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첨부된 pdf 문서에는 더 자세한 설명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종말론
- 한국 교회의 종말론 해석과 오늘의 종말론 문제들 -
서언
종말론 분야는 신학적으로 다른 분야에 비해 정설이 분명치 않고 잡다한 이견이 많은, 신학적으로 매우 취약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론에 관한 혼란이 야기되어도 이를 정리해서 교회를 바르게 인도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상황을 유념하면서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종말론을 어떻게 해석하고 가르쳐 왔는가를 밝히고 오늘의 종말론의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답을 알아보고자 한다.
Ⅰ. 한국 교회의 종말론 해석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종말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가르쳐 왔는가? 한국 교회가 종말론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 하는 점을 한두 마디로 간단히 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 안에서도 교파와 신학자에 따라 다양하게 종말론을 이해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종말론을 이렇게 해석해 왔고, 또 지금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가 종말론을 가르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뚜렷이 드러나는 몇 개의 특징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특징의 개요를 밝히기 위해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적 인물 3인을 선정했다. 이 3인은 조용기와 박형룡과 이종성이다. 이 3인을 선정한 이유는 이 3인은 각각 자신이 속한 교파의 신학적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일 뿐 아니라 종말론 분야에서도 한국 교회 내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1. 조용기의 종말론
한국 교회는 종말론 분야에서는 특별히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의해 매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기독교 서점의 종말론 코너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구조를 가진 책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많은 한국의 목회자들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이런 경향의 책을 읽고 그대로 가르치는 경우가 매우 많고 따라서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영향은 한국 교회 내에 깊이 침투되어 있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가르치는 한국의 대표적 인물은 조용기이다. 조용기의 신학 전부가 세대주의적 신학은 아니지만, 조용기의 종말론은 세대주의적 구조를 그대로 전수하고 있다. 조용기의 종말론이 세대주의적 종말론이라는 것은 미국에서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주로 침례파, 성결파, 오순절파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는 점과 연계해서 생각할 만한 일이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가? 박형룡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리스도의 … 강림은 사이에 7년의 간격을 두고 분리된 두 사변으로 구성된다. 그 첫째 사변 “파루시아”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을 만나러 공중으로 오심이니 그때 모든 사별성도(死別聖徒)는 부활하고 생존 성도들은 변형되어 공중으로 인상되어 어린 양의 혼인을 축하하고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 생존 성도들의 승천은 휴거, 혹은 비밀 휴거라고 칭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지상으로부터 떠나 있는 동안 심지어 내주하시는 성령도 교회와 함께 가실 것이요 7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이(흔히 2부로 분할된다.) 흘러가면서 몇 가지 중대한 일이 생길 것이다. 주로 유대인의 신앙하는 남은 백성에 의해 왕국의 복음이 다시 전파될 것이요 대규모 회심이 결과될 것이다. 계속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이스라엘과 관계하기 시작하실 것이니 아마 이때 그들은 회심할 것이다. 이 7년의 후반에는 비류 없는 환난의 때가 있을 터인데 그것의 길이는 오히려 변론의 제목이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들이 인류 위에 부어질 것이다. 7년 기의 종말에 “나타나심” 즉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이 있을 것이니 이번에는 그의 성도들을 위하여 오심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오심이다. 생존하는 민족들이 지금 심판을 받아(마25:31) 양과 염소가 구별될 것이며 대환난 기간에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며 적그리스도가 멸망되며 사단이 천 년간 결박될 것이다. 지금 천년왕국은 건설될 것이니 참된 간격적, 차세적, 물질적인 유대인의 왕국이며 다윗 왕위의 재설립을 포함하는 신정주의의 회복일 것이다. … 이 나라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 그리스도의 보좌는 예루살렘에 설치될 것이며 그곳은 또한 예배의 중심 처소일 것이다. … 천년기 후에 사단이 잠시 석방되고 곡과 마곡의 무리가 성도에 대항하여 모일 것이다. 그러나 대적 무리는 하늘 불에 소멸되고 사단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울 것이다. 조금 후에 죽은 악인들이 부활하여 크고 흰 보좌 앞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계20:11~15). 다음에 신천과 신지가 있을 것이다.
이상의 인용문의 핵심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특징은 7년의 간격을 두고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이중적 재림(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더불어 일어나는 지상 교회의 휴거, 7년간의 대환난과 이 환난을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으로의 두 시대로 나누는 구분, 후 환난 시대의 지독한 환난과 아마겟돈 전쟁,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환난 기에 죽은 성도들의 부활, 천년왕국의 건설과 천년왕국 마지막에 있을 곡과 마곡의 반란, 백보좌 심판과 신천신지의 건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말세의 시나리오는 요한계시록을 주로 말세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순서대로 문자적으로 엮은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발행된 조용기의 『요한계시록 강해』는 철저히 말세론적인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줄거리를 엮어 넣고 있다.
조용기에 의하면 계시록 4장은 교회의 휴거를 예언하고 있고, 계시록 6장부터 계시록 10장까지는 전 환난 시대 3년 반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계시록 11장부터 계시록 19장까지는 후 환난 시대 3년 반을 예언하고 있다. 후 환난 시대 마지막에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고 그리스도는 지상에 강림하여 천 년 동안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고 천년왕국을 건설한다. 이 천년왕국 후에 사단은 잠시 놓이고 이어서 백보좌 심판이 있고 신천신지가 건설된다.
이상과 같은 조용기의 『요한계시록 강해』는 문자 그대로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반복하고 있다. 조용기는 그리스도의 재림 역시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으로 정확히 구분하고 7년 대환난 이전의 교회의 휴거가 철저히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조용기가 가르치고 있는 종말론과 90년대 초의 종말론의 혼란의 주역인 이장림의 종말론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장림의 종말론과 조용기의 종말론은 근본적으로 같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종말론이다.
이장림의 종말론 역시 세대주의적 종말론이다. 이장림의 종말론 역시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기본적 구조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이장림은 1992년에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이 있을 것이고 교회는 이때 휴거될 것이고 이어서 7년간의 대환난 시대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 7년의 대환난 시대 역시 3년 반 동안의 전 환난 시대와 또 3년 반 동안의 후 환난 시대가 있을 것이고 이 7년 환난 시대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 있을 것이고 천년왕국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장림의 종말론과 조용기의 종말론의 차이는 이장림이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의 날짜를 1992년 10월 28일로 분명히 예언했었는데, 반해 조용기는 이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지 않은 데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기 역시 현시대가 이미 그리스도 재림의 마지막 시대에 진입해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였다. 있다. 조용기는 EC 통합을 말세에 나타날 로마 제국의 부활로 이해하고 다니엘이 예언하고 계시록이 증언한 열 발가락 시대, 열 뿔 시대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전쟁은 중동 전쟁이 될 것인데 걸프전은 하나의 상징으로 마지막 전쟁의 예고편으로 생각하였다. 조용기는, 마지막 전쟁은 소련이 주체가 되어 중동에서 일으키는 전쟁인데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의 실패로 경제가 위축되어 전체 아랍의 동조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이 전쟁은 소련과 아랍 연합이 갑작스런 천재지변으로 인해 패하고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되고 승전국 이스라엘은 시온산 마호메트의 오마하 성전을 헐고 솔로몬 성전을 재건하고 통일 유럽과 7년 평화 협력을 맺게 되는데 이 조약이 7년 환난의 출발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가 된다고 예언하였다.
결국 조용기의 종말론은 말세에 진행될 역사의 구체적 시나리오를 만들어 예언하는 잘못된 종말론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구조 속에서 요한계시록을 말세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조용기 종말론의 단 한 가지 다행한 점은 재림의 시간을 못 박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2. 박형룡의 종말론
박형룡은 1973년 출간한 교의신학 제7권 『내세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학적 전통은 역사적 천년기 전 재림론이다. 구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오랜 세월 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친 이눌서(W. D. Reynolds)박사는 역사적 천년기 전 재림론을 강의하였다. 8․15 광복 후 남한의 장로회신학교와 총회신학교에서 여러 해에 걸쳐 조직신학을 강의한 필자도 역사적 천년기 전 재림론을 전하였다.”
위의 박형룡의 언급에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평양신학교 시절부터 역사적 전 천년기 재림론을 표준적인 재림론으로 가르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역사적 전 천년기 재림론은 오늘에도 박형룡의 뒤를 이어 장로교회의 합동 측 계열의 신학자인 박아론, 차영배, 최홍석, 천정웅 같은 이들에 의해 계속 가르쳐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 한국 장로교회의 거의 절반은 역사적 전 천년기 재림론을 표준적인 종말론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역사적 전 천년기 재림론은 개혁신학의 기본적 전통에 입각한 종말론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한국의 정통신학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에 의해 가르쳐진 것이니까 당연히 개혁신학의 정통적 종말론일 것이라는 상상을 우리가 갖기 쉽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지 못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혁신학은 대체로 역사 속에 구체적인 실체로서의 천년왕국에 대한 꿈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해 왔기 때문이다.
천년왕국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답 역시 “아니다”였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재침례파(Anabaptist)들이 종말과 천년왕국을 거칠게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루터는 천년왕국을 단호히 거부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아 천년왕국설을 “유대인의 견해”로 정죄했다. 칼빈 역시 천년왕국설을 『기독교강요』에서 단호히 경멸하였다. 칼빈은 천년왕국설을 주장하는 자들을 가리켜 그들의 주장은 허구이며 너무 유치하여 논박할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다고 단호히 배격했다. 칼빈에 의하면 천년왕국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일시적인 나라로 만들 위험을 안고 있는데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결코 일시적인 나라가 아니고 영원한 나라라는 것이다.
칼빈 이후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대체로 무천년기 입장을 취했다. 1930년대 이후에도 베르코프(L. Berkhof), 보스(G. Vos), 해밀턴(F. E. Hamiton), 머리(L. Murray), 헨드릭슨(W. Hendriksen), 후크마(A. A. Hoekema) 등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들과 베르코프(H. Berkhof), 베르까우어(G. C. Berkouwer) 등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개혁신학자들 역시 구체적인 입장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역사적 구체적 실체로서의 천 년 동안 있을 문자적 천년왕국을 부정했다. 20세기의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 재림론의 대표적인 신학자 월부우드(J. F. Walvoord)는 “개혁파 종말론은 탁월하게 무천년기 재림론으로 되어 왔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의 전부 혹은 거의 전부는 그들의 종말론은 어거스틴의 교훈을 따른 무천년기 재림론이었다”라고 개혁교회의 종말론의 특징을 약술했다.
따라서 박형룡의 종말론은 개혁파 신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정통적 종말론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전 천년기 재림론은 개혁파 신학 속에도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종말관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 종말관은 미국의 복음주의자 래드(G. E. Ladd)의 변호를 받는 종말관으로 박형룡이 그의 『내세론』을 쓸 때 특히 래드의 신학적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면 박형룡에 의해 체계화되어 한국 교회 내에서 가르쳐진 역사적 전 천년기 재림론은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 재림론인가? 이 재림론의 개요를 박형룡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가까우니 이것은 가견적, 자신적, 영광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앞서 모든 민족에게 전도, 대배도와 대환난, 불법의 사람의 나타남 같은 사변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앞에는 오히려 흑암하고 사혹하는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는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재림은 거대, 단일, 눈 부시는 영광스러운 사변일 것이나 교회, 이스라엘, 세계에 관련되는 다른 몇 가지 사변들이 수반함이 있을 것이다. 죽은 성도들은 부활되고 생존 성도들은 변형되어 그들과 함께 주를 영접하러 승천할 것이다. 적그리스도와 그의 악한 동맹자들은 살해될 것이요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회개하여 구원을 얻고 성지에 회복될 것이다. 다음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변형된 세계에 건설될 것이다. 이방인들은 절대적인 다수로 그 왕국에 편입될 것이다. 평화와 의의 상태는 전 세계에 충만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가 만기가 되고 곡과 마곡의 반란이 일어났다가 하늘 불에 의해 소멸된 후에 나머지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뒤따라서 최종 심판과 신천신지의 창조가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다시 요약해 보면 역사의 마지막은 대환난 ➻ 그리스도의 재림 ➻ 성도들의 부활 ➻ 적그리스도의 멸망 ➻ 천년왕국 ➻ 곡과 마곡의 반란 ➻ 죽은 자의 부활(이 부활은 악인의 부활임. 박형룡은 성도들은 천년기 이전에 부활하고 악인은 최종 심판 때 부활한다고 보고 있음) ➻ 신천신지의 순서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박형룡의 주장은 역사적 전 천년기 이론의 대체적인 경향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 전 천년기 이론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갖고 있는 이론이다. 칼빈 신학교 교수였던 루이스 베르코프(L. Berkhof)는 이와 같은 역사적 전 천년기 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첫째, 이 설은 요한계시록을 부당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둘째, 성서는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단번에 말하고 있으며(단12:2; 요5:28, 29; 행24:15), 또한 의인의 부활이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반하여(요6:39, 40, 44, 54; 11:24), 이 설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천 년간의 간격을 두고 있다.
셋째, 이 설은 이미 영화된 성도와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죄인이 함께 사는 천년왕국을 가상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상과 같은 베르코프의 비판 외에도 우리는 역사적 전 천년기 재림론이 갖고 있는 매우 비관주의적 역사관에도 유념해야 한다. 이 비관주의적 역사관은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 재림론에도 뚜렷이 나타나는데 이 역사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해지고 마침내 엄청난 적그리스도의 발호와 대환난이 일어난다는 역사의 시나리오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매우 문자적으로 적용해서 말세 역사의 시나리오를 찾는 성서 해석 방법에서 기원하는데, 이런 비관주의적 역사관은 박형룡이 가르친 종말론 속에서도 매우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박형룡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이 시대는 사탄의 침투 아래 계속 악해져 갈 것이고 교회는 이 사실을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 세계를 구원하여 기독교화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의해서만 성취될 것이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은 박형룡이 설명하는 것과 같은 비관주의적 역사관을 가르치는 책인가? 물론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 황제 도미시안의 박해하에 있던 성도들에게 묵시적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한 책이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적 상황과도 같은 적그리스도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르치는 희망적 역사관이 그 중심에 있는 책이다. 물론 요한계시록 해석이 학자마다 상당한 편차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요한계시록이 비관적 역사관을 해설하는 근거로 보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피상적 해석의 결과일 것이다. 네덜란드의 대표적 개혁파 신학자 베르코프(H. Berkhof)와 베르까우어(G. C. Berkouwer)는 요한계시록의 중심이 희망적 역사관임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고 오늘 고난 하고 있는 성도들은 계시록이 약속하는 묵시적 희망으로 위로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3. 이종성의 종말론
한국 교회는 박형룡의 『내세론』 이후 약 20년 만에 체계화된 새로운 종말론을 갖게 되었다. 이 종말론은 1990년에 출간된 이종성의 『종말론』Ⅰ과 Ⅱ이다. 이종성의 종말론은 한국 교회가 박형룡의 신학을 뛰어넘어 새로운 신학을 갖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로써 종말론 분야에서도 박형룡의 종말론과는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는 새로운 종말론이다. 이 새로운 종말론은 박형룡이 신봉하고 가르쳤던 역사적 전 천년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 이종성의 새로운 종말론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오늘의 종말론 혼란의 핵심적인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설에 집중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 예언에 대한 반대
이종성의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를 예언하는 것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반대하고 있다. 이종성은 그의 종말론에서 교회 역사상 나타났던 수많은 종말의 날짜를 예언했던 잘못된 역사를 열거하면서 종말의 날짜 예언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종성의 글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밀러와 여호와의 증인의 종말 날짜 예언의 실패의 역사 속에서 직통계시나 성경의 아전인수격 해석을 기초로 종말의 날짜를 예언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충분히 받을 것이다. 이종성은 밀러를 비판하면서 종말의 날짜 예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밀러는 예수의 금령을 범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25:13; 24:50; 24:42; 행1:7; 살전5:1, 2). 이와 같이 성서는 분명하게 밝혀 두었다.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은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이므로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밀러는 인간의 생각으로 상징적으로 주어진 숫자를 인위적으로 계산하는 큰 과오를 범했다.” 이와 같이 이종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는 아버지께 속한 비밀로 못 박고 있다.
2)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한 반대
이종성은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고 있다. 이종성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한국 교회 내에서 종말 신앙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설명하고 이에 대해 비판했다. 이종성에 의하면 세대주의적 종말론에서 강조되는 교회의 공중 휴거 개념은 성서를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오는 곡해로서 “별 가치가 없는 주장”으로 일축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의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구절은 이종성에 의하면 17절 하반절의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를 강조한 것이지 휴거론자들처럼 이 세상과는 떨어진 공중 혼인 잔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종성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일회적이다. 비밀스러운 공중 재림이 있고 천년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지상 재림이 또 있다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다. 7년 대환난을 설정하고 그 이전의 재림과 그 이후의 재림으로 나누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종성에 의하면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성서를 지극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휴거설도 전 휴거(7년 대환난 직전에 교회가 휴거하는 것), 중 휴거(계 11장에 있는 두 증인이 나타나 3년 반 동안 예언한다는 한 구절을 근거로 그 두 증인의 예언 활동 중간에 일어나는 휴거), 후 휴거(교회가 7년 대환난을 겪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때 공중 휴거되어 지상에 내려온다는 것)로까지 나누고 있는데 이와 같은 휴거설은 모두 비성서적이다. 이종성은 몇 차례의 휴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순간적으로 홀연히 변화하는 것이 바울의 정신이라고 보고 있다(고전15:51).
3) 역사적 전 천년설에 대한 반대와 무천년설의 문제점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반대한 이종성은 연이어 래드(G. E. Ladd)에 의해 오늘날 대변되고 있는 역사적 전 천년기 재림론도 반대하고 있다. 이종성은 역사적 전 천년기 재림은 부활과 최후 심판과 세상의 종말 같은 큰 사건을 상호 분리해서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것들은 결코 천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양분되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또한 역사적 전 천년기 재림론이 주장하는 여러 번의 부활은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기 매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종성은 요한계시록 20장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고 상징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이종성은 전 천년왕국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종성은 무천년설을 지지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이종성은 오늘날 후크마(A. A. Hoekema)에 의해 대표되는 무천년설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종성은 계시록 20장에 대한 후크마의 해석(예컨대 계20:5, 6의 부활을 육체적 부활로 보지 않고 영적 부활로 보는 것)은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성도들의 영혼이 죽음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는 자리로 올라간다는 것을 천년왕국과 연계해서 생각하는 것은 설득력 있는 성서적 뒷받침이 아직은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종성은 어떠한 천년왕국설을 갖고 있는가? 우선 이종성은 전 천년설, 후 천년설, 무천년설 등의 주장으로 교회가 분열되기를 원치 않는다. 이종성은 종말이 어떤 과정을 밟아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천년왕국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있느냐 후에 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역사의 의미와 이 역사를 마감할 하나님의 사역과 종말 이후의 인간과 우주의 운명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종성은 종말론의 본질적인 중요한 문제는 간과하고 지엽적인 문제에 교회가 깊이 빠지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이해의 터전에서 이종성은 천년왕국설은 현 역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적 통치의 상징으로 이해한 베르까우어와 베르코프의 견해를 가장 천거할 만한 학문적 견해로 제시하고 있다. 천년왕국은 타계적 신앙이나 역사에 대한 포기와 비관주의와 결탁될 성격의 상징이 아니고 적그리스도와 대항해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상징이다. 천년왕국은 하늘 위에서가 아닌 지구 위에서의 그리스도 승리의 상징이다. 이런 관점에서 20세기 후반의 대표적 개혁파 신학자 몰트만은 그의 종말론 『오시는 하나님』(Das Kommen Gottes)에서 천년왕국의 의미를 자세히 논술하고 있다. 베르코프 역시 천년왕국의 상징을 역사의 발전과 진보 개념과 연결점이 있다고 보고 이를 연결시켰다.
4) 현 역사의 중요성과 종말
이종성은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마지막 날의 날짜를 예언했던 열광주의적 종말론의 특징을 분석하면서 이런 유형의 종말론은 현 역사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모든 관심을 마지막 순간에만 집중시키는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종성은 열광주의적 종말론 신봉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역사 안에서 시작되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고 성장하고 있다. 마지막 때에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형성될 그러한 전적으로 미래적인 나라는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도 중요한 현 역사를 그들은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는 이종성의 종말론과 열광주의적 종말론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열광주의적 종말론이 현 역사를 마귀에게 넘겨주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데 반하여 이종성은 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Ⅱ. 오늘의 종말론의 문제들
우리는 앞에서 한국 교회가 어떤 시각을 갖고 종말론을 이해해 왔고 어떻게 가르쳐 왔는가를 밝혔다. 그러면 이제는 더욱 구체적으로 오늘의 한국 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말론 혼란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바른 신학적 답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현재 한국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종말론 혼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말세론적 이해와 이와 연관된 666에 관한 문제, 그리고 한때 혼란을 빚었던 시한부 종말론과 휴거론의 문제이다.
1. 요한계시록과 666
한국 교회의 상당수의 신자들은 요한계시록을 말세론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밝힌 조용기의 『요한계시록 강해』가 철저히 말세론적 시각에 의해 요한계시록을 설명하고 있다. 바로 이런 말세론적 시각으로 서달석은 『현실로 나타나는 666』에서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언급된 짐승의 수 666은 말세에 진입한, 오늘날의 컴퓨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컴퓨터의 영자 스펠링을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해서 합하면 666이 된다는 것이다. 즉, C=18, O=90, M=78, P=96, U=126, T=120, E=30, R=108인데 이것의 합계가 666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달석에 의하면 컴퓨터가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666이다. 서달석은 다음과 같이 666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어떻게 예루살렘에 있는 우상을 온 세계 사람이 경배할 수 있을까? 얼마든지 가능하다. 앞으로 모든 사람은 손이나 이마에 666의 표를 받게 되면 그 표는 전자칩이 장치되거나 레이저 전파가 흘러나오기 때문에 어디에서든지 24시간 활동을 감시당할 것이고 인공위성을 통해 예루살렘 우상에게 경배할 시간에 불평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면 컴퓨터가 감지해 내서 즉각 체포, 사형당할 것이다.
미 공군에서는 컴퓨터 칩을 조종사 두뇌에 이식시키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고 입 안의 치아 사이에 칩을 부착해서 치료용으로 사용 중이며, 바늘 끝에 부착할 수 있는 칩이 개발되었고, 미국 TV에는 고기 눈알 같은 렌즈가 전화선에 부착되어 안방을 감시하고 사람의 생각까지 컴퓨터가 감지해 내는 시대가 666시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666의 표를 받은 사람은 어디서든지 감시를 당하므로 적그리스도의 지배를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서달석 및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컴퓨터만 666이 아니다. 신용카드 속에도 666이 숨어 있고 머지않아 세계 통일 화폐도 발행되는데 이 화폐도 어느 시점이 되면 666의 문신으로 변하고 만국 상품의 통상 부호인 바코드(Bar Code)도 666의 문신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제 666의 문신인 바코드가 없이는 상품 거래를 할 수 없는 시대가 곧 오는데 이것이 바로 계시록 13장의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도 못 하게 하나니”라고 언급된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서달석은 바로 위와 같은 시각을 갖고 자신의 책을 썼고 자신의 책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수많은 책을 번역, 출간하여 한국 교회 내에서 666과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하는 혼란의 주역이 되었다. 이와 같이 666과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한국 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어떤 교회 전도사는 교회 차량을 살 때 차 번호에 6자가 계속 들어가지 않도록 금식 기도한 쓴웃음조차 웃을 수 없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666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이 갖고 있는 특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유대인들의 묵시서에 속하는 책이다. 유대인들은 상당수의 묵시서에 속하는 책들을 갖고 있었다. 그중에 정경에 들어있는 것은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이지만 외경과 위경 속에 상당수의 묵시서들이 들어 있다. 예를 들면 「제4 에스라」, 「12족장의 계약」, 「에녹서」, 「모세의 승천」, 「이사야의 승천」, 「시락서」, 「바룩의 계시」 등 여러 책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 유대인들의 묵시서들의 특징을 잘 이해할 때 그 비밀이 해석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묵시서들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유대인들의 묵시서들은 박해기에 기록된 책들이었다. 묵시서들에 나타나는 용, 짐승, 나팔, 뿔, 대접 등 도무지 알기 힘든 언어들은 바로 이 박해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이런 언어들은 모두 박해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 언어들이다. 예컨대 요한계시록은 로마 황제 도미시안의 박해기에 기록된 책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에 의하면 로마 황제 도미시안은 사탄이었다. 그는 악의 상징이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륙했고 우상숭배를 강요했다. 요한에 의하면 도미시안은 명백히 사탄이었지만 ‘도미시안은 사탄이다’라고 직접적으로 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박해의 상황은 그것을 용인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도미시안은 사탄이다’라고 직접 썼다고 가정해 보자. 이 글을 쓴 요한은 즉각 체포되어 토막이 나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글을 읽는 사람도 화형을 당하든지 사자 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글은 찢겨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인 상황과 묵시서의 특징을 이해하고 요한계시록을 이해해 들어가야 한다. 그럴 때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우리에게 정확히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오늘날 한국 교회 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계시록 13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13장 1~2절에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었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면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유대 묵시서에서 용은 마귀를 상징하고 짐승은 국가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국가는 어느 국가인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로마이다. 그러면 13장 1~2절의 뜻은 무엇인가? 그 뜻은 현재 로마가 갖고 있는 권세는 마귀로부터 온 권세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권세에 순종하면 안 된다. 지금 로마가 황제숭배를 강요하면서 무서운 칙령을 반포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마귀로부터 나왔다는 말이다. 로마의 칙령과 권세 뒤에는 붉은 용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에 저항해야 한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주제이다. 요한은 박해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박해의 장본인인 로마가 마귀임을 설명하고 끝까지 싸워서 승리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계21:6-8).
계시록 13장 1~2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로마가 갖고 있는 국가 권세에 대한 요한의 언급은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권세에 대한 바울의 언급과는 내용상 반대가 된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모든 권세는 위로부터 왔다고 언급했다. 이 언급에 의하면 국가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구절이 외견상 주장하는 것이 서로 엇갈린다 해서 상호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13장에서의 바울의 언급은 정상적인 국가의 권세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국가가 선을 장려하고 악한 자를 벌하고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계시록 13장의 국가는 이미 악의 도구가 된 국가로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마귀의 왕국을 위한 국가로 변모한 국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에 저항해야 한다. 따라서 로마서 13장의 바울의 언급을 기초로 순종을 강요한 독재 권력의 강요는 전혀 성서적 정당성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계시록 13장 1~2절이 로마가 갖고 있는 권세가 마귀로부터 말미암았으므로 이에 대한 저항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요구하고 있다면 계시록 13장 18절의 666은 무엇인가? 계시록 13장 18절의 666 역시 계시록 13장 1~2절과 연계된 내용이다. 우선 13장 18절의 요한의 언급을 살펴보자.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위의 요한의 언급에서 우리는 이 666이 사람이라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666은 서달석이 주장하는 것처럼 컴퓨터나 신용카드나 세계 통일 화폐나 바코드와 같은 물건이 아니고 어떤 사람을 상징하는 수이다. 그것은 또한 어떤 도시도 아니다. 『유럽통합과 세계 총통』이라는 책을 쓴 처치는 미국의 뉴욕이 짐승의 수 666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N=84, E=30, W=138, Y=150, O=90, R=108, K=66). 처치에 의하면 뉴욕은 현대판 음녀 바벨론일 가능성이 충분하고 또한 뉴욕 외곽 지대에 바벨론이라는 곳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계시록 13장 18절은 666이 어떤 도시가 아니라 사람을 상징하는 숫자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누구인가?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사람이 로마 황제 네로(NERON)라고 생각하고 있다. 네로라는 이름의 라틴어 문자의 합이 666이 되기 때문이다(N=50, E=6, R=500, O=60, N=50). 그런데 이 네로는 마지막 N자가 없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마지막 N자를 없애면 그 합은 666이 되지 못하고 616이 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고대 사본 가운데 이 문자의 합을 666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616이라고 표기한 사본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마지막 N이 없이 네로를 불렀던 지역에서 필사했던 최초의 초대 교인은 이 사람이 명백히 네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666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616으로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그 합이 666이든 616이든 네로를 상징하기 위해 쓴 숫자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히브리어로 네로 황제(NERO Caesar)라는 글자의 합이 666이라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따라서 666은 오늘의 컴퓨터나 바코드와는 전혀 관계없는 황제 네로를 상징하기 위해 일회적으로 쓰인 암호 숫자이다. 계시록 13장 14절에 언급되고 있는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이라는 표현 역시 666이 네로라는 것을 명백히 입증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이라는 표현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네로 환생설을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네로 환생설에 의하면 네로는 워낙 악한 자여서 반드시 다시 살아나 엄청난 악을 행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도륙할 것으로 알려졌었다. 요한은 바로 이 네로와 같은 로마 황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황제숭배를 적그리스도의 수 666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 도미시안이 바로 환생한 네로와 같은 자이고 이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자가 총명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도 못 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말세에 있을 만국 통상 상품 기호인 바코드를 의미하는 것인가? 요한계시록을 말세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와 유사한 잘못에 빠진다.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바클레이(W. Barclay)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로마 제국 안에 행해졌던 관행과 연관된 표현이다. 즉, 향을 피우고 황제에게 경배하고 난 후에는 그것을 이행했다는 증서를 사람들이 받았다. 이 증서가 바로 짐승의 표이다. 이 표를 받은 사람은 박해와 죽음으로부터 면죄 받을 수 있었고 로마 제국 내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계시록 13장 17절의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 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라는 표현은 이 표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상행위조차 허용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 표를 결코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을 버리고 황제숭배를 하게 되면 머지않은 장래에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되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짐승들을 처박아 넣는 유황불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살인자들과 신앙을 버리고 우상숭배의 길에 들어선 비겁한 우상숭배자들은 불타오르는 유황의 바다에 빠질 것이다(계21:8).
요한계시록은 결코 말세론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요한계시록 속에서 컴퓨터나 만국 통합화폐나 EU 통합이나 바코드를 찾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공부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도미시안의 엄청난 박해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 박해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고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쓴 책이었다. 이 책을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고 해석하면 치명적으로 잘못 해석된다. 물론 요한계시록 안에 미래적인 단층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속에 들어 있는 단층이지 말세에 대한 연대기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요한계시록이 예언의 책이라는 말의 뜻은 말세의 시나리오가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오늘 믿음을 지키다가 죽은 충성된 자들이 결국은 마지막 때에 다시 살아서 세상을 통치하게 된다는 예언을 기록한 예언의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현재의 박해자들은 장차 유황불에 빠질 것이고 오늘 고난당하며 충성하는 자들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할 것임을 가르치고 위대한 기독교 역사관을 가르치는 책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2. 시한부 종말론
한국 교회 내에서의 시한부 종말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장림이었다. 이장림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1988), 『하늘문이 열린다』(1988), 『경고의 나팔』(1989), 『1992년의 열풍』(1990) 등의 책을 잇달아 출간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1992년이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은 더욱 구체화되어 1992년 10월 28일이라고 밝혔고 이때 많은 성도들이 홀연히 증발할 것(휴거)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일부 성도들은 남아서 7년간의 대환난을 맞이하는데 그 이유는 7년 환난 기간 동안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맡은 자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이론에 의하면 이것을 예언한 이장림 자신은 1992년 10월 28일에 데려갈 수도 있고 지상에 남아 복음 전도의 사명을 계속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정말 1992년 10월 28일에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이 있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밝혀졌다. 성서 역시 명백히 마지막 재림의 날짜를 결코 알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막13:33~37). 마지막이 언제일는지는 성서에 의하면 오직 성부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비밀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7). 마지막 날에 대한 결정은 성부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권한이요 비밀이다. 이장림은 『1992년의 열풍』에서 “너희가 알 바 아니요”를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으나 이것은 명백한 성서의 말씀을 뒤집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장림은 왜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이장림은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3:7)라는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직통계시를 받았고, 그 날짜가 1992년 10월 28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모스 3장 7절은 이스라엘의 장래를 그 종 선지자들에게 알려준다는 말이지 역사의 종말을 알려 준다는 말로 확대해석하면 안 된다. 이장림의 치명적인 오류는 아모스 3장 7절의 말씀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데 있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시기마다 필요한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구약성서에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 날에 대한 비밀은 예수의 명백한 말씀을 통해 결코 알 수 없는 비밀로 못 박혀 있다. 마지막 날은 성자 예수조차도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비밀이다.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마태복음 24장 37~39절에 나오는 “노아의 때와 같이”라는 구절을 옛날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심판의 때를 가르쳐 준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신실한 종들에게 마지막 날을 가르쳐 주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법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노아의 때와 같이”라는 표현 때문에 시한부 종말론을 신봉하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노아의 때와 같이”라는 표현은 전체 문맥 속에서 정확히 읽어야 한다. 이 “노아의 때”의 의미는 그 뒤에 연속으로 나오는 말씀인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와 연계되어 있다. 즉, “노아의 때”의 의미는 노아의 때에 멸망 당했던 사람들이 깨어 있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쾌락의 삶을 살다가 망한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사람들이 깨어 있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쾌락의 삶을 살다가 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알려주신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이 마지막 날을 알려주신다는 말이 아닌 것은 마태복음 24장 36절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는 마지막 날을 모른다는 말씀과 마태복음 24장 42~43절의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의 마지막 날을 모르므로 깨어 있으라는 권면의 말씀 사이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본문을 편집한 마태는 이 본문이,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모르므로 노아 때 먹고 마시고 쾌락의 삶을 살다가 망한 사람들처럼 망하면 안 된다는 권면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아의 때와 같이”는 결코 시한부 종말론을 근거하는 근거 구절로 사용하면 안 된다.
3. 휴거론
오늘의 한국 교회의 종말론 혼란의 중심에는 휴거론이 들어 있다. 종말론을 가르치는 사람들 중 다수의 사람들은 휴거론을 기초로 해서 종말론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휴거론은 개혁교회의 정통적인 종말론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성서적으로도 잘못된 이론이다. 왜냐하면 성서 속에 휴거론을 뒷받침할 만한 구절이 전혀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휴거론은 세대주의 종말론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이론으로, 예수의 지상 재림이 있기 7년 전에 공중에 비밀 재림이 있고, 이때 일군의 성도들의 휴거가 일어난다는 이론인데, 이것을 비밀 재림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세계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난 밤에 예수의 공중재림이 있고 일군의 성도들의 휴거가 일어난 줄 모르고 세상에서의 자기 일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휴거론이 틀린 이유는 성서 어느 곳에서도 예수께서 두 번 재림하신다는 곳이 없기 때문이고, 휴거론자들이 휴거론의 결정적인 근거 구절로 인용하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의 본문은 예수께서 마지막 날 재림하는 역사의 마지막 날을 서술하는 본문이지, 이 마지막 날의 재림보다 7년 전에 일어나는 공중의 비밀 재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중의 비밀 재림이 아닌 이유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의 표현이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최후의 심판의 날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은 자의 부활이 이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역사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지, 예수의 재림 이전 7년 전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살전4:18)한다는 표현은 귀한 사람이 공항에 내리면 공항에서 그를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다리던 주님을 공중에서 영접한다는 의미인데, 이렇게 주님을 영접해서 주님과 더불어 주께서 건설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항상”(살전4:17)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즉, 7년 동안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주님의 나라에서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은 세대주의의 휴거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성서의 본문이 아니다. 즉, 공중은 마지막 날 주님을 만나는 장소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부과하면 안 된다.
결언
폭풍처럼 휘몰아친 이장림의 시한부 종말론이 거짓으로 드러났으나 한국 교회 내에서 종말론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것은 구약시대 4,000년, 신약시대 2,000년이라고 해석한 세대주의적 신학의 영향 때문인데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짜를 예언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도 그들이 갖고 있는 종말론의 기본적인 구조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있기 때문에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한국 교회 내에서 극복되지 않는 한 종말론의 혼란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이 종말론의 혼란을 방지하는 방법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오류를 밝히고 요한계시록에 대한 말세론적 이해를 극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