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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행복이 있는 곳에 희열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 희열은 형성의 다발에 소속되는 것이고 행복은 느낌의 다발에 소속되는 것이다. 사막에서 지친 사람이 숲이나 물에 대하여 보거나 들을 때와 같은 것이 희열이고, 숲속의 그늘에 들어가거나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 행복이다. 이 각각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설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01. 이와 같이 “이러한 희열과 이러한 행복은 이 선정의 것이거나 이 선정 안에 있다.”라고 해서 이 선정을 ‘희열과 행복을 갖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는 희열과 행복을 ‘희열 행복’이라고 가르침과 계율 등과 같은 복합어에서처럼 사용할 수 있다.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은 이 선정의 것이거나 이 선정에 있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이라고 한다. 곧, 예를 들어 선정처럼 이와 같이 희열과 행복도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선정에 속한 것이므로 한 구절로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또한 『비방가』에는 “이러한 행복은 이러한 희열을 수반한다.”라는882) 등의 표현으로 말한 것이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의미는 이와 같다고 보아야 한다.
102. 첫 번째 선정에 대해서는 이후에 설명할 것이다.883) ‘든다’라는 것은 ‘들어서 지낸다.’는 뜻이다.884) ‘들어서’라는 것은 얻고, 도달하고‘라는 말이다. 혹은 ’성취시키고, 생산하게 하고‘라는 뜻이다. 그런데 『비방가』에서, 갖추고라는 것은 첫 번째 선정에 대하여 얻고, 획득하고, 이르고, 도달하고, 닿고, 실현하고, 성취하는 것이라고885) 설했다. 그곳에서도 의미는 이와 같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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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 idaṁ sukhaṁ imāya pītiyā sahagatan’ti : Vibh. 257
883) paṭhamaṁ jhānanti idaṁ parato āvibhavissati : Vism. 149/6 : 119
884) upasampajja viharati : 이 구절을 역자의 생각이 빠알리문법학적 관점에서 붓다고싸와 다르므로 역자의 선정에 대한 정형구를 살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삽입한 구절임을 밝혀 둔다. 원래 ‘든다.’는 번역은 ‘upasampajja viharati’를 지속적 양태로서 번역한 것이다. ‘들어서 지낸다.’는 문법적 설명을 위해 환원한 번역이다. 이하 Vism. 146의 2행 까지는 Aṭs. 167; Smp. 146과 병행한다.
103. ‘지낸다.’ 라는 것은 그것에 어울리는 위의 자세로 지내면서 앞서 언급한 유형의 선정을 갖춘 자가 되어 자신의 위의 자세, 행동, 수호,생활 생계 행위 체류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비방가』에서 이와 같이 “지낸다는 것은 위의 자세를 취하고, [146] 행동하고, 수호하고 생활하고 생계를 도모하고 행위하고 체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낸다고 한 것이다.”라고886) 설한 까닭이다.
104. [다섯 가지 장애의 버림과 기타] ‘다섯 고리를 버리고 다섯 고리를 갖추고’라고887) 앞서 설했다. 여기서 ‘① 감각적 쾌락의 욕망, ② 분노, ③ 해태와 혼침, ④ 흥분과 회한, ⑤ 의심 등의 이러한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림으로써 다섯 고리의 버림이 이루어진다고 알아야한다. 이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선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버림의 고리라고 한다. 물론 선정의 찰나에 다른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버려지지만, 이것들이 특별히 선정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105. 1) 감각적 쾌락의 욕망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대상에 탐착되는 마음은 하나의 대상에 모이지 않는다. 혹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사로 잡힌 마음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를 버리기 위해서 행도를 실천하지 않는다. 2) 분노로 인해 대상을 공격하는 마음은 장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3) 해태와 혼침에 정복된 마음은 부적합하다. 4) 흥분과 회한에 정복된 마음은 고요함이 없어 혼란스럽다. 5) 의심에 상처받은 마음은 선정의 증득을 성취하는 행도에 오르지 못한다. 이와 같이 특별히 선정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버림의 고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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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 upasampajjāti paṭhamassa jhānassa lābho paṭilābho patti sampatti phusanā sacchikiriyā upasampadā’ti : Vibh. 257
886) viharatī’ti iriyati vattati pāleti yapeti yāpeti carati viharati, tena vuccati viharatī’ti : Vibh. 252
887) pañcaṅgavippahinaṁ pañcaṅgasamannāgatan’ti : Vism. 129/6 : 79
106. 그러나 사유는 대상을 향해 마음을 떠오르게 하고, 숙고는 지속시킨다. 그것들에 의해서 불산란을 위한 가행이 성취된다. 마음에 가행의 성취로부터 생겨난 희열이 만족을 가져오고, 행복이 강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이러한 부양·지속·만족·강화를 통해서 도움을 받는 마음의 통일이 다른 관계된 사실들을 갖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르고 바르게 모운다. 그래서 사유·숙고·희열·행복·마음의 통일이라는 이러한 다섯 가지 선정의 고리가 생겨나는 까닭에 다섯 고리가 갖추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107. 이러한 다섯 고리가 생겨날 때 선정이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다섯 고리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갖춘 다른 어떤 것을 선정이라고 파악해서는 안 된다. 단지 고리를 갖춘 것을 통해서 사군(四軍),888) 오악(五樂),889) 그리고 여덟 고리의 길(八支道)890)이라고 불리듯, 이와 같이 [147] 단지 고리를 갖춘 것을 통해서 다섯 고리가 있다거나 다섯 고리를 갖춘 것이라고 불리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8. 물론 이 다섯 고리는 근접삼매의 찰나에도 있다. 또한 근접삼매에서는 자연적 마음보다 더 강하지만, 그러나 여기서는891) 근접삼매 보다는 더욱 강하고, 미세한 물질계의 특징을 얻는다. 여기서 사유는 지극히 청정한 유형으로 대상을 향해 마음을 떠오르게 하면서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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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 caturanginī senā : 고대 인도의 군대로 네 고리의 군대라는 말인데, 한역에서는 4군(四軍)이라고 한다. 코끼리부대(hatthikāya : 象軍), 기마부대(assakāya : 馬軍), 전차부대(rathakāya : 車軍), 보병부대(pattikāya : 步軍)이다.
889) pañcaṅgikatūriya : 다섯 고리의 음악이라는 말인데, 한역에서 5악(5악)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의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들이다. ① 아따따(atata)는 쿰바(kumbha)와 같이 한쪽이 가죽으로 된 북을, ② 비따따(vitata)는 베리(bheri)나 무딩가(mudinga)와 같이 양면이 가죽으로 겊인 드럼을, ③ 아따따비따따(atatavitata)는 비파(vina)와 같은 가죽으로 덮인 머리에 줄로 묶여 있는 현악기를, ④ 쑤씨라(susira)는 피리나 소라고둥이나 나팔과 같은 관악기를, ⑤ 가나(ghana)는 징이나 심벌즈, 탬버린과 같은 악기를 말한다.
890) aṭṭhaṅgiko ca maggoti : 여덟 가지 고귀한 길(八支聖道) 또는 팔정도(八正道)를 뜻한다.
891) idha : 첫 번째 선정의 근본삼매를 뜻한다.
고 숙고는 지극히 대상을 지속적으로 사유하면서 일어나고, 희열과 행복은 온 몸에 가득 차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몸의 어느 곳도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 차지 않은 곳이 없게 한다.”라고892) 설한 것이다. 마음의 통일도 상자와 뚜껑이 잘 맞는 것처럼 대상에 닿게 되어서 일어난다. 이러한 것이 그것들의 다른 점이다.
109. 그 가운데 마음의 통일은 물론 ‘사유가 있고 숙고가 있는’ 이러한 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비방가』에서는 “선정이라는 것은 사유·숙고·희열·행복 마음의 통일이다.”라고893) 설했기 때문에 그것도 당연히 선정의 고리이다.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한 것의 그 의도가 『비방가』에서 천명된 것이다.
110. [세 종류의 훌륭한 점] ‘세 가지 훌륭한 것과 열 가지 특징을 갖춘’894)이라는 것은 여기서 처음과 중간과 최종을 통해서 세 가지로 훌륭한 것이고, 그것들의 처음과 중간과 최종의 특징을 통해서 열 가지 특징을 갖추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11. 빠알리성전에 의하면 이와 같다.895) “첫 번째 선정에서 행도의 청정이 처음이고, 평정의 강화가 중간이고, 만족이 끝이다. 첫 번째 선정에서 행도의 청정이 처음인데, 처음에는 얼마나 많은 특징이 있는가? 처음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① 결박으로부터 마음이 청정해진다. ② 청정해진 까닭에 마음은 중간에 있는 멈춤의 인상에 행도를 실천한다. ③ 행도를 실천한 까닭에 거기에 마음이 뛰어든다. 결박에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청정해진 까닭에 마음은 중간에 있는 멈춤의 인상에 행도를 실천하는 것, 행도를 까닭에 거기에 마음이 뛰어드는 것이 첫 번째 선정에서 행도의 청정의 최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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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 nāssa kiñci sabbāvato kāyassa vivekajena pītisukhena apphuṭaṁ hoyi’ti : DN. I. 73; MN. Ⅲ. 93
893) jhānati vitakko vicāro pīti sukhaṁ cittassekaggatā’ti : Vibh. 257
894) Tivigdhakalyānaṁ dasalakkhaṇasampannati : Vism. 129/6 : 79
895) 이 말은 원전에 없지만, 이하의 문장은 Patis.의 인용구이므로 역자가 삽인한 것이다.
그 최초에는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선정의 처음의 훌륭한 것으로 세 가지 특징을 갖춘다.’라고 설한 것이다.”896)
112. “첫 번째 선정에서 [148] 평정의 강화가 중간이면, 중간에는 얼마나 많은 특징이 있는가? 중간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④ 청정한 마음을 무심하게 본다. ⑤ 멈춤의 행도에 든 마음을 무심하게 본다. ⑥ 통일의 현현을 무심하게 본다. 청정한 마음을 무심하게 보는 것, 멈춤의 행도에 든 마음을 무심하게 보는 것, 통일의 현현을 무심하게 보는 것, 그 첫 번째 선정에서 평정의 강화가 중간으로서, 중간에는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선정은 중간의 훌륭한 것으로 세 가지 특징을 갖춘다.’라고 설한 것이다.”897)
113. “첫 번째 선정에서 만족이 최종이면, 최종에는 얼마나 많ㅇ느 특징이 있는가? 최종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⑦ 거기에서 생겨난 사실들이 서로 능가하지 않는 의미에서의 만족이 있고, ⑧ 감각능력들이 하나의 기능이라는 의미에서의 만족이 있고, ⑨ 그것에 가깝게 정진을 기울인다는 의미에서 만족이 있고, ⑩ 수습한다는 의미에서 만족이 있다. 첫 번째 선정에서의 만족은 최종으로서 최종에는 이러한 네 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첫 째 선정은 최종의 훌륭한 것으로서 네 가지 특징을 갖춘다.’라고 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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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 paṭhmassa jhānassa paṭipadāvisuddhi ādi, upekkhānubrūhanā majjhe, sampahaṁsanā pariyosānaṁ, paṭhamassa jhānassa paṭipadāvisuddhi ādi, ādissa kati lakkhaṇāni? ādissa tīṇi lakkhaṇāni, yo tassa paribandho, tato cittaṁ visujjhati, visuddhattā cittaṁ majjhimaṁ samathanimittaṁ paṭipajjati, paṭipannattā tattha cittaṁ pakkhanati. yañca paribandhato cittaṁ visujjhati, yañca visuddhattā cittaṁ majjhimaṁ samathanimittaṁ paṭipajjati, yañca paṭipannattā tattha cittaṁ pakkhandati. Paṭhamassa jhānassa paṭipad āvisuddhi ādi, ādissaimāni tīṇi lakkhaṇāni. tena vuccati paṭhamaṁ jhānaṁ ādikaiyāṇañceva hoti tilakkhaṇasampannañca : Paṭis. I. 167-168
897) paṭhamasa jhānassa upekkhānubrūhanā majjhe, majjhassa kati lakkhaṇāni? majjhassa tīṇi lakkhaṇāni, vusuddhaṁ cittaṁ ajjhupekkhati, samathapaṭipannaṁ ajjhupekkhati, ekattupaṭṭhānaṁ ajjhupekkhati. yañca visuddhaṁ cittaṁ ajjhupekkhati, yañca samathapaṭipannaṁ ajjhupekkhati, yañca ekattupaṭṭhānaṁ ajjhupekkhati. paṭhamassa jhānassa upekkhānubrūhanā majjhe, majjhassa imāni tīṇi lakkhaṇāni. tena vuccati paṭhamaṁ jhānaṁ majjhekalyāṇañceva hoti tilakkhaṇasampannañca : Paṭis. I. 168
114.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899) “행도의 청정900)은 자량을 지닌 근접삼매이고, 평정의 강화901)라는 것은 근본삼매이고, 만족이 성찰이다.”라고902) 해석한다. 그러나 “하나로 통일된 마음은 행도의 청정에 뛰어드는 것인데, 평정을 통해 강화에 이르고, 앎을 통해 만족에 이른다.”라고903) 경전에서 설한 까닭에 근본삼매 가운데 근접삼매로서 행도의 청정, 유지중립적 평정904)의 작용으로서 평정의 강화, 원리들이 서로 능가하지 않는 것 등의 성취에 의해서 청정해진 앎의 작용의 현현으로서 만족에 이른다고 알아야 한다.
115. 어떻게 상세히 알 수 있는가? [행도의 청정] 1) 근본삼매가 일어날 때, 장애라고 불리는 오염의 무리가 선정의 방해인데, 그 장애로부터 마음이 청정하게 된다. 2) 청정해졌기 때문에 장애가 없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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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8) paṭhamassa jhāssa sampahaṁsanā pariyosānaṁ, pariyosānassa kati lakkhaṇāni? Pariyosānassa cattāri lakkhaṇāni, tattha jātānaṁ dhammānaṁ anativattanaṭṭhena sampahaṁsanā, indriyānaṁ ekarasaṭṭhena sampahaṁsanā, tadupagavīriyavāhanaṭṭhena sampahaṁsanā, asevanaṭṭhena sampahaṁsanā. paṭhamassa jhānassa sampahaṁsanā pariyosānaṁ, pariyosānassa imāni cattāri lakkhaṇāni. tena vuccati paṭhamaṁ jhānaṁ pariyosānakalyāṇañceva hoti catulakkhaṇasampannañcā’ti : Paṭis. I. 168
899) eke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아루라다뿌라 시에 있는 아바야기리비하라(無畏山寺 : Abhayagirivihāra) 사원에 거주자들을 말한다.
900) paṭipadāvisuddhi : 한역에서는 행도청정(行道淸淨)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청정수행(淸淨修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901) upekkhānubrūhanā : 한역에서는 사수증(捨隨僧)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사증장(捨增長)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902) paṭipadāvisuddhi nāma sasambhāriko upacāro. upekkhānubrūhanā nāma appanā. sampahaṁsanā nāma paccavekkhaṇa’ti : 『빠라맛타만주싸』의하면, 아바야기리비하라 파의 주장이다.
903) ekattagataṁ cittaṁ paṭipadāvisuddhipakkhandañceva hoti upekkhānubrūhitañca ñāṇena ca sampahaṁsitan’ti : Paṭis. I. 167
904) tatramajjhattupekkhā : 한역에서 중사(中捨)인데, 『해탈도론』에서는 평등사(平等捨)라고 번역하고 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의 평형성을 유지시키는 것이 유지중립성이다. Vism. 466/14 : 153을 참조하라.
중앙적 멈춤의 인상905)이 행도로서 실천된다. 중앙적 멈춤의 인상이라는 것은 평등하게 일어난 근본삼매를 뜻한다. 또한 그 직전의 마음이 일련의 상속을 통해 변화하는 것을 통해서906) 그러한 여성(如性)907)에 [149] 가까이 가는 것을 두고 중앙적 멈춤의 인상이 행도로서 실천된다고 하는 것이다. 3) 이와 같이 행도가 실천되고, 그러한 여성(如性)에 가까이 가는 까닭에 거기에 뛰어든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전의 마음에 있는 유형을 성취하는 것이 첫 번째 선정이 일어나는 찰나에 접근하기 때문에 행도의 청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16. [평정의 강화] 이와 같이 청정해진 그것을 다시 청정하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청정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 4) 청정을 무심하게 본다고 하는 것이다. 멈춤의 상태에 가까이 가서 멈춤의 행도가 실천될 때 다시 집중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5) 멈춤의 행도가 실천되는 것을 무심하게 본다고 하는 것이다. 멈춤의 행도가 실천되었기 때문에 오염과의 결합을 버리고 통일로서 현현된 것에 대하여 통일로서 현현되도록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6) 통일로서 현현한 것908)을 무심하게 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지중립적 평정의 강화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117. [만족] 이와 같이 평정이 강화되면 7) 거기에서 생겨난 삼매와 지혜라고 불리는 쌍련법909)이 서로를 능가하지 않으면서 일어난다. 8) 또한 믿음 등의 능력들이 다양한 오염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해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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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5) majjhimasamathanimitta : 원래 중간적 또는 중앙적 멈춤이라는 뜻인데, 한역에서 중지상(中止相)인데, 해탈도록에서는 중사마타상(中奢摩他相)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906) tadanantaraṁ pana purimacittaṁ ekasantatipariṇāmanayena : Vism. 672/22 : 1-6을 참조하라.
907) tathatta : 한역에서, 여성(如性) 또는 진여(眞如)라고 한다. 여기서는 그러한 상태 즉, 근본삼매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908) ekattupaṭṭhāna : 한역에서는 일성현현(一性顯現)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일향주(一向住)라고 번역하고 있다.
909) yuganaddhadhadhammā : 쌍으로 관련된 원리인 삼매와 지혜(定慧), 즉 멈춤과 통찰(止觀)을 말한다.
기능에서 통일적 기능910)을 하며 작용한다. 9) 또한 그가911) 그것들에 가까이 간다. 그것들이 서로 능가하지 않는 상태와 통일적 기능의 상태에 알맞은 정진을 기울인다. 그 찰나에 수습912)이 일어난다. 이 모든 유형들은 앎을 통해 오염에서 위험을, 정화에서 공덕을 본 뒤에, 각각의 여실한 것에 따라913) 만족하고, 정화되고, 청정해졌기 때문에,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이 서로 능가하지 않는 상태 등의 성취를 통한 정화된 앎의 기능이 완성이 만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다.
118. 거기서는 평정으로 인해 앎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이와 같이 “그렇게 마음을 책려하고 그 마음을 평정하게 잘 본다. 평정에서 기인한 지혜를 통해서 지혜의 능력이 현저해지고, 평정의 덕분에 다양한 오명에서 마음이 해탈된다. 해탈에서 기인한 지혜를 통해서 지혜의 능력이 현저해진다. 해탈되었기 때문에 그 원리들은 통일적 기능을 한다. 지혜의 능력은 통일적 기능의 의미에서의 수행을 통해서 현저해진다.”914)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앎의 기능을 하는 만족을 최종이라고 한 것이다.
119. 이제 ‘땅의 두루채움과 관련된 첫 번째 선정을 얻는다.’라고915)했는데, 여기서 숫자의 차제에 따라 첫 번째라고, 첫 번째로 일어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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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ekarasa : 한역에서는 일미(一味)인데, 해탈도론에서도 일미(一味)라고 번역하고 있다.
911) esa : 수행자를 지칭한다.
912) asevana : 한역의 습행(習行)인데, 해탈도론은 능수행(能修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913) tatha thata : ‘그렇게 그렇게’라는 말인데, 한역에서 여법(如法)이라고 한다.
914) tathāpaggahitaṁ cittaṁ sādhukaṁ ajjhupekkhati, upekkhāvasena paññāvasena paññindriyam adhimattaṁ hoti, upekkhāvasena nānattakilesehi cittaṁ vimuccati, vimuccati, vimokkhavasena paññāvasena paññindriyaṁ adhimattaṁ hoti. vimuttattā te dhammā ekarasā honti. ekarasaṭṭhena bhāvanā[ vasena paññindriyaṁ adhimattaṁ hotī]’ti : Paṭis. Ⅱ. 25 원문의 끝부분 [ ]은 『청정도론』에 누락된 것을 역자가 보충한 것이다.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해탈되었기 때문에 그 원리들은 통일적 기능을 한다.’라는 말은 ‘해탈되었기 때문에 믿음·지혜·정진·집중이 통일적 기능을 한다.’라는 뜻이다.
915) paṭhamaṁ jhānaṁ adhigataṁ hoti pathavīkasiṇan’ti : Vism. 129/4 : 79
까닭에 [150] 첫 번째라고 한 것이다. 대상을 사유하기 때문에, 반대를 소진시키기 때문에 선정이다.916) 흙의 원륜을 전체라는 뜻에서 땅의 두루채움이라고 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얻은 인상도, 땅의 두루채움의 인상에서 얻은 선정도 땅의 두루채움이라고 한다. 이러한 뜻에서 선정으로서의 땅의 두루채움을 알아야 한다. 그것과 관련해서 ‘땅의 두루채움과 관련된 첫 번째 선정을 얻는다.’라고 설한 것이다.
120. [오랜 지속의 성취] 이와 같이 획득할 때 그때 수행자는 터럭을 쏘는 궁수처럼, 요리사처럼 유형을 파악해야 한다. 유능한 궁수가 활을 잡고 터럭을 쏘는 연습을 하다가 터럭을 맞춘 경우에는 밝고 있는 양 발과 활의 시위와 현과 화살의 유형을 파악하여 “나는 이와 같이 서서 이와 같이 활의 시위를 붙잡고 이와 같은 현으로 이와 같이 화살을 붙잡고 터럭을 쏘았다.”라고917) 생각하여 그 다음부터 그러한 유형들을 성취하여 실패하지 않고 터럭을 맞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도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사람을 섬기면서 이러한 처소에서 이러한 위의 자세로 이러한 시간에 이것을 획득했다.”라고918) 이러한 음식의 적절함 등의 유형을 파악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가 선정을 잃었을 때 그 유형들을 갖추어서 다시 일으킬 수 있거나,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하게 만들면서 거듭 도달할 수 있다.
121. 또한 예를 들면, 솜씨 좋은 요리사가 주인을 대접하면서 그가 즐겨먹는 갖가지 것들을 살펴보고 그 다음부터는 그러한 것을 올리면 상을 받듯, 이와 같이 그도 획득할 무렵의 음식 등의 유형을 파악하여 그것들을 성취시키고 잃어버렸을 때마다 거듭해서 근본삼매를 얻는다. 그러므로 터럭을 쏘는 궁수처럼 요리사처럼 유형들을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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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 ārammaṇūpanijjhānato paccanīkajhāpanato vā jhānaṁ : 선정 자나(jhāna)에 대한 유사언어학적 설명이다.
917) evaṁ me ṭhitena evaṁ dhanudaṇḍaṁ evaṁ jiyaṁ evaṁ saraṁ gahetvā vālo viddho’ti
918) imaṁ nāma me bhojanaṁ bhuñjitvā evarūpaṁ puggalaṁ sevamānena evarūpe senāsane iminā nāma iriyāpathena imasmiṁ kāle idaṁ adhigatan’ti : 첫 번째 선정(初禪)을 증득했다는 뜻이다.
122.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현명하고, 유능하고, 숙련된 요리사가 왕이나 왕궁의 대신들에게 새콤하고, 쓰고, [151] 맵고, 달고, 거칠고, 부드럽고, 짜고, 순한 다양한 종류의 카레 요리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고 해 보자. 수행승들이여, 그 현명하고, 유능하고, 숙련된 요리사는 이와 같이 주인의 인상을 파악한다. ‘오늘 이 카레요리가 주인을 기쁘게 했다.’거나 ‘주인은 이러한 카레요리를 집었다.’거나 ‘주인은 이러한 카레요리를 많이 먹었다.’거나 ‘주인은 이러한 카레요리를 칭찬하여 말했다.’ 또는 ‘오늘 이 새콤한 카레요리가 주인을 기쁘게 했다.’거나 ‘주인은 새콤한 카레요리를 집었다.’거나 ‘주인은 새콤한 카레요리를 많이 먹었다.’거나 ‘주인은 새콤한 카레요리를 칭찬했다.’거나, 또는 ‘오늘 쓰디쓴 카레요리가 주인을 기쁘게 했다.’거나 ‘주인은 쓰디쓴 카레요리를 집었다.’거나 ‘주인은 쓰디쓴 카레요리를 많이 먹었다.’거나 ‘주인은 쓰디쓴 카레요이를 칭찬했다.’거나 또는 ‘오늘 매운 카레 요리가 주인을 기쁘게 했다.’ 거나 ‘주인은 매운 카레요리를 집었다.’거나 ‘주인은 매운 카레요리를 많이 먹었다.’거나 ‘주인은 매운 카레요리를 칭찬했다.’거나, 또는 ‘오늘 달콤한 카레 요리가 주인을 기쁘게 했다.’거나 ‘주인은 달콤한 카레요리를 집었다.’거나 ‘주인은 달콤한 카레요리를 많이 먹었다.’거나 ‘주인은 달콤한 카레요리를 칭찬했다.’거나, 또는 ‘오늘 거친 카레요리가 주인을 기쁘게 했다.’거나 ‘주인은 거친 카레요리를 집었다.’거나 ‘주인은 거친 카레요리를 많이 먹었다.’거나 ‘주인은 거친 카레요리를 칭찬했다.’ 거나, 또는 ‘오늘 부드러운 카레요리가 주인을 기쁘게 했다.’거나 ‘주인은 부드러운 카레요리를 집었다.’거나 ‘주인은 부드러운 카레요리를 많이 먹었다.’거나, ‘주인은 부드러운 카레 요리를 칭찬했다.’ 거나, 또는 ‘오늘 짭짭한 카레요리가 주인을 기쁘게 했다.’거나 ‘주인은 짭짤한 카레요리를 집었다.’거나
‘주인은 짤짤한 카레요리를 많이 먹었다.’거나 ‘주인은 짭짤한 카레요리를 칭찬했다.’거나, 또는 ‘오늘 순한 카레요리가 주인을 기쁘게 했다.’거나 ‘주인은 순한 카레요리를 집었다.’거나 ‘주인은 순한 카레요리를 많이 먹었다.’거나 ‘주인은 순한 카레요리를 칭찬했다.’라고, 수행승들이여, 그 현명하고 유능하고, 숙련된 요리사는 이와 같이 주인의 인상을 파악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현명하고, 유능하고, 숙련된 요리사는 의복, 급료, 상여금을 받는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현명하고, 유능하고, 숙련된 요리사는 주인의 인상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현명하고, 유능하고, 숙련된 수행승도 이와 같다. 1) 그 수행승은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 그가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면서 마음이 집중되고 번뇌가 버려질 때, 그는 그 인상을 파악한다. 2) … 느낌에 대해 느낌을 … 3) … 마음에 대해 마음을 … 4) … 사실에 대해 사실을 관찰하면서 마음이 집중되고 번뇌가 버려질 때, 그는 그 인상을 파악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현명하고, 유능하고, 숙련된 수행승은 새김을 확립하고 알아차림을 성취하여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을 누린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현명하고, 유능하고, 숙련된 수행승은 자신의 마음의 인상을 파악했기 때문이다.”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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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seyyathāpi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sūdo rājānaṁ vā rājamahāmattaṁ vā nānaccayehi sūpehi paccupaṭṭthito assa ambilaggehipi tittakaggehipi kaṭukaggehipi madhuraggehipi khārikehipi akhārikehipi loṇikehipi aloṇikehipi. sa kho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sūdo sakassa bhattu nimittaṁ uggaṇhāti ‘idaṁ vā me ajja bhattusūpeyyaṁ ruccati, imassa vā abhiharati, imassa vā bahuṁ gaṇhāti, imassa vā vaṇṇnaṁ bhāsati, ambilaggaṁ vā me ajja bhattu sūpeyyaṁ ruccati, ambilaggassa vā abhiharati, ambilaggassa vā bahuṁ gaṇhāti, ambilaggassa vā vaṇṇaṁ bhāsati – pa – aloṇikassa vā vaṇṇaṁ bhāsatī’ti. sa kho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sūdo lābhī ceva hoti acchādanassa, lābhī vetanassa, lābhī abhihārānaṁ. taṁ kissa hetu, thatā hi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sūdo sakassa bhattu nimittaṁ uggaṇhāti.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o paṇḍito byatto kusako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vedanāsu vedanā. citte citt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123. 그가 인상을 파악하여920) 그런 유형들을 성취할 때 근본삼매는 성취되지만, 오랜 지속은 성취되지 않는다. 그러나 삼매를 방해하는 현상들에서 지극히 청정해지면, 오랜 지속이 성취된다.
124.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위험에 대한 성찰 등을 통해서921)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잘 극복하지 않고 몸의 안온을 통해서 몸의 거침을 잘 안정시키지 못하고, 시도의 단계에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 등을 통해서922) 해태와 혼침을 잘 제거하지 못하고, 멈춤의 인상에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 등을 통해서 [152] 흥분과 회한을 잘 근절하지 못하고, 다른 삼매를 방해하는 현상들을 잘 정화하지 못하고 선정을 성취하면, 그는 불결한 보금자리에 든 벌처럼 불결한 정원에 들어간 왕처럼 빨리 밖으로 나오게 된다.
125. 그러나 삼매를 방해하는 현상들을 잘 정화하고 선정을 성취하면, 그는 깨끗한 보금자리에 든 벌처럼, 깨끗한 정원에 들어간 왕처럼 성취를 온종일 지속시킨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말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분노와
흥분과 혼침과 의혹의 다섯 가지를 제거하고
멀리 여읨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마치 깨끗한 정원에 든 왕처럼 그곳에서 즐기리.”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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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ke abhijjhādimanassaṁ. tassa dhammesu dhammānupassino viharato cittaṁ samādhiyati, upakkilesā pahīyanti, so taṁ nimittaṁ uddaṇhāti. sa kho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bhikkhu lābhi ceva hoti diṭṭhadhammasukhavihārānaṁ, lābhī satisampiaññassa. taṁ kissa hetu, tathā hi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bhikkhu sakassa cittassa nimittaṁ uggaṇhāti’ti : SN. V. 151-152
920) nimittaggahaṇena cassa puna : 여기서부터 Vism. 152의 15행까지 Spk. 278과 일치한다.
921) kamādīna :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여기서 ‘등’이란 부정(不淨)에 대한 정신활동(asubhamanasikāra)이나 출리의 공덕(nekkhammānisamsa)에 대한 성찰을 말한다.
922) ārambhadhātumanasikarādivasena : Vism. 132/4 : 53을 참조하라. 『빠라맛타만주싸』에 의하면, 여기서 ‘등’이란 정진의 깨달음 고리의 인상(vīriyasambojjhaṅganimitta)이나 빛에 대한 지각(光明想 : ālokasaññā)을 포함한다.
126. [인상의 확장] 그러므로 오랜 지속을 원하는 자는 방해가 되는 현상들을 정화하고 선정을 성취해야 한다. 마음의 닦음을 완전히 전개하기 위해서는 대응인상을 얻어지는 대로 확장시켜야 한다. 그것을 확장하는 두 가지 토대 곧, 근접삼매와 근본삼매가 있다. 근접삼매에 도달하여 그것을 확장할 수 있고, 근본삼매에 도달하여 그것을 확장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영역에서 반드시 확장해야 한다. 그래서 ‘대응인상을 얻어지는 대로 확장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127. 이것이 확장하는 방법이다. 수행자가 발우를 확장시키고 과자를 확장시키듯이 음식을 증가시키고 넝쿨을 성장시키고 천포를 확장 시키는 방식으로 확장시켜서는 안 된다. 농부가 갈아야 할 땅을 쟁기로 한정한 뒤에 한정한 범위 안에서 밭갈이를 하듯, 수행승들이 결계를 엮으면서 먼저 경계의 특징을 살핀 후에 나중에 엮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상을 차례대로 손가락 한 마디, 두 마디, 세 마디, 네 마디 정도로 마음으로 한정한 뒤에 한정한 만큼 확장해야 한다. 그러나 한정하지 않고 확장해서는 안 된다. 그 다음 한 뼘, 한 척, 한 툇마루, 한 방사, 한 승원의 경계를 마을, 도시, 지방, 왕국, 바다의 경계로 차례대로 한정하여 확장하면서 혹은 철위세계924)의 한계까지 [153] 확장하고, 혹은 그 이상으로 확장해야 한다.
128. 마치 어린 백조들이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짧은 저리를 날면서 연습하여 차례로 해와 달 가까이로 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수행승은 앞서 말한 방식으로 인상을 한정한 뒤에 확장하면서 철위세계의 경계까지 확장학나 그 보다 더 확장할 수 있다.
129. 그리고 그가 확장시킬 때마다의 장소의 그 인상은 땅의 높은 곳과 낮은 곳, 황무한 하천, 험준한 산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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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 kāmes chandaṁ paṭighaṁ vinodaye ǀ uddhacca middhaṁ vicikicchapañcamaṁ ǀ vivekapāmojjakarena cetasā ǀ rājāva suddhantagato tahiṁ rame’ti ǁ
924) cakkavāḷa : 철위세계에 대해서는 이 책 Vism. 206/7 : 44와 그 주석을 보라.
못으로 평탄하게 확장시킨 소가죽처럼 평탄하게 된다. 그러나 초심자는 이러한 인상에서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하면 반복해서 입정을 닦아야 하고 성찰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성찰을 반복하는 자에게는 선정의 고리가 거칠고 힘없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현현하기 때문에 거듭 노력하고자 하는 조건에 이르지 못한다. 그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선정을 얻으려 노력하더라도 첫 번째 선정에서 퇴각하여 두 번째 선정에 도달할 수 없다.
130. 그래서 세존께서 설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산에서 사는 암소가 어리석고 경험이부족하고 영역을 잘 알지 못해서 산을 타기에 능숙하지 못한데, 그 암소가 이와 같이 ‘내가 예전에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보면 어떨까, 예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먹어보면 어떨까? 예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면 어떨까?’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 암소는 앞발을 잘 가누기도 전에 뒷발을 들어 올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전에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갈 수 없고, 예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사켜볼 수 없고, 예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서서 이와 같이 ‘내가 예전에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보면 어떨까. 예전에 먹어보지 못한 풀을 먹어보면 어떨까? 예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면 어떨까?’라고 생각한 곳으로 안전하게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산에서 사는 그 암소가 어리석고 경험이 부족하고 영역을 잘 알지 못해서 산을 타기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어떤 수행승은 어리석은 경험이 부족하고 영역을 잘 알지 못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드는데 능숙하지 못하다. 그는 그 인상을 수습하지 못하고, 닦지 못하고, 익히지 못하고, 잘 확립되도록 정립하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에 들면 어떨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154]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에 들 수 없다. 그는 이와 같이 ‘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드는 것이 어떨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전에도 들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양면으로 실패한 것이고 양면으로 퇴전한 것이다. 마치 암소가 어리석고 경험이 부족하고 영역을 잘 알지 못해서 산을 타기에 능숙하지 못한것과 같다.”925)
131. [다섯 가지 자재] 그러므로 그는 첫 번째 선정에서 곧 다섯 가지 자재를 얻어야 한다. 거기에는 ① 전향의 자재, ② 입정의 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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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5) seyyathāpi bhikkhave gāvī pabbateyyā bālā abyattā akhettaññū akusalā visame pabbate carituṁ. tassā evamassa ‘yaṁnūnāhaṁ agatapubbañceva disaṁ gacchayyaṁ, akhāditapubbāni ca tiṇāni khādeyyaṁ, paītapubbāni ca pānīyāni piveyyan’ti. sā purimaṁ pādaṁ na supatiṭṭhitaṁ patiṭṭhāpetvā pacchimaṁ pādaṁ uddhareyya, sā na ceva agatapubbaṁ disaṁ gaccheyya, na ca akhāditapubbāni tiṇāni khādeyya, na ca apītapub bāni pānīyāni piveyya. yasmiñcassā padese ṭhitāya evamassa ‘yaṁnūnāhaṁ agatapubbañceva – pa – piveyyan’ti. tañca padesaṁ na sotthinā paccāgavvheyya. taṁ kissa hetu? tathā hi sā bhikkhave gāvī pabbateyyā bālā abyattā akhettaññū akusalā visame pabbate carituṁ,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o bhikkhu bālo abyatto akhettaññū akusalo vivicceva kāmehi – pa – pa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ituṁ. so taṁ nimittaṁ nāsevati, na bhāveti, na bahulīkaroti, na svādhiṭṭhitaṁ adhiṭṭhāti, tassa evaṁ hoti ‘yaṁnūnāhaṁ vitakkavicārānaṁ vūpasamā – pa – dutiyaṁ jhanaṁ upasampajja vihareyyan’ti. so na sakkoti vitakkavicārānaṁ vūpasamā – pa – du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ituṁ. tassevaṁ hoti ’yaṁnūnāhaṁ vivicceva kāmehi – pa – pa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eyyan’ti. so na sakkoti vivicceva kāmehi –pa pa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ituṁ. ayaṁ vuccati bhikkhave bhikkhu ubhato bhaṭṭho ubhato parihīno, seyyathāpi sā gāvī pabbateyyā bālā abyattā akhettaññū akusalā visame pabbate caritun’ti : AN. Ⅳ. 418-419
③ 재정의 자재, ④ 출정의 자재, ⑤ 성찰의 자재가 있다.926) 1)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시간 중에 첫 번째 선정에 전향하고, 정향하는데 지체하는 것이 없는 것이 전향의 자재이다. 2)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시간 중에 첫 번째 선정에 입정하고, 입정하는데 지체하는 것이 없는 것이 입정의 자재이다. 3)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시간 중에 첫 번째 선전에 체류하고, 체류하는데 지체하는 것이 없는 것이 재정의 자재이다. 4)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시간 중에 첫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고, 출정하는데 지체하는 것이 없는 것이 출정의 자재이다. 5)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시간 중에 첫 번째 선정에서 성찰하고, 성찰하는데 지체하는 것이 없는 것이 성찰의 자재이다.927)
132. 여기서 그 의미를 설명해 보자. 1) 첫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여 먼저 사유로 전향할 때 존재지속의 고리를 끊고 생겨나는 전향의 직후에 사유를 대상으로 하는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통각이 생겨난다. 그 다으에 두 번의 존재지속의 고리가 생겨난다. 그 다음에 다시 숙고를 대상으로 전향이 일어나고 앞서 말한 방법으로 통각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선정의 고리에 대하여 계속해서 마음을 보낼 수 있을 때 그가 전향의 자재를 성취한 것이다. 쌍신변928)의 시간에 발견된다. 이 보다 더 빠른 전향의 자재라는 것은 없다.
133. 2) 존자 마하 목갈라나 장로가 난도빠난다929) 용왕을 길들일 때처럼, 신속하게 입정하는 능력을 입정의 자재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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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 tatrimā pañca vasiyo āvajjanavasī, samāpajjanavasī, adhiṭṭhānavasī, vuṭṭhānavasī, paccavekkhaṇavasī’ti : 한역의 오자재(五自在)로 전향자재(轉向自在), 입정자재(入定自在), 재정자재(在定自在), 출정자재(出定自在), 관찰자재(觀察自在)를 말한다.
927) paṭhamaṁ jhānaṁ yatthicchakaṁ – pa – samāpajjati samāpajjanāya dandhāyitattaṁ natthīti samāpajjanavasī : Paṭis. I. 100
928) yamakapāṭihāriya : Vism. 309/12 : 72와 그 주석을 보라.
929) Nandopananda : Vism. 398/12 : 106 이하와 그 주석을 보라.
134. 3) 손가락을 한 번 튕기거나 열 번 튕기는 찰나, 지속하는 능력을 ‘재정의 자재’라고 한다. 4)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출정할 수 있는 능력을 ‘출정의 자재’라고 한다.
135. 이 양자를 보여 주기 위해 장로 붓다락키따930)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 [155] 존자는 구족계를 받은 지, 8년이 되어 테람밧탈라931)에 사는 장로 마하로나굿따932)를 간병하기 위해 온 삼만 명 정도의 신통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 앉았다. “장로에게 죽을 공양하고 있는 간호사인 용왕을 사로잡아야겠다.”라고 허공에서 공격하는 금시조왕을 보고 그 즉시로 산을 화현시켜 용왕의 두 팔을 잡고 그 가운데 넣어버렸다. 금시조왕은 산을 한 방 치고는 도망쳤다. 장로는 “만약에 뭇다락키따가 없었다면, 모두가 경멸을 받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36. 5) 그런데 성찰의 자재에 대해서는 전향의 자재와 같은 방식으로 설했는데, 성찰하는 통각은 거기서 바로 전향의 직후에 일어나는 까닭이다.933)
[두 번째 선정(二禪)]
137. 8. [두 번째 선정] 이러한 다섯 가지 자재에 대한 자재를 행하는 자는 익숙한 첫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여, “이 성취는 장래라는 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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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Buddharakkhita : 스리랑카의 장로로 그와 마하로나굿따에 얽힌 이야기는 이곳이 출처이다.
931) Therambatthala : 원래는 마하나가(Mahānāga) 왕이 장로 마힌다(Mahinda)를 기념해서 지은 암밧탈라투빠(Ambatthalathūpa) - 암바탈라는 스리랑카 밋싸까(Missaka) 산의 고원지대 – 의 별칭인데, 후에 승려들이 기거하면서 장로 마하로하나굿따도 이곳에 주석하게 되었다.
932) Mahārohaṇagutta : 그와 붓다락키따 장로에 얽힌 이야기는 이곳과 Vism. 375/12 : 9가 그 출처이다.
933) paccavekkhaṇajavanāneva hi tattha āvajjanānantarāni’ti : Vism. 154/4 : 132를 참조하라.
가깝고, 사유와 숙고는 거친 것이기 때문에 선정의 고리로서 허약한 것이다.”라고934) 알고, 거기에서 허물을 보고 두 번째 선정은 적정이라고 정신활동을 일으켜 첫 번째 선정에 대한 애착을 종식시키고 두 번째 선정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138. 그래서 첫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여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선정의 고리들을 성찰하는 자에게 사유와 숙고가 거칠게 현현하고, 희열과 행복과 마음의 통일은 적정한 것으로 현현하다. 그때 거친 고리를 버리고 적정의 고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그 인상에 대하여 ‘땅, 땅’이라고 거듭해서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자에게는 “이제 두 번째 선정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알려지면서 존재지속의 고리가 차단되고 그와 동시에 땅의 두루채움을 대상으로 의문전향이 일어난다. 그들 가운데 마지막 하나가 미세한 물질계의 두 번째 선정의 마음이고, 나머지는 이미 그 종류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것이다.935)
139. 그리하여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에 든다.”936) 이와 같이 두 가지 고리를 버리고 세 가지 고리를 갖추고 세 종류의 훌륭함과 열 가지 특징을 갖춘, 땅의 두루채움과 관련된 두 번째 선정을 획득한다.
140. 그 가운데937) [156]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에’라는 것은 사유와 숙고의 두 가지가 지멸되고 초월되었기 때문에, 두 번째 선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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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4) ayaṁ samāpatti āsannanīvaraṇapassatthikā, vitakkavicārānaṁ oḷārikattā aṅgadubbalā’ti
935) sesāni vuttappakārāneva kāmāvacarānī’ti : Vism. 137/4 : 74
936) vitakkavicārānaṁ vūpasamā ajjhattaṁ sampasādanaṁcetaso ekodibhāvaṁ avitakkaṁ avicāraṁ samādhijaṁ pītisukhaṁ duti 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 Vibh. 245; SN. Ⅱ. 210; MN I. 21; AN. I. 38 등을 보라.
937) tattha : 이하 Vism. 158의 11행까지는 Aṭs. 168; Smp. 147과 병행한다.
찰나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말한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어떤 것이든 두 번째 선정에서는 모든 첫 번째 선정의 현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첫 번째 선정의 접촉 등은 여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의 거친 고리를 뛰어넘은 뒤에 첫 번째 선정과는 다른 두 번째 선정 등을 획득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에’라고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41. ‘내적인’이라는 것은 여기서 자기의 내면에 속한 것을 지칭한다. 그런데 『비방가』에서는 안의 개인적인 것이라고938) 설명했다. 또한 자기 안의 의미이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생겨나고 자기의 상속 가운데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이 여기서 의미하는 것이다.
142. ‘평온’이라는 것은 이와 같다. 믿음을 지닌 것을 평온이라고 하는 것이다. 평온과의 결합으로 인해서 선정도 평온인데, 청색과 결합으로 인해서 푸른 옷도 푸른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혹은 그 선정은 평온을 갖춘 까닭에 사유와 숙고의 동요가 멈춘 까닭에 마음이 평온해져서 평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분별로 보면, ‘마음의 평온’이라고 이와 같은 구절로 결합할 수 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선적 의미의 구별로 보면 ‘마음의’라는 것은 그것을 통일과 함께 결합시켜야 한다.
143. 여기서 그 의미를 해설해 보자. 하나로 상승하기 때문에 통일이다.939) 사유와 숙고가 그것을 능가하지 못하는 까닭에 최상 곧, 최승으로 상승한다는 의미이다. 최승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유와 숙고가 없기 때문에 유일한 것이고, 반려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함께 관련된 사실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상승한다는 것인데 생기한다는 뜻이다. 최승의 의미에서 유일한 것이고 상승하는 까닭에 통일이라고 한다. 그것은 삼매와 동의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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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8) ajjhattaṁ paccattan’ti : Vibh. 258
939) eko udetī’ti ekodi : 유사언어학적 해석이다.
이와 같이 그 통일을 닦아서 강화시키는 까닭에 그것을 두 번째 선정의 통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통일은 정신의 통일이지, 뭇삶의 통일도, 영혼의 통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마음의 통일이라고 한다.
144. 그리고 이렇게 ‘그 믿음는 첫 번째 선정에도 있는 것이 아닐까? 또는 이 통일이라고 하는 것은 삼매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두 번째 선정만을 ’평온과 마음의 통일‘이라고 했는가? 라고 물을지 모른다. 대답한다. 첫 번째 선정은 [157] 사유와 숙고의 동요로 인해서 파랑이 이는 물과 같아 아주 평온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그때의 믿음에 관하여 평온이라고 하지 않는다. 평온하지 않기 때문에 그때의 삼매도 아주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통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정에서는 사유와 숙고에 의한 방해가 없기 때문에 믿음은 기회를 얻어서 강해진다. 강한 믿음을 수반하여 획득했기 때문에 삼매도 밝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45. 그런데 『비방가』에서는 “평온이라는 것은 믿음이고 신뢰이고 신해이고 신락이다. 마음의 통일이라는 것은 마음의 확립 올바른 삼매이다.”라는940) 정도로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한 것과 그 의미에 대한 주석은 모순되지 않고, 여하튼 합치하고 일치하는 것이라고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146.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라는 것은 이와 같다. 수행을 통해서 버렸으므로 그 사유가 없는 까닭에 사유를 뛰어넘은 것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숙고를 뛰어넘은 것이다. 『비방가』에서도 “이 사유와 이 숙고가 적정해지고 진정되고 지멸되고 사라지고 소멸되고 부서지고 파괴되고 마르고 고갈되고 종식된다. 그러므로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라고 한 것이다.”라고941) 설했다. 그런데 여기서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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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0) sampasādananti yā saddhā saddahanā okappanā abhippsādo. cetaso ekodibhāvanti yā cittassa ṭhiti – pa – sammāsamādhī’ti : Vibh. 258
941) iti ayañca vitakko ayañca vicāro santā honti samitā vūasantā atthaṅgatā abbhatth aṅgatā appitā byappitā sositā visositā byantikatā, tena vuccati avitakkaṁ avicāran’ti : Vibh. 258
말한 이 구절에 따라서도 그 의미가 성취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무슨 까닭에 다시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라고 말했는가? 대답하자면, 그렇다. 그 의미는 이미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뜻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이미 “‘각각의 거친 고리를 뛰어넘어 첫 번째 선정과 다른 두 번째 선정 등을 획득한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에’라고 한 것이다.”라고942) 말하지 않았는가?
147. 더욱이 사유와 숙고가 멈추기 때문에 이것이 평온이지, 오염의 더러움이 그치기 때문이 아니다. 사유와 숙고가 멈추기 때문에 이것이 통일이지, 근접삼매의 선정에서처럼 장애를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첫 번째 선정에서처럼 고리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다. 이와 같이 평온과 통일의 상태의 원인을 보여 주기 위한 구절이다. 마찬가지로 사유와 숙고가 멈춘 뒤에 이것은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은 것이다. 세 번째 선정과 네 번째 선정의 경우처럼 시각의식 등의 경우처럼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은 것은 아니다. 사유와 숙고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보여주기 위해서 [158]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라고 이러한 구절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했더라도 이와 같이 언급할 필요가 있다.
148. ‘삼매에서 생겨난’이란 첫 번째 선정의 삼매에서 또는 관련된 삼매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거기서 첫 번째 선정도 관련된 삼매에서 생겨났지만, 여기서 이 삼매야말로 사유와 숙고가 없기 때문에 ‘삼매’라고 불릴 가치가 있다. 지극히 동요하지 않고 지극히 평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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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 oḷārikassa pana oḷārikassa aṅgassa samatikkamā paṭhamajjhānato paresaṁ dutiyajjhānādīnaṁ samadhigamo hotī’ti dassanatthaṁ vitakkavicārānaṁ vūpasamāti evaṁ vu ttan’ti : Vism. 156/4 : 140
그러므로 이것을 찬탄하기 위하여 이것이야말로 ‘삼매에서 생겨난’이라고 한 것이다. 희열과 행복이라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방식과 같다. ‘두 번째’라는 것은 숫자의 차례로 두 번째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 성취된다고 해서 두 번째인 것이다.
149. ‘두 가지 고리를 버리고 세 가지 고리를 갖추고’라고 한 것은 여기서 사유와 숙고의 버림을 통해서 두 가지 고리가 버려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선전에 근접하는 찰나에 장애가 버려지듯, 그와 같이 이 사유와 숙고가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근본삼매의 찰나에 이것은 그것들이 없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것들을 이것의 ‘버림의 고리’라고 한다.
150. 희열과 행복과 마음의 통일이라는 이러한 세 가지 일어남을 통해서 세 가지 고리를 갖추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비방가』에 “선정이란 확신 희열 행복 마음의 통일이다.”라고943) 설한 것은 그 부수적인 것을 포함하는 선정을 보여주기 위해 경설로써944) 설한 것이다. 그러나 논설로써는945) 확신을 제외하고 정려의 특징946)에 도달한 고리로서, 이것은 세 가지 고리를 지닐 뿐이다. 이와 같이 “그때 어떠한 세 가지 고리의 선정이 있는가? 희열 행복 마음의 통일이다.”라고947) 설한 것과 같다. 나머지는 첫 번째 선정에서 설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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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3) jhānati sampasādo pīti sukhaṁ cittassa ekaggatā’ti : Vibh. 258 여기서 선정이란 두 번째 선정(二禪)을 뜻한다.
944) pariyāyena : 일반적 의미로서의 경설(經設)을 말한다. WRtil. 186에서는 ‘일반적 의미에서’라고 번역하고 있고 남청1권 314에서는 경설이라고 번역한다.
945) nippariyāyeṇa : 특수한 의미로서 논설(論說)을 말한다. 직접적인 부처님의 법문에서 설해진 것이 아닌 것으로 아비달마의 이론에 의한 것일나 의미를 지닌다. WRtil. 186에서는 ‘특수한 의미에서’라고 번역하고 있고, 남청1권314에서는 이 용어를 논설(論說)이라고 번역한다.
946) upanijjhānalakkhaṇa : 한역의 정려(靜慮) 또는 선사(禪思)를 의미한다.
947) katamaṁ tasmiṁ samaye tivaṅgikaṁ jhānaṁ hoti, pīti sukhaṁ cittassa ekaggatā’ti : Vibh. 263
[세 번째 선정(三禪)]
151. 9. [세 번째 선정] 그런데 이와 같이 그것을 획득했더라도, 이미 언급한 방식과 같이 다섯 가지 유형으로 자재를 행하고, 익숙한 두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여 “이 성취는 사유와 숙고의 적에 가깝고, 또한 ‘거기에 희열이 있고 마음의 환호가 있는 한, 그것은 거친 것이라 일컬어지는’ 희열은 거친 것이기 때문에 선정의 고리로서 허약한 것이다.”라고948) 알고, 거기에서 허물을 보고 세 번째 선정에 대하여 적정한 것으로 정신활동을 일으켜 두 번째 선정에 대한 애착을 종식시키고 세 번째 선정을 획득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152. 그래서 두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여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159] 선정의 고리들을 성찰하여 그에게 희열은 거친 것으로 나타나고, 행복과 마음의 통일만이 적정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때 거친 고리를 버리고 적정의 고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그 인상에 대하여 ‘땅, 땅’이라고 거듭해서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자에게 ‘이제 세 번째 선정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알려지면서 존재지속의 고리가 차단되고 그와 동시에 땅의 두루채움을 대상으로 의문전향이 일어난다. 그들 가운데 마지막 하나가 미세한 물질계의 통각이고, 나머지는 이미 그 종류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것이다.949)
153. 그렇게 해서 “희열이 또한 사라진 뒤,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세 번째 선정에 든다.”950) 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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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8) ayaṁ samāpatti āsannavitakkavicārapaccatthikā, ‘yadeva tattha pītigataṁ cetaso uppilāvitaṁ etenetaṁ oḷārikaṁ akkhāyatī’ti(DN. I. 37) vuttāya pītiyā oḷārikattā aṅgadubbalā’ti
949) sesāni vuttappakārāneva kāmāvacarānī’ti : Vism. 137/4 : 74
950)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ṁvedeti, yaṁ taṁ ariyā ācikkhanti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 Vibh, 245; SN.Ⅱ. 210; MN I. 21; AN. I. 38 등을 보라.
같이 하나의 고리를 버리고 두 개의 고리를 갖추고 세 종류의 훌륭함과 열 가지 특징을 갖춘, 땅의 두루채움과 관련된 세 번째 선정을 획득한다.
154. 그 가운데951) ‘희열이 사라진 뒤’에서 ‘사라진’이라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희열에 대하여 싫어하거나 뛰어넘는 것이다. 양자의 사이에 ‘또한’이라는 글자는 연결의 의미이다. 그것은 지멸과 연결되거나 사유나 숙고의 지멸과 연결된다. 그 가운데 지멸과 연결될 때는 ‘희열이 사라진 뒤에, 더욱이 지멸된 뒤에’라고 그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에서 보면, 사라짐은 혐오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희열을 싫어한 뒤에, 또는 지멸한 뒤에’라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유와 숙고의 지멸’과 연결할 때 ‘희열이 사라진 뒤에, 더욱이 사유와 숙고가 지멸한 뒤에.’라는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에서 사라짐은 뛰어넘음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희열을 뛰어넘고 사유와 숙고를 지멸한 뒤에’라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155. 실제로 이러한 사유와 숙고는 두 번째 선정에서 이미 지멸하였는데, 그런데 이 선정에서 길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서, 그리고 찬탄을 말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사유와 숙고가 지멸한 뒤에’라고 말할 때, ‘사유와 숙고의 지멸은 이 선정의 길이다.’라고 하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세 번째 고귀한 길에서 아직 버려지지 않았을 지라도, ‘개체가 있다는 견해952) 등의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이 버려진 까닭에’라고 이와 같이 찬탄의 말로서 버림에 관해 설하는 것ㅇ느 [160]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여기서 지멸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사유와 숙고의 지멸을 언급하면서 찬탄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희열을 뛰어넘은 뒤에 사유와 숙고가 지멸한 뒤에’라고 그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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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1) tattha : 이하 Vism. 164의 4행까지가 Ats. 171; Spk. 244와 병행한다.
952) sakkāyadiṭṭhi : 한역에서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하는데, 상세한 설명은 이 책의 해체에서 「번역술어에 대한 해명」을 보라.
156. ‘평정하고’라는 것은 이와 같다. 여기서 ‘일어나는 대로 본다.’는 까닭에 평정인 것이다.953) ‘평등하게 본다. 편견에 빠지지 않고 본다.’라는 뜻이다. 정결하고 광대하고 견고한 평정을 갖추었기 때문에 세 번째 선정을 갖춘 자는 평정한 자라고 불린다. 그런데 평정은 열 종류가 곧 ① 육지적 평정, ② 범주적 평정, ③ 각지적 평정, ④ 정진적 평정, ⑤ 형성적 평정, ⑥ 감수적 평정, ⑦ 통찰적 평정, ⑧ 유지중립적 평정, ⑨ 선정적 평정, ⑩ 청정적 평정이 있다.954)
157. 그 가운데 1)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기뻐하거나 우율해하지 않고 평정하게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린다.’라는955) 등으로 기술된, 여섯 가지 감관의 문에서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여섯 가지 대상이 나타날 때 청정한 본래의 상태를 버리지 않은 유형인, 번뇌를 부순 자의 평정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여섯 가지 고리에 의한 평정 곧, 육지적(六支的) 평정956)이다.
158. 2) 그런데 ‘평정의 마음으로 한쪽 방향을 가득 채운다.’957)라고 이와 같이 기술된, 일체 뭇삶에 대한 중립적 유형의 평정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삶에 의한 평정 곧, 범주적 평정95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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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3) ettha upapattoto ikkhatī’ti upekkhā : 유사언어학적인 설명이다.
954) upekkhā pana dasavidhā hoti chaḷaṅgupekkhā, brahmavihārupekkhā, bojjhaṅgupekkhā, vīriyupekkhā, saṅkhārupekkhā, vedanupekkhā, vipassanupekkhā, tatramajjhattupekkhā, jhānupekkhā, pārisuddhupekkhāti : 한역에서는 십종사(十種捨) : 육지사(六支捨), 범주사(梵住捨), 각지사(覺支捨), 정진사(精進捨), 행사(行捨), 수사(受捨), 관사(觀捨), 중사(中捨), 선사(禪捨), 편정사(遍淨捨) 라고 한다.
955) idha bhikkhave bhikkhu cakkhunā rūpaṁ disvā n’eva sumano hoti, na dummano, upekkhako ca viharati sato sampajāno’ti : AN. Ⅲ.279
956) chaḷaṅgupekkhā : 한역에서 육지사(六支捨)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육분사(六分捨)라고 번역하고 있다.
957) upekkhāsahagatena catasā disaṁ pharitvā viharatī‘ti : DN. Ⅰ. 251
958) brahmavihārupekkha : 한역에서는 범주사(梵住捨)인데, 『해탈도론』에서는 무량사(無量捨)라고 번역하고 있다.
159. 3) ‘멀리 여읨에 의존하여 평정의 깨달음 고리를 닦는다.’959)라고 기술된, 함께 생겨난 현상들의 중립적 평정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깨달음 고리에 의한 평정, 곧, 각지적(覺支的) 평정960)이다.
160. 4) ‘때때로 평정의 인상에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961)라고 기술된, 너무 급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는 정진이라고 불리는 평온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정진에 의한 평정 곧, 정진적 평정962)이다.
161. 5) ‘얼마나 많은 형성적 평정이 멈춤에 의해서 생겨난는가? 얼마나 많은 형성적 평정이 통찰을 통해서 생겨나는가? 여덟 가지 형성적 평정963)이 멈춤에 의해서 생겨난다. 열 가지 형성적 평정964)이 [161] 통찰을 통해서 생겨난다.’965)라고 기술된, 장애 등에 대한 성찰을 통해 확립된 까닭에 파악에 중립적인 평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형성에 의한 평정 곧, 형성적 평정이다.
162. 6) ‘평정을 수반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착하고 건전한 마음이 생겨날 때’966)라고 기술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으로 지각되는 평정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느낌에 의한 평정 곧, 감수적 평정96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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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9) upekkhāsambojjhaṅgaṁ bhāveti vivekanissitan’ti : MN. I. 11
960) bojjhaṅgupekkhā : 한역에서 각지사(覺支捨)인데, 『해탈도론』에서는 보리각사(菩提覺捨)라고 번역하고 있다.
961) kālenakālaṁ upekkhānimittaṁ manasikarotī’ti : AN. I, 257
962) vīriyupekkhā : 한역에서 정진사(精進捨)인데, 해탈도론에서도 정진사(精進捨)라고 번역하고 있다.
963) aṭṭha saṅkhārupekkhā : 한역의 팔행사(八行捨)로 여덟 가지 선정과 관계된 것을 말한다.
964) dasa sankhārupekkhā : 한역의 십행사(十行捨)로 네 가지 길(四向)과 네 가지 경지(四果)와 공해탈(空解脫)과 무상해탈(無相解脫)과 관계된 것이다.
965) kati sankhārupekkhā samathacasena uppajjantim kati saṅkhārupekkhā vipassanāvasena uppajjanti. aṭṭha saṅkhārupekkhā samathavasena uppajjanti. dasa saṅkhārupekkhā vipassanāvasena uppahhantī’ti : Paṭis. I. 64
966) yasmiṁ samaye kāmāvacaraṁ kusalaṁ cittaṁ uppannaṁ hoti upekkhāsahagatan’ti : Dhs. 29
163. 7) ‘있는 것과 있게 된 것을 버리고 평정을 얻는다.’968)라고 기술된, 식별에 대한 중립적인 평정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통찰에 의한 평정 곧, 통찰적 평정969)이다.
164. 8) 욕망 등의 마음의 작용 가운데970) 기술된, 함께 생겨난 것이 평등한 효율로 이루어진 평정이 있는데, 그것이 유지중립성에 의한 평정 곧, 유지중립적 평정971)이다.
165. 9) ‘평정하게 지낸다.’972)라고 기술된, 최상의 행복에도 불구하고 불편부당한 평정이 있는데, 그것이 선정에 의한 평정 곧, 선정적 평정973)이다.
166. 10)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974)이라고 기술된, 일체의 반대되는 것을 정화시키고 반대되는 것을 지멸하는 까닭에, 활동이 일지 않는 평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청정에 의한 평정 곧, 청정적 평정975)이다.
167. 그 가운데 육지적 평정, 범주적 평정, 각지적 평정, 유지중립적 평정, 선정적 평정, 청정적 평정은 의미상으로 동일한 것으로, 유지중립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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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7) vedanupekkhā : 한역에서 수사(受捨)인데, 『해탈도론』에서도 수사(受捨)라고 번역하고 있다.
968) yadatthi yaṁ bhūtaṁ, taṁ pajahati, upekkhaṁ paṭilabhatī’ti : MN. I. 264
969) vipassanupekkhā : 한역에서 관사(觀捨)인데, 『해탈도론』에서는 견사(見捨)라고 번역하고 있다.
670) yevāpanakesu : 원래 어원적으로 ‘또한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보(追補)라는 뜻인데, Dhs. 9에서는 마음의 작용들(諸心所法)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그것을 적용한다.
971) tatramajjhattupekkhā : 한역에서 중사(中捨)인데, 해탈도론에서는 평등사(平等捨)라고 한다. Vism. 148/4 : 114와 주석을 참조하라.
972) upekkhako ca viharatī’ti : Vibh. 245
973) jhānupekkhā : 한역에서 선사(禪捨)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선지사(禪支捨)로 번역하고 있다.
974) upekkhāsatiparisuddhiṁ catutthaṁ jhānan’ti : Vibh. 245
975) pārisuddhupekkhā : 한역에서 편정사(遍淨捨)인데, 『해탈도론』에서는 청정사(淸淨捨)로 번역하고 있다.
평정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각각의 위치에 따라서 그 구별이 있을 뿐이다. 동일한 뭇삶일지라도 소년, 청년, 장로, 장군, 왕 등의 구별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육지적 평정이 있는 곳에 각지적 평정은 없고, 각지적 평정이 있는 곳에 육지적 평정이 없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들이 의미상으로 동일한 것이듯, 형성적 평정과 통찰적 평정이라는 것도 의미상으로 동일한 것이다. 곧 그것들은 단지 지혜로 작용에 의해서 두 가지로 구분되지 때문이다.
168. 예를 들어 사람이 산양의 발모양을 한 지팡이를 가지고 저녁에 집에 들어간 뱀을 찾다가 그 뱀이 헛간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뱀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다가 세 가지 만자(卍字)976)를 보고 의혹이 없어져 ‘뱀인지 뱀이 아닌지’에 대한 식별에 대해 [162] 중립적이 되는 것처럼, 이와 같이 통찰을 시작한 자가 통찰로 이루어진 앎으로 세 가지 특징977)을 보면, 일체의 형성이 무상하다는 것 등의 고찰에 대하여 중립성이 생겨나면, 이것이 바로 통찰적 평정이다.
169.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산양의 발 모양의 지팡이로 단단히 뱀을 붙잡고 ‘어떻게 내가 이 뱀에 다치지 않고 물리지 않도록 놓아줄 수 있을까?’라고 놓아주는 방법을 찾을 때, 파악에 중립적이 되듯, 세 가지 특징을 보는 까닭에 불타는 삼계의 존재를 보는 자에게는 형성의 파악에 대한 중립성이 있는데, 이것을 형성적 평정이라고 한다.
170. 이와 같이 통찰적 평정이 성립할 때, 형성적 평정도 성취된다. 그래서 이와 같은 고찰과 파악에 대한 중립이라고 불리는 그 작용에 따라서 두 종류로 구별된다. 그런데 정진적 평정과 감수적 평정은 서로 다르고 나머지와도 의미상 구별된다.
171. 이러한 평정 가운데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선정적 평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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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6) sovattikattaya : 세 가지 만자(卍字)의 문양을 뜻한다.
977) lakkhaṇattaya : 한역의 삼법인(三法印)을 말한다.
그것은 중립을 특징으로 삼고,978) 불편부당을 기능으로 삼고, 불관여를 현상으로 삼고, 희열의 사라짐을 토대로 삼는다. 이것에 대해 “그것은 의미상으로 유지중립적 평정과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닌기? 또는 그것은 첫 번째 선정과 두 번째 선정에도 있는 것인가? 따라서 거기서도 평정하게 지낸다고 말해야 하는데, 왜 이와 같이 말했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답한다. “작용이 명료하게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다. 그곳에서는 실로 작용이 사유 등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으므로 명료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사유와 숙고와 희열에 사로잡히지 않으므로 노출된 정맥처럼 작용이 명료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렇게 언급한 것이다.” 이로써 ‘평정하게 지닌대.’라는 그 구절의 해석이 모든 면에서 끝났다.
172. 이제 ‘새김이 있고 올바로 알아차리고’라는979) 것은 이와 같다. 여기서 기억하기 때문에 새김이 있는 것이고, 올바로 알기 때문에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새김과 알아차림을 갖춘 것을 말한 것이다. 그 가운데 새김은 기억을 특징으로 삼고, 잊지 않음을 기능으로 삼고, 수호를 현상으로 삼는다. 알아차림은 혼미하지 않음을 특징으로 삼고, 판단을 기능으로 삼고, 조사를 현상으로 삼는다.
173. 비록 그 가운데 새김과 알아차림은 앞의 선정에도 있지만, 새김을 잃고 올바른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에게는 근접삼매도 성취되지 못하거늘 하물며 근본삼매가 성취될 수 있으랴! 그들 선정들도 거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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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 sā majjhattalakkhaṇā : 이하 Vism. 164의 4행까지는 Samanatapāsādikā. 151과 병행한다. 평정에 관한 『해탈도론』 419에서의 정의는 ‘捨者何相何味何起何處 平等爲相 無所著爲味 無經營爲起 無沈爲處’라고 되어 있다.
979) sato ca sampajāno’ti : 한역은 염(念)과 정지(正知)인데, 그것들에 대한 『해탈도론』 419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 云何爲念 念隨念彼念覺億持不忘 念者念根念力正念此謂念問念者何相何味何起何處 答隨念爲相 不忘爲味 守護爲起 四念爲處 云何爲智 知解爲慧 是正智此謂爲智 於是正智有四種 有義智 自相智 不愚癡智 行處智 於是有義智者有四爲威儀 自相智者 入於空處 不愚癡智者 知於世間八法 行處智者 謂於四處 於此經中行處智是可取問智者何相何味何起何處 答不愚癡爲相 緣著爲味 擇取諸法爲起 正作意爲處.
것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다니는 사람의 것처럼, 그들 선정들 속에서 마음의 행보는 쉽다. 그러나 그곳에서 새김과 알아차림의 작용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거친 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163] 그 선정이 미세해지는 까닭에, 사람이 면도칼날의 바다980)를 항해하듯, 그 선정 가운데 마음의 행보에는 새김과 알아차림의 작용이 수반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서도 언급된 것이다.
174. 더구나 예를 들어, 어미소를 따라가는 송아지를 어미소에서 떼어낸 뒤에 지켜보지 않으면 다시 어미소에 가까이 가는 것처럼, 이 세 번째 선정의 행복은 희열에서 떼어낸 뒤에 그것을 새김과 알아차림으로 지켜보지 않으면, 다시 희열에 가까이 가서 희열과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175. 이제 여기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라고 했는데, 물론 세 번째 선정을 갖춘 자에게 행복의 느낌에 대한 향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몸과 연관된 행복은 느낀다. 혹은 정신적인 몸과 연결된 행복과 더불어 일어난 지극히 수승한 물질로서 그의 신체적인 몸이 가득 차서 그 가득 찬 것 때문에 선정에서 출정하더라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해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라고 설한 것이다.
176. 이제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행복하다고 표현하는’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 선정을 원인으로 이 선정을 이유로 세 번째 선정을 갖춘 사람은 부처님 등의 고귀한 님들이 곧 ‘평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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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 khuradhāra : 한역의 검파해(劍波海)로 지옥의 일종이다. Jat. V. 269 참조.
새김이 있고 행복하다.’라고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히고, 찬탄하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여기서 ‘세번째 선정에 든다.’라는 문맥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7. 그런데 왜 그들은 이와 같이 찬탄하는가? 찬탄할 만하기 때문이다. 곧, 그는 행복의 최상에 도달한 지극히 미묘한 행복의 세 번째 선정에 있더라도 평정하고, 거기에 행복에 대한 애착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희열이 생겨나지 않도록, 새김을 확립하기 때문에 새김이 있고, 또한 고귀한 님들이 사랑하고 고귀한 님들이 익히는, 잡염(雜染)이 없는 행복을 정신적인 몸으로 경험한다. 그러므로 찬탄받을 만하다. 이와 같이 찬탄받을 만하기에 고귀한 님드링 이와 같이 [164] 찬탄의 이유가 되는 덕성을 드러내면서 ‘평정하고 새김 있고 행복하다’라고 이와 같이 찬탄한다고 알아야 한다. ‘세 번째’라는 것은 숫자의 차례에 따라서 세 번째인데, 이 세 번째가 성취되었기 때문에 세 번째 이다.
178. 그런데 ‘하나의 고리를 버리고 두 개의 고리를 갖추고’라고981)했는데, 여기서 희열의 버림을 통해서 하나의 고리가 버려진 것을 알수 있다. 두 번째 선정에서 사유와 숙고가 버려지듯, 그것은 근본삼매의 찰나에 버려진다. 그래서 그것은 세 번째 선정의 버림의 고리라고 불린다.
179. 그런데 행복과 마음의 통일이라는 것은 이들 양자가 일어남을 통해서 두 가지 고리가 갖추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방가』에서 “선정이라는 것은 평정·새김·알아차림·행복·마음의 통일이다.”라고982) 설한 것은 그 부수적인 것을 포함하는 선정을 보여 주기 위해 경설로써 설한 것이다. 그러나 논설로써는 평정과 새김과 알아차림을 제외하고 선정의 특징에 도달한 고리로서, 이것은 논설로써는 두 가지 고리를 지닐 뿐이다. 이와 같이 ‘그때 어떠한 것이 두 가지 고리를 지닌 선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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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 ekaṅgavippahīnaṃ duvaṅgasamannāgatan’ti : Vism. 159/4 : 153
982) jhānti upekkhā sati sampajaññaṁ sukhaṁ cittassekaggatā’ti : Vibh. 260
행복과 마음의 통일이다.’라고983) 설한 것과 같다. 나머지는 첫 번째 선정에서 설한 것과 같다.
[네 번째 선정(四禪)]
180. 10. [네 번째 선정] 이와 같이 그것을 획득했더라도, 이미 언급한 방식과 같이 다섯 가지 유형으로 자재를 행하고, 익숙한 세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여 “이 성취는 희열이라는 적에 가깝고, ‘행복이라는 것은 마음의 향수인데, 그런 까닭에 거친 것이다.”라고984) 알고, 거기에서 허물을 보고 네 번째 선정에 대하여 적정한 것으로 정신활동을 일으켜 세 번째 선정에 대한 애착을 종식시키고 네 번째 선정을 획득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181. 그래서 세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여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선정의 고리들을 성찰하는 그에게 정신적인 만족이라고 불리는 행복은 거친 것으로 나타나고, 평정과 마음의 통일만이 적정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때 거친 고리를 버리고 적정의 고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그 인상에 대하여 ‘땅, 땅’이라고 거듭해서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자에게 ‘이제 네 번째 선정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알려지면서 존재 지속의 고리가 차단되고 그와 동시에 땅의 두루채움을 대상으로 의문 전향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그 대상에 대하여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통각이 일어난다. [165] 그들 가운데 마지막의 하나가 미세한 물질계에 속하는 네 번째 선정의 통각이고, 나머지는 이미 그 종류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것이다.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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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 katamaṁ tasmiṁ samaye duvaṅgikaṁ jhānaṁ hoti, sukhaṁ cittassekaggatā’ti : Vibh. 264
984) ayaṁ samāpatti āsannapītipassatthikā, ‘yadeva tattha sukhamiti cetaso ābhogo, etenetaṁ oḷārikaṁ akkhāyatī’ti( DN. I. 37) evaṁ vuttassa sukhassa oḷārikattā aṅgadubbalā’ti
182. 그러나 이것이 차이이다. 행복의 느낌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수습조건으로서의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네 번째 선정에서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과 더불어 일어난다.986) 그러므로 그것들은 평정의 느낌과 관계된다. 또한 평정의 느낌과 관계되는 까닭에 거기서는 행복도 버려지는 것이다.
183. 그리하여 “행복과 고통이 버려지고 이전의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에 든다.”987) 이와 같이 그는 한 가지 고리를 버리고 두 가지 고리를 갖추고 세 종류의 훌륭함과 열 가지 특징을 갖춘, 땅의 두루채움과 관련된 네 번째 선정을 획득한다.
184. 그 가운데,988) ‘행복과 고통이 버려지고’라고 했는데, 신체적인 행복과 신체적인 고통을 버린 것을 말한다. ‘이전에’라는 것은 그 이전에 즉 네 번째 선정의 찰나에 들기 전을 말한다.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라는 것은 ‘정신적 행복과 정신적 고통의 이들 두 가지가 이전에 사라진 뒤에, 버려진 뒤에’를 말한 것이다.
185. 언제 그것들이 버려지는 것인가? 네 번째 선정의 근접삼매의 찰나에 버려진다. 만족은 네 번째 선정의 근접삼매의 찰나에 버려지기 때문이다. 고통과 불만과 행복은 가각 첫 번째 선정, 두 번째 선정, 세 번째 선정의 근접삼매의 찰나에 버려진다. 이와 같이 그것들을 버리는 차제에 따라 설하지 않았어도, 「능력의 분별」989)에서 능력들을 설한 차제에 따라 여기서도 설한 행복 고통 만족 불만이 버려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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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5) sesāni vuttappakārāneva kāmāvacarānī’ti : Vism. 137/4 : 74를 참조하라.
986) catutthajjhāne ca adukkhamasukhāya vedanāya uppajjitabbaṁ : PPmol. 156에 따르면, ‘네 번째 선정에서 그 준비단계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과 더불어 일어난다.’라는 뜻이다.
987)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ṁ atthangamā adukkhamasukhaṁ upekkhāsatipārisuddhiṁ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ī’ti : Vibh 245
988) tattha : 여기서부터 Vism. 168의 아래에서 11행까지는 Aṭs. 175; Smp. 153; Spk. 230과 일치한다.
186. 그러나 만약에 그것들이 각각의 선정의 근접삼매의 찰나에 버려진다면, 그렇다면 왜 “어디서 이미 생겨난 고통의 능력이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 여기서 이미 생겨난 고통의 능력이 남김없이 소멸한다.990) 어디서 이미 생겨난 불만의 능력이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을 이루고, 사유와 숙고를 여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에 든다. 여기서 이미 생겨난 불만의 능력이 남김없이 소멸한다.991) 어디서 이미 생겨난 안락의 능력이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희열이 또한 사라진 뒤,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세 번째 선정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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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9) Indriyabhaṅga : Vibh. 122
990) dukkhindriyaṁ aparisesaṁ nirujjhati : Srp. Ⅲ. 242에 따르면, ‘고통의 능력은 첫 번째의 선정에 근접할 때, 불만의 능력 등은 두 번째의 선정 등에서 소멸되고 끊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승한 소멸이 있으므로 선정에서의 소멸이 있다. 수승한 소멸은 첫 번째 선정 등의 근본삼매에서의 소멸이다. 근접삼매의 찰나에 소멸되는 것은 수승한 소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선정으로 근접할 때 고통의 능력이 사라질지라도 근본삼매가 아니라면 그 고통은 등에나 모기등과의 접촉이나 불편한 자리 때문에 다시 생겨날 수 있다. 고통의 능력이 근접삼매에서 소멸된 것이면 훌륭하게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근본삼매에서 희열이 넘쳐 온 몸이 안락에 휩싸이고 몸이 안락에 휩싸이면, 고통의 능력은 완전히 소멸된다.’
991) domanassindriyaṁ aparisesaṁ nirujjhati : 불만을 포함하여 모든 불건전한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 첫 번째 선정의 일반적인 정의인데, 이 정의는 일반적인 선정의 정의와 일치시키기 어렵다. Srp. Ⅲ. 243에 따르면, 불만의 능력은 두 번째 선정에 근접하면서 없어지지만 ‘사유와 숙고를 조건으로 신체적으로 피곤하고 정신적으로 긴장하면(vitakka vicārapaccaye pi kāyakilamathe citt’upaghāte ca sati)’ 다시 생겨난다. 그러나 사유와 숙고가 없는 두 번째의 선정에서 그것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이미 생겨난 안락의 능력이 남김없이 소멸한다.992) 어디서 이미 생겨난 만족의 능력이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행복과 고통이 버려지고 이전의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에 든다. 여기서 이미 생겨난 만족의 능력이 [166] 남김없이 소멸한다.”993) 라고 994) 이와 같이 선정들에서만995) 소멸을 설한 것인가? 완전히 소멸한 까닭이다. 곧, 그것들의 완전한 소멸은 첫 번째 선정 등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근접삼매의 찰나에는 소멸이 없고, 소멸되더라도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다.
187. 여러 가지 전향을 지닌996) 첫 번째 선정의 근접삼매에서는 고통의 능력이 소멸했더라도 등에나 모기 등에 물리거나 평탄하지 않은 자리로 인한 피곤으로 다시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삼매 가운데서는 그렇지 않다. 혹은 근접삼매 가운데서는 소멸되더라도 잘 소멸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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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 sukhindriyaṁ aparisesaṁ nirujjhari : 여기서 안락(sukha)의 능력은 육체적인 느낌을 의미하지 정신적인 행복(sukha, somanassa)을 뜻하지는 않는다. Srp. Ⅲ. 243에 따르면, 안락의 능력은 세 번째 선정에 근접하면서 없어지지만 ‘희열에서 오는 승묘한 신체적인 현상에 접촉될 때(pītisamuṭṭhāna paṇītarūpapuṭṭha- kāyassa)’ 다시 생겨난다. 그러나 세 번째의 선정에서는 신체적인 안락의 조건인 희열이 완전히 소멸되기 때문에 그것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993) somanassaindriṁ aparisesaṁ nirujjhati : 여기서는 일반적인 네 번째의 선정에 대한 정의와 일치한다. Srp. Ⅲ. 243에 따르면, 만족의 능력은 네 번째 선정에 근접하면서 없어지지만 ‘가깝더라도 집중에 도달하는 평정의 결여로 올바로 뛰어넘지 못하여(āsannattā appaṇāpattāya upekkhāya abhāvena)’ 다시 생겨난다. 그러나 네 번째의 선정에서는 그것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994) kattha cuppannaṁ dukkhindriyaṁ aparisesaṁ nirujjhati, idha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pi – pa – paṭhamaṁ jhanaṁ upasampajja viharati, etthacuppannaṁ dukkhindriyaṁ aparisesaṁ nirujjhati, kattha cuppannaṁ domanassindriyaṁ sukhindriyaṁ somanassindriyaṁ aparisesaṁ nirujjhari, idha bhikkhave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 pa –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etthacullannaṁ somanassindriyaṁ aparisesaṁ nirujjhatī’ti : SN. V. 213
995) jhānesveva : 근본삼매의 선정들을 의미한다.
996) nānāvajjane : 여러 가지 전향(多轉向)이란 근본삼매를 지향하는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다른 전향을 말한다. 즉, 근본삼매를 지향하는 작용이 있는 근접삼매는 하나의 전향을 갖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양한 전향을 갖는다.
대치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삼매 가운데서는 희열로 가득 차서 온 몸이 행복으로 충만하다. 행복으로 충만한 몸은 고통의 능력이 잘 소멸된다. 대치에 의해서 부수어지는 까닭이다.
188. 여러 가지 전향을 지닌 두 번째 선정의 근접삼매에서 불만의 능력이 버려졌더라도, 사유와 숙고를 조건으로 하는 신체적 피로나 정신적 고통이 있을 때 생겨난다. 사유와 숙고가 없을 때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고 생겨날 때는 사유와 숙고가 있을 때이다. 그리고 두 번째 선정의 근접삼매에서는 사유와 숙고가 버려지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생겨날 수 있다. 두 번째 선정에서는 조건이 버려지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189. 또한 세 번째 선정의 근접삼매에서 행복의 능력이 버려지더라도, 희열과 더불어 일어난 수승한 물질로 가득 찬 몸에 생겨날 수 있지만, 세 번째 선정에서는 그렇지 않다. 세 번째 선전에서는 행복의 조건이 되는 희열이 완전히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네 번째 선정의 근접삼매에서 만족이 버려지더라도, 가까이에 있는 까닭에, 또한 근본삼매에서 얻는 평정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올바로 초월하지 못하므로,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네 번째 선정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 생겨난 고통의 능력은 남김없이 소멸한다고 각각에 ‘남김없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190. 여기서 ‘그런데 각각이 선정의 근접삼매에서 그 느낌들이 버려진다면, 왜 여기에 그것들을 모아놓았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쉽게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이라는 것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 것인데, 그것은 미세하여 인식하기 어렵고 쉽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흉포하여 이렇게 저렇게 접근하여도 포획할 수 없는 황소를 쉽게 포획하기 위해서 목우자는 한 우리에 모든 소들을 몰아넣고, [167] 나중에 한 마리씩
꺼내면서 그 차례가 오면, ‘바로 이 놈이니 붙잡아라.’라고 그 황소를 붙잡듯,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파악하기 쉽게 이 모든 것을 모아 놓았다. 이와 같이 모아진 것들을 보여 주고, ‘행복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고, 만족도 아니고, 불만도 아닌 것으로, 이것은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느낌이다.’라고 파악될 수 있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191. 그리고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마음의 해탈의 조건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것들을 설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괴로움의 버림 등이 그것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벗이여,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있다. 벗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즐거움을 뛰어넘고 괴로움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와 같이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있다.”라고997) 설한 것이다.
192. 또한 개체가 있다는 견해 등은 다른 곳에서 버렸더라도, 세 번째 길에 대한 찬탄의 말을 위해 그곳에 버려진 것으로 말해진 것처럼,998) 이와 같이 찬탄의 말을 위해서 이 선정에서 그것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는 조건의 제거로 인해서 여기서 탐욕과 성냄을 지극히 멀리 여읜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이것들을 설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서 행복은 만족의 조건이고, 만족은 탐욕의 조건이다. 고통은 불만의 조건이고, 불만은 성냄의 조건이다. 행복 등의 제거를 통해서 그것을 조건으로 탐욕과 성냄도 제거되는 까닭에 지극히 멀리 여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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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 cattāro kho āvuso paccayā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 idhāvuso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 pa –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imekhvāvuso cattāro paccayā adukkhamasukhāya cetovimuttiyā samāpattiyā’ti : MN. I. 296
998) yathā vā aññattha pahīnāpi sakkāyadiṭṭhi–ādayo tatiyamaggassa vaṇṇabhaṇanatthaṁ tattha pahīnāti vittā : Vism. 159/4 : 155를 참조하라.
193. ‘괴로움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라는999) 것은 이와 같다. 괴로움이 없으므로 괴로움을 뛰어넘은 것이고, 즐거움이 없으므로 즐거움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것으로 여기서 괴로움과 즐거움의 대치가 되는 세 번째 느낌을 밝힌 것으로 단지 괴로움과 즐거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느낌이라는 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으로 평정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중립적인 것을 기능으로 삼고, 분명하지 않음을 현상으로 삼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토대로 삼는다고 알아야 한다.
194.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것’이란 이와 같다. 평정에서 생겨난 생김은 지극히 청정한 것이다. 곧, 이 선정에서 새김은 지극히 청정하다. 그 새김의 청정함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다른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비방가』에서도 “이 새김은 이 평정으로 인해서 맑고 깨끗하고 청정해졌다. 그 때문에 ‘평정하고 새김 있고 청정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1000) 설하고 있다. 여기서 [168] 평정으로 인해서 새김이 지극히 청정해졌는데, 그 평정은 의미상으로 유지중립적 평정인 것을 알아야 한다. 단지 여기서 그것은 새김만 지극히 청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일체의 관련된 사실들도 청정하게 하지만, 그러나 새김을 대표로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195. 그 가운데 이 평정은 물론 아랫 단계 세 선정 가운데도 있다. 그러나 마치 대낮에도 초승달은 있지만 대낮에도 태양의 빛에 정복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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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 adukkhamasukhaan’ti : 한역의 불고불락(不苦不樂)인데, 이것에 대한 『해탈도론』 420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 不苦不樂受者 意不攝受心不棄捨 此謂不苦不樂受 不苦不樂受者 何相何味何起何處 中問爲相 住中爲味 除是起喜滅是處
1000) ayaṁ sati imāya upekkhāya visadā hoti parisuddhā pariyodātā. tena vuccati upekkhāsatipārisuddhī’ti : Vibh. 261
또한 부드러운 측면이나 도와주는 측면에서 자신과 동류인 밤을 얻지 못한 까닭에 깨끗하고 청정하지 못한 것처럼, 이와 같이 유지중립적 평등의 초승달도 사유 등의 적대적인 현상의 빛에 정복되고, 동류1001)의 평정의 느낌의 밤을 얻지 못한 까닭에, 첫 번째 선정 등에서 존재하더라도 첫 번째 선정에서는 청정하지 못하다. 그것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에 청정한 초승달의 빛처럼 함께 생겨난 새김 등도 청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평정하고 새김있고 청정한 것’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유 등의 적대적 현상들의 빛에 정복되지 않고, 자신과 동류인 평정에 의한 느낌이라는 밤을 얻은 까닭에, 그 유지중립적 평정이라는 초승달은 지극히 청정하다. 그것이 청정한 까닭에 청정한 초승달의 빛처럼 함께 생겨난 새김 등도 깨끗하고 청정하다. 그러므로 오직 이것을 ‘평정하고 새김있고 청정한 것’이라고 한 것을 알아야 한다.
196. ‘네 번째’라는 것은 숫자의 차례에 따라서 네 번째인데, 이 네 번째가 성취되었기 때문에 네 번째이다.
197. 그런데 ‘하나의 고리를 버리고 두 개의 고리를 갖추고’라고1002) 했는데, 여기서 만족의 버림을 통해서 하나의 고리가 버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만족은 동일인식과정중의 앞선 통각들에서 버려진다.1003) 그래서 그것을 버림의 고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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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sabhāga : 유지중립성과 평정의 느낌은 동류로써 유사한 것이지만, 유지중립성은 형성의 다발에 속하고, 평정의 느낌은 느낌의 다발에 소속되는 마음의 작용이다. 양장의 차이에 대해서는 Vism. 162, 461, 466을 참조하라.
1002) ekaṅgavippahīnaṁ duvaṅgasamannāgatan’ti : Vism. 165/4 : 183을 참조하라.
1003) tañce pana somanassaṁ ekavīthiyaṁ purimajavanesuyeva pahīyati : ‘그런데 이 만족은 네 번째 선정의 근본삼매를 일으키는 동일인식과정중에 앞선 통각들에 해당하는 네 번째 선정의 근접삼매에서 버려진다.’라는 뜻이다. Vism. 165/4 : 185를 참조하라. 여기서 동일인식과정(一路 : ekavīthi)이란 네 번째 선정이 일어날 때는 먼저 존재지속의 고리(有分 : bhavaṅga)를 끊고, 의문전향의 마음을 일으켜 거기서 다음의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통각이 일어난 후에 최후의 한 통각이 네 번째 선정이 되고, 그것에서 존재지속의 고리로 떨어진다. 이상의 ‘존재지속의 고리에서 존재지속의 고리에 이르기까지의 작용경
그리고 평정의 느낌과 마음의 통일이라는 이러한 두 가지가 일어남을 통해서 두 가지 고리를 갖추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는 첫 번째 선정에서 설한 방식과 같다. 이러한 것이 네 가지 선정1004)의 방식이다.
[다섯 가지 선정(五種禪)]
198. 11. [다섯 가지 선정] 그리고 다섯 가지 선정1005)을 일으키고자 하는 자는 숙달된 첫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여 ‘이 성취는 장애라는 적에 가깝고, 사유는 거칠기 때문에 선정의 고리로서 허약한 것이다.’라고1006) 알고, 거기에서 허물을 보고 [169] 두 번째 선정에 대하여 적정하다고 정신활동을 일으키면서 첫 번째 선정에 대한 애착을 종식시키고 두 번째 선정을 획득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199. 그래서 첫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여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선정의 고리들을 성찰하는 자에게 사유만이 거칠게 현현하고, 숙고 등은 적정한 것으로 현현하다. 그때 거친 고리를 버리고 적정의 고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그 인상에 대하여 ‘땅, 땅’이라고 거듭해서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자에게 앞서 말한 방식대로 두 번째 선정이 일어난다. 이것에서는 오직 사유만이 버림의 고리이고 숙고 등의 네 가지는 갖춤의 고리이다. 나머지는 이미 그 종류를 설했다.
200. 그러나 이와 같이 그것을 획득했을 때도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은 다섯 종류 유형의 자재를 통해서 숙달된 두 번째 선정으로부터 출정하여 ‘이 성취는 사유라는 적에 가깝고 숙고는 거칠기 때문에 선정의 고리로서 허약한 것이다.’라고1007)알고, 거기에서 허물을 보고 세 번째 선정에 대하여 적정하다고 정신활동을 일으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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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를 동일인식과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1004) catukkajjhāna : 한역의 네 가지 선정(四種禪)으로 경전상의 일반적 분류방식에 해당하며, 여기서 정확히 언급하자면, 네 가지 미세한 물질계의 선정(色界四禪)을 말한다.
1005) pañcakajjhāna : 한역의 오종선(五種禪)으로 네 가지 선정에서 두 번째 선정을 두 가지로 나누면, 전부 오종선이 되는데, 여기서 그 두가지를 논한다.
1006) ayaṁ samāpatti āsannanīvaraṇapaccatthikā, vikakkassa oḷārikattā aṅgadubbalā’ti
1007) ayaṁ samāpatti āsannavitakkapaccatthikā, vicārassa oḷārikattā aṅgadubbalā’ti
두 번째 선정에 대한 애착을 종식시키고 세 번째 선정을 획득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
201. 그래서 두 번째 선정에서 출정하여 새김이 있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선정의 고리를 성찰하는 자에게 숙고가 거칠게 현현하고, 희열등이 적정하게 현현하다. 그때 거친 고리를 버리고 적정의 고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그 인상에 대하여 ‘땅, 땅’이라고 거듭해서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자에게 앞서 말한 방식대로 세 번째 선정이 일어난다. 이것에서는 오직 숙고만이 버림의 고리이고 네 종류로 분류한 것 가운데 두 번째 선정에서처럼 희열 등의 세 가지는 갖춤의 고리이다. 나머지는 이미 그 종류를 설했다.
202. 이와 같이 네 가지 선정에서 두 번째를 두 종류로 나무면, 다섯 가지 선정의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된다. 거기서 네 가지 선정의 세 번째와 네 번째인 것들은 다섯 가지 선정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된다. 첫 번째는 첫 번째로 동일한 것이다.
이로써
선량한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청정도론』에서
「삼매수행론」 가운데
「땅의 두루채움」이라고 불리는
제4장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