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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창제(姜昌濟)
출신지: 평북 창성
훈격: 독립장(1963)
운동계열: 임정・중국방면
강창제(姜昌濟) 1898. 4. 7~1965. 2. 7 호:창산(倉山) 이명:정명희(鄭明熙),강동욱(姜東旭),여순지(呂順之)
평북 창성(昌城)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때 향리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초기 「임정」에 참여하였으며 1922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 기자로 활약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다가 1923년 3월에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특별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7월 14일에는 임시정부 회계검사원(會計檢査院) 검사관(檢査官)에 임명되었고, 동년 11월에는 의열단원(義烈團員)으로도 활약하였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의회정치에 참여하였으며, 1925년 3월 13일에는 제1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독립운동자금 공급 문제와 위임통치 문제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승만(李承晩) 초대 통령의 탄핵안을 상정 가결케 함으로써 재임 6년만에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면직되고 이동녕에 이어 박은식(朴殷植)이 6개월간 제2대 임시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내무부의 참사(參事)겸 경무국장(警務局長)서리에 취임하여 임정의 강화와 통일정부 유지에 진력하는 한편 노병회(勞兵會)의 이사(理事)로도 활약하였다. 1926년에는 나창헌(羅昌憲)・고준택(高俊澤) 동지와 협의하고 중화(中貨) 5,000원(元)을 조달 제공하여 임시정부의 호위 및 강화를 기약하였으며, 밀정이나 일제의 앞잡이 등을 숙청정리하고 난동분자의 엄중단속, 일제의 주요시설 파괴, 요인제거 등을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고 그 산하 단체로 정위단(正衛團)를 두어 그 총무겸 심판원(審判員)으로 20대의 열기를 쏟았다. 이에 가담한 청년지사들은 40여명에 달하였는데 주요 인사를 보면 전기한・나창헌・고준택 외에 최병선(崔炳善)・김광산(金光山)・문일평(文一平)・이성구(李成九)・장진원(張鎭元)・이일태(李逸泰)・김석룡(김석룡)・한성도(韓聖島)・이운한(李雲漢)・이지만(李枝萬)・강파(姜波)・이지찬(李枝贊)・이지선(李枝善)・김창근(金昌根)・김수산(金水山)・공득평(孔得平)・이경산(李景山)・박지웅(朴志雄)・강병학(姜秉鶴)・신송식(申松植)・박창세(朴昌世)・이덕용(李德用)・이덕삼(李德三)・이응삼(李應三)・문선재(文善才)・최용건(崔鏞建) 등 30여명을 손꼽을 수 있다. 병인의용대의 임정보호운동으로 상해의 한국동포사회의 치안이 훨씬 개선 안정되었으며 일제의 앞잡이들은 거의 근절되어갔으므로 임시정부의 권위는 크게 제고되고 안정된 반석위에 놓여질 수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임시정부는 제3차 개헌을 통해 지도체제를 국무위원제로 전환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병인의용대원 최병선・장진원(영환,英煥)・김광산 등과 같이 상해 홍구해녕로(虹口海寧路)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영사관 내산판사처(內山辦事處)를 기습 공격하여 내산(內山)과 그 주구인 최동윤(崔東允)을 격살하였다. 내산판사처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변절시키거나 귀순케하는 전담반이었다. 기습으로 최병선이 부상당하였고 동지 장진원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그는 동지들은 구출하고자 대원 김광산・김창근・이성구 등과 함께 다시 출동하여 작전을 폈으나 발각되므로 수류탄을 던져 일본경찰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전원이 무사 귀대하였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금 대원동지 이덕삼 등을 시켜 일본의 고등계 형사 판사처(辦事處)를 야습하여 1명의 경찰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927년에는 동지 김창근・이성구와 같이 이지선이 제조한 신한 폭탄을 들고 일본영사관 창고를 대파, 타격을 주고 1명의 경찰에게 중상을 입힌 뒤 2명의 밀정을 총살하였다. 1928년 그는 강소성(江蘇省) 경찰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동년 7월에는 한인청년동맹회(韓人靑年同盟會)의 조사부원을 지냈다. 1929년에는 민족주의자 안창호(安昌浩)・이동녕・김구(金九)・조소앙・이시영(李始榮) 등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하였다. 이해 8월 25일 병인의용대 명의로 가로인(假露人) 숙청호소문을 가두에 게시하였는데 이는 유일당 운동의 성과가 기대 이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1930년에는 상해에 있는 프랑스 정보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고 2년 뒤인 1932년에 상해 동남대학(東南大學)을 3년 중퇴한 뒤 강소성 정부 민정청(民政廳) 경무고문으로 초빙되어 일을 맡아 보았다.
1933년에는 병인의용대장에 선임되고 한국독립당 중앙이사 겸 조사부장을 역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 의열단(義烈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등 이른바 5당통합을 성취시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 그 중앙위원겸 조사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그 당시 중앙위원으로는 이청천(李靑天)・최동오(崔東旿)・유동열(柳東說)・이광제(李光濟)・박창세(朴昌世)・양기탁(梁起鐸)・현익철(玄益哲)・김학규(金學奎)・이운한(李雲漢)과 중앙상무 위원으로는 이청천・최오동외 박창세・이광제와 함께 그도 선임 되었다. 이들은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의열단, 재만조선혁명당 등의 순 민족주의적 정수의 혁명자로서 조직된 단체임을 내외에 선전하였다. 1935년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을 결성하고 2년뒤에는 양기탁・유동열・이청천・현익철・최동오 등과 같이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여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1938년은 중・일 전쟁의 악화로 수난이 겹친때였다. 임정은 1937년 진강을 떠나 장사(長沙)로 오는 중 12월 13일 남경(南京)이 일본에 함락되고 북경(北京)에 일제의 괴뢰 중국정부(행정원장 왕극민, 王克敏)가 수립되었고, 24일에는 항주(杭州)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장사에서 임시판공처를 차린 임정에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이것이 장사사변(長沙事變)이다. 3당통합문제에 대하여 장사의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南木廳)에서 대표가 모여 논의하는 자리에 이운한이 김구・현익철・유동열・이청천 등을 저격한 사건이 그것이다. 이중 현익철은 사망하고 김구등은 소생하였다. 이의 연루자로 그도 이운한・박창세 등과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와 박은 석방되고 이운한은 탈옥 도주하였다. 이 사건의 원인을 김구의 「백범일지」에서는 이운한이 김구가 남경에 있을 때 상해에 특무공작을 위해 경비를 조달한 일이있다 했고, 일제 보고에는 자금분배와 감정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석방된 후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정보부 심사과장(審査課長)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에는 홍진(洪震)・유동열・이연호(李然皓)・신영삼(申榮三)・신기언(申基彦) 등과 같이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조직하고 그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즈음 중국군사위원회 대립(戴笠)장군이 한국인으로 의용군을 조직하여 인원을 초모하게 되면 중국군의 후방부대로 편성하여 훈련시킬 뿐 아니라 무장을 도와 참전케해 준다는 사실을 이연호로부터 보고받자 그는 전방인원 모집책임자로 선정되어 중국군사위원회 서안(西安) 주재 한국내 연락처장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그는 임정 요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5卷,國家報勳處, 1988年, pp.461~464.
註ㆍ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警務局) 107面
ㆍ思想情勢視察報告集 246面
ㆍ思想情勢視察報告集 (其2) 427面
ㆍ朝鮮民族運動年鑑 175・190・196・203・224面
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49・361・363・366・370面
ㆍ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72面
ㆍ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500・502・504・513・533・539・585・600・601・602・613・645・646・663・671・697・706面
ㆍ日帝侵略下韓國36年史 8卷 107・865面
ㆍ日帝侵略下韓國36年史 13卷 541・810面
ㆍ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245面
ㆍ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519・544・549・562・596・607・631・632・654・768・825・826・884面
ㆍ高等警察要史 105面
ㆍ民族獨立鬪爭史史料(海外篇) 128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4卷 670・682・736・1036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6卷 148面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7卷 327・604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1卷 827・835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4卷 586面
이름: 강철구(姜鐵求)
출신지: 충남 부여
훈격: 독립장(1963)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철구 1894. 2. 8~1943. 10. 21 호:해산(海山)
충청남도 부여(扶餘)사람이다.
그는 향리 부여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등 면학에 열중하다가 나라의 형세가 어지러워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국권회복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7년 대종교 교도로 만주에 건너가 북간도 연길현 동불사(延吉懸銅佛寺) 천영학교(天英學校) 교사가 되어 제2세 민족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1920년 1월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재 서일(徐一)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조력하였다. 이해 4월 재무국장 윤정현(尹庭鉉)의 명령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부여의 갑부 박창규(朴昌奎)・박남규(朴南奎)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조달해가지고, 만주에 돌아와 서무부장 김택(金澤)에게 수교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사관연성소 확충자금모집차 임시정부 발행 공채 35,000원 상당의 문서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이에 함북 회령에서 김동진(金東鎭)을, 청진에서 김동순(金東純)을, 서울에서 문용섭(文龍燮)을 각기 동지로 영입하고 동년 9월 부여에서는 문장섭(文章燮)・김재설・김삼현・문경섭 등의 동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군자금 모집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강경(江景)에서 김찬형(金燦亨)・김철수(金哲洙) 등을 영입하는 한편 이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였다. 이해 10월에는 상경하여 동생 강용구(姜鎔求) 집에 은신 활동하면서, 이곳을 거점으로하여 김정제(金廷濟)・조창호(趙昌鎬)・김목현(金穆鉉) 등을 다시 동지로 확보하고, 부호가택을 은밀히 방문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 뒤 다시 고향 부여로 내려가서 군내 각면을 순방하고 군자금의 필요성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애국 활동을 소상히 설명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곳에서 동지 박창규・박남규와 이기범(李基範)으로 하여금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각 면에 다니면서 소화시키도록 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모금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포교에 진력하는 한편, 1928년 3월까지 연길현 동불사 상양리(上陽里)에서 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을 계속하였다. 1942년에 만주 동경성(東京城)에 대종교로 천전(天殿)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재만 독립운동의 거물로 지목되어 동년 11월 19일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혹독한 고문을 당한 나머지 1943년 목단강성(牧丹江省) 가목사(佳木斯)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4卷,國家報勳處, 1987年, pp.502~503.
註ㆍ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警務局) 109面
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86面
ㆍ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73面
ㆍ東亞日報(1932. 4. 1 字)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8卷 797・800・802面
이름: 강철규(姜徹奎)
출신지
훈격: 애국장(1991)
운동계열: 만주・노령방면
강철규(姜徹奎) (1887)~1920. 10. 25
중국 길림성 혼춘현(吉林省 琿春縣)에서 한민회(韓民會) 단원으로 군자금 모집과 무기조달에 힘쓰며 국내진공을 계획하던 중 일군에게 피체되어 1920년 10월 25일 참살(斬殺)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9卷, 國家報勳處, 1991年, p.543.
註・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353面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8卷 529面
이름: 강철수(姜喆秀)
출신지: 전남 구례
훈격: 대통령표창(2006)
운동계열: 3・1운동
강철수(姜喆秀) 1867. 7. 23~1924. 7. 2
1919년 3월 2일 전남 구례군(求禮郡) 용방면(龍方面) 용정리(龍井里)에 전북 남원군(南原郡) 천도교구장 유태홍(柳泰洪)이 보낸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강철수를 비롯한 천도교인들은 그날 밤 주민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자 비밀리에 관공서 게시판 등에 독립선언서를 붙였다.
이로 인해 강철수는 체포되어 1919년 4월 4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光州地方法院 順天支廳:1919. 4. 4)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권 583면
이름: 강춘경(姜春京)
출신지: 충남 홍성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3・1운동
강춘경(姜春京) 1887.12. 9~1951. 3. 9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군(洪城郡)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강춘경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19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犯罪人名簿(金馬面)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1182∼118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33∼134면
·洪陽史(洪陽史出版委員會, 1969) 50면
·홍성지역의 3・1운동 (김진호,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3, 2004) 72∼74·97∼102면
이름: 강춘근(姜春根)
출신지: 제주
훈격: 애국장(1996)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춘근(姜春根) 1918;27세~1919. 1. 6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군(南濟州郡) 좌면(左面) 법정사(法井寺)에서 일어난 항일 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이 무장투쟁은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 등의 스님과 태을교(太乙敎:仙道敎라고도 한다. 普天敎의 前身)의 지도자 박주석(朴周錫) 등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여 일어난 것이다.
1918년 9월 19일, 김연일 등 스님들은 신도 30명에 대하여, "왜노(倭奴)가 우리 조선을 병탄(倂呑)하였을 뿐 아니라, 병합(倂合) 후에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불원(不遠) 불무황제(佛務皇帝)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나,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사는 내지인관리(內地人官吏)를 죽이고 상인(商人)들을 도외(島外)로 구축하여야 한다"고 하는 등 신도들을 교유해 나갔다.
10월 5일, 신도 33명을 소집한 김연일은 스스로 불무황제로 칭하고 박주석을 도대장(都大將)으로 임명한 후, 강춘근 등에게는 각각 반수(班首)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김연일은 도대장 이하 군직(軍職)을 명하여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각면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해 주민들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이때 모인 항일시위군은 400여 명이나 되었다.
강춘근 등의 주도자들은 시위군을 지휘하여 서귀포(西歸浦) 호근리(好近里)로 진격하며 전선을 절단하여 통신을 단절시켰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일경들은 미리 서귀포에서 무장한 채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김연일은 박주석에게 그곳에서 일경과 대치하도록 하고, 그와 강춘근은 봉기군 일부를 이끌고 중문주재소(中門駐在所)를 습격하였다. 주재소장 길원(吉原)은 갑작스럽게 닥친 시위군을 방어하지 못하였다. 강춘근은 시위군을 주도하며 앞장서서 순식간에 주재소를 파괴·소각하고 일경 3명을 포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무고하게 주재소에 구류된 13명의 구금자를 석방하였다. 한편 남아 있던 박주석 부대는 일군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19년 1월 6일 재판을 기다리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265·266面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4卷 206面
·刑事事件簿
이름: 강춘삼(姜春三)
출신지: 황해 해주
훈격: 애국장(1990)
운동계열: 의병
강춘삼(姜春三) 1858. 5. 3~1913. 5. 6
강춘삼은 황해도 해주군 청운방 사리 마치동(海州郡 淸雲坊 馬馳洞)사람으로서 군대 강제 해산이후 거의(擧義)하여 대일 항쟁에 전념하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그가 활약하던 황해도 일대의 의병의 수는 당시 일경의 집계에 의하면 6~7백 명에 달하였으며, 다시 여러개의 부대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 주력 의병대의 의병장은 박기섭(朴箕燮)이었다.
박기섭은 본래 영남사람으로서 당시 목천(木川) 부사로 있었는데 황해도 유림의 인사들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는 군대 해산 후, 항일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뻗어가고 있을 때, 전 군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명범석(明範錫)・신종균(申宗均)을 시켜서 왕의 밀지를 전달하여 은근히 격려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앙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그에게 황해도 유림 인사들이 그들의 의병 거사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뜻을 모은 참모진들이 평산 도평산(挑坪山)에 의진을 정한 후 격문을 지방에 돌리자, 여기에 호응하는 의사들이 4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박기섭의 의진이 형성되자, 기타의 의병 부대로서 강춘삼의 의진을 비롯하여, 신경칠(辛景七)・이야천(李野天)・김상현(金相鉉)・한경옥(韓京玉)・허덕천(許德天)・장명단(張明端) 등의 의진이 형성되었다.
특히 강춘삼의 의병 부대는 박기섭 의병 부대의 중대장 심노술(沈魯述)이 거느리는 의병들과 더불어 평산군 이서(以西)로부터 해주군 사이에 걸쳐 크게 활약하여 전과를 거두었고, 장명단 의병 부대는 해주군 서부 지방에서 신출귀몰하는 게릴러 작전으로 끝까지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 이후 강춘삼의 활약에 대한 문헌 기록은 없지만 1913년까지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즉 1910년에 해주 근처 여묵 원야(餘默 原野)에게 일군과 접전하여 적에게 크게 타격을 주었으며, 그해 가을 해주 동촌 청단시(東村 靑丹市) 쟈라기 벌판 전투에서 대접전을 벌여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고 한다.
1913년 5월 일본 헌병의 불의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어 청단시 학곡(鶴谷)에서 총살되어 향년 55세로 순국하였다.
그 후 향리에서는 그의 사당과 기념비를 건립하고 추모제를 지내었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음.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1卷,國家報勳處,1986年, pp.444~445.
註・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539・627面
・獨立運動史 資料集(國家報勳處) 3卷 624面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73面
이름: 강춘삼(姜春三)
출신지: 충남 당진
훈격 ()
운동계열: 3・1운동
강춘삼(姜春三) 1886.12.10~1968. 8. 2
1919년 4월 충남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현재 당진군) 면장 이인정(李寅正)과 면직원 이대하(李大夏), 송재만(宋在萬)등은 4월 4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4월 3일 대호지면장 명의로 각 구장 앞으로도로수선(道路修繕)에 관한 공문을 보내 4월 4일 주민들을 공식적으로 동원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4월 3일 한운석에게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줄 애국가를 작사케 하여 1,000여 매를 등사하였고, 독립선언서도 등사하여 각 마을에 배포하였다.
4월 4일 대호지면 앞 광장에 도로수선을 위장하여 600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광장 한 가운데에는 대형 태극기가 휘날렸다. 이인정이 군중 앞에 나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따라 외쳤다. 시위군중은 이인정과 송재만을 필두로 장정리를 거쳐 천의시장(天宜市場)으로 행진하였다. 사전 연락으로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여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군중들이 천의시장에 이르렀을 때 주재소의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제지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군중의 기세에 눌려 만세를 몇 번 따라 부르고 도망쳤다.
시위군중은 오후 4시경까지 정미면사무소(貞美面事務所)와 천의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일단 해산하였다. 이때 당진경찰서(唐津警察署)에서 지원 나온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대와 충돌하였다. 다급해진 경찰이 발포하자 분노한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며 격렬히 항쟁하였다.
강춘삼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24일 서산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犯罪人名簿(大湖芝面)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54∼155면
·唐津地域 抗日獨立運動史(唐津文化院, 1991) 137∼188면
이름: 강춘서(姜春瑞)
출신지: 강원 평창
훈격: 애족장(1995)
운동계열: 의병
강춘서(姜春瑞) 1908;36세~
강원도 평창(平昌) 사람이다.
박내혁(朴來赫)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 평창·정선(旌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을 강제 체결하면서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거족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과 교육부문에 의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의 의병운동이었다. 특히 의병운동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강춘서는 이같은 시기에 박내혁 의진에 참여하여 강원도 평창·정선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1908년 음력 4월경 박래혁 의병장의 지휘 아래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08년 10월 13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流刑) 3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244·245면
이름: 강치구(姜稚求)
출신지: 함남 홍원
훈격: 건국포장(1993)
운동계열: 국내항일
강치구(姜稚求) 1908. 9.17~1945. 6. 6
그는 1931년 5월 학천청년동맹(鶴泉靑年同盟)에 가입하여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희현면(希賢面)과 학천면(鶴泉面) 등지에서 일어난 호세불납동맹(戶稅不納同盟)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주동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함남 홍원 일대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재건운동(朝鮮共産黨再建運動)을 전개하였다. 1937년 7월 ‘조선공산당청년동맹재건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東亞日報(1934. 1. 4, 1937. 7. 9)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9권 813면, 제11권 709면
이름: 강치명(姜治明)
출신지: 평북 창성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광복군
강치명(姜治明) 1911. 3. 5~1950. 7.10
평북 창성(昌城) 사람이다.
1941년 9월 일본군에 징발되어 상해 연부대(烟部隊)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던 중 강소성(江蘇省) 무석현(撫錫縣)으로 전속되었다. 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김문호(金文鎬)주임과 접선이 되어 광복군에 입대하여 징모처 제3분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하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34·235·237·238·441면
이름: 강태동(姜泰東(姜錫龍)(姜鎭春))
출신지: 함남 이원
훈격: 애국장(1990)
운동계열: 임정・중국방면
강태동(姜泰東) 1889. 6. 13~1946. 2 이명 : 姜錫龍, 姜靑居
함경남도 이원(利原)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던 김가진(金嘉鎭)과 같이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의 함경도 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7월 1일에는 상해에서 대한적십자가 조직되자 그 상위원(常委員)으로서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19년 9월 그는 권태용(權泰容)・이을규(李乙奎)와 동반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임시정부의 격문, 포고문 등을 전국에 배포하는 한편, 대동단(大同團) 단장 전협(全協)과 상의하고 의친왕 이강 공(義親王 李堈公)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에 협력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 상해의 김가진으로부터 받아 온 밀서(密書)를 이강 공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강 공의 망명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11월 8일 서울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일행은 일경의 경계망을 뚫고 아슬아슬하게 신의주를 통과하여 만주땅까지 갈 수 있었으나 일경 요네야마 경부의 끈질긴 추격으로 이강 공은 안동현 정거장에서 일경에게 연행되어 되돌아 올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시 상해로 도피하여 대동단 총재인 김가진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1921년 9월에는 동년 11월 11일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청원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게 되자, 그는 김한(金翰)과 함께 자유당의 대표로 이 청원서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광복시까지 계속 활동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광복후 서울에 돌아왔으나 1946년 2월에 영면하자, 임시정부장(臨時政府葬)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
出典:『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第5卷,國家報勳處, 1988年, pp.464~465.
註・朝鮮民族運動年鑑 6・23・43面
・武裝獨立運動料史 25・36面
・民族獨立鬪爭史史料(海外篇) 15面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9・339・346面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71面
・高等警察要史 245・255・257・259面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 分冊 194・239面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國會圖書館) 42・54・123・124面
・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50・59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4卷 201・446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9卷 176・466・666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13卷 1466・1467面
☞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기록내용:(2000년 10월)
-이명: 姜鎭春
이름: 강태선(姜太善)
출신지: 제주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일본방면
강태선(姜太善) 1924. 6.15~
제주 성산(城山) 사람이다.
1942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대판(大阪)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한국인 차별대우를 체험하면서 점차 민족의식에 눈떠갔다. 그는 주불해(周佛海)가 지은 ≪삼민주의(三民主義)≫ 등 사상서적을 탐독하며 한국 민족의 진정한 행복은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길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42년 8월경 친지인 지원호(池源鎬)·심종보(沈宗輔) 등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해 협의하면서 태평양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데 뜻을 같이하였다. 또한 징병제는 독립운동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일제가 강요하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은 민족의식을 말살하는 것이므로 강력히 저항해야 한다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들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서로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력에 의한 독립봉기의 시기 등을 협의하는 한편 동지규합에 힘쓰다가 1944년 6월 3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44년 8월 25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註·판결문(1944. 8. 25 대판지방법원)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254면
·소화특고탄압사(명석박륭·송포총삼편) 하권 24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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