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성(康允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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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대경(大卿)
호(號) 용담(龍潭)
시호(諡號) 문정(文貞)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조선전기
본관 곡산(谷山)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강윤성(康允成)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대경(大卿), 호는 용담(龍潭).
부친은 상산백(象山伯) 강서(康庶)이다. 강서부터 신천강씨(信川康氏)에서 곡산강씨(谷山康氏)로 분적되었다.
강윤성은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뒤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부시랑(吏部侍郞),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지내고, 1343년(충혜왕 후 4)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임명되었다.
처는 진주강씨(晉州姜氏) 강은(姜誾)의 딸이다.
강윤성은 딸이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가 되었는데, 후일 조선 개국 후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된 분이다.
그는 태조의 국구(國舅)로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봉해지고 경안백(慶安伯)에 추봉되었다.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國朝人物考
강득룡(康得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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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 안정(安靖)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고려시대
본관 신천(信川)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강득룡(康得龍)
생졸년 미상. 본관은 신천(信川).
부친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이고, 누이동생은 조선 태조(太祖)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이다.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관직을 버리고 관악산 연주암(戀主庵)에 은거하며 매일같이 연주대(戀主臺)에 올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고려의 멸망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태조 때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해졌고, 좌리공신(佐理功臣) 첨의정승(僉議政丞)에 녹훈(錄勳)되었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묘는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에 있다. 재령강씨(載寧康氏)의 중조(中祖)가 되니, 봉지인 안릉(安陵)은 재령(載寧)의 옛 이름이다.
[참고문헌]
信川康氏族譜 始興郡誌(1988) 京畿人物誌
강진(康晉)
[문과] 세종(世宗) 2년(142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1위(21/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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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본관 신천(信川)(주1)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유학(幼學)
관직 호조판서(戶曹判書)
문과시제 책문(策問):무농(務農)‧예의(禮議)‧성곽(城郭)‧수군(水軍)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강안식(康安式)
[조부(祖父)]
성명 : 강유(康儒)
[증조부(曾祖父)]
성명 : 강득룡(康得龍)
[외조부(外祖父)]
성명 : 윤시(尹恃)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송명산(宋命山)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2]
성명 : 김유생(金有生)
본관 : 미상(未詳)
[주 1] 본관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내의 급제 기록,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11655]) 내의 급제 기록, 『국조방목(國朝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26-47]) 내의 급제 기록 모두 본관이 “재령(載寧)”으로 기록되어 있음. 재령과 신천은 동원(同源)임.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강순룡(康舜龍)
출생일 미상
사망일 미상
고려후기 지밀직사, 찬성사, 재령백 등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신천(信川). 호는 화곡(化谷).
증조부는 우정승을 지낸 강숙재(康淑才), 할아버지는 상호군을 지낸 증상산부원군(贈象山府院君) 강서(康庶), 아버지는 찬성사를 지낸 곡산군(谷山君) 강윤성(康允成)이다
처음 원나라에 들어가서 숭문감소감(崇文監少監)이 되고, 이름을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라 칭했다.
1354년(공민왕 3) 본국에 돌아와 강중상(姜仲祥)과 함께 지밀직사사를 거쳐, 찬성사가 되었다.
1374년 오랑캐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 등을 살해하고 북원(北元)의 장수 나하추(納哈出)에게 달아났는데, 이때 김의를 원나라에 보냈다는 혐의로 유배되었다.
누이동생은 신덕왕후(神德王后)로 이성계(李成桂)의 비이다. 양가의 통혼은 전형적인 부원관력(附元官歷)을 배경으로 한 결합으로 원나라의 몰락기인 공민왕 때에 고려조정에 진출하여 현달한 가문이다. 이성계의 정변과 집정과정에서 유력한 협력세력으로 작용하였다.
조선개국 이후 재령백(載寧伯)의 작호를 받았으며, 제1차 왕자의난에 일족이 참화를 당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순룡(康舜龍))]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출생일 미상
사망일 1396년(태조 5)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는 조선 제1대 태조의 왕비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396년(태조 5)에 사망했다.
신덕왕후의 친정 강씨 가문은 고려말의 권문세족으로 이성계의 권력 집중과 조선 개국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방석의 친모로 세자책봉을 둘러싸고 방원(태종)과 갈등하다가 화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존호와 능호를 신덕과 정릉으로 정하고 원찰 흥천사를 세워 태상왕이 직접 원당 제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태상왕 사후 태종이 능을 옮기고 왕비의 제례를 폐했다.
1669년(현종 10)에야 신주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능호는 정릉으로 서울 성북구에 있다.
본관은 곡산(谷山) 또는 신천(信川).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신덕왕후가 집권 거사에 참여하여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뒤 계비가 된 배경에는 신천강씨의 권문세족으로서의 위치가 컸다.
아버지 강윤성과 작은아버지 강윤충(康允忠)·강윤휘(康允暉) 형제들은 충혜왕·공민왕 때 재상권문가로서 세도를 떨쳤다.
강윤휘의 아들인 상장군(上將軍) 강우(康祐)는 이성계(李成桂)의 큰아버지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쌍성만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서 두 집안은 겹사돈 관계에 있었다.
강윤충은 충숙왕의 폐행(嬖幸)이 되어 세를 떨쳤고, 충혜왕 때에는 조적란(曺頔亂)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아버지 강윤성도 충혜왕과 충목왕 때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또한 강윤휘는 충정왕 때 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356년(공민왕 5)에 원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장사성군(張士城軍)의 토벌군이 동원된 적이 있는데, 이 때 원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이 바로 원나라의 이부낭중(吏部郎中)의 직위를 가진 이성계의 재종숙 이나해(李那海)와 숭문소감(崇文少監)의 직위를 가진 강씨의 오빠 강순룡(康舜龍)이었다.
또한, 부원기(附元期) 때 폐행 권신의 일족으로 발호한 영산신씨(靈山辛氏) 신귀(辛貴)의 처도 강씨의 아우가 된다.
이와 같이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배경을 가진 강씨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위화도회군을 할 당시에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田莊)을 맡아 살림을 따로하고 있었다.
이 때 변고에 대비, 일가족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하여 이천에 있는 한충(韓忠)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현비(顯妃)로 책봉되었다.
신덕왕후의 친가는 이성계의 권력 집중과 조선개국 과정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는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사후 존호와 능호를 각각 신덕(神德)과 정릉(貞陵)으로 정하였다.
개국공신들의 헌의로 국모를 높이는 뜻의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하여 조선의 항식(恒式)으로 삼았고,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수릉직을 맡게 하였다. 그런 뒤 기제(忌祭)를 맞아 경복궁 내 강씨의 처소를 인안전(仁安殿)으로 정하고 영정을 봉안했다가 이듬해 9월 정릉에 영각(影閣)을 지어 옮겼다.
1399년(정종 1) 기일에 흥천사(興天寺)를 원당으로 삼아 제사할 때 태상왕(太上王:이성계)도 참례하였다.
태상왕이 사망한 뒤 1409년(태종 9) 2월에 묘를 사을한(沙乙閑)곡에 이장했다가 다시 한강 남쪽 공현(鞏縣)의 뒤에 이장하여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봄·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다.그 뒤 1412년 기제는 서모나 형수의 기신제(忌辰祭)의 예에 따라 3품관(三品官)으로 제사를 대행하게 하였다.
200여 년 뒤인 1581년(선조 14) 11월 먼저 3사(三司)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6개월 여만에 정파된 바가 있다. 이 때 중신들의 주장은 건원릉비(健元陵碑)에 신의(神懿)·신덕이 열거되어 있고, 강씨가 차비(次妃)로 서술된 점, 태조가 정한 강비의 시책(諡冊)에 칭송이 엄연한데 그 뜻과 달리 후대인들이 부묘(祔廟: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일)를 폐하고 능을 옮겨 중대한 원(寃)을 남게 한 것 등이 모두 천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 뒤 현종 대에 이르러 정통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이념이 강조되고 예론이 크게 일어나자 강씨의 부묘 문제는 다시 대두하였다. 즉, 1669년(현종 10) 2월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 등은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갖추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이로써 이 해 9월 강씨의 기신제가 8월 11일로 고정되어 200여 년만에 복구되었다. 그리고 추진 기구인 부묘도감(祔廟都監)에서 예조와 함께 시호 제정을 발의하여 순원현경(順元顯敬)으로 정하였다.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고, 능호는 정릉(貞陵)으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소생으로 왕자 이방번(李芳蕃)·이방석(李芳碩)과 경순공주(敬順公主)를 두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덕왕후(神德王后))]
강윤충(康允忠)
고려후기 일등공신, 찬성사,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
원래 천인이었으나 충숙왕을 섬겨 호군(護軍)이 되었다.
일찍이 낭장(郎將) 백유(白儒)의 처를 강간한 일로 감찰사(監察司)의 탄핵을 받아 장류(杖流)되었다가 다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기용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1339년의 조적(曺頔)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랐으며, 다시 양광전라경상삼도문민질고사(楊廣全羅慶尙三道問民疾苦使)가 되어 권세를 이용하여 가렴주구를 일삼는 자를 적발하는 등 치적이 있었다.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1347년(충목왕 3)에 왕을 꾀어 사사로운 원한이 있던 조득구(趙得球)를 탐라(耽羅)로 귀양보냈다.
그해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이 무렵 충목왕의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총애를 받고 영화를 누리고 횡포가 심하였으며,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어 인사권을 장악하고 많은 뇌물을 받았다. 이로 인해 1348년 김윤(金倫)·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 등으로부터 ‘영귀(榮貴)를 탐하여 백 가지로 욕심을 부리어 일대(一代)의 흉악을 저지르는 자’라는 탄핵을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가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356년 호군 임중보(林仲甫)가 충혜왕의 얼자(孽子) 석기(釋器)를 받들고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순군(巡軍)에 갇혔는데, 이에 관련되어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었다가 3년 뒤에 살해당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윤충(康允忠))]
신귀(辛貴)
출생일 미상
사망일 1371년(공민왕 20)
고려후기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된 공신. 무신.
본관은 영산(靈山).
증조할아버지는 전교령(典校令)을 지낸 신지화(辛至和)이고, 할아버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신화(辛華)이다.
아버지는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신원경(辛原慶)이고 장인은 곡산인(谷山人)이며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강윤성(康允成)으로 이성계(李成桂)의 동서이다.
당시에 ‘신왕(辛王)’이라고 불릴 만큼 세도(勢道)가 있었던 형 신예(辛裔)와 동생 신순(辛恂:李和의 동서)과 더불어 치부와 발호가 매우 심하였다.
1357년(공민왕 6) 채하중(蔡河中)이 역모해 옥중에서 목숨을 끊자,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전우상(全祐祥)·조휘(趙暉)·정인(鄭姻)·강찬(康贊)·홍상재(洪尙載) 등과 함께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기용해 공신 재상가(宰相家)를 숙청할 때에도 신돈의 동종(同宗)이라 하여 판서(判書)로 기용되었다.
한편 신돈을 초대해 대접하고자 친구인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 강원보(姜元甫)의 집에 그릇을 빌리려고 심부름꾼을 보냈었다. 이때 강원보가 장차 우리가 신돈을 제거하려 한다고 통고하자, 이를 신돈에게 알렸다.
그날 밤에 신돈이 궁검(弓劍)으로 호위하고 왕에게 고해 모반자를 순군(巡軍)에 가두고 국문해 처단하였다.
1371년 신돈의 당여(黨與)가 거사를 모의하자, 문객(門客) 선부의랑(選部議郎) 이인(李韌)이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밀서(密書)를 투입하였다. 이에 신돈의 당이 숙청되면서 신귀도에 유배된 뒤 참살되었다.
동생 신우(辛祐), 아들 신극공(辛克恭)·신극람(辛克濫)·신극례(辛克禮)·신극경(辛克敬)은 모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사위 정희계(鄭熙啓) 역시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가 되었다. 또, 조카인 신유현(辛有賢)·신유정(辛有定)도 개국원종공신으로 영산(靈山) 신씨(辛氏) 일문은 조선조의 명문세가로서 기틀을 이루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귀(辛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