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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2일 병오 5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유자광의 심문으로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이개·박팽년·하위지의 일에 대해 말하다
유자광(柳子光)이 사초(史草)를 가지고 축조(逐條)하여 심문하니, 김일손(金馹孫)이 말하기를,
"신의 사초(史草)에 기록한 바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 한 것은 신의 생각에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소릉(昭陵)의 재궁(梓宮)059) 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은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었고, 이개(李塏)·최숙손(崔叔孫)이 서로 이야기한 일과 박팽년(朴彭年) 등의 일과 김담(金淡)이 하위지(河緯地)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 일과, 이윤인(李尹仁)이 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 한 일과, 세조가 그 재주를 애석히 여기어 살리고자 해서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효유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나아가 죽었다는 일은 모두 고 진사(進士)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30권 5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316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註 059]재궁(梓宮) : 무덤.
117.연산군일기 41권, 연산 7년 11월 11일 을유 3번째기사 1501년 명 홍치(弘治) 14년
대간이 유자광을 논박하는 것이 잘못임을 말하고 대신에게 묻다
전교하기를,
"대간이 유자광의 일을 논박하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대간이 굳이 논박할 것이 없다고 여겨지니, 물러가 사무를 보는 것이 옳겠다. 이 일을 물어라."
하니,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유자광이 전복[鰒]을 진상한 일을 대간이 가리켜서 그르다고 하매, 유자광이 상소 안에 대간을 언급한 것은 곧 스스로의 억울함을 변명한 말인데, 대간은 자기들을 공박한다고 하여 성을 풀지 않았으니, 그들이 성내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유자광의 일은 사직(社稷)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므로 진실로 다스릴 수가 없으며, 대간(臺諫)도 또 전하의 이목(耳目)과 같은 관직이므로 그들이 논박하는 바도 한 사람의 사정(私情)이 아니니, 전하께서 재가(裁可)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대신이 조그마한 허물이 있는 것을 대간의 탄핵으로 갑자기 다스리기를 명할 수는 없는 것이니, 나의 생각으로는 대간이 굳이 아뢸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오."
하였다. 이극균(李克均)이 다시 아뢰기를,
"유자광의 일은 별로 죄과가 없으니, 진실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내불당(內佛堂)을 지으려고 하자, 집현전(集賢殿)에서 상소를 했고 직제학(直提學) 박팽년(朴彭年)이 또한 상소하여 논하였습니다. 지금 이 홍문관이 대간(臺諫)과 더불어 세력이 서로 잇닿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일찍이 대간이 되었고 조부도 또한 대간이 되었으므로 대간의 기풍(氣風)은 상세히 알고 있사오나, 옛날에 일을 의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와 같이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대간이 비록 물러가고자 하더라도 도리어 홍문관에게 제지를 당하여 자유로이 할 수 없을 것이니, 지금 비록 물러가기를 명하더라도 대간은 반드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비의 풍습이 이와 같으니, 갑자기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간의 기풍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고 정승도 또한 일찍이 알고 있소. 정승이 이미 삼공(三公)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그 풍습을 능히 바꾸지 못하니, 내가 장차 혼자서 어떻게 하겠소?"
하였다. 이극균이 다시 아뢰기를,
"대체로 선비의 풍습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틀은 위에 있습니다. 대간은 인물을 탄핵하는 것이 본래 그 직책입니다. 홍문관 같은 데는 곧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다만 상께서 빠뜨린 것을 보좌할 뿐이지, 인물을 탄핵하는 일을 대간(臺諫)과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 어찌 그 직책이겠습니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41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456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118.중종실록 4권, 중종 2년 9월 9일 기유 3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공신 남용에 신중을 기할 것에 관한 대간들의 상소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신 등은 들으니, 예로부터 공신이 많기로는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와 같은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나라 고조(高祖)의 개기(開基)630) 할 때에는 공신이 소하(蕭何)등 31인에 지나지 않았고,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중흥(中興)할 때에는 등우(鄧禹) 등 28명의 장수에 지나지 않았고, 효선제(孝宣帝)의 중흥할 때에는 곽광(霍光) 등 16인에 지나지 않았고, 당 태종(唐太宗)이 창업(創業)할 때에는 장손무기(長孫無忌) 등 24인에 지나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정국(靖國)하는 처음에 책훈(策勳)이 이미 1백 인을 넘었으니, 한(漢)·당(唐) 이대(二代)의 숫자를 합쳐도 오히려 대적할 수 없으므로, 외람됨을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전하께서는 이를 뉘우치지 않으시고 지금 또 노영손 이외의 20여 인에게 정난 공신(定難功臣)의 칭호를 함부로 내려 주시니, 일국의 신민(臣民)들이 놀라고 으아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서(丹書)와 철권(鐵券)이 진흙같이 천해졌으니, 족히 유공자(有功者)에게 권장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 한(漢)나라나 당(唐)나라 3백, 4백 년 사이에 또한 어찌 논의할 만한 공신이 없었겠습니까만, 백마(白馬)631) ·기린(麒麟)632) ·운대(雲臺)633) ·능연(凌煙)634) 이후로는 들어본 일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정국 공신을 정하신 지 14개월이 되었는데, 또 별도로 공훈의 칭호를 만들어 공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내리고 있으니, 신 등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전하께서는 인자하고 총명한 자질을 가지시고 중흥(中興)하는 운수를 당하여, 무릇 시행하는 일이 마땅히 당(唐)·우(虞)635) 로써 스스로 기약해야 할 것인데, 논공(論功)하는 한 가지 일은 도리어 구구한 한(漢)·당(唐)의 아래에 있으니, 신 등은 더욱 전하를 위하여 애석해 합니다.
우리 세조 대왕께서는 공신을 소중하게 아시면서도 또한 함부로 상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리를 아신 까닭으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 일으킨 변란636) 을 진압했을 때에도 오직 김질(金礩)과 정창손(鄭昌孫) 등에게만 좌익 공신을 추록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참여됨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일과 때가 바로 이와 더불어 한가지인데도 본받지 않으시고, 익대 공신의 구례(舊例)로 단정하여 하문(下問)하시는데 대하여 두세 대신이 따라서 순종하고 그 부당함을 말씀드리지 않으니, 신들은 폐조(廢朝)637) 의 아첨하여 따르던 풍습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는가 염려됩니다. 공을 논하고 상을 내림은 국가의 큰일인데, 전하께서는 먼저 위에서 상의 의사대로 단정하시어 홀로 두세 대신과 의논하실 뿐이요, 대간 시종에게는 미치지 않으시니, 신 등은 통절(痛切)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성상의 뜻은, 이것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니 무슨 해될 것이 있느냐 하시겠지만, 우리 나라가 땅덩어리는 편소(褊小)한데 공신은 조정에 가득하니, 관작이 너무 넘칠 뿐만 아니라, 기전(畿甸)638) 에 사는 백성들이 재산의 10분의 3, 4분은 그 집에 바치고, 양민(良民)의 호부한 자는 모두 반당(伴倘)에 투속(投屬)되고, 주현(州縣)에 딸린 노비(奴婢)도 반이나 구사(丘史)639) 에 예속되니, 공가(公家)의 형세가 날로 깎이고 달로 떨어져서 그 피해가 적지 않으므로, 신 등은 거듭 국가를 위하여 우려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노영손만을 정국 공신에 첨록(添錄)하고 공 없는 사람을 다 삭제하여, 한편으로는 조정의 지당한 예를 준수하고 한편으로는 벼슬과 상을 함부로 주는 폐단을 막으소서. 그렇게 하면 공론으로 보아 다행입니다.
신 등이 듣건대,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풍간하기를, ‘벼슬은 악덕(惡德)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오직 현명하고 선량한 사람에게만 내리소서.’ 하였다 합니다. 그것은 관작(官爵)이란 것은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기구요, 악덕한 사람을 대접하는 기구는 아닌 까닭입니다. 전일에 폐조의 모든 정사는 사은(私恩)에서 나왔으므로, 간사한 탐관이 세력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서 은택(恩澤)을 얻게 되고 천얼(賤孼)이 연줄을 따라 총명(寵命)을 받게 되니, 맑은 기풍은 다 사그라지고 흐린 찌꺼기가 마구 흘렀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착하고 간사함을 분별하시어, 일체로 조정의 혼탁한 정사를 씻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윤과 조계형의 소행은 말하자면 입이 더러울 지경이고 사류들이 그와 동배 되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 일인데, 전하께서는 파직시키고 난 다음에 다시 수용(收用)하셨습니다. 옛적에 당나라의 유자후(柳子厚)640) 는 한때의 문사(文士)였으되 왕비(王伾)에게 몸을 더럽히자 헌종(憲宗)이 물리친 일이 있는데, 하물며 나인(內人)에게 빌붙은 신은윤의 경우이겠습니까? 송나라의 정감(程戡)도 또한 한때의 곧은 선비였었으나 귀행(貴幸)641) 과 결탁하여 벼슬자리에 이르자 인종(仁宗)이 내쳤는데, 하물며 계형 같은 간신에게 붙어 아첨한 자이겠습니까?
바야흐로 신은윤과 조계형을 파직시킬 때에 조정에서는 송연(竦然)히 염치는 버릴 수 없음을 알게 되어 앞을 다투어 명절(名節)을 힘써 닦았었는데, 벼슬자리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사판(仕版)에 오른다면, 이는 조정이 염치의 칼날을 꺾어 구습(舊習)에 복귀하는 것이 되니, 어찌 전하께서 사풍(士風)을 바로잡는 도리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공신이라 하여 버릴 수 없다고 하신다면, 더욱이 조정을 바로잡음으로써 백관을 바로잡는 의의가 아닙니다. 지금 공신이 조정에 가득 차 있으니 진실로 전하의 이 말씀을 듣는다면, 반드시 거리끼는 바가 없어져서 신은윤·조계형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관작을 아껴서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어들여 두 사람의 죄를 징계하면 국가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신 등은 언책(言責)을 다하지 못했으니, 체직(遞職)하여 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홍문관과 김감·정미수 사이에는 서로가 알력(軋轢)이 심하여 사세가 서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또 홍문관이 공론으로써 와서 아뢰는 것이니, 저 두 사람은 진실로 피혐하고 죄를 기다림이 마땅한데, 김감은 도리어 말한 사람을 탓합니다. 청컨대 이 두 사람을 체직하시고, 김감은 추국(推鞫)642)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상소한 글을 보니, 그 의도를 다 알겠다. 그러나 나의 윤허하지 않는 뜻은 이미 다 말하였다. 김감과 정미수의 일도 또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다시 아뢰었으나, 다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187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역사-전사(前史)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註 630]개기(開基) : 창업.
[註 631]백마(白馬) : 옛날 흰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시면서 맹세[會盟]했으므로, 곧 공신들의 회맹을 지칭한 것임.
[註 632]기린(麒麟) : 한대(漢代)의 공신 곽광(霍光) 등 11인의 화상을 봉안했던 기린각(麒麟閣)으로서 곧 공신의 봉호를 말함.
[註 633]운대(雲臺) : 한(漢)나라 궁중의 고대(高臺)인데 한 명제(漢明帝) 때 공신 등우(鄧禹) 등 28인의 화상을 그 대(臺) 위에 그려 두었음.
[註 634]능연(凌煙) : 당 태종(唐太宗) 때 공신 장손무기(長孫無忌) 등 24인의 화상을 봉안했던 곳.
[註 635]당(唐)·우(虞) : 중국 요순(堯舜).
[註 636]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 일으킨 변란 : 1455년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성상문·박팽년 등은 단종의 복위를 모의, 이듬해 4월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送別宴) 석상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이 운검(雲劍)을 잡게 되자, 이 기회를 기화로 세조를 죽이고 이어 한명회(韓明澮)·권남(權擥) 등 일파를 없애기로 했다가, 이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金礩)의 밀고로 일망타진 되었던 일.
[註 637]폐조(廢朝) : 연산군.
[註 638]기전(畿甸) : 서울 부근의 땅.
[註 639]구사(丘史) : 조선 시대 때 임금이 종친과 공신에게 하사한 관의 노비.
[註 640]유자후(柳子厚) : 종원(宗元)의 자(字).
[註 641]귀행(貴幸) : 임금에게 은총을 받는 자.
[註 642]추국(推鞫) : 의금부에서 특지(特旨)에 의하여 중한 죄인을 신문함.
119. 중종실록 7권, 중종 3년 10월 22일 병술 1번째기사 1508년 명 정덕(正德) 3년
조강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불시의 고강·적절한 교수·독서당 예우 등을 아뢰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지평 신상(申鏛)과 정언 홍언필(洪彦弼)이 앞의 일을 논하고, 신상이 또 아뢰기를,
"인재의 부진함이 이 때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성종조(成宗朝)에서는 인재를 양육해서 훌륭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나, 불행하게도 폐주(廢主)가 죽이고 귀양을 보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는 사기(士氣)가 소삭(蕭索)하여 학문에는 뜻을 두지 아니하고, 먼저 매진(媒進)704) 할 마음을 갖고 있으니 이는 권려(勸勵)의 올바른 길을 얻지 못한 때문입니다. 근자에 무사(武士)에게는 활쏘기를 시험하여, 우등을 한 자에게는 문득 상물(賞物)을 하사하시니, 무인은 이를 영화롭게 여겨 다투어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거재(居齋) 유생(儒生)에게도 또한 불시에 점명(點名)하여, 혹은 제술(製述), 혹은 강경(講經)을 하여 입격한 자에게는 서책을 하사하여 권면하는 뜻을 보이시면, 저들도 반드시 임금의 하사를 영광으로 여겨 흥기(興起)할 마음이 많아질 것입니다."
하고 언필(彦弼)이 아뢰기를,
"성균관 동지사 안침(安琛)은 병으로 사진(仕進)하지 못하고, 윤금손(尹金孫)도 또한 연고 없이 출사하지 않으니, 청컨대 모두 해임하시고, 참판(參判) 중에 문학과 덕망이 있는 이를 겸임시켜 교회(敎誨)하도록 하소서."
하고, 지사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인재의 부진은 과연 신상(申鏛)이 아뢴 바와 같습니다. 예전에는 비록 재상의 자식이라도 학업에 뜻을 돈독하게 하다가, 늙도록 성취하지 못하면 이에 비로소 관직을 구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게 되면 모두 매진(媒進)할 마음을 품고 학문을 힘쓰지 아니하며, 비록 학업에 뜻하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대부분이 자기 집에서 연습을 하고, 성균관에 거재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물망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표솔(表率)705) 을 삼는 것만한 것이 없겠습니다. 강경서(姜景敍)·남곤(南袞) 같은 이에게 동지사(同知事)를 겸임시켜 훈회(訓誨)를 하게 하면, 유생(儒生)들이 흥기하여 즐거이 부학(赴學)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후에 재주를 시험하여 혹은 바로 회시(會試)706) 에 직부(直赴)케 하거나 서책(書冊)을 하사하면 어찌 인재가 부진함을 근심하겠습니까?
또 사학(四學)의 관원은 그 직에 제수(除授)된 지 오래지 않아 문득 다른 관직에 옮기므로, 오래 있고자 하지 않고, 교도에 근실하지 아니하니, 금후로는 사학 교수를 택차(擇差)하여 구임(久任)707) 한 자를 승천(陞遷)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또 예전에는, 윤차 당상(輪次堂上)이 한 달 내에 2∼3차 성균관에 나아가서 혹은 제술(製述)도 하고 혹은 강경(講經)도 하였으나 지금은 폐지되었으니, 청컨대 이를 신명(申明)하여 시행하되, 성균관뿐만 아니라 사학도 또한 성균관의 예에 따르도록 하소서. 그리고 당하관으로서 문학이 있는 자로 하여금 윤차(輪次)로 사진(仕進)케 하여 유생들의 제술을 고찰하도록 하소서.
또 독서당(讀書堂)이 경중(京中)에 있으므로 사가(賜暇)한 사람이 자주 그 집을 내왕하고 친우들의 방문도 또한 많아 전업(專業)할 수 없으니, 용산 독서당을 수리하는 동안에 제안 대군(齊安大君)의 두모포(豆毛浦) 정자(亭子)에 거처하면서 학업에 전력하게 하소서. 그리고 서당에는 경비의 지응(支應)이 너무 박하고 사령(使令)도 부족하니, 넉넉하게 예우(禮遇)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인재의 부진이 이와 같아, 이미 해조(該曹)708) 및 관학(館學)709) 의 관원을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하였다. 설경(說經) 성세창(成世昌)이 아뢰기를,
"독서당의 지응에 관한 일은 헤아릴 것도 없습니다. 만약 서책과 지필(紙筆)이 부족하다면 국가에서 간직한 서책도 많으니, 청컨대 이를 옮겨 두어 관람에 편리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참찬관 이세인(李世仁)이 아뢰기를,
"오늘에 아뢴 것은 모두 인재를 양육하기 위한 일이니 유의하소서. 우리 나라는 비록 해외(海外)에 있다 할지라도, 중조(中朝)에서 문사(文士)가 많다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앞서 천사(天使) 예겸(倪謙)이 나와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의 재주를 보고 소중화(小中華)라고 칭찬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홍문관(弘文館)의 관원으로서 장래가 있는 자는 오래도록 그 직에 있으면서 나라를 빛낼 인재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284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註 704]매진(媒進) : 다투어 나아가기를 꾀함.
[註 705]표솔(表率) : 모범. 본보기.
[註 706]회시(會試) : 한성부와 지방에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을 서울로 모아 제2차로 보이는 시험을 회시, 또는 복시(覆試)라 한다. 이 회시에 합격한 사람만이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된다.
[註 707]구임(久任) : 문무관은 그 품계에 따라 일정한 재임 기간이 있다. 그러나 그 직무의 중요도를 감안하여 일정 임기에 구애치 않고 오래도록 근무하게 하는 것.
[註 708]해조(該曹) : 당해조, 즉 예조를 말함.
[註 709]관학(館學) : 성균관과 사학.
120.중종실록 17권, 중종 7년 11월 25일 을미 2번째기사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영의정 유순정이 소릉의 시말을 고찰하여 상소하다
영의정 유순정(柳順汀) 등이 소릉의 시말(始末)을 고찰한 것을 아뢰었는데, 대략에,
"신유년502) 7월 23일에 권씨(權氏)503) 가 훙(薨)하였고, 【이날 노산군(魯山君)이 탄생하였다.】 임신년504) 5월 14일에 문종(文宗)이 훙하셨습니다. 병자년505) 5월 을사(乙巳)에 좌승지 구치관(具致寬)에게 명하여 의금부에 가서 성삼문(成三問)에게 묻기를 ‘상왕(上王)506) 께서도 너희들의 모의를 참여하여 아시는가’ 하니, 성삼문이 ‘아십니다. 권자신(權自愼)이 그의 어머니에게 고하여 상왕께 통하였고, 뒤에 자신과 윤영손(尹令孫) 등이 누차 나아가 약속하여 기일을 고하였으며, 그날 아침에 자신이 먼저 창덕궁으로 나아가니, 상왕께서 장도자(長刀子)를 주셨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치관이 또한 자신에게 물었는데, 대답이 삼문과 같았습니다.
정축년 6월에 의정부가 아뢰기를 ‘현덕 왕후(賢德王后) 권씨(權氏)의 어머니 아지(阿只) 및 동생 자신이 모반(謀反)하다가 복주(伏誅)되었고, 그의 아버지 권전(權專)은 추폐(追廢)하여 서인(庶人)이 되었고, 또한 노산군은 종사(宗社)에 죄를 얻어 이미 군(君)으로 강봉(降封)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아직 그대로 명호(名號)와 지위를 보존함은 합당하지 못하니, 추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개장(改葬)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습니다.
성종(成宗)무술년507) 에 유학(幼學) 남효온(南孝溫)이 상소하였는데, 그 첫 조목에
‘삼가 고찰하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는 하늘이 낸 용맹과 지혜, 일월(日月)같은 총명을 가지셔서 하늘과 사람의 도움으로 큰 변란을 평정하시어 화가위국(化家爲國)하심으로써 종사(宗社)가 위태하게 되었다가 다시 안정되었고, 백성들이 거의 죽게 되었다가 다시 소생하였는데, 뜻밖에도 병자년508) 에 여러 간신들이 난을 선동하다가 잇달아 복주(伏誅)되고, 남은 화가 소릉(昭陵)을 폐하는 데까지 미쳐, 20여 년 동안 원혼(冤魂)이 의지할 데가 없으니,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하늘에 계신 문종(文宗)의 신령이 어찌 홀로 약·사·증·상(禴祀蒸嘗)509) 을 받으려 하시겠습니까! 신은 학술이 없고 문견이 얕아, 진실로 어떤 일이 상서(祥瑞)를 가져오고 어떤 일이 어떤 재앙을 가져 오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난 일을 상고하고 짐작해 보니, 나의 마음이 곧 천지의 마음이요, 나의 기운이 곧 천지의 기운인즉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운이 순(順)함은 바로 천심(天心)과 천기(天氣)가 순함이요,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운이 순하지 못함은 바로 천심과 천기가 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마음과 하늘의 기운이 순하지 못하면 재앙이 내리게 되는 것인데, 신의 우매한 소견으로는 소릉(昭陵)을 폐한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순하지 못하였으니, 천심이 순하지 못할 것은 따라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설사 철훼한 사당의 신주는 다시 종묘(宗廟)에 모실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오직 존호(尊號)를 복구하고 다시 예장(禮葬)하여 한결같이 선후(先后)의 예(禮)처럼 하여, 생민의 여망에 답하고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며, 조종(祖宗)의 뜻에 보답한다면, 심상한 것보다는 몇 만 배나 나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만일 「폐한 지가 3대(代)를 지났으되 조종(祖宗)이 거행하지 않은 일이니, 지금 추복(追復)하고 예장할 수 없다.」 한다면, 세조(世祖)께서 무인년510) 에 하신 훈계로써 밝히겠습니다. 예종(睿宗)께 훈께하시기를 「나는 곤란한 때를 당했었지만 너는 순탄한 때를 당했는데도, 나의 행적(行跡)에 얽매여 변통할 줄 모른다면 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대체로 일이란 거행할 수 없는 때가 있고 거행할 수 있는 때가 있는 것인데, 어찌 전의 일에 구애되어 변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대명 황제(大明皇帝)가 경태(景泰)511) 를 추복한 어진 일이 뚜렷이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유의하시어 채택하소서.’
하였는데, 명하여 승정원에 보이게 하시자,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이 아뢰기를 ‘신이 이 상소를 보건대 「소릉을 추복하자」 하였는데, 이는 신자(臣子)로서 의논할 수 없는 것을 지금 남효온이 함부로 의논한 것이니, 역시 불가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소릉을 지금 복구할 수 없다.’ 하셨고, 이튿날 경연(經筵)에서 상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시기를 ‘어제 유생(儒生) 남효온의 상소에 소릉 폐한 일을 말하였으나, 선왕(先王) 때의 일이어서 사세가 복구하기 곤란한데, 경 등은 아는가?’ 하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주대(奏對)하기를 ‘그 상소한 말을 보건대, 모두 지나치고 절당하지 못한 것이어서 진실로 채택하여 거행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그때의 말을 보건대 지극히 자상하고 세밀하다. 그러나 조종 때의 오랜 일로서 가벼운 일이 아닌 듯하니, 정부(政府)·부원군(府院君)·육조 참판·한성부 전원으로 하여금 의계(議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626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註 502]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503]권씨(權氏) : 문종 비.
[註 504]임신년 : 1452 문종 2년.
[註 505]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506]상왕(上王) : 단종.
[註 507]무술년 : 1478 성종 9년.
[註 508]병자년 : 1456 세조 2년. 이해 6월 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端宗)을 복위시키려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註 509]약·사·증·상(禴祀蒸嘗) : 중국 주대(周代)의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의 이름으로, 사는 봄, 약은 여름, 상은 가을, 증은 겨울 제사이다.
[註 510]무인년 : 1458 세조 4년.
[註 511]경태(景泰) :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로, 경제를 가리킨다. 영종(英宗) 때 성왕(郕王)으로 있다가, 영종이 북정(北征)하는 사이 황태후(皇太后)에 의해 제위에 올랐으나 8년 만에 영종에 의해 폐위되었다.
121.중종실록 29권, 중종 12년 8월 5일 무신 2번째기사 1517년 명 정덕(正德) 12년
기준 등이 잠실의 폐단과 조세·부역을 가벼이 할 것 등을 아뢰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기준(奇遵)이 아뢰기를,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될 수 없으므로 옛 임금들은 다 여기에 마음을 썼는데, 후세의 임금들 중에는 백성이 근본이 되고 농사가 백성의 하늘이 된다는 것을 몰라서 멸망하기에 이른 자가 많습니다. 우리 나라는 폐조(廢朝) 이후로 해마다 기근이 들어 민생이 곤궁한데 백성 중에서 전토(田土)를 가진 자가 얼마 안 되고, 한 두둑의 전토를 가진 자도 마침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있을 곳을 잃고 떠돌며 굶어 죽는 사람이 잇다니 어찌 이처럼 잔인한 일이 있겠습니까? 잠실(蠶室)의 폐단은 근래 대간(臺諫)도 간쟁(諫諍)하거니와, 백성이 뽕나무를 심지 않고 누에 치는 일을 아주 그만 두는 까닭은 공잠(公蠶)이 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가진 자가 위를 덜고 아래를 보태고자 하더라도 의를 보태는 폐단이 있는데, 백성이 살아갈 수 없다면 나라가 장차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하고, 시독관(侍讀官)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잠실을 두는 것은 근본에 힘쓰는 뜻을 보이기 위한 것인데, 두 곳 【동잠실·서잠실을 가리킨다.】 에 두고 또 승부를 겨루어 앞을 다투는 폐단이 있으니 이는 사치로 이끄는 것이라, 대간이 오래 간쟁하여 오되 전혀 동념(動念)하지 않으십니다. 잠상(蠶桑)도 근본이기는 하나 농사에 비하면 말단인데, 지금 사방의 백성이 열 중에서 아홉은 말단에 종사하고 하나만 본업에 종사하여 하나로 아홉을 구제하니, 어떻게 기근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監司)·수령(守令)으로 하여금 백성이 근본에 힘쓰도록 권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기준(奇遵)이 아뢰기를,
"백성이 말단을 좇는 까닭은 농사의 이익은 적고 말단의 이익이 많기 때문이니 자생(資生)이 어려워진다 하여 억제할 수는 없으나, 상께서 먼저 근본을 도타이하는 성실을 보이시면 이런 폐단을 없앨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왕(成王)이 어려서 왕위를 이으매 주공(周公)이 농사의 어려움을 모를까 염려하여 시(試)를 지었는데, 대개 농가(農家)의 일은 사대부(士大夫)·귀척(貴戚)·근속(近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임금에게 있어서는 알기가 워낙 어렵거니와, 이 칠월(七月)589) 은 농사의 괴로움과 백성의 어려움을 극진히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좌우에 걸어 두고 앉아서나 누워서나 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하면 역시 근본에 힘쓰는 한 도움이 될 것이니, 전에 이를 감사에게 교유(敎諭)하였다. 그러나 교유만 하고 말면 반드시 공효(功效)를 이루지 못할 것이요, 근본은 도타이하기에 힘쓰면 공상(工商)은 말단의 이익이고 농사에 힘쓰는 것이 본업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절로 알게 될 것이다."
하매, 영사(領事)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예전에는 조세와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여 제 일을 즐기게 하였으므로 백성이 즐겨 농(農)으로 돌아가서 놀고 먹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부역이 과중하여 백성이 안락하게 살아가지 못하므로 농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조세와 요역을 가볍게 하면 자연히 농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였다. 기준이 아뢰기를,
"공자가 ‘용도(用度)를 절약하여 백성을 아낀다.’ 하였거니와 용도를 절약해야 백성을 아낄 수 있는 것인데, 만약에 용도를 절약하지 않으면 반드시 백성의 재물을 노략하게 될 것이며, 백성으로 하여금 제때에 할 수 없게 하면 반드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세와 요역을 가볍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마땅하거니와, 지금 공물(貢物) 중에서 예전에는 났었으나 이제는 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상정(常定)한 지 이미 오래라도 지금 나는 것으로 바치게 하면 민생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반복하여 생각해도 그 폐단이 지극히 중하니, 지금 나는 것에 따라 그 바치기 어려운 것을 바꾸어 바치게 해야 하며, 그러면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매, 신용개가 아뢰기를,
"만약에 한번 고쳐 정하면, 물산(物産)이 있는 고을이 오로지 그 폐해를 받고, 나는 것이 없는 곳만 홀로 그 공(貢)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물의 상정이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나는 것에 따라 고치면 폐단을 덜 수 있을 것이다."
하매, 장령(掌令) 정순붕(鄭順朋)이 아뢰기를,
"연해(沿海)의 각 고을에서는 해물(海物)이 나기도 하고 나지 않기도 하나, 옆 고을에서 나면 그곳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도 바칠 수 있습니다."
하고, 신용개가 아뢰기를,
"그것은 마땅할 듯합니다. 만약에 공안(貢案)을 죄다 고친다면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특진관 김극핍(金克愊)이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지당하십니다. 폐단을 아뢰는 자도 공안을 개정(改正)할 것을 말한 일이 있고, 해조(該曹)는 개정하기를 어려워하나 폐단이 심한 것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물건이라면 백성이 편리하게 여기고 나지 않는 물건이라면 그곳 백성이 바치기 어려워하거니와, 대신(大臣)의 말은 한 고을에만 치우치게 매기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입니다. 소신(小臣)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을 때에 보니, 그 도 사람이 그곳에서 나지 않는 물건을 전라도에서 바꿔 오자면 그 값이 여느 때의 열곱이 되는데, 감사·수령은 제 시기 안에 봉진(封進)하려 하고 향리(鄕吏)·영리(營吏)는 거의 다 지나치게 거두므로, 백성이 사방에서 구하되 구하기도 하고 못 구하기도 하는데 감사나 수령이 된 자가 그 폐단을 알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마음이 편할 수야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만약에 그 공물(貢物)을 고르게 하자면, 반드시 팔도(八道)를 합하여 그 생산되는 것을 써서 상정(詳定)해야 하며, 그러면 혹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이 경종(耕種)할 때에는 늘 빌어 쓰고 겨우 수확하여서는 죄다 공채(貢債)·사채(私債)를 갚느라고 날라가므로 그 곤궁이 폐조(廢朝)와 다름없는데, 이러한 까닭은 백성에게 저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근본을 힘쓰는 자는 점점 유망(流亡)하여 가니, 이 때문에 말단을 좇는 자가 많습니다."
하고, 특진관 이자건(李自健)이 아뢰기를,
"각 고을의 토산(土産)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죄다 실려 있으니, 다시 정하게 하면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기준(奇遵)이 아뢰기를,
"그 생산되고 생산되지 않는 것을 참작하여 정해서 시행하면 백성이 혹 편리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고,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토지의 물산이 같지 않으니 통합해서 나누어 정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순붕(鄭順朋)이 아뢰기를,
"반드시 죄다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혹 예전대로 변하지 않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안(貢案)은 가벼이 고칠 수 없으나, 그것이 아주 오래되었으므로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모아 의논하면 그 폐단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기준이 아뢰기를,
"대본(大本)이 이미 그릇되었으므로 그 말절(末節)을 구제하더라도 백성이 혜택을 입지 못합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이언호(李彦浩)가 아뢰기를,
"칠월편(七月篇)은 임금이 체념(體念)해야 할 것입니다. 왕업(王業)의 근본은 농사에 있는데, 임금은 구중(九衆) 안에 깊이 거처하니 농사의 어려움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혹 안다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유연(油然)히 절로 생길 것입니다. 칠월(七月)·무일(無逸)590) 의 경계는 유심(留心)하지 못하면 도리어 무용(無用)한 것이 되어 마침내 유위(有爲)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시종이 한결같게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그림을 만들고 색칠까지 하는 것은 도리어 노리갯감이 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마음에 간직하는 것만 못하며,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는 것이 바로 백성을 걱정하는 성실이 되니, 이언호가 아뢴 시종이 한결같게 해야 한다는 말이 지당합니다."
하고, 헌납(獻納) 민수원(閔壽元)이 아뢰기를,
"옛 임금으로서 스스로 게으르고자 하지는 않으나 점점 끝까지 잘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 다 이 까닭이니, 상께서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신다면 곧 점점 처음과 같지 아니하여 끝까지 이루지 못하는 조짐이 될 것입니다."
하고, 기준이 아뢰기를,
"요즈음 백성이 곤궁하고 현우(賢愚)가 뒤섞이니, 이처럼 걱정 많은 때가 없습니다. 대저 혈기가 한창일 때에는 착한 말을 듣거나 착한 일을 들으면 위선(爲善)에 용맹하여 다른 일을 돌보지 않으나, 혈기가 쇠약하고 게을러지면 잡된 생각이 마구 일어나서 능히 처음같이 하기가 어렵습니다. 신(臣)이 보건대, 아랫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젊을 때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시(詩)·서(書)에 종사하다가도 마음 공부가 없으면 혹 산업에 종사하거나 제 처자식에게 사사로와져서 스스로 악인(惡人)이 되는 줄 모릅니다. 상께서 모름지기 유념하여 늘 이 마음을 간직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이 없이, 아뢰는 말을 매양 새로이 듣고자 하시면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져서 스스로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은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이처럼 재변이 일어나고 백성이 어려운 때가 없었음에랴! 변방의 일이 얼음이 언 뒤에는 지극히 염려스럽고 기황(飢荒)도 심하여 매우 염려스럽다."
하매, 신용개가 아뢰기를,
"이 도는 해마다 흉년이 들고 피적(彼賊)이 근경(近境)에 왕래하며 황제도 스스로 덕(德)을 잃었으므로, 혹 사변이 있을지라도 군량이 없으면 유위(有爲)할 수 없으니 이런 일들이 다 우려됩니다."
하고, 기준이 아뢰기를,
"이제 듣건대, 서방의 적은 좀도둑이 아니라 반드시 호걸(豪傑)한 사람이 있어서 그 호령을 맡아서 기율이 있고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상국(上國)을 섬기는데, 적이 문정(門庭)을 지나도 묻지 않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의 대신들이 조치를 다하기는 하나, 평양(平壤) 등 세 고을 사이는 적지(赤地)가 1천 리나 되니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나 마땅한 인재를 얻으면 반드시 비어(備禦)의 방도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구(賊寇)가 문정을 지나면 막아야 할 것이나, 평안도 온 도내가 해마다 흉년을 만나서 군량(軍糧)이 부족하니 이런 일을 쉽게 처치할 수 없다."
하매, 신용개가 아뢰기를,
"적이 우리 문정을 지나더라도 먼저 군사를 일으켜서 그 노여움을 돋우어서는 안 됩니다. 평안도의 군량이 이미 부족한데다가 또 흉년을 만났으니, 이제 곡식을 들여가서 구황(救荒)하더라도 얼마나 댈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극핍(金克愊)이 아뢰기를,
"적의 무리가 왕래하는 땅이 다만 강 하나를 건너 있으니, 도외시하여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지성으로 큰 나라를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 불가하며, 또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형세이니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평안도 온 도내가 기황이 매우 심한데 베풀 만한 방책이 없으므로 군량을 조전(漕轉)하나, 아마도 무사히 도착하여 배를 대지 못할 듯합니다."
하고, 신용개가 아뢰기를,
"식량을 나르는 일도 부득이해서 하는 것인데, 곡식을 나르는 자가 다들 가기를 즐기지 아니하여 황해도 장산곶[長山串]까지 가서는 다 바람 때문이라 핑계하고 더 가지 않아서 중도에 뭍에 내리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에게 일러서 바람의 형편을 보아 보내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대간(臺諫)이 전의 일을 반복하여 논계(論啓)하였으나, 신거이(愼居易)의 일만을 윤허하고 나머지는 다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김세필(金世弼)·이귀(李龜)의 일을 신용개(申用漑)에게 물으매, 신용개가 아뢰기를,
"인물로 보거나 계본(啓本)으로 보면 상가(賞加)하여도 불가한 데가 없습니다. 김극핍(金克愊)이 전에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이귀를 포승(褒陞)591) 하였는데, 지금 마침 입시(入侍)하여 있으니 상께서 하문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김극핍에게 물으매,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청렴하고 근신하게 봉공(奉公)하며 또 수령들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계문(啓聞)하였더니, 법사(法司)가 신이 지나치게 칭찬하였다 하여 함문(緘問)592) 하기에 신이 달리 답할 말이 없으므로 잘못 들었다고 답하였습니다."
하였다. 묘현(廟見)의 일로 장령(掌令) 정순붕(鄭順朋)이 세 번 아뢰고, 헌납(獻納) 민수원(閔壽元)이 한 번 아뢰고, 기준(奇遵)이 세 번 아뢰고, 이청(李淸)이 한 번 아뢰어 다들 다시 의논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정부(政府)593) 와 예조(禮曹)에 의논하고 또 육경(六卿)594) 에게 의논하였으니, 의논이 상세하고도 극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매, 정순붕이 또 아뢰기를,
"시종(侍從)들이 이 일 때문에 번번이 경연에서 아뢰고, 또 물러가서는 온 관원(館員)이 와서 아뢰었으니 그 아뢰는 것이 이미 지극하였는데, 신 등이 또 이 일을 경연에서 아뢰는 것은, 이와 같은 예문(禮文)에 관한 일을 성상소(城上所)595) 로 하여금 논집(論執)하게 하는 것은 온편치 않기 때문에 경연에서만 아뢰는 것입니다. 근래 대신들은 옛일을 행하기 어렵다고 하나, 예전에 이를 만든 데에도 어찌 뜻이 없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시종의 생각은 다만 고례(古禮)를 행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 뜻은 아름답다. 다만 대례(大禮)는 이미 조정의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하였으므로 이제 다시 의논할 일이 없으나, 예문은 갑작스레 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조용히 다시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 옳으리라."
하매, 정순붕이 아뢰기를,
"넓게 의논하여야 합니다. 또 절의(節義)와 인후(仁厚)한 풍습은 국가가 배양할 바입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를 조종(祖宗)께서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으며, 세종(世宗)께서는 길재를 간대부(諫大夫)596) 로 삼으셨으니 그 후한 대우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왕씨(王氏)를 박대한 일은 태조(太祖)의 본의가 아니라 한때의 모신(謀臣)의 잘못이니, 세종조(世宗朝)에서 숭의전(崇義殿)597) 을 설립하여 왕씨의 제사를 존속시킨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근래 절의가 퇴폐하고 떨치지 않으니 도타이 권하여 떨치게 해야 할 것이며, 왕씨의 후예에 대하여 수령(守令)이 작은 죄로 말미암아 형신(刑訊)을 가하기까지 하니 또한 자주 존문(存問)해야 합니다. 정몽주의 일은 더욱 가상합니다. 정몽주가 어찌 천명과 인심이 이미 우리 태조에게 돌아간 줄 몰랐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두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근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 노산군(魯山君)598) 을 복위시키려 꾀하였으니 그 죄는 주벌(誅罪)해야 하나 그 절의는 주벌할 수 없는데, 이제까지 난신(亂臣)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임금으로서 정대하고 공평한 마음에 어그러집니다. 중흥(中興)하여 창업(創業)한 임금은 인심과 천명이 돌아감에 따라 난폭한 자를 제거하는 것이지만, 또한 으레 그 절의를 숭장(崇奬)하여 후세에 권할 일로 삼는 것은 뒤를 이은 임금으로서 도타이 장려할 일입니다."
하고, 민수원(閔壽元)이 아뢰기를,
"금세에 절의 있는 선비가 없으니 절의를 배양하는 일을 상께서 하셔야 합니다. 절의는 나라의 근본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그 근본을 굳게 해야 하는데, 그 근본을 굳게 하려면 먼저 사기를 진작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절의를 숭상하여 근본을 배양하면 될 것이다. 성삼문·박팽년 등의 일은 대신에게 물어야 하겠으나, 정몽주·길재 등의 일은 대신에게 묻지 않더라도 그 후손을 녹용(錄用)해야 하리라."
하매,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아뢴바 절의를 배양하는 일은 지당합니다. 숭장해야 할 자는 성삼문·박팽년뿐 아니라 이개(李塏) 등도 숭장해야 합니다. 그때에는 불의(不義)인 듯하였으나, 대의(大義)가 정해진 뒤에는 사람들이 도리어 의(義)로 여기니 이제 난신(亂臣)이라는 이름을 가할 수 없습니다."
하고, 기준(奇遵)이 아뢰기를,
"성삼문·박팽년 등이 세조에게는 역적이 되고 노산에게는 충신이 되는데, 그때에는 부득이 죄를 가하였으나 이제는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예전에 정공(丁公)599) 이 한 고조(漢高祖)에게로 돌아가매 한 고조가 참(斬)하였는데, 이 일이 성삼문의 일과 서로 비슷합니다. 단병(短兵)600) 으로 교전할 때에는 정공이 한 고조에게 덕이 되었으나 항우(項羽)에게는 실절(失節)이 되었으니, 한 고조가 개국(開國)한 뒤에는 참하여 절의를 격려한 것은 마땅합니다. 성삼문·박팽년을 이제껏 난신으로 지목하니 어찌 이처럼 답답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자손은 이제 없거니와, 그 외자손(外子孫)이 혹 있더라도 저애(阻礙)됨이 없지 않을 터이니 이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다 허통(許通)601) 해야 합니다. 신이 매양 아뢰고자 하였으나 못한 것이거니와, 만약에 아뢴 대로 도타이 숭장하면 곧 국맥(國脈)을 연장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고, 민수원이 아뢰기를,
"좌우가 아뢴 대로 권장하여 사기를 격려해야 합니다."
하고, 이청이 아뢰기를,
"세조께서 하늘에 응하고 백성을 따랐는데, 성삼문 등이 오히려 노산을 복위시키려고 꾀하였으니 세조에게는 역적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껏 난신으로 지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 정몽주의 일은 더욱 가상하고 아름습니다."
하고, 기준이 아뢰기를,
"위란(危亂)할 즈음에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여 이와 같은 몇몇 사람이 있는 것은 워낙 드문 일이니 추장(推奬)해야 합니다. 무왕(武王)은 지극히 거룩한데도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오히려 말을 당기면서 간(諫)한 까닭은 군신(君臣)의 분수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하고서야 나라가 쇠약해지더라도 전복하는 화(禍)가 없고, 어진 사람이 많이 나서 사직(社稷)이 힘입을 바가 있을 것입니다. 세조조에서도 어찌 성삼문 등의 절의를 몰랐겠습니까마는 문죄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감히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조정에 의논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정순붕(鄭順朋)이 아뢰기를,
"소릉(昭陵)602) 을 추복(追復)하는 일은 매우 좋습니다. 또 신이 종묘(宗廟)의 제도를 보건대, 1실(室)·2실·3실, 그리고 8실에 이르기까지 다 차서대로 벌여 있는데 4실 【곧 문종(文宗)의 실(室)이다.】 은 한 모퉁이에 따로 나와 있으니, 만약에 처음부터 이렇게 하였다면 이는 처음부터 잘못한 것이며, 이미 그 실에 들어갔는데 뒤에 어느 일로 말미암아 나가게 되었다면 옳지 않습니다. 대저 종묘의 제도는 소신(小臣)도 모르나, 문소전(文昭殿)603) 의 제도는 소목(昭穆)604) 에 따랐는데, 종묘의 제도는 소목에 따르지 않은 까닭은 또한 무엇입니까? 소신이 보고서 마음에 미안하게 여긴 지 오랩니다."
하고, 김극핍(金克愊)이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아뢴 것은 다 성덕(聖德)을 믿고서 말한 것입니다. 성삼문 등의 일로 말하면, 정몽주의 일과 나란히 견줄 수는 없으나 성삼문 등의 외손(外孫) 중에 지금 이미 사로(仕路)에 나온 자가 있으니, 현직(顯職)에 통할 수 있도록 하면 사람들이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하고,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다른 사람의 자손은 없으나, 다만 박팽년의 외손 이귀(李龜)와 성삼문의 외손 박호(朴壕) 등이 있으니 다 현직에 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종묘 4실(室)의 제도는, 공정 대왕(恭靖大王)605) 께서 먼저 4실에 들어가셨다가 성종(成宗)께서 부묘(祔廟)606) 되실 때에 공정 대왕께서 영녕전(永寧殿)에 입묘(入廟)되고 문종(文宗)께서 그 실에 들어가셨습니다. 문소전의 제도는 전전(前殿)이 있고 또 후전(後殿)이 있는데, 전전은 소목의 차서로 모셨으나 후전은 소목의 차서로 하지 않았습니다. 종묘 4실의 제도는 신도 잘 알 수 없으나, 아뢴 의논과 같은 데가 있습니다."
하고, 기준(奇遵)이 아뢰기를,
"4실의 제도에 있어서는 차서를 옮기기까지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 종묘의 제도에서 본 것이 있어서 말을 한 것이나 모두가 조종조(祖宗朝)에서 정한 제도이고, 지금은 그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
하였다. 지사(知事) 김전(金詮)이 아뢰기를,
"성삼문·박팽년 등의 일을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을 편집할 때에 신이 먼저 의논을 내어 기록하고자 하였으나, 의논이 같지 않아서 기록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충적(忠籍)에 기록하여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극진히 해야 합니다."
하고,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절의(節義)에 대해서는 포숭(褒崇)을 극진히 해야 하니, 김극핍(金克愊)이 한 말은 헛말입니다. 각별한 은전을 써서 포숭해야 합니다."
하고, 정순붕(鄭順朋)이 아뢰기를,
"미워하되 그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 군자(君子)가 임금을 보도하는 도리입니다."
하고, 기준이 아뢰기를,
"임금으로서는 절의를 배양하여 사기(士氣)를 일으켜야 하니, 과연 김전이 아뢴 바와 같이 《속삼강행실》에 기록하면 좋겠습니다."
하고, 정순붕이 아뢰기를,
"사기를 배양하려면 먼저 절의를 숭상해야 합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2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304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가족-친족(親族) / 농업-권농(勸農) / 농업-양잠(養蠶) / 윤리-강상(綱常) / 정론-간쟁(諫諍) / 재정-역(役) / 재정-공물(貢物)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군사-군정(軍政)
[註 589]칠월(七月) : 《시경(試經)》의 편명(篇名).
[註 590]무일(無逸)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註 591]포승(褒陞) : 성적을 칭찬하여 아뢰어 승진토록 하다.
[註 592]함문(緘問) : 함서(緘書)로 따져 묻는 것.
[註 593]정부(政府) : 의정부(議政府).
[註 594]육경(六卿) : 육조 판서.
[註 595]성상소(城上所) :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각각 한 사람의 관원(官員)이 나와서 공사(公事)의 출납(出納)을 맡아보는 직소(職所), 또는 그 관원을 가리키기도 한다. 마치 다른 관사(官司)의 장무(掌務)와 같은 것이다.
[註 596]간대부(諫大夫) : 사간 대부(司諫大夫)의 약칭. 길재(吉再)는 세종 8년 12월에 사간원 좌사간 대부(司諫院左司諫大夫)로 추증(追贈)되었다.
[註 597]숭의전(崇義殿) : 고려의 네 임금, 곧 태조(太祖)·현종(顯宗)·문종(文宗)·원종(元宗)을 모신 사당. 경기 마전(麻田)에 있다.
[註 598]노산군(魯山君) : 단종(端宗).
[註 599]정공(丁公) : 정고(丁固).
[註 600]단병(短兵) : 창검 따위 작은 무기.
[註 601]허통(許通) :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허가하다.
[註 602]소릉(昭陵) : 문종(文宗)의 비(妃) 현덕 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능. 여기서는 현덕 왕후를 지칭하는 말. 본디 현덕 왕후는 경기 안산(安山) 땅에 장사하고 그 능을 소릉이라 하였었는데, 세조 때에 폐하여 해빈(海濱)으로 이장하였었고, 중종 때에 추복(追復)하여 현릉(顯陵:문종의 능)으로 다시 이장하였다.
[註 603]문소전(文昭殿) : 본디 태조 때에 태조의 비(妃)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사당을 세워 인소전(仁昭殿)이라 하였던 것을 태종 때에 이 이름으로 고쳤고, 세종 때에 태조와 태종의 위패(位牌)를 모셨다.
[註 604]소목(昭穆) : 사당에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태조(太祖)를 중앙 상위(上位)에 두고, 그 좌열에 2세·4세……를 두어 소(昭)라 칭하고, 우열에 3세·5세……를 두어 목(穆)이라 칭한다.
[註 605]공정 대왕(恭靖大王) : 정종(定宗).
[註 606]부묘(祔廟) : 조상의 묘에 합사(合祀)하는 것.
122.중종실록 29권, 중종 12년 8월 5일 무신 8번째기사 1517년 명 정덕(正德) 12년
묘현·절의 등의 일을 군신에게 연방하다
상이 묘현(廟見)·절의(節義) 등의 일을 군신(群臣)에게 연방하였다.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묘현의 일은, 신 등이 당초의 의논을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워낙 거행해야 할 예(禮)이나, 친영(親迎)도 우리 나라에서는 행하지 않던 것을 행하였는데, 행한 뒤에 마땅하다고도 하고 마땅하지 않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위에서 융례(隆禮)를 아래에 보이는 것이니 무방합니다. 이 묘현으로 말하면, 당(唐)·송(宋)에서 이미 행하였다고는 하나 예전과 지금은 마땅한 것이 다르며, 우리 나라는 남부(男夫)의 예도(禮度)도 소활(疏闊)한데 부인(婦人)의 예도는 맞게 할 수 있을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또 되도록 간실(簡實)하게 하고자 하더라도 부녀(婦女)의 종자(從者)가 많지 않겠습니까? 고례를 행하려 하다가 지금에 맞지 않는 것보다는 선왕(先王)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낫습니다. 절의의 일은, 국가에서 원기(元氣)를 배양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길재(吉再)·정몽주(鄭夢周)는 선왕조(先王朝)에서도 포장(褒奬)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근래 폐기하고서 수거(修擧)하지 않으므로 신명(申明)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는 좋은 뜻입니다.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의 일로 말하면, 당대에는 버려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젊은 유사(儒士)가 이것을 말하면, 상께서는 그런 줄 알고 마실 뿐이요, 절의가 가상한 사람이 있더라도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평안도의 일은, 신상(申鏛)에게 이야기해서 보내고자 하는 것이니 이는 아름다운 일이나, 신상(申鏛)도 범상한 사람이 아니므로 저들을 접대하는 일과 변방의 방비에 관한 일들은 다 그 마음으로 처치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우의정 신용개(申用漑)·좌찬성 김전(金詮)·병조 판서 고형산(高荊山)·좌참찬 이계맹(李繼孟)·호조 판서 안당(安瑭)·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한세환(韓世桓)·예조 참판 조계상(曺繼商)·병조 참판 유미(柳湄)·호조 참판 이자견(李自堅)·한성부 좌윤 윤희평(尹熙平)·이조 참판 김극핍(金克愊)·한성부 우윤 이자화(李自華)·공조 참판 방유령(方有寧)·공조 참의 정광국(鄭光國)·호조 참의 박소영(朴召榮)·병조 참의 서극철(徐克哲)·참지(參知) 박호겸(朴好謙) 등의 계사(啓辭)도 같았으며, 형조 참판 이사균(李思鈞)이 아뢰기를,
"묘현의 일은, 행하고자 하는 자는 고례를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고, 행하지 않고자 하는 자는 시의(時宜)에 맞지 않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미 친영(親迎)을 행하였으면 묘현을 행해야 하는데, 이미 친영을 행하고서 묘현을 행하지 않으면 예(禮)에 갖추지 못한 바가 있게 되거니와, 큰일을 하고자 하는 자라면 군의(群議)가 어렵게 여기든 쉽게 여기든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또 조종(祖宗)께서 행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매우 옳지 않습니다. 주(周)나라의 예악(禮樂)은 성왕(成王) 때에 이르러서야 크게 갖추어졌으니, 무릇 일에 있어서 선왕이 행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묘현은 정례(正禮)에 맞으므로 진실로 의심없이 행해야 합니다."
하고, 이조 참의 김안로(金安老)가 아뢰기를,
"묘현의 일은 성인(聖人)의 정례인데, 고례가 오래 폐기되었던 것을 문득 회복하려 하므로 뭇사람이 다 어렵게 여기는 것이나, 혼례는 지극히 중하니 이미 대혼(大婚)의 예(禮)를 바로 하였으면 묘현을 행하기에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절의(節義)는 국가가 원기를 배양하는 큰일인데 폐조(廢朝)의 정치가 혼란한 뒤로 절의가 퇴폐하였으니, 정몽주 등은 특별히 치제(致祭)609) 하고 또 그 자손을 찾아서 녹용(錄用)해야 합니다. 성삼문·박팽년은 다른 초사(招辭)에 연루된 일이 아니므로, 전에 《속삼강행실》을 지을 때에 그려서 올리려 하였으나 당대의 일이라 하여 의논이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성종조(成宗朝)에서도 그 자손으로서 금고(禁錮)610) 된 자를 풀어 주었으니, 이제 그 자손을 현직(顯職)에 통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우승지(右承旨) 이자(李耔)가 아뢰기를,
"근일 예전에 없던 성례(盛禮)를 행한 것을 대소 신민(大小臣民)이 누구인들 탄미(嘆美)하지 않겠습니까? 아랫사람이 묘현을 행해야 한다고 하는 것도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대신(大臣)은 나라의 습속에 없던 일이라 하여 시의(時宜)에 어그러지는 일일 것이라 하나, 아랫사람은 이미 정례를 행하고서도 끝내 정례를 행하지 못하는 것을 미진(未盡)하게 여겨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상께서 처음에 고례(古禮)를 찾아서 행하셨는데 이제 습속에 구애되어 행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상께서 다시 짐작하셔야 합니다."
하고, 김안로가 또 아뢰기를,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폐조(廢朝)에서 억울하게 죄를 입었으니, 그 자손은 주죄(誅罪)된 사람의 자손의 예(例)로 녹용할 수 없습니다. 어진 사람의 후손으로 녹용하고 그 처자로 하여금 기한(飢寒)을 면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정광필·신용개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대신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매, 정광필 등이 같은 말로 대답하기를,
"도리를 지키고 실천한 사람은 포장해야 합니다."
하고, 김전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학문이 순정(醇正)하고 명예와 세력에 뜻을 두지 않았으니 정파(正派)를 얻은 사람입니다. 학자가 종사(宗師)로 삼아 마침내 그 학행(學行) 때문에 화(禍)가 미쳤으니 매우 애석합니다."
하고, 이자가 아뢰기를,
"김굉필·정여창은 학술이 순정하여 우리 나라에는 이런 사람이 없으니, 선비들이 향방을 알게 된 것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의 공(功)에 힘입은 것입니다. 예전에 증직(贈職)하여 포장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어찌 어진 사람에게 관계되겠습니까마는 나라를 맡은 이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자손도 녹용해야 합니다."
하니,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묘현(廟見)의 일은 군의(群議)가 다 행하기를 어렵게 여기니 홍문관(弘文館)에 말하라. 김굉필 등의 자손은 녹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29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306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윤리-강상(綱常) / 가족-친족(親族) / 인물(人物)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출판-서책(書冊) / 역사-고사(故事)
[註 609]치제(致祭) : 임금이 제수(祭需)·제문(祭文) 등을 내려서 제사하는 것.
[註 610]금고(禁錮) : 벼슬아치에 대한 처벌로, 벼슬에 서용(敍用)하지 않는 것. 이를테면, 파직하고서 영불서용(永不敍用)에 처하는 것이 이것인데, 당자뿐 아니라 자손에게도 미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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