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고건축 우보만리 한옥에 대하여…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스크랩 정릉(貞陵)-신덕왕후(神德王后)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175 12.05.13 15: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릉(貞陵)과 정동(貞洞)

 

서울 살면 정릉(貞陵)이란 이름은 웬만하면 들어 보았을 것이고,

삼각산(북한산) 등산 다니면서 정릉 쪽으로 내려오거나 올라가기도 했을 것이다.

이름에 능()이 붙었으니 현재 또는 과거에 있었으리라는 추리를 할만한데,

()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대개 사람들이 능()을 가 본

경험은 학교 소풍 때 일 텐데 정릉(貞陵)은 수백 명 학생을 풀어 놓기에는

규모가 작은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서울에는 정릉 말고 경운궁 곧 덕수궁 옆에 정동(貞洞)이란 동네가 또 있다.

정동(貞洞)은 조선 시대에는 정릉동(貞陵洞)이라고도 불렀으니 바로 정릉이

처음 정동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남은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이 정릉(貞陵)이다. 조그마한 능에 거 뭐 볼 것 있느냐?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역사의 한 장면이 들어 있다.

 

 

태조(太祖)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太祖)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이다. 보통 계비(繼妃)로 부르고 달리 적당한 말도 생각나지 않아 필자도

따라 하지만 뭘한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계비라는 말은 처음 비()가 죽거나

폐위된 뒤 새로 맞아 들일 때 쓰는 데, 강씨(康氏)의 경우는 다르다.

 

곡산(谷山) 강씨(康氏)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따님 신덕왕후

(神德王后)는 태조(太祖)가 유처취처(有妻娶妻)한- 부인이 있으면서 또 맞아 들인-

부인이었다. 보통 이 부분 해설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 태조는 고려시대의 풍습에 따라 향리(鄕里)와 개경(開京)에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각각 두었는데 강씨는 경처(京妻)였다…..

 

이것이 과연 고려의 풍습이었을까? 작첩(作妾)은 한 세대 전 필자 어릴 때만 해도

누구네 아버지 첩 얻었다 더라 하는 이야기 자주 들을 정도로 많았다.

박정희 군사정권도 잘한 일이 더러 있으니 5.16 후 공무원 작첩을 엄하게 다스려

그 뒤부터 첩을 둔 사람이 공직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유처취처(有妻娶妻)하여 두 부인(夫人) 좌부인(左夫人) 우부인(右夫人)을

거느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시골에서 후손은 없고 첩자(妾子)로 집안을

이을 수 없어 어쩔 수 없다며 핑계 대고 이런 일 하는 것을 보긴 했으나,

조선이 망한지 한참 지난 뒤니 제멋대로 한 것이지 옛 법도에 따른 것이

아닐 것이다. 유처취처(有妻娶妻)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사안인데

그것이 보통 사유 가지고 받아 낼 일인가?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윤원형은

난정을 그냥 부인 만들지 굳이 본처를 죽이고 또 문정왕후 동원은 왜 했는가?

 

고려 후기 어느 재상이 우리나라는 여자가 많고 남자는 적으니 한 남자가

여러 부인을 두도록 하자는 논의를 냈다가 여자들한테 혼이 나는 일이 있었다.

이런 논의가 나왔다는 것은 고려 때도 여러 부인(첩이 아니라)을 두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불법이었다는 반증이다. 태조가 두 부인을 거느린 것은

아마도 편법이 아니었을까 한다. 굳이 풍습이라고 한다면 세력자에게 법이

예나 지금이나 잘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용어로는 계비(繼妃) 보다 차비(次妃)가

(삼국시대는 이런 말이 나온다) 더 어울리지 않을까?

 

 

조선왕조 첫 번째 왕비(王妃)

 

차비(次妃)던, 계비(繼妃)던, 경처(京妻-경처라니 괜히 현지처 생각이 난다)던,

신덕왕후(神德王后)는 조선왕조 첫 번째 왕비(王妃)다. 왜냐하면 태조의 첫째

부인-저 위 해설에 따르면 향처(鄕妻)-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는

조선 개국(開國) l년 전인 1391년에 이미 돌아갔기 때문이다.

 

1392년 임신(壬申) 7월 17일 태조(太祖)는 백관의 추대를 받는 모양새를 갖추어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나아가고, 8월 7일 강씨(康氏)를 세워 현비(顯妃)를 삼았다.

 

강씨(康氏)의 소생 방석(芳碩)이 세자(世子)가 되다

 

오늘 날 대통령 임기가 다 되가는 데 아직 결정이 나지 않고 친목모임에도 보면

회장임기가 끝났지만 후임을 못 정해 너 더 해라 아니 이제 더는 못해 하며

승강이 하는 것을 더러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우리 조상들은 임금이 아직

살 날이 창창해도 세자부터 정할 정도로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고려 무신란 때도 보현원에서 변을 일으켜 왕을 제압하자 마자 다음 한 일이

태자를 붙잡는 것이고, 성삼문이 세조(世祖)를 제거하는 거사 마지막 순간에

망설인 것도 세자가 자리에 없는 때문이었고, 선조(宣祖)가 임란(壬亂)에

의주로 피란 나가기 전 시급히 한 일이 광해군을 동궁(東宮)으로 삼아

분조(分朝)를 세우는 것일 정도로 세자가 정치에 주는 안정감은 대단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해야 할 일이 여럿 있겠지만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입세자(立世子)였다.

 

다 알다시피 태조는 첫 부인 한씨(신의왕후(神懿王后)에게서 여섯 아들을 두고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에게서 아들 둘-무안대군(撫安大君)방번(芳蕃),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과 딸 하나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두었다.

 

“ …태조가 일찍이 배극렴(裵克廉)과 조준(趙浚) 등을 내전에 불러서

세자 세울 것을 의논하니, 극렴 등이 말하기를, “시국이 평온할 때에는 적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먼저 공 있는 자를 세워야 합니다.” 하였다.

 

신덕왕후가 몰래 듣고 통곡했는데,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배극렴 등이 드디어 의논을 끝내고 나왔다.

뒷날 또 배극렴 등을 불러서 의논하니, 다시는 적자를 세워야 하느니,

공 있는 이를 세워야 하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극렴 등이 물러가서 의논하기를,

“강씨(康氏 신덕왕후)는 필시 자기 아들을 세우고자 할 텐데,

방번은 광패(狂悖)하니, 막내아들 방석이 조금 낫다.” 하고,

드디어 방석을 봉하여 세자로 삼기를 청하였다. (연려실기술) “

 

실록에는 신덕왕후가 몰래 듣고 통곡했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중국사에서 이 비슷한 구조를 본 것도 같으니 이 부분 후대에 이야기가 불어서

전설이 된 것 아닌가 한다. 그러나 울음이 밖에 들리게 까지는 아니라도

정황상 강씨가 자기 소생으로 세자를 세우게끔 공작을 한 개연성은 충분하다.

 

 

신덕왕후(神德王后) 세상을 떠나다

 

태조 5년( 1396 병자 ) 8월 13일

밤에 현비(顯妃)가 이득분의 집에서 훙()하였다.

임금이 통곡하고 슬퍼하기를 마지 아니하였고,

조회(朝會)와 저자[]를 10일간 정지하였다. (실록)

 

궁궐이 아니라 이득분의 집에서 돌아 간 것은 병세가 위중하여 피접을 나간

때문이다. 옛날 병이 심해질 때 집을 옮기면 행여 낳아질까 하는 믿음이 있었다.

 

취현방(聚賢坊)에 장지를 정하다

 

신덕왕후 장지는 행주, 안암동 등을 물색하다가 취현방(聚賢坊)으로

최종 결정이 되었다.

 

태조 5년( 1396 병자 ) 8월 20일

임금이 행주(幸州)에 거둥하여 능지(陵地)를 보았으나 뜻에 맞지 않았다.

서운관(書雲觀) 유한우(劉旱雨)·배상충(裵尙忠)·이양달(李陽達) 등이

저희들끼리 서로 좋으니 나쁘니 하여 서로 다투다가 결정을 짓지 못하므로,

임금이 크게 성을 내어 모두 매를 때리었다.

 

태조 5년( 1396 병자) 8월 21일

임금이 안암동(安巖洞)에 거둥하여 능지(陵地)를 보아 이튿날 개기(開基)하고

땅을 파 보도록 명하였는데, 물이 솟으므로 중지하였다.

 

태조 5년( 1396 병자) 8월 23일

임금이 취현방(聚賢坊)에 거둥하여 능지(陵地)를 보아 결정하였다.

 

 

지도: 수선전도 중 정동(貞洞)

 

실록에는 취현방(聚賢坊)이지만 흥천사기(신덕왕후 원찰)에는 황화방(皇華坊)으로

나온다. 또 인터넷 검색하면 정릉 원위치가 영국 또는 미국대사관저 라고 하니

황화방설을 좇은 것으로 보인다. 영국대사관이나 미국대사관저나 거기가 거기고,

황화방(皇華坊)과 취현방도 지척이니 어디가 되었건 정동 일대는 분명하다.

 

 

태조 6년( 1397 정축 ) 1월 3일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취현방(聚賢坊) 북녘 언덕에 장례하고 

정릉(貞陵)이라 이름하였다. (실록)

 

1396년 8월에 돌아 갔고 1397년 1월에 장사 지냈다면 여섯 달 만이다.

천자(天子)는 일곱 달, 제후(諸侯)는 다섯 달, 경대부는 석 달, 사서인은 달을 넘겨

장사 지내라는 예법을 살짝 어겼지만 아마도 연말이고 또 발인(發靷)에 적합한

길일(吉日)을 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무인정사(戊寅靖社) 1차 왕자의 난

 

그러나 문 밖에서 통곡하며 세운 보람도 없이 신덕왕후 죽은 지 이태 만인

무인(戊寅)년 1398년에 두 아들 방석과 방번은 무참히 살해 당한다.

 

무인년(1398) 가을에 태조가 병이 들었는데, 정도전이 태조의 요양을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의논하자고 핑계하여 모든 왕자를 불러 이 기회에

난을 일으켜서 자기 당이 안에서 어떻게 처치하고자 하였다.

 

중략(中略)

 

태종이 대궐에 이르니, 한 내시가 안에서 나와 말하기를,  “전하께서 병세가

중하여 다른 곳으로 피우(避寓) 하고자 하오니, 모든 왕자는 다 들어오시오.”

하였다. 그 전에는 궁문에 모두 등불이 밝혀져 있었는데, 이 밤엔 등불이 없어서

사람들이 더욱 의심하였다. 태종이 거짓으로 뒷간에 가서 생각하고 있을 때,

익안군 방의(益安君 芳毅)와 회안군 방간(懷安君 芳幹)과 상당군(上黨君) 이백경

(李伯卿)이 뒤따라 와서 불러 말하기를, “정안군 정안군(靖安君), 장차 어이할꼬.”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왜 소리를 높이는가.” 하고, 또 손으로 소매를 치면서

말하기를, “계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는 방의ㆍ방간ㆍ백경과 함께 달아나

영추문(迎秋門)으로 나왔다.

 

중략(中略)

 

태종이 무사를 거느리고 정도전 등을 정탐하니, 그때 이직(李稷)과 함께

남은(南誾)의 첩의 집에 모여서 등불을 밝히고 즐겁게 웃고 반종(伴從)들은

다 졸고 있었다. 이숙번으로 하여금 일부러 활을 쏘아 기왓장 위에 떨어지게

하고는 불을 놓아 집을 태우니, 도전이 이웃집 봉상시 판사 민부(閔富)의 집에

숨었는데, 민부가 소리질러 말하기를, “배가 불룩하게 나온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 왔다.” 하였다. 군사가 들어가 수색해서, 도전이 칼을 짚고 기어서

나오는 것을 잡아 태종 앞으로 나오니, 도전이 우러러보고 말하기를,

“만약 나를 살려 주시면 힘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왕씨를 저버리고 또 이씨를 저버리고자 하느냐.”

하며, 즉시 목을 베어 죽였다. (연려실기술)

 

정도전이 먼저 선수(先手) 치려는 것을 태종이 간신히 막았다는 이야기 인데

역사 책을 읽을 때는 행간(行間)과 낙수(落穗)를 잘 살펴야 한다.

선수 치려는 사람은 남의 첩 집에서 놀고 있고 당할 뻔 한 사람이 만반의 준비를

다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북한에서는 6.25를 북침(北侵)이라고 하는 바 전후 사정 모르고 들으면

그럴듯하게 여기게끔 논리가 꽤 정연하다고 한다. 전 세계가 아폴로 달 착륙과

9.11 때 미 펜타곤에 비행기 부딪힌 것을 티브이로 보았건만 사진 조작이라는

사람이 있고 그것만 읽으면 아 그런가 하고 여길 수도 있다.

 

어쨌던 통곡하며 애쓴 보람도 없이 무인정사(戊寅靖社)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의 두 아들 방석과 방번과 사위 또한 죽고 딸 경순공주만 남는다.

 

…새벽에 태조가 처소를 청량전(淸?殿)으로 옮기니, 조준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도전과 남은 등의 죄를 아뢰고, 또 세자를 폐하고 새로 책봉하고자 청하였다.

 

태조가 방석에게 이르기를, “너한테는 편하게 되었구나.” 하였다.

방석이 절하고 나갈 때 현빈(賢嬪 방석의 부인)이 옷을 붙들고 우는데,

방석이 옷을 뿌리치고 나갔다. 또 방번을 쫓아낼 것을 청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세자도 이미 그만두었으니, 네가 나간들 무슨 해가 있겠느냐.” 하였다.

흥안군(興安君) 이제가 곁에 있다가 오히려 칼을 빼어 두리번거리자, 공주가

이제에게 말하기를, “우리 부부가 만약 정안군 집으로 간다면 살 것이다.” 하였다.

방번이 서쪽 문으로 나갔는데, 태종이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네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잘 가거라, 잘 가거라.” 하더니,

도당(都堂)에서 뒤쫓아 가 중도에서 죽였다. (연려실기술)

 

 

태종(太宗)을 위한 변명

 

태종 9년( 1409 기축 ) 2월 23일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사진: 대동여지도 경조5부에 표시한 정릉(貞陵)과 신흥사

 

잠시 왕위에 올랐던 정종(定宗)이 태종에게 양위하고 이후 태조대왕도 승하한다.

그 뒤 정동에 있던 정릉은 능을 쓴지 12년 만에 사을한(沙乙閑) 산기슭(현 위치)

으로 옮겨간다. 이를 두고 왕릉연구가나 다른 인터넷 글에서는 의붓어머니-

신덕왕후에게 원한이 깊은 태종의 분풀이로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능을 도성(都城)내에 쓴 것부터 잘못으로 태종은 이를 바로 잡은 것이다.

 

의정부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옛 제왕(帝王)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貞陵)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使臣)이 묵는

관사(館舍)에 가까우니,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실록)

 

의심을 가지면 한도 없는 것이 위 의정부의 상언도 태종의 의중을 헤아려

아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집 마당에도 묻지만,

동양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엄연히 다른데 능을 성안에서 쓴 것은

태조가 아무리 사랑하는 왕비라 하더라도 무리한 일이었다. 태조가 살아 있을

동안은 할 수 없었지만 그 뒤 조정 공론에 의하여 옮겼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또한 정릉에 둘러졌던 병풍석은 광통교 석물로, 목재는 태평관

(중국 사신을 위한 숙소-위 수선전도 참조) 개수에 쓰는데

이것도 위 태종의 원한설의 유력한 물증으로 내세운다.

 

 

사진 : 최근 복원 된 광통교의 석물-신덕왕후 정릉의 병풍석이었다.

 

멀쩡히 잘 있는 정릉의 석물을 헐어다가 광통교에 쓴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능을 옮길 때는 옛 석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원자리 땅에

묻고 새로 만드는 것이 관례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의 영릉은 원래 태종의

헌릉(獻陵) 옆에 있었다. 그 뒤 예종 즉위년(1468)에 현재 위치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 석물은 땅에 묻어 버렸으니 최근 헌릉 일대를 발굴한 결과 옛 세종 릉의

석물이 나왔다. 따라서 땅에 묻어 버린 석물을 광통교에 가져다 쓴 것 가지고

태종의 원한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태종 10년( 1410 경인 ) 8월 8일

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광통교(廣通橋)의 흙다리[土橋]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貞陵)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石橋]를 만드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실록)

 

위 실록 기사로 보면 태종 9년 정릉을 옮기고, 태종 10년 그 구기(舊基)의 돌로

(아마도 옛 자리에 파 묻었을 것이다) 다리를 만든 것이지, 멀쩡한 정릉의 돌을

헐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옮겨 간 정릉의 초라한 모습과 그 뒤 왕실에서 푸대접 한 것 보면

태종이 누명을 써도 어쩔 수 없는데 이 부분은 정릉 이야기 하면서 부연한다.

 

 

정릉(貞陵) 찾아가는 길

 

 

 

사진 (구글-정릉과 흥천사)

 

노선 버스에 정릉이라고 쓴 것도 많고 위 구글 지도대로 성신여대 입구역에서

(요즈음 전철역에 죄 대학 이름을 따서 헷갈리는 데 옛날 돈암동이다)

꺾어 들어가 아리랑 고개를 넘어 아리랑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성신여대 입구역 에서부터 정릉 팻말이 죽 있으니 그것 보고 따라가면 된다.

위 지도 중 흥천사(신흥사)는 신덕왕후 정릉이 정동에 있을 때도 그 옆에 지은

원찰(願刹)이었다.

 

정릉(貞陵)  입구

 

아리랑 시장 안 좁은 길을 지나 주택가 사이로 들어가면 정릉 입구가 있다.

승용차 몇 대는 세울 수 있지만 공간이 없을 확률이 높고 거주자 우선제니

뭐니 하여 차 가지고 가면 고생하기 십상이다. 거주자 우선제도 좋지만

자기 차 비웠을 때 딴 차 잠시 세우면 좀 안되나..

 

 입장료 천원 내고 (경로는 공짜다. 필자도 우기면 될 듯 한데 망신당하기 싫어서)

들어가면 곧 개울과 다리가 나오니 금천(禁川)이다.

 

 금천(禁川)

 

 

사진 : 정릉 금천. 이미 몇 차례 해설한 대로 금천은 사바세계와

혼령세계간 경계표지다.

 

 

홍살문(紅箭門)

금천 다리를 건너 몇 발자국 가면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홍살문 또한 관청이나 주요 건물의 경계표지다.

 

 

 

사진 : 홍살문-지금 보니 홍살문의 태극은 양태극이 아니고 언제나 삼태극,

태극기처럼 청홍(양태극)이 아니고 청황홍이다.

 

홍살문 아래 오른 쪽으로 능행(陵幸) 온 임금이 절하는 배위(拜位)가 보인다.

문 너머 참도(參道)는 왼편 신도(神道) 오른 편 어도(御道)로 층이 졌는데

직선으로 벋질 못하고 가다가 왼쪽으로 직각으로 꺾여 정자각(丁字閣)에 이른다.

동원이강-같은 구내에 언덕을 달리 하는 능은 이런 식으로 하나, 달랑 능 하나에

참도를 꺾은 것은 능역이 원채 좁아 직선으로 벋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리라.

 

 

사진 : 정릉 구글. 능은 경좌갑향(庚坐甲向) 서에서 동을 바라보고 썼다.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에 오르는 계단 역시 두 부분으로 나뉘었으니 왼쪽 난간이 있는 계단으로

선왕의 혼령이 오르고 오른 쪽으로는 금상(今上)과 제관이 오른다.

 

 

사진 : 정자각 계단. 난간에 새겨진 태극 역시 양태극이 아니라 삼태극이다.

 

 

사진 : 정자각

 

 

비각(碑閣)

 

정자각 옆에 비각이 있다.

 

 

사진 : 비각

 

 

 

사진 : 비. 대한신덕고황후정릉(大韓神德高皇后貞陵)

신덕왕후가 아니라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라고 하였으니 고종황제가

칭제건원(稱帝建元) 한 후 다시 세운 비다.

 

천대(賤待) 받은 정릉

 

능을 옮기고 또 그 구기(舊基)의 돌과 나무를 광통교와 태평관에 쓴 것 까지는

태종의 원한하고 상관없다고 변명했지만, 옮겨 온 정릉의 모습을 보면

그런 말을 듣게도 생겼다. 또한 신덕왕후를 부묘(祔廟)하지 않아 현종 때 까지

종묘에 들어가지도 못 했다. 민간에서도 부사(祔祀)를 지내야만 위패를 사당에

모시는데 이것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제사도 왕실에서 지내지 않아

정릉이 어디 있는지 조차 잊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천장한지

172년 만인 선조 14년 (1581년) 정릉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선조 신사년(1581) 11월에 신덕왕후를 복위하자는 의논이 비로소 일어났다.

과거에 신덕왕후가 태조를 도와서 나라를 얻게 하고 태조의 정비(正妃)가 되어

명 나라의 고명(誥命)을 받았으며 돌아간 후에 시호를 주고 능을 봉하기를

신의왕후와 조금도 차이가 없이 하였었다.

 

그러나 태조가 승하하자, 다만 신의왕후만을 같이 모시고, 신덕왕후에 대해서는

일체의 전례(典禮)를 다 폐해버리고 거행하지 않았다. 세월이 오래 되자 능 또한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지가 2백 년이 되었다. 이때에 와서 덕원(德源)에 사는

강순일(康純一)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서 하소연하며 아뢰기를,

“저는 판삼사사 강윤성(康允成)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軍役)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國墓)를 봉사(奉祀)하는 사람들은 군역을 면하는 전례에 의하여 개정해

주소서.” 하였다. 강윤성은 신덕왕후의 아버지이다.

 

태조의 사조(四祖)의 후비(后妃 고조모,증조모,조모,모)들의 부모의 묘가 북방에

있었는데, 관에서 한 사람씩 정해 ‘국묘 봉사자(國墓奉祀者)’라 하여 군역을

면제해 준 전례가 있는 까닭에 순일이 이렇게 하소연한 것이다. (연려실기술)

 

정릉 문제는 1581년 11월 13일부터 시작하여 1583년 4월에 이르기까지

1년 반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삼사(三司)와 성균관 유생들이 번갈아 또는 합주(合奏)한다.

그 중 하나 ;

 

선조 14년( 1581 신사 ) 12월 17일

양사가 합계하기를,

“신들이 신덕왕후 한 가지 일로 오랫동안 복합(伏閤)하여 이미 달포가 지났는데도

상께서 통촉하지 않으시고 전혀 분부가 없으시니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답답하고

민망하여 할 말을 모르겠습니다. 성조(聖祖) 의 당당하신 배필로 한 나라 국모의

의범(儀範)을 보이시어 높은 이름이며 아름다운 시호가 사책에 분명히 실려

있는데 한번 정릉에 옮길 것을 고한 뒤에 전례가 없어진 지 지금 수백 년이

되었으니 이는 신자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지극한 아픔입니다.

효를 그리시는 전하의 정성으로 마땅히 가슴속에 아픔이 간절하여 서둘러

거행해야 할 것인데도 항상 불윤(不允) 두 글자로 공론을 준엄하게 물리치시니

신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성의(聖意)의 소재를 모르겠습니다.

 

……중략……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태종의 정통성과 연결이 되고 선조 또한 방계로 왕위에 올라 정통성에

문제가 있어 다루기 힘에 겨운 듯 1583년 4월 양사(兩司)와 옥당(玉堂-홍문관)은

신덕왕후(神德王后) 건을 정계(停啓)-즉 논의를 중지한다.

 

정릉을 다시 찾아 내다

 

선조 때 신덕왕후를 종묘에 부묘(祔廟)하는 것은 이루지 못하지만 잊혀진 능이

어디 있는가는 찾아내어 매년 한식날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이이(李珥)가 앞장서 말하기를, “신덕왕후는 태조와 같이 모셔야 할 분인데,

아무 까닭 없이 제사하지 않는 것은 인륜에 관계되는 일이니, 마땅히 존숭하는

행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니, 조정이 모두 의논하여 비로소 예관을 시켜

먼저 능을 찾게 하였다.

 

문관 이창(李昌)이 신덕왕후의 외손으로 마침 조정에 벼슬하고 있었으므로,

예조에서 그를 데리고 능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 아차산(?嵯山) 안팎을 두루

답사하였으나 내내 찾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변계량(卞季良)의 춘정집(春亭集)

가운데 정릉을 이장한 축문에 ‘국도 동북’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근거로 물색하여 산 밑 마을에 가서 찾으니,  과연 국장(國葬)으로

한 능이 산골짝 사이에 퇴폐되어 있었다. 조정의 의논이 처음에는 태묘(太廟)에

같이 모시기를 신의왕후의 예(例)와 꼭 같이 하기를 청하더니, 다른 한 의논이,

예경(禮經)에 제후는 두 번 장가들지 못하고 예(禮)에 두 적처(嫡妻)가 없다는

말들을 인용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또 하책(下策)을 내어 다만 정자각(丁字閣)을 세우고 참봉을 설치하는 것만

여러 능의 제도와 꼭 같이 할 것을 청했으나 이 의논 또한 시행되지 못하고,

다만 조묘의 예에 의하여 매년 한식날에만 제사지내는데 그치기로 하였다.

(연려실기술)

 

신덕왕후 복위(伏爲)

 

신덕왕후는 현종(顯宗) 10년 (1669년)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진다.

그 과정에 태종의 잘못 된 처사를 바로 잡는다고는 차마 할 수 없으니

모든 죄는 당시 (태종 대) 신하가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

 

….신덕왕후에 관한 처분이 당초에 태종의 본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미진했던 전례(典禮)를 지금 와서 고친다고 무슨 혐의가 있습니까….

 

 

송시열을 위한 변명(辯明)

 

복위 논쟁의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 이를 두고 어느 왕릉연구가는

‘현종 대는 송시열의 권력이 왕을 능가했고 신권이 왕권을 압도해 왕의 권위가

형편없이 추락한 시점인데 숭명주의자 송시열이 현종을 들볶아서 한 일

‘사실상 서인의 정치적 승리’ 라고 해설한다.

 

복위문제를 송시열이 주도하여 여러 차례 상소 올린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송시열이 왕권을 압도했다면 어떻게 예송에서 밀리자 마자 추락하며,

또 현종의 아드님 숙종 때 사약을 받을 수 있는가 ?

 

조선 후기에 산림(山林)이 대단한 권위를 가진 것은 맞지만 왕권이 그렇게 약하진

않았다. 정순왕후는 순조 대왕이 어려 섭정을 했지만 대왕이 성년이 되어서 까지

간섭하려 들다가 대왕이 묵묵부답으로 버티니 다시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노론 집권, 그 뒤 안동 김씨, 또 대원군이 기세등등 하다가도 눈 깜짝 할 사이에

밀려나는 경위를 보면 조선 후기 신권이 왕권을 압도했다는 설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숭명주의자 라서 현종을 들볶았다’ ‘서인의 정치적 승리’ 도 지나친 도식화다.

이 왕릉연구가를 포함 우리 대부분이 ‘민족주의의 덫’에 걸려있고, 민족사관과

식민사관은 보면 볼수록 쌍둥이 형제같이 닮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송시열 일파가 외관상 숭명주의자 같긴 한데 이야기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선 숭명으로 나타나는 소중화 사상은 필자가 다른 글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노론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당시 선비 사회 전체가 당파를 초월하여 공감대를

이루던 사안이지 서인의 승리로 볼 문제가 아니었다.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절 할 때 마다 세 번 씩 도합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짓찧는 치욕을 당하니 조선 선비사회는 크나 큰 충격을

받는다. 그 뒤 명나라가 망하자 조선이야말로 세계 문명의 중심-소중화(小中華)

의식에 빠져 들어 숭명으로 보이는 현상이 벌어지는 데 이것은 앞으로 연구를

계속 할 명제라는 점만 이야기 하고 이만 넘어간다.

 

 

능상(陵上)

 

정자각 뒤 능상으로 올라가는 사초지는 왕릉 중 가장 가파르지 않을까 한다.

올라가는 길은 없지만 올라가지 말라는 팻말도 없다. 금지되지 않은 것은

해도 되는 것 아니냐며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올라가지만 뒷골은 땅긴다.

그러나 잔디는 가끔 밟아주어야 더 잘 자라고 필자가 뭘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잘 좀 보고 사진 몇 장 찍으려는 것 뿐이니 윤리적 죄의식은 들지 않았다.

절차를 밟으려면 얼마나 힘들고 자격증도 없는 아마추어한테 허락이나 해 줄까?

 

 

 

사진 : 능상

 

혼유석(상석)과 장명등을 빼고는 현종 때 복위하면서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가방 크다고 공부 잘 하는 것 아니라지만 능(陵)에 석물이 너무 빈약하다.

우선 문신석만 있을 뿐 무신석은 없다. 사후에 추존(追尊)되면 석물을 추가하지

않는다는 관례에 따라 소략할 수 있다 그러나 신덕왕후는 살아서 이미 그것도

조선 최초의 왕비였다.

 

장명등(長明燈)

 

 

장명등이 특이하게 생겨 해설을 읽으니 ‘정릉의 장명등은 고려왕릉을 본 뜬 형식’ 이라고 한다.

 

 

혼유석(魂遊石)

 

 

혼유석에 다리-고석(敲石)가 둘 밖에 없다. 보통 4개 또는 5개가 있는데.

안내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장명등과 상석을 받치는 고석(鼓石) 등의 석물만이 옛 능에서 옮겨온 것이고

나머지 대부분의 석물은 현종대에 새로 조영 된 것이므로….’

 

이 부분 의심이 든다. 왜냐하면 태조가 도성 안에 능을 정하고 아침 저녁

제 올리는 염불을 듣고서야 수라를 받을 정도로 아끼던 왕비의 능 혼유석에

다리를 고작 둘 밖에 달지 않았을까? 또 다른 석물은 다 놔 두고 혼유석만

가지고 왔을까? 옛 정동에 있던 혼유석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태종 때

천장하면서 새로 만들며 다리를 둘만 단 것 아닐까 한다. 당대 물건은 맞겠다.

 

병풍석은 당연히 없다.

 

세종 능에도 없으나 처음 헌릉 옆에 쓸 때는 있다가 예종 때 여주로 옮기면서

세조가 병풍석을 금하는 통에 없어진 것이니 태종 때는 있었다.

 

 

사진 : 태종 헌릉의 병풍석- 자기 능에는 이렇게 둘러 놓았으면서 의붓어머니

산소는 옮긴다고 슬쩍 빼 먹으니 애들한테도 방원이 소리 듣는 것 아닌지?

누구는 태종이라고 하면 실감이 안 나고 방원이 라고 해야 영상이 잡힌다고 한다.

 

 

석양(石羊)과 석호(石虎)

 

통상 능 주위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는 두 쌍씩 계 8 마리 인데 신덕왕후

정릉에는 각 한 쌍 계 4 마리다. 태종의 헌릉에는 보통의 두 배인 4 쌍씩 계 16 마리가 있는데.

 

 

석양

 

 

석호: 조선 후기 작품이라 그런지 꼬리가 대단히 사실적이다.

 

세호(細虎)

망주석은 현종 때 만든 것이라 조선 초기 귀 같이 달렸던 세호가

무슨 형태를 잡았다. 다람쥐인지 벌레인지 호랑이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그런데 왼쪽 세호는 아무리 보아도 부러진 것 같다.

 

아마도 왕조가 망한 1910년 이후 문화재 관리를 거의 하지 않던 근년 사이에

벌어진 일 같다.

 

 

뒤에서 본 능상(陵上) 전경

전경과 지세를 보려면 능 뒤 능으로 맥이 흐르는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나무가 가리고 그 너머 아파트가 죽죽 올라가 형국을 살필 수가 없다.

보인다고 해도 풍수를 모르니 헛일이긴 하지만.

 

 

흥천사(興天寺)

 

흥천사는 태조 대왕이 정릉을 정동에 쓰면서 신덕왕후 원찰로 같이 지었다가,

태종 때 능이 현 위치로 천장될 때 역시 옮겨 와 이름이 신흥사로 바뀌었다.

지금은 이름이 다시 흥천사다.

 

 

신흥사는 필자 어렸을 때는 환갑잔치 같은 것 하기로 유명했는데

잔치를 절에서 한 것인지 절 주위 음식점에서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필자가 챙길 때가 되니 환갑잔치가 슬며시 없어졌다.

요즈음 환갑에 잔치한다면 애들이 무슨 하며 비웃음 살 것이다.

 

정릉에서 흥천사는 걸어서 5분도 안 걸린다지만 자동차 길은 큰 길로 나가

아리랑 고개로 돌아서 가야 한다.

 

 

사진 : 흥천사 일주문

 

그 동안 여러 차례 불타고 지금 절은 고종 때 새로 지은 것으로 크게 참고할 것은 없다.

 

 

사진 : 극락보전

 

절의 금당(金堂)은 종종 용선(龍船)에 비유되어 흥천사 극락전도 앞에는 용머리

뒤에는 용선이 그려져 있다.

 

중생을 용선에 싣고 피안-극락세계로 데리고 간다는 뜻이리라.

 

글씨가 볼 만한 것이 있는데 종각의 글씨는 위창(葦滄) 오세창 씨 글씨다.

 

 

오세창 씨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요즈음 이명박이 안창호씨라고 했다고

안 선생이 네 친구냐 하는 식으로 욕을 먹는다. 그러나 씨(氏)라는 호칭이

옛날에는 상당한 존칭으로 안창호 씨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요즈음은 개나 말이나 씨를 다 붙이는 통에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시골은 말이 늦게 바뀌는 것이니 잘 알아 보고 평하는 것이 좋다.

 

 이상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