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공개해서는 안될 목사의 금기사항'이라는 글을 보았다. 글쓴이가 공개되지 않은 그 글은 어느 목사님이 자신의 지난날들을 돌이켜 생각하며 정리한 글로 여겨졌다. 처음에는 글의 내용이 크게 공감되어 카페에 올려 다른 이들과 공유하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 목사에게 금기사항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겨 카페에 올리는 것을 유보했다.
며칠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정말 공개해서는 안될 목사의 금기사항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 수록 '그렇지 않다'고 여겨졌다. 오히려 글에서 제시된 내용들에 대해 회의가 일었다. 일시나마 글에 공감되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까지 했다. 그러면서 문득 중국의 '변검(變瞼)'이 오버랩되었다.
변검이란 중국의 전통극 가운데 하나다. 변검은 중국 사천(四川)지방의 전통극인 천극(川剧)에서 배우가 신속하게 얼굴 표정을 바꾸며 연기하는 특이한 기법의 하나다. 배우가 관객들 앞에서 매우 민첩하게 자신의 얼굴표정을 바꿔 변화시킴으로 극중인물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낭만적인 표현수법이 변검이다. 이런 연기는 배우가 한 번의 공연에서 7번까지 얼굴모양을 바꿀 수 있다.
중국에서 변검이 시작된 때는 '아주 먼 옛날 변변한 무기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이 사나운 짐승을 쫓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알려졌다. 당시의 사람들은 야수를 만났을 때, 살아남기 위해 얼굴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단장했었다. 그것을 힌트로 극의 연기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오늘의 변검이다.
변검의 핵심은 극중인물이 자신의 실체를 철저히 감춰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다. 이런 변검이 하필이면 인터넷에서 발견된 '공개해서는 안될 목사의 금기사항'을 깊이 생각하는 중에 나의 뇌리에 오버랩된 이유는 무엇일까? 변검과 '공개해서는 안될 목사의 금기사항'과는 어떤 유사상이 있는 것일까?
'공개해서는 안될 목사의 금기사항'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 첫째는 목사의 가정이 공개되지 말아야 할 것에서 10가지 항목이 제시되었고, 둘째는 목사가 성도들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 것들로 '취미생활을 공개하지 말라'며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 듯한 여운을 남겼다.
이 글을 여러날 생각하는 동안 처음에는 공감된 듯 했으나 날이 지날수록 자꾸만 회의적이 되었다. 글은 '자신의 실체는 철저히 감추고, 가공된 모양으로 다른 사람들, 즉 신자들 앞에 드러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어쩌면 나의 오해일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떨쳐 버려지지 않는 회의적인 생각이었다.
'금기(禁忌)'란 국어사전에서 '마음에 꺼려서 하지 않거나 피함'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목사의 금기사항'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목사가 마음에 꺼려서 하지 않거나 피해야 할 항목, 또는 내용'이라고 이해한다면 틀리지 않을 듯 싶다. 그러므로 글에서 제시한 내용들은 목사로서 다른 사람, 특히 교회의 성도들에게 마음에 꺼려서 하지 않거나 피해야 할 일들이라고 여겨졌다.
현대교회 안에는 직무상 여러가지 직분들이 존재한다. 목사와 장로가 있고, 권사와 집사 등이 있다. 목사는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있고, 집사의 경우는 안수집사와 서리집사가 있다. 이런 교회의 직분은 교인들의 계급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지 교회는 이런 직분들이 계급화되어 왔다. 그것도 아주 철저한 계급사회인 군대(軍隊)를 능가하는 엄격한 계급사회로 변절된 듯이 여겨진다.
교회에 '공개해서는 안될 목사의 금기사항'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계급사회화 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서로 상종할 수 없는 격리가 계급이 존재하고 있다는 실증(實證)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계급사회인 군대에는 장교와 사병의 처우가 다르다. 식당이나 화장실도 장교와 사병이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교식당, 사병식당이 따로 있고, 장교용 화장실과 사병용 화장실이 따로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목사의 금기사항이 있다면, 이 또한 군대와 다를 바 없다. 목사와 다른 교인들은 서로 계급적 차이로 인해 거리감을 두어야 한다. 결국 철저하고 엄격한 군대라는 조직사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 같아서는 인터넷에 공개된 내용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반론을 제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랴. 오히려 또 다른 반론의 받아 불필요한 논란에 휘말려들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침묵만은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며칠을 고심하다가 결국은 이렇듯 이 글을 쓰게된 것이다.
교회의 성도는 모두가 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다. 성도됨에는 목사와 장로, 권사와 집사가 구별되지 않는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 교회에서 맡은 바 직분은 서로 달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는 직분을 초월하여 한 몸의 지체인 것이다.
교회의 직분인 목사와 장로, 또는 권사나 집사가 성도라는 자신의 실체를 감추지 말자. 실체를 감춘다는 그것은 가면(假面)이다. 가면을 벗어 버려라. 한 몸된 지체가 서로에게 무엇을 감추고 말 것이 있으랴. 무엇을 마음에 꺼리거나 피해야 할 것이 있으랴. 서로가 서로를 다른 사람대하듯이 대하지 말라. 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지체로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 몸된 지체는 서로가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우월감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한 지체의 불구로 장애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다른 지체의 탁월함이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허황된 자부심이나 긍지를 가지지도 않는다. 오직 한 몸된 지체로 서로를 나눠지 않고 어떤 영욕(榮辱)도 더불어 공유한다.
이제 더 이상은 교회의 어떤 특별한 직분으로 자신을 격리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 한 몸된 지체에게는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 꺼려서 하지 않거나 피해야 할 일이란 없다. 비록 목사라 할지라도 공개해서는 안될 금기사항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한 몸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것도 감출 것이 없어야 한다.
나는 지금 '공개해서는 안될 목사의 금기사항'이라는 글을 쓴 이를 비난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오랜 경험을 후배들에게 권면하기 위해 썼으리라 믿는다. 그렇지만 적절한 표현과 타당한 권면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교회를 계급사회로 인식될 우려를 하고 있을 뿐이다. 목사라는 직분. 그것은 결코 계급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목사나 장로, 권사나 집사는 직분일뿐, 진정한 신분은 성도다. 그러므로 성도로서 성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성도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에 꺼려서 하지 않거나 피해야 할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며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넘치면 넘치는대로 서로를 수용하여 한 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가면을 벗어버려라. 가면이란 진짜 얼굴을 감추기 위한 거짓 얼굴이다. 변검을 연기하는 배우가 표현하는 얼굴과 같다. 어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변화무쌍하게 자신의 모습을 바꾼 거짓된 얼굴로 표현하는 변검술이 성도의 삶에는 필요하지 않는다. 물론 성도의 삶에는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참거나 인내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금기사항이 될 수는 없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서도 떳떳해야 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다면, 구태여 무엇을 감춰야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살자. 상대방에게 행한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면 즉시 먼저 용서를 구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잘못한 일은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용서하자. 이를 위해 거짓으로 꾸미거나 과장, 또는 피하거나 감춰야 할 이유는 없다. 항상 투명하게 자신을 비추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날마다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