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송 이기붕
1896년12월 20일충북괴산군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그가 10살 때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자랐습니다. 그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고 당시 한글학자인 주시경을 만나 그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중학교 2학년 때는 이승만(李承晩)을 만나 알게 되었다고합니다.
교회 생활을 통하여 선교사의 통역을 하며 공부하던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 미국으로 건너가 심부름꾼, 호텔에 종업원등 공학을 하며 아이오와주 데이버대학교문학과를 졸업합니다.
당시 뉴욕에 있던 이승만을 만나 귀국할 것을 말했다가 일본의 앞잡이가 되려고 귀국하느냐고 책망을 들었으나 1934년 귀국 이화여자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박마리아를 만나 1935년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습니다.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정의 통역관으로 일하다 10월 12일이승만이 귀국하면서 비서직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정부수립 후 대통령비서실 실장, 서울특별시 시장, 제3대 국방부 장관을 지내고 1951년12월 자유당 창당하고 2인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자기중심의 자유당을 만들기 위해 공무원 공공기관 경찰 깡패등을 총동원하기 시작하였으며 1954년에는 이승만의 대통령 장기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고 56년3월5일 제7차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만장일치로 가결시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금년선거에는 나는 출마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하였으나 여론과 민중을 동원시켜 출마가 국민의 뜻이라고 선동하여 출마케 합니다.
57년에는 자기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60년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경쟁자인 민주당의 장면(張勉)과 경합,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 선거에 당선되는 등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국민은 이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3월15일 마산에서 일어난 부정 선거 반대 데모를 시작으로 김주열의 얼굴에 박격 포탄이 박힌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데모는 불이 붙었고 4월18일 평화적인 데모를 하고 돌아가던 고대생들을 매복하고 있던 깡패들의 급습으로 수십명이 중상을 입게 되자 학생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어져서 19일 2만여명 이상의 대학 중고교생들이 서울 시가지를 누비게 하였으며 하오2시에는 경무대 어귀에 까지 돌진하니 대치 경찰은 최루탄과 실탄을 발사 20여명의 학생들이 현장에서 절명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26일 10시 이대통령의 하야성명이 발표 되고 자유당은 역사의 속으로 사라지게 될 때 4월 28일 새벽,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李康石)은 이 모든 원인의 발단이 자신의 집에서 시작된 것으로 인정하고 권총으로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李康旭)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스스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의 집은 국가에 환수되어 4·19혁명기념도서관이 건립되었습니다.
한 때 신앙인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총애를 받던 이기붕 그는 이렇게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위해 신앙을 팔아 하나님과 민족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 버린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한 신앙인으로서 깊은 통찰로 하나님의 참다운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