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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중앙에 있는 의령군은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불렸다. 또한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과 남강을 끼고 있는 비옥한 평야 지대면서 지리산 줄기인 자굴산이 있는 산간분지 지역이다. 역사적으로는 1592년 임진왜란 시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수천의 민중이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파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때는 의병의 후손답게 의령 곳곳에서 수많은 주민이 시위에 참가했다. 또한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과 유엔군의 격전 속에서 많은 지역민이 전쟁 참화를 당하기도 했다. 더구나 1953년 7월 휴전 이후에도 빨치산 준동으로 전쟁 후유증을 오랫동안 앓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충익사, 의병박물관을 비롯해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춘 벽계관광지, 자굴산 산악휴양지 등 다양한 관광시설을 가진 아름답고 풍요로운 고장으로 발전하고 있다.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훌륭한 인물 다수 탄생 충혼탑 등 유적 바라보며 선조들의 호국정신 기려
봉무산 공원의 전몰용사충혼탑. |
임진왜란 유물이 전시된 의병박물관. |
의령 명승지 지도. |
▶의병광장·의병박물관·전몰용사충혼탑
시원하게 뻗은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군북·의령 IC를 빠져나오면 곧바로 남강에 걸쳐진 정암 철교를 만난다. 이곳이 바로 의병의 고장 의령읍 관문이다. 매년 6월 1일이 국가기념일인 ‘의병의 날’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날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전국의 수많은 의병을 추모하고, 의병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자 정부에서 2010년 제정했다. 의병광장, 의병박물관, 곽재우 장군 생가 등 전국 최초의 의병 발상지답게 의령은 의병과 관련되는 유적지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또한 의령읍을 잘 조망할 수 있는 봉무산 공원에는 전몰용사충혼탑이 우뚝 서 있다.
6·25전쟁 중 이 지역의 젊은 청년 722명이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다. 특히 이 충혼탑은 멀리 의령천 건너편의 의병탑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공원 옆에는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의령초등학교(1910년 개교)가 있다. 이곳에서 오늘날의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는 신세대들이 충혼탑과 의병탑을 바라보며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설계한 듯했다.
▶의령 민초들의 수난
의령군 역시 6·25전쟁의 처참한 참화를 많이 겪은 지역이다. 이곳은 북한군의 일방적인 점령으로 지역 내 큰 전투기록은 없다. 따라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전까지 대부분의 주민이 북한군 치하에서 지냈다. 40여 년 교직에 몸담았다 현재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박희구(83·의령군 의령읍 서동) 씨는 전쟁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남강과 낙동강 건너편에는 유엔군이, 의령은 북한군이 주둔했다. 남강 정암 철교는 폭격으로 끊겼다. 강을 건너 함안으로 진격하려는 북한군은 야간에 수중교 건설을 위해 많은 주민을 동원했다. 당시 열여덟 학생이었던 나도 강제로 끌려갔다. 유엔군의 조명탄이 터지면 모든 사람이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가끔씩 비행기 소리라도 들리면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결국 그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가는 북한군 릴레이식 보급수송에 동원됐다가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시골 친척집에서 은거하다가 마침내 감격적인 유엔군의 북진대열을 맞이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이 같은 북한군 강제노역 중 미군 폭격이나 피아 전투 간 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빨치산의 의령경찰서 습격 사건
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동안의 처절했던 동족상잔은 끝났다. 그러나 의령은 지리산의 험준한 산악과 연결돼 있어 정전 후에도 북한군 패잔병과 빨치산의 준동으로 또다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같은 해 11월 23일, 이날은 의령 장날이었다. 당시 시골주민들은 5일장을 통해 집에서 키우던 정든 강아지까지 팔아 생필품을 구입하곤 했다. 오래간만에 이웃 마을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소식을 나누는 등 장터는 항상 작은 시골잔치의 무대가 된다. 그때 느닷없이 두 대의 트럭에 분승한 무장군인들이 나타났다. 거칠게 트럭을 몰고 경찰서로 달려가는 그들을 주민들은 불안한 눈길로 쳐다봤다. 이들은 바로 국군 복장으로 위장한 이영회 빨치산 부대였다. 경찰서에 들이닥친 무장대는 곧바로 박영동 경찰서장 등 많은 경찰관을 살상하고 일부를 납치했다. 이어서 읍내를 누비며 우체국·금융조합·군청을 방화했다.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의 의령장터는 아비규환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적 무대로 변하고 말았다. 수 시간의 약탈이 끝난 후 그들은 인근 용덕과 정곡지서를 습격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당시의 순직 경찰관들을 위한 추모비가 의령경찰서 정문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제단 앞에 누군가 갖다 둔 국화 한 송이와 함께 그날의 참상을 비문은 생생히 전해 주고 있었다.
▶의령이 낳은 훌륭한 인물·지역명승지
외적의 침공과 불의를 방관하지 않는 충절의 고장 의령이지만 이러한 터전 위에 우리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훌륭한 인물도 이곳에서 많이 탄생했다. 삼성그룹 창시자 호암 이병철 선생의 생가도 여기에 있다. 그는 1936년 마산에서 조그마한 정미소사업으로 출발해 현재의 삼성전자 등을 포함한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었다. 한국 최대의 장학재단을 설립해 매년 1000여 명의 국내외 학생들을 지원하는 관정 이종환 선생도 의령 출신이다. 그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출연한 재산은 8000억 원이나 되며 곧 1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의령은 훌륭한 인물 배출뿐만 아니라 빼어난 자연경관으로도 유명하다. 읍내를 관통해 흐르는 의령천은 손으로 떠서 마셔도 좋을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읍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자굴산 휴양지, 벽계관광지, 정암루(솥바위), 수도사 등은 전국적으로 이름나 있는 가볼 만한 명승지다.
<신종태 전쟁과평화연구소 연구위원>
첫댓글 충절의 고장 의령에 대해서 알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