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존과 본질 =
실존과 본질의 문제는 근대철학 이후에 부각된 것이지만, 그 개념들은 중세철학에서부터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위치하고 있다. 이 두 개념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키엘케고올의 실존주의에서 부터 일 것이며, 특히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선언한 이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르트르의 선언이 가지는 의미는 심오하지만 그 개념적인 이해에 있어서 다분히 모호함이 있고, 논리적 혹은 심리학적인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라틴어에서 본질에 해당하는 용어는 ‘essentia’이고 실존에 해당하는 용어는 ‘existentia’이다. 이 두 용어는 다의적인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essentia’는 그것이 무엇인 것(quid)으로서 즉 영어의 ‘what is this?’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해변 가에서 이상한 것을 주운 꼬마가 ‘이게 뭐지?’라고 물을 때, 우리는 그것은 ‘가재야’ 혹은 ‘꽃게야’라고 답한다. 이때 이 어떤 것의 본질은 곧 그것이 '무엇인 것' 즉‘가재’이거나 ‘꽃게’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질은 어떤 것의 정체성 혹은 동일성으로서 사전적인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본질의 1차적인 의미라면 본질은 2차 3차로 다양하게 분화될 수 있다. ‘가재’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북미산 가재’라든가 혹은 ‘제주산 가재’라든가 더 나아가 ‘북미산 붉은 수염가재’라든가 ‘제주산 긴꼬리 가재’라는 식으로 더 구체적으로 분화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본질의 개념을 인간에게 적용시킨다면 ‘인간으로서의 본질’ ‘개인으로서의 본질’ ‘남자 혹은 여자로서의 본질’ ‘시인으로서의 본질’ ‘정치가로서의 본질’ 등 다양하게 분화될 수 있는 것이다. 넓은 의미로 무엇이라고 규정되는 모든 것은 곧 ‘본질’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실존은 근원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 규정되지 않은 것, 모호하거나 혼란한 그 무엇을 말한다. 즉 한 개인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지만 무엇인지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어떤 불안, 고통, 애매모호한 상황, 다의적인 심리적 상태, 왔다 갔다 하는 정신적인 가치감정 등 한마디로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있는 한 개인을 둘러싸고 존재감정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직 '본질화'되지 않지만 '나의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모호한 일체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키엘케고올은 실존은 ‘불안이다’고 하는가 하면, 사르트르는 ‘실존은 자유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한 진술에는 ‘주체에 대한 자각’이라는 근대철학의 정신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내가 누구인 것’은 결코 나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나 문화나 관습이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선택의 행위에는 이미 주어진 ‘나의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나의 존재감정을 이루고 있는 ‘실존적인 상황’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어떤 사상이나 문화나 그 어떤 것으로부터 규정된 인간에 대한 정의, 가령 ‘인간은 이데아의 반영이다’ ‘인간은 영혼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은 감성적 동물이다’ ‘인간은 신경이 좀 더 발달한 고등동물이다’ ‘인간은 물질이다’는 등 그 어떤 인간의 본질도 ‘나의 본질’ 즉 ‘내가 누구인 것’을 규정할 수 없으며, 오직 나의 현 상황과 나의 의지를 통해서 스스로 ‘내가 누구인가’를 선택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단적으로 내가 누구인가? 하는 나의 본질은 나를 둘러싼 총체적인 나의 상황 즉 ‘나의 실존’이 규정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이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참으로 휴머니스트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고찰하기 이전에 현재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개별적인 상황들을 존중하기에 보다 ‘인간적인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르트르의 선언에는 여전히 불분명하고 모호한 점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인간의 조건이란 것에 대한 고찰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적인 조건들을 초월한 ‘초인’이 아닌 이상, 이미 주어진 나의 본질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가령 나를 둘러싼 상황이 어떤 것이든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본질들 ‘나는 한 인간이다’ ‘나는 여자이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누구의 자식이다’ ‘나는 노래를 잘 부를 수 없다’ ‘나는 이성적인 존재이다’는 등의 수많은 나의 본질들을 내가 어떻게 무시하거나 초월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어찌할 수 없이 주어진 수많은 본질들은 필연적으로 ‘현재’나 ‘미래’의 나의 개별적인 본질을 형성하는데 뗄레야 뗄 수없이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범인들이 '나의 실존은 나의 본질에 앞선다'고 선언한다는 것은 다분히 혹은 반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심리학적으로 고찰된 인간의 심리적인 현상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 인간의 미래의 모습은 현재의 나의 실존적인 상황이 전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과거의 어떤 특수한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서 내면 깊숙이 형성된 그 어떤 ‘본질’, 즉 심리학에서 ‘무의식’이라고 하는 ‘과거의 자아’에 의해서 영향 받고 지배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심리학적 고찰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나의 실존적 상황 이전에 나의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나의 본질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며, 이는 곧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셋째, 다양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인간의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 ‘일의적’으로 축소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나의 자유란 결코 이미 주어진 모든 규범이나, 일체의 사유를 부정하고 초월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의 자유는 기존에 주어진 어떤 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또한 그것을 (나의) 진리로 수용할 수도 있다. 거부할 자유만을 자유라고 하고 옳다고 인정할 자유, 수용할 자유를 자유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부정의 자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의 본질 즉 내가 누구인 것은 모든 주어진 것을 초월하여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지만, 이미 주어진 것, 규정된 것을 긍정하고 수용하면서 정립될 수도 있다. 여기서도 그 기준은 결국 ‘진리’ 혹은 ‘진실’이다. 모든 기존의 것이 모두 ‘거짓’인 것도, 모두 ‘진실’인 것도 아니다. 진리인 것은 수용할 수 있고, 거짓인 것은 부정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의 의미가 아닐까!
결국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실존과 본질은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즉 실존이 없는 본질은 생각할 수 없고, 본질이 없는 실존 또한 생각할 수 없다고,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실존과 본질에 대한 질문은 결국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하는 질문과 다를 바 없다고 할 것이다. 실존과 본질에 대한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성’일 것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창조적인 존재이다. 이는 주어진 ‘실존적 상황’에서 새로운 본질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곧 ‘인간’이라는 것이다. 창조란 당연히 주어진 기존의 것을 초월하겠지만, ‘초월’이 부정이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인간의 창조란 차라리 ‘주어진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끄집어내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낸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2.06.18 13:41
첫댓글 고맙습니다. 실수를 알려줘서, 무심코 친 것이 아마도 평소 국문법에는 약한 탓도 있고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