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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선조의 아들은 14명이나되었지만 정비의인황후 박씨는 줄곳 병석에 누워 있어 선조의 나이 40세를 넘기자 별수없이 광해군을 선택 하니 이는 정비 소생이 아니라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광해군으로 등극하여 1608년 2월 ㅡ1623년 3월 까지 15년 1개월을 비교적 오랜 왕위를 유지 하였으며 개혁정치를 꿈꾸었으나 고질적인 사색당파의 심화로 불행한 왕위 생할인 유배생활 18년 끝에 결국 풀려 나지도 못하고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폐위 되고 유배생할중 죽고 인조가 등극하게 된다
2. 임징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북쪽으로 쫒겨 가는 몸으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세자책봉 문제는 당시 상국인 명의 인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1594년 윤근수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주청했지만 명에서 당시 장자격인 임해군이 포악 하여 연산군을 왕으로 책정하여 인준을 청하엿으나 명에서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인준을 거절 하였다 명의 인준을 받지 못하엿지만 전시체제라 모든 대신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받들었다
하지만 전란이 끝나고 1602년 인목황후가 계비가 되고 영창대군을 낳고 조정은 다시 당파들의 갑론 을박속에 영창대군을 거론하지만 선조는 현실성이 없다고 광해군에 선위 교서를 내리고 죽는다
왕위계승권이 인목대비에 넘어가자 당시 영의 정이었던 유영경이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 할것을 주청 하였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우여곡절끝에 즉위 시키니 15대 광해군 으로 나이는 34세 였다
3,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임진왜란로 파탄에 이른 국가재정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남인의 이원익을 등용시키고 전란중에 타버린 궁궐을 개수하여 왕권의 위엄을 살리리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 했다
1608년 명나라에서 조선에서 세자 책봉과정에 대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자 광해군은 서둘러 대북파의 건의을 받아들여 임해군을 유배 시켰다
이는 광해군이 왕위 계승권을 반대하던 소북파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현장실사을 요청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에 대북파 정치인들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하여 정적을 제거 해야 한다고 선조에 종용하자 선조는 광해군은 왕권 안정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를 들어주었어 정적을 소탕했으나 이로 인해 더 많은 정적들이 생겨 나게 되었다
1611년 정인홍 이언적. 이황의 문묘를반대하는 사겅이 발생하엿는데 이과정에서 성균관유생이들이 유생의 이름이 올려져 잇는 청금록에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 하였는데 광해군은 이사태에 직면하자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 쫒아 내는 조치를 치루었으나 이때문에 유생과 등을 지고 마는 대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612년 소북파 100여명이 숙청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하여 어보 고난이를 위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 고문과정속에서 사건이 겉잡을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나고 말았다
1613년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복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안리치( 집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박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 했다가 증살((방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폐 그열기로 죽게 하는것)한편 한편 선조의 유명을 받던 7신하를 파직시키는 사건이다
1616년 능창군 추대 사건이 발생 하자 광해군은 능창군을 추대 하려는 신경희 등 일파을 제거한다
1617년 폐모론자가 대두하자 이를 반대하던 이항복.기자헌. 정홍익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인목대비 존칭을 폐하고 서궁으로 유배시키어 왕원을 이협하던 모든 세력을 성공하지만 오히려 폐룬행위를 일삼으면서 오히여 반전의 명분을 제거하고 결국 인조반정으로 좇게 나는 결과을 얻고 말았다 ...
4, 광해군은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간세금구조를 일원화 시키고 세무부담을 줄였다, 1611 농지를 조사측량하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양전제도를 도입하여 국가 재원을 확보했다
3>>. 1608년 창덕궁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1621년에 인경궁을 중건하는등 왕실의 권위 회복하기도 했다
이무렵 여진족 세력이 커져 후금을 건국하자 광해군은대포를 주주하고 평양감사에 박엽.만포천사에 정충신등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명나라 원병 요청에 강홍립 1만명의 기병을 주어 응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차싸움에서 명나라가 패하자 적당히 싸우는 체 하다가 후금에 투항해 누르하치와 화의을 맺도록 하는 2중외교를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 하기도 하였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후금에 대한 정보를 광해군에 밀서를 보냄으로서 후금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여 후금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예방하기도 했다
1609년 송사약조를 체결하고 대일외교를 재개 하였으며 1617년 회답사를 파견함으로서 일본과 관계를 회복하고 전쟁위기에서 벗어날수 있게 되었다
광해군은 새로운 도읍지로 파주의 교하로 옮겨 경제와 무역 부국 안정정책을 기도하는 실리정책을 기도햇으나 원군파병문제등 현안문제에 부딛쳐 실현 하지 못햇으나 여러가지문제를 동시에 해결할수 있는 기발한 착상이었다 .파주의 교하는 당시 농업사회에 의존하던 조선시대에 철저한실리주의 획기적인 발상으로 파주는
교하는 위치적으로 임진강을 끼고있는 곡창지대로 식량및 세수증대을 깨할수 있었고 . 중국과 해상교통이 가능한 곳으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 적당했다.군사적으로 보아 한성보다 북쪽에있어 일본의 위험에 조금이라도 벗어날수 있었고 또한 주위에 산이낮아 산성을 쌓아 방어하기 적당한 곳이었다.중국과 해상로가 가까워 수군에 의한 위험이 있는 곳이나 근본적으로 중국은 해상전에 약한국가이기에 그다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천도계획은 명의 원군파병하는 문제등 여러 현안문제에 부딪혀 실현하지 못하고 축성작업에 동원된 백성의 원성만 높히는 결과를 초려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기발한 천도계획은 당시상황으로서 매우 기발한 착상이었다 요컨데 광해군은 밖으로 철저한 실리노선을 걸었고 안으로 강력한 왕권체제하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 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병화로 소실되었던 서적간행에 박차를 가하여 신증 둥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도등을 재편찬하고 임란에 소실된 사고을 복원하여 임진왜란때 소실된 네곳의 사고를 대신했다
이시대의 문학으로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 보감이 편찬 되었는데 동의 보감은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 된바 있다
공해군 15년 기간동안 정권을 장악한 대북파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데 정적들은 서북파들이었다 이들은 기회를 다 1623년 김류.이귀.김자점등 사대주의자들이 능창군의 형 능창군을 수장으로 모시고 창덕군의 이르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에 성공 능창군이 인조가 등극하니 이른바 이사건이 인조 반정이라 칭하고 있다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4대를 거부하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 했다는 이유에서 였다
고아해군은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이배되어 무려 18년간 생을아주 초연한 자세로 연명했다가 1641년 67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 재위 15년동안 2명의 부인에게 자녀도 세자질과 웅주 2명을 얻었을뿐이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 적성동에 있는 공빈 김씨의 묘 아래 쪽에 있다
조선사에서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 명분론자들이 자신의 반란을 합리한 측면이 강하다. 외히려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인 외교론 현실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을 완전히 꽃피우지 못하고 자신이 왕의 재위기간보자 유배생할을 많이 하다 죽은 가장 비극적인 임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할것이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나라 국정은 극도한 피폐해 져 있었다 .전란의 와중으로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광해군은
지난 임진왜란을 거울삼아 나라을 부강케 하고 아울러 왕권 강화책으로 실리외교를 펼치면 기울어가는 명을 버리고 명을 대신하고자 하는 청과 양면외교를 펼쳐서 중국과 군신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수 있는 유일한 기회을 맞고 있었다. 광해군은이점을 읽어내고 중립노선을 걸었지만 대명사대주의에뿌리깊은 이들이 계속해서 대명사대주의를 걸어 결국 둿날 청에게 굴복하여 무뤂을 끓고 군신관계를 맺는 대치욕을 당하게 된다
광해군은 비록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등 일부 반대파 정적을 제거하기는 하였으나 조선시대 성군이라 일컫는 태종이나 세조처럼 철저한 보복정치는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을 죽여야 한다는 대북세력을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인목대비를 강등 시키는데 국한해서면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다
조선에 반정이 두번 일어났는데 연산군의 폭정으로 일어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두사건을 말한다
연산군은 철저한 폭군이요 패륜아 였다면 공해군은 일부 사대주의자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었다 .게다가 중종은 반전으로 추대 받은 경우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혁명을 이르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등극하는 반정이다 대역 사건이다 물론 실패하면 9족을 멸하게 되는 참형이다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조세력 정치적 오과 인 목적과 인복대비의 철저한 복수심에 의하여 광해군 .패비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강화도에 위리안치 시켰다 .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도의 동문쪽에 폐세자와세자빈은 서문쪽에 각각 안치 시켰다
당시 20대중반이었던 세자빈은 담밑에 구멍을 뚷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 이내용의 편지가 무엇인지 알수 없엇지만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감사와 모의하여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 였을 것이다 이때문에 반정세력과 인목대비는 그들을 죽이려 했고 이소식을 들은 세자질과 세자빈 박씨는 스스로 목숨을끊고 자결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이 조금 지난후 아내 유씨도 사별하게된다
광해군의 중립정책을 이해할수 없는 처사라하면서 대명 사대주의를 주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이 폐위 되자 궁궐후원에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 했다 .그러나 유배생할이 시작되면서 홧병으로 유배생할1년 7개월 만에 1624년 10월에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인조는 광해군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태안으로 이배 시켰다가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이배 시켰다 1636년 청나라가 처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겟다고 공언하자 다시 그를 교동으로 안치 시켰으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고 암시를 내리지면 경기수사는 오히려 그를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듬해 완전히 조선이 청에 굴복한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귀향 보냈다
제주도에서 초연한 자세로 기나긴 세월을 이어가다 그는 1641년 귀향생할 18년 수개월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때 광해군의 나이 67세였다
그리하여 인조가 등장하자 철처한 보복을 가하여 18년간 유배시키어 죽게 하는 조선왕조 일대 사건이라 말할수 있을 것이다
.인조또한 사대명분론에 열연하여 국방을 게을리 하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명을 뒤엎고 등장한 여진족인 청에남한산성에 굴복하여 군신관계를 굴욕을 당하다고 마는 비운을 당하게 된다
광해군
1575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혼이고 어머니는 후궁이던 공빈 김씨 였다. 소년시절의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이나 배다른 형제들에 비해 총명하고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광해군이 태어나던 해인 1575년은 조정에서는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정치적 분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동인, 서인 나뉘게 되어 후에 붕당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침입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것은 역설적이지만 광해군에게는 행운이었다. 피난길을 모색하고 있던 다급한 상황에서 신하들은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세자를 책봉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선조는 왕위에 오른 지 벌써 25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세자 책봉이 미뤄지고 있었던 것은 왕비 소생의 대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출의 장자였던 임해군마저도 성품이 너무도 거칠고 부덕하여 도저히 후사가 될 자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차자인 광해군을 세우자니 그 역시 곤란한 점이 있었다.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은 여러 요인들로 인하여 힘입은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드디어 1592년 5월 20일 선조는 평양에 머물면서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된 그 순간부터 공식적인 조선의 왕으로 설 때 까지 인정받지 못한 세자로 16년, 승인되지 못한 왕으로 1년, 그렇게 17년 이라는 가시 밭 길을 걸어야만 했다. 광해군의 정통성 즉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닌 그의 위상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위 계승자의 선정은 물론 조선자체내의 일이었지만 중국황제의 고명을 받는 것이 통과의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조선국왕으로서의 자격과 권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거의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 했다. 그러나 유독 광해군에게 있어서 만은 그가 적자도 장자도 아닌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 전란이라는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부득이 하게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책봉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세자로서 전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김개시라는 이름의 상궁이었다. 일개 상궁의 말에 광해군은 왜 역모의 고변을 물리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걸까?
광해군은 왕에 오른 과정부터 여느 왕과는 달랐다.
장자도 적자도 아닌 광해군은 왕세자에 오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갑작스럽게 세자에 책봉돼 전란을 수습하면서 백성의 지지를 받게 된다.
영창대군 출생으로 왕위 계승에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결국 선조의 궁녀였던 김개시와 대북파의 도움으로
1608년 왕좌에 오른다.
광해군의 즉위에 공을 세운 김개시는 이후 15년간 광해군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특히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수많은 부정부패와 비리를 저질렀다.
벼슬을 얻으려면 김개시를 먼저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동법과 중립외교가 대표적인 예다.
대동법은 토지의 소유량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으로 세금 부담이 높아진 사대부들의 반발을 샀다.
중립 외교 역시 명나라를 섬기며 성리학을 신봉하던 사대부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힌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쫓겨나 묘호조차 얻지 못한 광해군.
광해군의 여인 김개시 김개똥
조선의 3대 악녀 중 하나인 김개시...
그녀를 김개똥이라고 하는 이유는 김개시(金介屎)의 시가 똥시(屎)이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의 여인이었지만, 광해군의 연인인지는 불분명한데
한창 때에는 신하들 중 최고 권력자와 맞먹는 권세를 누렸다고 합니다.
광해군의 여인 김개시는 선조 때 광해군의 궁녀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선조의 궁녀가 되었는데...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서 나쁜 사이를 잘 중재했으며, 광해군을 위해 일했다고 합니다.
광해군과 김개시를 다룬 드라마 중에서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말년의 선조를
김개시가 광해군을 도와 독살했다는 내용도 있을 정도입니다.
선조 사망 후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자 김개시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는데요,
이는 김개시가 머리가 좋고 판단력이 빠르며, 국정에도 개입할 정도로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 시기 최대 권신인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국정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김상궁... 즉, 상궁의 지위에 머물렀는데
때문에 광해군의 여인 김개시가 능력은 있으나 얼굴은 못생겼을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나중에 김개시는 광해군의 총애를 뒤에 업고 매관매직 등 각종 비리를 저질러서
몇몇 신하들이 이에 대해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렸지만, 오히려 상소 올린 신하들이 유배를 갔었습니다.
결국 나중에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몰락했을 때 김개시 역시 참수당했습니다.
광해군 시기 역모의 기미가 보였을 때 그에 대한 상소가 몇번 올라왔는데
그때마다 김개시가 광해군을 안심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김개시가 반정세력에게 뇌물을 받고 내통했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습니다.
인조 아버지 정원군의 무덤 장릉
조선시대의 궁궐과 서울 주변에 산재해 있는 왕릉에 대해
시리즈로 포스팅할 계획을 세우고 창덕궁 탐방부터 시작했는데
시간 여유도 없었지만 갖고 있는 지식의 한계로 생각을 거두었다.
벌려 놓은 일도 많고 약간 부담스럽긴 하지만
다시 시도해 볼 생각이다.
장릉르 첫 번째 답사지로 삼은 것은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는 지리적 편리성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곳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 때문에
김포 장릉답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포시청을 품고 있는 얕은 산자락에 있는 장릉은
자가용으로는 김포시청 또는 풍무리 홈플러스. 승가대학 입구 등
여러 접근로를 통해 들어 갈 수 있고
주차장도 비교적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는데
대중교통편이 불편하여 일단 김포시청이나 사우 삼거리까지 접근한 다음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조선 14 대 선조 임금은 무려 열 네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 임해군 대신 둘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 되었으나 나중에
적통 영창대군이 태어나는 바람에 세자로서 그의 지위에 대해 말이 많았지만
결국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의 조카 이종이 서인세력들과함께 쿠테타를 일으켜
삼촌인 광해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바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선 16 대 인조임금이다.
광해군 재임시절 뛰어난 외치를 발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왜란이후 피폐해진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더이상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전화를 입은 나라를 복구하는 것과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던 광해군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적통인 영창대군이 있었음에도 왕위를 이어받은 광해군을
아니꼽게 여기고 있던 서인은 광해의 외교 정책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
당시 강성해진 누루하치 후금 세력에
조선이 사대하고 있는 명나라가 밀리고 있었는데
그런 명분상의 적과 내통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들은
공공연히 광해군의 왕권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광해군은
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었던 위험 인물인
친형 임해군과 적통 형제 영창대군을 비롯한 왕족들을
제거하여 반란의 싹은 잘라버렸는데
이로 인하여 민심을 잃게 된다.
선조의 네째아들 정원군의 맏아들 이종은
아버지 정원군이 광해군의 견제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못 견뎌
마흔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고
출중한 리더쉽을 갖춘 친 동생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우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방편과 복수심에 불타
평소 광해에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던 서인을 비롯한 이괄 같은 무반들과
손을 잡고 치밀하게 쿠테타를 준비한 끝에 마침내 광해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쿠테타에 성공하고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그가 왕 노릇을 해야 한다는 명분이 약했고
태생적으로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고
경기도 남양주에 있던 정원군의 묘를 김포로 옮겨 장릉이라는 능호를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장릉은 피비릿내나는 골육상쟁을 중단하고자 하는 인조의 염원이 만든
상징물 같은 곳이다.
사후에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융릉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는 조선 왕릉이 아니다.
참고로 우리 나라에 장릉이라 불리는 왕릉은 세군데다.
첫번째 장릉은 인조가 묻혀있는 장릉 [長陵]으로 경기도 파주시 탄현에 자리잡고 있다.
두번째 장릉은 단종이 묻혀있는 장릉 [莊陵]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세번째 장릉 [章陵]이 김포 풍무동에 자리잡고 있는 이곳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무덤이다.
▲ 정자각! 380년 역사의 향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조상숭배를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는 민족정서를 고려해서 였을까.
우리 문화를 말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일제 뿐만 아니라
6.25 전쟁통에도, 개발이 모든 것에 우선했던 독재의 와중에서도
조선 왕릉은 거의 훼손되지 않았고 엄격한 보호와 관리아래
유적과 자연 환경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근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왕조의 무덤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이렇게 잘 보존된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현상이라고 한다.
조선의 왕릉으로서 장릉은
형제간의 골육상쟁끝에 탄생한 부산물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도 갖고 있지만
380년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재실. 참도. 정자각 같은 유적지와 더불어
이를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숲과 연못 까지도 소중한 역사 유산이 아닐 수 없다.
▲ 능원보다 눈길을 끌었던 정자각이었다. 기둥사이로, 마루장 아래로 유장히 흘러간 세월이 느껴졌다.
▲ 필체가 미려하다. 명필이었다는 인조의 친필일까. 조선국 원종대왕 장릉.인현왕후 조묘(?)
▲ 명당이다.
풍수지리는 가장 흥미로운 왕릉 감상 포인트중 하나다.
답이 나와 있는 예제 문제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인조가 아버지 정원군의 묘를 남양주에서 김포로 옮기는 과정에
풍수적인 고려도 단단히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능원위로 올라가 살펴볼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쉬웠지만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고
우측에서 명당수가 흘러와 연지에 담겼다가 다시 저수지로 흘러가고
조산, 안산, 문필봉(계양산)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장릉은
명당의 모범 답안 같은 곳이라고 한다.
명분이 약해 자칫 부스러질 수 도 있었던 불안한 왕권을 확고히 하고
피비릿내 나는 형제간의 골육상쟁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인조의 간절함이 마침내 이 명당을 고른 것이다.
이렇게 명당의 힘을 빌리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비극적인 운명의 고리를 끊지는 못했다.
전쟁에 폐한 무능한 왕으로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까지 죽인 비정한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 장릉의 겨울 숲
많은 사람들이 장릉을 찾는 이유는 역사 탐방이라기 보다는
장릉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감상하기 위함일 것이다.
능원을 산책하는데 넉넉잡아 1시간이면 충분할 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봄.여름.가을.겨울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도심속의 비경이라 할 수 있다.
▲ 재실의 담장이 유난히 정겹다.
장릉은 일부러 찾아보라고 권 할 만큼 대단한 의미를 지닌 명소는 아니지만
혹 인근에 살고 있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거나
김포에 들를 기회가 있을 경우
둘러보면 후회하지 않을 장소임은 분명하다.
눈이 내리면 역사가 아니라 설경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 저수지 풍경
< 출처: 네이버 항공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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