사진 10여장을 보실 수 있습니다)

* 탄천의 유래

탄천은 용인 법화산에서 발원하여 성남시의 중앙부를 흐르는 한강의 줄기로 '숯내'라고도 한다.

옛날에 "삼천갑자 동방삭"이가, 글자 그대로 삼천갑자를 살았으니 햇수로 따져보면

약 18만년의 장수한 기록 보유자로서 온 세상에서 큰 골칫거리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천상의 옥황상제가 동방삭을 잡기로 결심하고 저승사자를 탄천 부근으로 보내어

탄천에서 숯을 씻도록 하였다.

저승사자가 탄천의 냇물에다 숯을 씻으니 물은 자연적으로 검게 되었다.

그때 마침 동방삭이 탄천의 검은 물이 흐르고 있음을 보자,

이상하게 생각하고 탄천을 이리저리 헤매던 중 냇가에서 숯을 씻고 있는 건장한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동방삭이 "왜 숯을 물에 씻고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숯이 희어지도록 씻는다"라고 말했다.

"나는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씻어서 희게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하며

크게 웃는 것을 보고, 저승사자는 "이 자가 동방삭이다" 하고 그를 잡아 옥황상제께 데리고 가니

동방삭의 인생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이 내를 '숯내' 또는 '탄천'이라고 했다.


- 전쟁의 격전지

용인은 반도의 중심으로 삼국시대부터 3국의 각축장이었으며
나라에 큰 전쟁이 있을때마다 큰 전투가 있었던 아픈 과거 역사가 있는 곳이다.

용인의 전투는 알려진 바로는 크게 4개로 볼 수 있다.
처인성전투, 임진왜란 때 치욕의 4대 패전사, 병자호란 때 유일한 승전,
한국전쟁 중 우방 터키군의 승전 김량장 전투 등이다.

* 처인성 전투

몽골은 고려가 조약을 지키지 않고 다루가치와 사사건건 충돌하자,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기라고 요구하며 2차 침입을 시도한다.
고려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것은
몽골군이 물에서 하는 싸움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배층은 이미 안전한 강화로 피난을 갔지만,
힘 없는 백성들은 육지에 남아 고스란히 몽골군에 희생되어야만 했다.


이때 승려인 김윤후가 남은 백성들을 모아 처인성을 지키고 나섰다.
살리타이는 낮은 도성에 불과한 처인성을 가볍게 생각하다가
그곳에서 김윤후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다.

총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은 힘이 빠져 서둘러 후퇴하고 만다.
몽골군의 침입이 시작되었을 때 고려의 정부군은 크게 약체화되어 사실상 제구실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몽골군의 침입을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육지에 남은 농민과 천민들 덕분이었다.
그 대표적인 항쟁 중의 하나가 처인성 전투인 것이다.


* 임진왜란 용인전투

광교산 용인전투는 임진왜란이 발발된지 두 달이 채 안 된 1592년 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충청도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이끄는
5만명의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참패한 전투다.
임진왜란 당시 치욕의 전투로 기록된 슬픈 역사로서 이후
10여일만에 수도가 짓밟힌 것이다.

* 병자호란

'병자호란 광교산 김준용 장군 전승비'

병자호란 때 광교산에서 청나라 군사들을 물리친 김준용 장군의 전승지에
비 모양으로 바위에 새긴 글자이다.

김준용은 원주 김씨로 광해군 원년(1609)에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광교산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적장이자, 청태종의 사위인 양고리 등의 목을 베었다.
이에 조선군은 사기가 크게 높아져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난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숙이라는 시호도 붙여졌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조 때 수원성 축조에 필요한 돌을 구하러 광교산에 갔던 사람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은 채제공이 그 사실을 새기게 했다고 한다.
암반에 '충양공김준용전승지'라 새기고 그 좌우에'근왕지차살청삼대장',
'병자청란공제호남병'이라는 전승 내용을 새겨놓았다.

* 한국전쟁 터키참전

터키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번째로 많은 1만5천여명의 병력을

파병했으며 이 가운데 3,200여명이(사망자로 두번째) 전사하고 부상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터키군은 1951년 1월 용인시 김량장동과 151고지 일대에서 전개된 ‘썬더볼트 작전’에서
중공군 1,9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올렸으며,
특히 김량장리 전투에서 백병전으로 승리함으로써 용맹성은 당시 유엔군의 귀감이 되었다.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동백동 영동고속도로변 잣고개에 참전비를 건립했다.

용인 4대 전투 기념 사진 4매(사진을 클릭하시면 사진 10여장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생거진천사거용인生居鎭川死居龍仁

이 말의 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그중에 제일 많이 알려진 내용 한가지만 소개한다.

옛날 진천 땅에 추천석이란 사람이 살았다.
하루는 그가 잠시 잠들었다가 애절한 통곡소리에 잠을 깬다.

그는 저승사자들의 실수로 이승을 떠나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염라대왕은 진천 땅의 추천석을 즉각 풀어주고, 용인 땅 추천석을 데려오라고
명을 다시 내렸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육신은 땅에 묻히고 집에는 위패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진천의 추천석은 궁리 끝에 용인의 추천석 몸을 빌어 깨어났다.

모습이 달라 믿지 않게된 가족들은 고을 원님을 찾았다.

“진천의 추천석은 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의 추천석이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이라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앞으로 생거진천사거용인生居鎭川死居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이후 추천석은 혼이 있을 때는 진천에서 살았고

세상을 떠나자 용인땅에 묻히기 위해 그곳 가족이 찾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생거진천사거용인生居鎭川死居龍仁’이 된 것이다.

용인은 산세가 금계포란형으로 금닭이 후손의 영광을 위하여
알의 부화를 기다리며 품고 있는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용인에는 공원묘지가 10여군데가 있으며, 유명
한 분들의 묘만 해도 210여기 정도 있다고 한다.

사거용인死居龍仁의 증명물 - 명당자리 소개 (사진을 클릭하시면 사진 10여장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전승지인 처인성 전투의 김윤후 장군,

포은 정몽주, 정암 조광조, 교산 허균, 삼학사 중 한분인 오달제, 반계 유형원,
이순신 장군의 조카로 우의정을 지낸 이완,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장군, 번암 채제공,
을사조약에 항거하며 자결한 민영환 등 역사적인 인물들의 묘가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 김대건 신부는 용인 양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소문 밖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양지의 은이골(남곡리)은 천주교의 성지로 손꼽히게 되었다.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묘가 에버랜드 내에 있고,
김수환 추기경의 묘는 용인의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두분(김대중, 전두환)의 전직 대통령께서 조상의 묘자리를 용인으로 이전하여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 출가외인이란 말의 유래

시집간 여성을 가리켜 출가외인이라 하는데 이 말이 생기게 된 데에는 이런 유래가 있다.

포은 정몽주가 죽은 뒤 가족들이 정몽주의 상여와 함께 고향인 포항으로 향해가던 중

용인 모현 땅을 지나면서 갑자기 요령방울이 바람에 날려 어느 곳에 가서 떨어졌다.

모두 기이하게 여겨서 지관에게 물으니 이 자리가 천하명당자리라고 했다.

가족들은 의논하여 하늘이 뜻이니 이 터에다 묘를 쓰자고 결정했다.

날이 어두워 그 주변에서 묵기로 했는데 정몽주의 손녀가 그 터가 탐이 나서

인부들에게 독한 술을 먹여 잠들게 한 뒤 밤새도록 그 자리에 물을 퍼날라다 부었다.

아침에 가족들이 그곳에 가보니 땅이 축축하게 젖어있는게 아닌가?

다시 지관에게 물어서 그 자리보다는 못하지만 명당자리인 그 위에다 묘소를 썼다.

훗날 손녀의 남편인 연안 이씨가 죽자 원래 정몽주의 묘터에다 남편의 묘소를 썼다.

이후 연안 이씨 후손들은 대발복하여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영일 정씨와 연안 이씨와는 사돈간임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그때부터 출가한 손녀를 출가외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송병준(오적五敵)의 99칸 집이 지금은 기독교 성지가 되었다.

"가을에 흐르는 물이 아름답다"는 추계리 내 순교자기념관(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이 있는 곳이

조선말 매국노 일진회 송병준의 사저(99칸)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현대식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원래 송병준의 별저는 일진회 본거지로 많은 일화를 남긴 곳이다.

해방이 되면서 일제 때 김두환과의 관계로 유명했던 하야시는 원래 한국(선우영빈)사람이었는데

선우씨는 해방 후 부산에서 갑부가 되었고 사후에 부인이 이곳을 매입했다가

하야시의 젊은 시절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한우리교회 재단에 기증했다.

기독교 순교 100주년 기념관은 순교자기념관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벧엘교회 앞 계단으로 오르면 벽돌집 기도처를 지나 추계리 별장촌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오봉산 등산의 최고 난코스는 코가 닿을만큼 경사가 심하다.

줄을 잡고 올라서면 9부 능선에 계밀양(추계)에서 올라오는 길옆으로 묘지가 있다.

아래 위로 50여m를 두고 두기의 묘지는 前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의

조부모의 묘지라고 해서 화제가 됐던 곳이다.

이곳에서 용구리 고개를 보면 양지와 평창리를 안고 있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명당자리다.

원래 용구리 고개에서 보면 오봉산 봉우리가 큰 봉이 3개, 작은 봉이 6개가 있어서

삼정승 육판서를 거느린 좋은 땅이라 대통령을 낳았다고 화제가 됐던 곳이다.

- 내 고향 용인 화산리

나는 용인군 이동면 화산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꿈과 심성을 키워갔던 곳이다.
그때 고향에서 같이 놀던 불알친구들이 지금까지 고향을 지켜오거나
객지에 살다가 귀향한 경우가 많다.
그들과 만나면 반세기 세월을 거슬러 어린아이가 되곤 한다.


요즈음 <나이의 평준화>란 것이 있다.
60대가 되면 지식, 용모, 돈과 지혜 등이 의미가 없고, 오직 건강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사람들 간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느꼈지만,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그 차이가 별 것이 아니구나를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이리 저리 빼고 더하면
마지막 계산은 엇비슷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친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친구 중에는 지금 장안평에서 큰 자동차 중고상을 하면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자식들의 교육을 잘 시켜서
훌륭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한 친구는 어린 시절에는 어려웠으나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결과
야무진 또순이 집사람과 함께 재산을 일구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리고 있으며,
농전農專을 나와 시골에서 조합원으로 일하면서 조합장의 명예까지 얻은 친구는
재산뿐만 아니라 자식농사를 잘 지어 교수 사위에다 선생님 며느리까지 얻어
우리가 보기에도 부럽고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학교나

직장에서 사귄 친구 못지 않게 소중한 인연으로 나를 고향 나들이를

자주하게 한답니다.

요즘 고향의 향기가 그리워 자연스레 고향을 자주 찾게 된다.
특히 가족 묘지를 다시 만들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주변과의 조화를 생각하게 되어
동네는 물론 근처 보이는 곳을 다니곤 한다.

화산리에는 '시궁산時宮山'(513.9m)이 있다.
용인의 남쪽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이 산 정상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해서 '시궁時宮'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며칠 전 너울길 산행팀과 계사년 시산제를 올리면서 금년도 산행의 안전은 물론
멀리 보이는 조씨 문중 가족 묘지에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신령님께 부탁 드렸지요.

개발이란 명분으로 숲과 작은 산들이 훼손되는 안타까움에 늘 아쉬움이 있지만
어릴 때 동네 한가운데를 지키고 서있던 큰 은행나무와

이웃 마을을 넘어가는 서낭당 고개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가

아직도 그 우람하고 푸근한 품으로 우리를 반기며 맞아준다.


이 은행나무는 저의 선조께서 이 고장에 터를 잡으실 때 심은 것으로
얼마 전에 전문가로부터 약 450년의 수령으로 평가 받았으며,
우리 가문의 중시조께서 자리 잡으신 년대와 비슷하여
그동안 구전되어 오던 것이 증명이 되었답니다.

내고향 화산리 주변 모습(사진을 클릭하시면 사진 10여장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저의 고향 이야기만으로 지루하셨죠.

더 좋은 테마를 발굴해서 좋은 메세지 만들도록 하겠사오니 이해 바랍니다.

조병오 드림

아래는 용인 애향가로서 유인상 창안, 유달영 작사, 조성지 작곡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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