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세조실록 34권, 세조 10년 8월 26일 정미 2번째기사 1464년 명 천순(天順) 8년
김종서·윤처공 등의 숙질을 편한대로 거주하게 할 것 등을 명하다
의금부(義禁府)·사헌부(司憲府)·형조(刑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김종서(金宗瑞)·윤처공(尹處恭)·이명민(李命敏)·이현로(李賢老)·이경유(李耕㽥)·원구(元矩)·조번(趙蕃)·김연(金衍)·고덕칭(高德稱)·황의헌(黃義軒)·중은(仲銀)·정효전(鄭孝全)·박계우(朴季愚)·조순생(趙順生)·정분(鄭笨)·조완규(趙完圭)·불련(佛連)·하위지(河緯地)·박중림(朴仲林)·성승(成勝)·박쟁(朴崝)·송석동(宋石童)·김문기(金文起)·유성원(柳誠源)·권저(權著)·김감(金堪)·이지영(李智英)·정관(鄭冠)·안우(安祐)·최득지(崔得池)·최사우(崔斯友)·이호(李昊)·장귀남(張貴男)·봉여해(奉汝諧)·황선보(黃善寶)·존자(存者)·조청로(趙淸老)·천동(千同)·이휘(李徽)·정유재(鄭有才)·선효장(宣孝章)·탁계(卓繼)·중산(仲山) 등의 숙질(叔姪)은 모두 외방(外方)에서 편(便)한대로 거주하게 하고, 그 나머지 잡범(雜犯)한 사람은 놓아서 보내라."
하고, 또 이조(吏曹)·병조(兵曹)에 전지(傳旨)하기를,
"불충(不忠)·불효(不孝) 이외의 죄로 거두어 들인 고신(告身)과 자급(資級)을 강등시킨 사람의 고신(告身)을 모두 되돌려 주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34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7책 648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142.세조실록 47권, 세조 14년 9월 6일 임술 3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계유년의 난신에 연좌된 사람들을 방면하다
계유년(癸酉年)450) 의 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사람으로 외방 종편(外方從便)한 자인 대정(大丁)의 숙부(叔父) 김타내(金他乃), 정관(鄭冠)의 숙부(叔父) 정순우(鄭純祐), 안우(安祐)의 서얼(庶孽) 조카 즉금오무지(則金吾無只), 장귀남(張貴南)의 숙부(叔父) 장말손(張末孫), 봉여해(奉汝諧)의 서얼 숙부(叔父) 봉덕생(奉德生), 황선보(黃善寶)의 조카 황장생(黃張生)·숙부(叔父) 황신(黃信), 황의헌(黃義軒)의 조카 황말동(黃末同)·황옥중(黃玉中)·황근중(黃謹中)·황철수(黃哲守), 정효전(鄭孝全)의 조카 정흥생(鄭興生), 조순생(趙順生)의 조카 조섬(趙銛), 정분(鄭苯)의 조카 정세존(鄭世存)·정옥수(鄭玉守)·정효동(鄭孝同)·정옥동(鄭玉同), 박계우(朴季愚)의 조카 박팽로(朴彭老), 김연(金衍)의 조카 김의동(金義同), 조완규(趙完圭)의 조카 조가마이(趙加麻耳)·조삼원(趙三元), 조번(趙藩)의 조카 조영달(趙永達), 식배(植培)의 조카 마질동(馬叱同)·개질동(介叱同)·우질동(牛叱同)·영산(永山)·명산(命山), 중은(仲恩)의 조카 개질동(介叱同), 원구(元矩)의 숙부 원미(元美)·원익달(元益達), 고덕칭(高德稱)의 조카 고중규(高仲規)·고석동(高石同)·고만동(高萬同)·고광대(高光大), 김종서(金宗瑞)의 조카 김영덕(金永德)·김무적(金無適)·김명찰(金明察), 윤처공(尹處恭)의 조카 윤상좌(尹上佐)·윤제(尹濟)·윤빈(尹濱), 이명민(李命敏)의 조카 이맹준(李孟準)·이은동(李銀同)·이은철(李銀哲)·이흥조(李興祖)·이영조(李榮祖)·이철동(李哲同)·이환승(李煥昇)·이연동(李年同)·이말손(李末孫)·이오을(李吾乙)·이미동(李未同)·이잉질동(李芿叱同)·이중동(李仲同), 이현로(李賢老)의 숙부(叔父) 이순지(李順之), 이경유(李耕㽥)의 조카 이유한(李維漢)·이말동(李末同)·이계동(李季同)·이엄(李儼)·이석동(李石同)·이말동(李末同)·이세중(李世中) 및 조충손(趙衷孫)과 공신(功臣)의 집에 급부(給付)되어 계집종이 된 자인 장귀남의 누이 학비(鶴非)·말비(末非), 황선보의 누이 소사(召史), 조완규의 누이 정정(精正), 중은의 누이 귀덕(貴德), 원구(元矩)의 누이 심이(心伊), 양옥(梁玉)의 누이 의비(義非), 김유덕(金有德)의 누이 막장(莫莊), 황귀존(黃貴存)의 누이 후존(厚存)·윤존(閏存)과 여러 고을에 안치(安置)된 자인 원구의 조카 원효손(元孝孫), 고덕칭(高德稱)의 조카 고맹규(高孟規), 최노(崔老)의 누이 내은이(內隱伊)·내은덕(內隱德)과 병자년(丙子年)451) 난신(亂臣)에 연좌된 사람으로 내외방(內外方)에 종편(從便)한 자인 조청로(趙淸老)의 숙부(叔父) 조수산(趙壽山)·조강산(趙江山), 조카 조우질동(趙牛叱同)·조천동(趙千同), 하위지(河緯地)의 조카 하포(河浦)·하분(河汾)·하귀동(河龜同), 이휘(李徽)의 서얼 숙부(叔父) 이재(李才), 권저(權著)의 조카 권손건(權孫件)·권이동(權伊同)·권막동(權莫同), 이호(李昊)의 조카 이영석(李永石), 박중림(朴仲林)의 조카 박사제(朴斯悌)·박사평(朴斯枰)·박사정(朴斯禎)·박성년(朴成年)·박철수(朴哲守)·박개질동(朴介叱同), 박쟁(朴崝)의 조카 박경손(朴敬孫)·박겸문(朴謙文)·박신문(朴信文)·박수문(朴守文)·박사문(朴思文), 송석동(宋石仝)의 숙부 송인(宋仞), 김문기(金文起)의 서얼 숙부(叔父) 김구수(金仇守)·김개질지(金介叱知), 성승(成勝)의 조카 성만년(成萬年)·성조년(成兆年)·성억년(成億年), 유성원(柳誠源)의 조카 유종금(柳種今)·유연생(柳年生)·유수좌(柳守佐)·유문산(柳文山), 이지영(李智英)의 서얼 숙부 이유(李遺)·이의(李義) 및 성연(成燃)·성소(成炤)·안조술(安祖述)·최맹한(崔孟漢)·최계한(崔季漢)과, 공신(功臣)의 집에 급부(給付)되어 계집종이 된 자인 권저의 누이 소사(召史), 허조(許慥)의 누이 소근(小斤)·소사(召史), 이유기(李裕基)의 서얼 누이 효전(孝全), 최면(崔沔)의 누이 막비(莫非), 권저의 서얼 누이 소사(召史)와, 을유년(乙酉年)452) 난신에 연좌된 사람 안에서 여러 고을에 안치된 자인 김처의(金處義)의 조카 김서각(金犀角)·김문손(金文孫)·김용각(金龍角), 숙부 김효충(金孝忠), 서얼 숙부 김의송(金義松), 최윤(崔潤)의 조카 최효동(崔孝同)·최철산(崔哲山)·최철동(崔哲同)·최수정(崔水丁), 봉석주(奉石柱)의 숙부 봉안당(奉安唐)과, 관비(官婢)로 정속(定屬)된 자인 최윤의 서얼 누이 수덕(水德),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종[奴]이 된 자인 김처의의 조카 김삼각(金三角)·김인각(金麟角)·김삼동(金三同)·김범이(金凡伊)·김귀각(金龜角)·김종각(金終角) 최윤의 서얼 조카 최춘동(崔春同)·최소산(崔小山)과 임실(任實)에 부처(付處)된 오응(吳凝), 의주(義州)에 충군(充軍)된 문상덕(文尙德)과, 관노(官奴)로 해남(海南)에 영속(永屬)된 이강(李崗), 함열(咸悅)에 영속된 이한(李閒), 대흥(大興)에 정속(定屬)된 유소(劉昭), 충주(忠州)에 정속된 최윤(崔倫)과 유인(流人)으로 광양(光陽)의 이종근(李宗根), 순천(順天)의 안극돈(安克頓), 영해(寧海)의 배효사(裵孝思)와 진주(晉州)에 부처된 나유선(羅裕善)을 방면하였다. 이때에 세자(世子)가 임금의 병이 심하여 근심하고 걱정하며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계유년(癸酉年)453) 이래의 난신의 숙질(叔姪)과 자매(姉妹)의 연좌자(緣坐者) 무릇 2백여 인을 의논하여 방면한 것이다. 좌의정(左議政) 박원형(朴元亨)의 공신 비첩(功臣婢妾) 의비(義非)도 또한 방면한 중에 들어 있었으므로 박원형이 자못 불평(不平)을 품고 동부승지(同副承旨) 한계순(韓繼純)에게 말하기를,
"의비는 본래 천인(賤人)에 속하였으므로 방면해도 또한 천인(賤人)이요, 방면하지 아니한다 해도 또한 천인이며, 하물며 이 계집종[婢]은 곧 나의 공신 녹권(功臣錄券)에 기록된 비자(婢子)이겠는가? 그를 대신하여 또한 충급(充給)에 응(應)할 것이니, 청컨대 이러한 뜻을 주달(奏達)하라."
하였으나, 한계순이 묵연(默然)하니,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이 한계순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어찌하여 처음에 도모하지 아니하였는가? 지금 비록 즉시 계달(啓達)하지 아니하고 황표(黃標)로 의비(義非)란 두 글자를 덮어 붙여 전지(傳旨)를 내리더라도 방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나, 한계순이 또 묵연하더니, 상량(商量)하기를 오랫동안 하다가 의비란 두 글자 곁에 빈 황표(黃標)를 붙이고 박원형의 말한 바를 주달(奏達)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오늘 아침에 봉원군(蓬原君)454) 이 이르기를, ‘연좌된 자가 비록 본래 천인에 속하였다고 하더라도 본주(本主)에게 방환(放還)하는 것이 또한 성상의 은총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일이 이미 의논하여 정해졌는데 되돌려 달리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하고, 드디어 듣지 아니하였다. 정창손의 공신 노비도 또한 방면된 자가 있었으나 정창손은 대략 개의(介意)하지 아니하였다. 의비는 처음에 박원형의 재종숙(再從叔)의 첩(妾)이었는데, 이미 연좌되자 박원형이 드디어 공신비(功臣婢)로 점유하여 첩을 삼아 두 아들을 낳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47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8책 209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註 450]계유년(癸酉年) : 1453 단종 원년.
[註 451]병자년(丙子年) : 1456 세조 2년.
[註 452]을유년(乙酉年) : 1465 세조 11년.
[註 453]계유년(癸酉年) : 1453 단종 원년.
[註 454]봉원군(蓬原君) : 정창손.
143.성종실록 67권, 성종 7년 5월 2일 갑진 1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경연에서 송거의 부거 문제로 군신간에 논란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이숙문(李淑文)이 아뢰기를,
"이번에 송거(宋琚)를 과거(科擧)에 응시하게 한 것은 매우 불가(不可)한 것입니다."
하였고, 정언(正言) 이세광(李世匡)은 아뢰기를,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罪惡)이므로 백세(百世)토록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신의 친자식으로 하여금 조정(朝廷)의 반열(班列)에 다시 끼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내금위(內禁衛)는 임금의 좌우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이니, 역신(逆臣)의 아들을 거기에 소속시킬 수는 없습니다. 내금위도 그러한데, 더구나 과거를 보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현수(宋玹壽)는 직접 난역(亂逆)을 범(犯)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연좌(緣坐)되었을 뿐인데, 그의 자손(子孫)이 비록 과거에 응시한다고 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고, 이어 좌우(左右)에게 문의하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은 대답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 박습(朴習)·심온(沈溫)은 직접 난역(亂逆)을 범(犯)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정(朝廷)에서 용납될 수 없었는데, 송현수(宋玹壽)는 이에 직접 난역을 범한 자입니다. 그러니 그 아들을 응시케 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하였고, 영사(領事)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세조(世祖)께서 성삼문(成三問)·유성원(柳誠源)·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을 명유(名儒)라 하여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으나, 성삼문 등은 성상(聖上)의 은혜는 생각지 않고 난역(亂逆)을 꾀하였었는데, 그 당시 송현수(宋玹壽)가 그들에게 칼을 주었으니, 이것이 함께 난역을 꾀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삼문(成三問)이 형(刑)을 받았을 때에, 송현수(宋玹壽)는 그 몸을 보전할 수 있었는데, 노산(魯山)이 쫓겨나자 형(刑)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한명회(韓明澮)가 대답하기를,
"그 때에는 옥사(獄辭)가 끝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또 아뢰기를,
"과거(科擧)는 국가에서 엄중하게 선발(選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난신(亂臣)의 자손을 과거에 응시하게 하고 있는데, 이처럼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으니, 이는 대의(大義)에 있어 미안(未安)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거(宋琚)는 이미 내금위(內禁衛)가 되어 벌써 벼슬길을 터놓고 있으니, 과거에 응시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지사(知事)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난신(亂臣)의 자손을 굳이 그렇게 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참작하겠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6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9책 337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사법-재판(裁判) / 가족-친족(親族) / 군사-중앙군(中央軍)
144.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2일 병오 5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유자광의 심문으로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이개·박팽년·하위지의 일에 대해 말하다
유자광(柳子光)이 사초(史草)를 가지고 축조(逐條)하여 심문하니, 김일손(金馹孫)이 말하기를,
"신의 사초(史草)에 기록한 바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 한 것은 신의 생각에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소릉(昭陵)의 재궁(梓宮)059) 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은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었고, 이개(李塏)·최숙손(崔叔孫)이 서로 이야기한 일과 박팽년(朴彭年) 등의 일과 김담(金淡)이 하위지(河緯地)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 일과, 이윤인(李尹仁)이 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 한 일과, 세조가 그 재주를 애석히 여기어 살리고자 해서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효유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나아가 죽었다는 일은 모두 고 진사(進士)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30권 5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316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註 059]재궁(梓宮) : 무덤.
145.연산군일기 42권, 연산 8년 1월 8일 신사 4번째기사 1502년 명 홍치(弘治) 15년
병조에서 야인을 잡은 공에 대한 논공에 관하여 묻다
병조가 아뢰기를,
"평안도 절도사(節度使) 유순정(柳順汀)이 저 적을 사로잡고 논공(論功)하는 계본(啓本)에, 1등 김자치(金自治) 등 20인은 ‘적을 사로잡음[摛賊]’이라 칭하고, 2등 이종인(李宗仁) 등 54인은 ‘뒤를 밟아서 쫓음[尋蹤追逐]’이라 칭하고, 3등 노자강(盧自江) 등 7백 83인은 ‘적을 포위함[圍賊]’이라고 칭하여 등급을 나누어 계문(啓聞)하였는데, 신 등의 생각에는, 저들 5인이 본디부터 변방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고 국경에 나왔다가 군대의 위세(威勢)를 보이던 병졸 1천여 명을 만나 혹 죽거나 사로잡혔으니, 우리 군사의 나간 것이 처음부터 절도사(節度使)의 장병들이 계획을 짜낸 것도 아니고 또한 자기 목숨을 버리고 적군에 나아가 싸운 예(例)도 아닌데, 이로써 등급을 나누어 논공하는 것은 외람된 일인 듯합니다. 그러나 근래 서쪽 변방의 장병들이 여러번 적군의 침범을 입어 심기(心氣)가 저상되어 있으니, 지금 만약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지 않는다면 권장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3등을 통틀어 각각 한 품계(品階)씩만 올려 주고, 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022) 하고 가자(加資)할 수 없는 사람은 면포(綿布) 5필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삼공(三公)023) 으로 하여금 이 일을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파평 부원군(坡平府院君) 윤필상(尹弼商),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좌의정 성준(成俊), 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부름을 받고 와서 아뢰기를,
"병조(兵曹)가 아뢴 것이 지당합니다. 다만 평안도 사람들이 겨울과 여름에 국경을 지키느라고 그 노고가 다른 도(道) 사람보다 배나 되니, 청컨대 은전(恩典)을 특별히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권면되도록 하소서. 그래서 포상 절목(褒賞節目)을 녹계(錄啓)합니다. 1등은 각각 두 품계(品階)를 올려주되, 다만 고사리 첨사(高沙里僉使) 이극정(李克靖)은 이미 자궁(資窮)이 되었으나 유명한 무인(武人)으로서 변방의 사무에 숙달하여 그 재주가 쓸 만하온데, 자궁한 사람에게 한 자급을 더해 주면 당상관(堂上官)이 될 것이므로 신 등이 감히 함부로 아뢰지못하고 취품(取稟)합니다. 관노(官奴) 5인에게는 병조가 면포(綿布) 5필을 주어야 된다고 아뢰었으나, 각기 5필씩을 더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2등과 3등은 한 품계를 올려주고 자궁한 자에게 대가(代加)하는 것은 병조의 아뢴 대로 좇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절도사(節度使) 유순정(柳順汀)은 이미 주장(主將)이 되었으니, 포장(褒奬)을 가하기를 청합니다.
또 신 등이 듣자옵건대, 직제학(直提學) 정광필(鄭光弼)을 정시(庭試)에 제술(製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반(西班)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신이 듣기에는 광필(光弼)이 정시보는 날 숙부 난손(蘭孫)의 아내와 숙부 난무(蘭茂)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대궐에 나왔는데도 능히 제술하지 못했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집에 있으면서 제술하지 않은 것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문종(文宗) 때에 하위지(河緯地)는 정시에 들어왔으나 형 강지(綱地)가 죽었단 소식을 듣고 또한 제술하지 않았는데, 뒷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옳게 여겼습니다. 광필(光弼)은 글을 잘하는 선비이므로 국가에서 마침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신 등이 그 사정을 이와 같이 들었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평안도 사람들의 논공 행상(論功行賞)은 아뢴 대로 하되, 이극정(李克靖)에게 한 품계를 올려 당상(堂上)으로 승진시키는 일과 절도사(節度使)에게 포장(褒奬)을 가하는 일은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광필(光弼)은 서반(西班)으로 보내지 말라."
하였다. 필상(弼商) 등이 아뢰기를,
"순정(順汀)에게는 중국 옷감의 표리(表裏) 한 벌[事]과 숙마(熟馬)024) 1필을 내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의 추안(推案)을 보았다. 다만 좌우 재상(宰相)들을 침범하여 핍박했다. 자기 위치를 넘어서 거리낌없이 떠들고 희학했다 하는데, 이른바 침범하여 핍박했다는 것이 누구이며, 떠들고 희학했다는 것이 무엇이냐? 다시 상고해서 아뢰라."
하니, 지평 유응룡(柳應龍)이 아뢰기를,
"그날 이즙(李諿)은 치원(致元)의 윗자리에 앉았고, 윤탄(尹坦)은 치원(致元)의 아랫자리에 앉았는데, 치원이 끌어당기면서 장난을 했던 까닭으로 좌우를 침범하여 핍박했다고 한 것이며, 이른바 자기 위치를 넘어서 함부로 행동했다는 것은 치원이 그날 자기 자리에 앉지 않고 아랫자리에 앉기도 하고 윗자리에 앉기도 하며 부산하게 왕래하면서 떠들고 조금도 예모(禮貌)가 없었던 까닭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시추(時推)로써 율에 비추어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4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460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군사-지방군(地方軍) / 왕실-사급(賜給) / 사법-재판(裁判)
[註 022]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 : 자궁자란 당하관으로서 더 올라갈 수 없는 통훈 대부(通訓大夫)의 품계를 말하는데, 그는 공이 있더라도 더 올라갈 품계가 없기 때문에 아들·사위·동생·조카 등에게 대신으로 자급을 받게 했음.
[註 023]삼공(三公) : 삼정승(三正丞).
[註 024]숙마(熟馬) : 길이 잘 든 말
146.중종실록 17권, 중종 7년 11월 25일 을미 2번째기사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영의정 유순정이 소릉의 시말을 고찰하여 상소하다
영의정 유순정(柳順汀) 등이 소릉의 시말(始末)을 고찰한 것을 아뢰었는데, 대략에,
"신유년502) 7월 23일에 권씨(權氏)503) 가 훙(薨)하였고, 【이날 노산군(魯山君)이 탄생하였다.】 임신년504) 5월 14일에 문종(文宗)이 훙하셨습니다. 병자년505) 5월 을사(乙巳)에 좌승지 구치관(具致寬)에게 명하여 의금부에 가서 성삼문(成三問)에게 묻기를 ‘상왕(上王)506) 께서도 너희들의 모의를 참여하여 아시는가’ 하니, 성삼문이 ‘아십니다. 권자신(權自愼)이 그의 어머니에게 고하여 상왕께 통하였고, 뒤에 자신과 윤영손(尹令孫) 등이 누차 나아가 약속하여 기일을 고하였으며, 그날 아침에 자신이 먼저 창덕궁으로 나아가니, 상왕께서 장도자(長刀子)를 주셨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치관이 또한 자신에게 물었는데, 대답이 삼문과 같았습니다.
정축년 6월에 의정부가 아뢰기를 ‘현덕 왕후(賢德王后) 권씨(權氏)의 어머니 아지(阿只) 및 동생 자신이 모반(謀反)하다가 복주(伏誅)되었고, 그의 아버지 권전(權專)은 추폐(追廢)하여 서인(庶人)이 되었고, 또한 노산군은 종사(宗社)에 죄를 얻어 이미 군(君)으로 강봉(降封)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아직 그대로 명호(名號)와 지위를 보존함은 합당하지 못하니, 추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개장(改葬)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습니다.
성종(成宗)무술년507) 에 유학(幼學) 남효온(南孝溫)이 상소하였는데, 그 첫 조목에
‘삼가 고찰하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는 하늘이 낸 용맹과 지혜, 일월(日月)같은 총명을 가지셔서 하늘과 사람의 도움으로 큰 변란을 평정하시어 화가위국(化家爲國)하심으로써 종사(宗社)가 위태하게 되었다가 다시 안정되었고, 백성들이 거의 죽게 되었다가 다시 소생하였는데, 뜻밖에도 병자년508) 에 여러 간신들이 난을 선동하다가 잇달아 복주(伏誅)되고, 남은 화가 소릉(昭陵)을 폐하는 데까지 미쳐, 20여 년 동안 원혼(冤魂)이 의지할 데가 없으니,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하늘에 계신 문종(文宗)의 신령이 어찌 홀로 약·사·증·상(禴祀蒸嘗)509) 을 받으려 하시겠습니까! 신은 학술이 없고 문견이 얕아, 진실로 어떤 일이 상서(祥瑞)를 가져오고 어떤 일이 어떤 재앙을 가져 오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난 일을 상고하고 짐작해 보니, 나의 마음이 곧 천지의 마음이요, 나의 기운이 곧 천지의 기운인즉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운이 순(順)함은 바로 천심(天心)과 천기(天氣)가 순함이요,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운이 순하지 못함은 바로 천심과 천기가 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마음과 하늘의 기운이 순하지 못하면 재앙이 내리게 되는 것인데, 신의 우매한 소견으로는 소릉(昭陵)을 폐한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순하지 못하였으니, 천심이 순하지 못할 것은 따라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설사 철훼한 사당의 신주는 다시 종묘(宗廟)에 모실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오직 존호(尊號)를 복구하고 다시 예장(禮葬)하여 한결같이 선후(先后)의 예(禮)처럼 하여, 생민의 여망에 답하고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며, 조종(祖宗)의 뜻에 보답한다면, 심상한 것보다는 몇 만 배나 나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만일 「폐한 지가 3대(代)를 지났으되 조종(祖宗)이 거행하지 않은 일이니, 지금 추복(追復)하고 예장할 수 없다.」 한다면, 세조(世祖)께서 무인년510) 에 하신 훈계로써 밝히겠습니다. 예종(睿宗)께 훈께하시기를 「나는 곤란한 때를 당했었지만 너는 순탄한 때를 당했는데도, 나의 행적(行跡)에 얽매여 변통할 줄 모른다면 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대체로 일이란 거행할 수 없는 때가 있고 거행할 수 있는 때가 있는 것인데, 어찌 전의 일에 구애되어 변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대명 황제(大明皇帝)가 경태(景泰)511) 를 추복한 어진 일이 뚜렷이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유의하시어 채택하소서.’
하였는데, 명하여 승정원에 보이게 하시자,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이 아뢰기를 ‘신이 이 상소를 보건대 「소릉을 추복하자」 하였는데, 이는 신자(臣子)로서 의논할 수 없는 것을 지금 남효온이 함부로 의논한 것이니, 역시 불가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소릉을 지금 복구할 수 없다.’ 하셨고, 이튿날 경연(經筵)에서 상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시기를 ‘어제 유생(儒生) 남효온의 상소에 소릉 폐한 일을 말하였으나, 선왕(先王) 때의 일이어서 사세가 복구하기 곤란한데, 경 등은 아는가?’ 하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주대(奏對)하기를 ‘그 상소한 말을 보건대, 모두 지나치고 절당하지 못한 것이어서 진실로 채택하여 거행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그때의 말을 보건대 지극히 자상하고 세밀하다. 그러나 조종 때의 오랜 일로서 가벼운 일이 아닌 듯하니, 정부(政府)·부원군(府院君)·육조 참판·한성부 전원으로 하여금 의계(議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626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註 502]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503]권씨(權氏) : 문종 비.
[註 504]임신년 : 1452 문종 2년.
[註 505]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506]상왕(上王) : 단종.
[註 507]무술년 : 1478 성종 9년.
[註 508]병자년 : 1456 세조 2년. 이해 6월 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端宗)을 복위시키려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註 509]약·사·증·상(禴祀蒸嘗) : 중국 주대(周代)의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의 이름으로, 사는 봄, 약은 여름, 상은 가을, 증은 겨울 제사이다.
[註 510]무인년 : 1458 세조 4년.
[註 511]경태(景泰) :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로, 경제를 가리킨다. 영종(英宗) 때 성왕(郕王)으로 있다가, 영종이 북정(北征)하는 사이 황태후(皇太后)에 의해 제위에 올랐으나 8년 만에 영종에 의해 폐위되었다.
147.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 4월 9일 신축 1번째기사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조강에 나아가다
조강에 나아갔다. 시강관(侍講官) 한주(韓澍)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사위(嗣位)하시자 조야(朝野)가 태평한 정치를 바라니, 무릇 다스리기 위한 도리를 어찌 유념하시지 않겠습니까마는, 먼저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세에는 기화(氣化)가 매우 투박하므로 반드시 학문의 공을 깊이 하여야 재주가 성취될 수 있으며, 나면서부터 아는 성인은 참으로 얻기 어렵습니다. 기묘년에 실패하고부터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하여 학문을 일삼지 않으므로 훌륭한 인재가 나오지 않고 기절(氣節)이 땅을 쓴 듯이 없으니, 지금 먼저 힘써야 할 것은 사습을 바루고 기절을 떨치는 것뿐입니다. 조광조의 일을 대간과 시종이 여러 번 아뢰어 마지않았는데, 어제 경연에서 짐작하여 하겠다는 분부가 계셨으므로 지극히 감격하였습니다. 조광조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아셨으면 시원스럽게 그 말을 따라서 사림을 위안하셔야 옳을 것인데, 이미 시비를 알고도 이토록 망설이시니, 착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참되지 못하신 것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습을 바루어 학자들에게 향방(向方)을 알게 하려면 이보다 중대한 것이 없거니와, 어진 사람을 포양하는 것은 제왕의 성대한 일입니다.
노산군(魯山君)이 어둡고 나이 어려 종사(宗社)가 위태로우므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다 세조(世祖)께 돌아가서 즉위하셨으니, 이것은 종사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마지못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뒤에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 등이 난(亂)을 꾀하다가 주살(誅殺)되었습니다. 대개 충의(忠義)의 인사는 이러한 때에 많이 나오거니와, 저 육신(六臣)은 그때에 있어서는 대죄(大罪)를 입어 마땅하나, 그 본심을 논하면 옛 임금을 위한 것입니다.
송 태조(宋太祖) 때에 왕언승(王彦昇)이 한통(韓通)을 죽이자,305) 태조가 제마음대로 죽인 죄를 주려고 하니 뭇 신하가 간(諫)하였으므로 그만두었으나 종신토록 절월(節鉞)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태종(太宗) 때에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를 아울러 포상하였습니다. 이것은 다 제왕이 피아의 차이 없이 천하를 공정하게 대하는 성대한 마음입니다. 세조께서 육신(六臣)에 대하여 어찌 아름답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위태롭고 의심스러울 때이므로 어쩔 수 없이 죄를 주어서 인심을 진정시켰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당대의 난신(亂臣)이 후세의 충신이라 하였으니 바로 충의의 이름이 뒷사람에게는 아주 없어질 것이 염려되므로, 이러한 은미한 말을 하여 두 마음을 품는 신하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대개 인심과 천리(天理)는 속일 수 없으므로, 태종께서 정몽주를 포장(褒奬)하여 의심하지 않았고, 대행 대왕 때에도 그 자손을 등용하였는데, 무릇 이런 것은 모두가 제왕의 훌륭한 일입니다. 신정(新政)의 처음에 특별히 충의의 절조로 사림을 권장하면, 한때의 기습(氣習)이 절로 투박하여지지 않고 진작될 것입니다."
하고, 지사(知事) 정순붕(鄭順朋)은 아뢰기를,
"절의는 갑자기 일어날 수 없고, 반드시 배양하고서야 진작되는 것입니다. 정몽주·성삼문 등을 당시에는 마지못하여 죄를 주었더라도, 시비는 뒷날의 공론에서 절로 정하여졌습니다. 신이 일찍이 선왕 때에 이 뜻을 아뢰었더니, 선왕께서 이로 말미암아 두루 물으셨습니다. 전조(前朝)의 장령(掌令) 서견(徐甄)의 시(詩)에,
삼국을 통일한 공 어디 있는가
전조의 왕업 길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하였는데, 그때의 대간(臺諫)이 죄주고자 하였으나, 태종께서 ‘서견은 전조의 신하로서 본국(本國)을 위하여 이 시를 지었다. 나에게 이러한 신하가 있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셨습니다. 그 후사(後嗣)에게 규모를 보이신 방법이 이처럼 크므로, 세종(世宗) 때에 이르러 인재가 쏟아져 나와서 성대하게 나라의 빛이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오늘날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습을 바루고 기절을 기른다는 말은 매우 절실하다."
하였다. 영사(領事) 성세창(成世昌)은 아뢰기를,
"군자의 마음은 치우침이 없어 충(忠)에 뜻을 둘 따름이므로 형화(刑禍) 때문에 구태여 피하지 않고, 효(孝)에 뜻을 둘 뿐이므로 남의 말 때문에 스스로 현혹되지 않고, 염(廉)에 뜻을 둘 따름이므로 하찮은 물건이라도 구차하게 취하지 않는 등 무릇 착한 일에는 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권장하는 도리는 반드시 이런 사람에게 먼저 해야 하니, 그 포상하는 방법은 그 사람에게 벼슬을 추증해야 할 뿐 아니라 자손을 등용해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에서 찾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뒷날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오늘의 효자에게서 바랄 수 있으니, 대개 천하의 선(善)은 그지없고 군주가 선을 취하는 것도 그지없습니다. 청백한 관리도 반드시 포상하고 등용하여 풍성(風聲)을 세워야 하는데, 뒷사람이 사모하여 본뜰 자로서 어찌 마땅한 사림이 없겠습니까. 삼대(三代) 때에는 불목(不睦)·불효(不孝)에 대한 형벌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른바 악을 징계하는 뜻입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자가 반드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실상을 천하에 밝게 나타내야, 사람마다 선은 좋아할 것이고 악은 미워할 것인 줄 환히 알아 천하의 습속(習俗)이 그제야 바로잡힐 것입니다.
경(經)에 이르기를 ‘덕(德)이 유행(流行)하는 것은 우역(郵驛)을 두고 명을 전하는 것보다 빠르다.’ 하였고, 또 ‘정치라는 것은 포로(蒲蘆)이다.’306) 하였습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마땅히 뭇 사람이 발돋움하여 바랄 때에 밝게 보여야 하는 것이니 진실로 그 시기를 잃으면 일어나는 의기가 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선왕의 법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한때에 폐단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일이 시행할 만한지를 짐작하여 조정에 의논해서 빨리 시행하여야 합니다. 무릇 신이 임금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일찍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천안(天顔)을 가까이하자 십중 팔구는 잊었습니다. 이러한 경영(經營)에 관한 말을 들어 주는 것이 늦고 시행하는 것이 더디면, 아랫사람의 실망이 또한 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순붕은 아뢰기를,
"군주는 마땅히 아주 공정하고 사심이 없기로 마음먹어야 하니, 이미 그 근원을 바루고 나면 정치는 절로 맑고 밝아지는 것입니다. 밖으로부터 그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많으면 명철하더라도 점점 사사에 끌리는 해독이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군주는 마땅히 궁금(宮禁)을 엄숙하게 하여 안의 말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밖의 말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듣기로는 문안비(問安婢)라는 것이 어지러이 드나든다 하니, 신의 소견과 외정(外廷)의 의논은 다 ‘여알(女謁)307) 의 성행이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는 기필할 수 없으니 전감(前鑑)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족친(族親)이라도 위아래에 분별이 있는 것인데, 문안하러 드나드는 것이 번거로우면 혹시 일에 해로운 점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살펴서 하겠다고 일렀다. 특진관(特進官) 심연원(沈連源)은 아뢰기를,
"경연관의 절의(節義)에 관한 말은 국가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서한(西漢)은 절의를 숭상하지 않았으므로 왕망(王莾)이 하치않은 재주로 몰래 한(漢)나라의 정통을 옮기는데도 한 사람도 의리를 떨치는 이가 없었고, 동경(東京)308) 은 절의를 숭상하였으므로 환제(桓帝)·영제(靈帝) 때에 조조(曹操)같은 간웅도 종신토록 참호(僭號)하지 못하였으니, 절의는 치란(治亂)에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절의를 숭상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도 여러번 사화를 겪어 원기가 손상되었습니다. 폐조(廢朝)의 어지러운 때에는 그래도 선왕께서 배양하신 공에 힘입어 사습(士習)이 조금 떨쳐져서 기묘년 무렵에는 어진 사람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만났으므로 이상적으로 잘 다스려진 정치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고금의 처지가 다른 줄도 모르고 망령되게 삼대(三代)의 융성한 정치를 머지않아 곧 이룰 수 있다고 하다가 마침내 과격하였기 때문에 화를 일으켰습니다. 그 후 사림의 기절이 여지없이 아주 없어졌으니, 위에서 늘 유념하여 다시 떨칠 도리를 생각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습을 바루어 국맥을 유지하는 것이 정론인 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쉽사리 허락할 수 없는 뜻이 그 가운데에 있으므로 감히 시원하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언(正言) 심영(沈苓)이 아뢰기를,
"지금은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매우 좁아서, 양과(兩科)의 출신 이외에는 재주와 도(道)를 품은 현인·군자가 있더라도 사진(仕進)하여 품은 것을 펼 길이 없으므로, 마침내, 초목(草木)과 함께 썩게 됩니다. 이것은 정치에 매우 방해되니, 반드시 천거하는 법을 더욱 밝혀서 시행하되 천거된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천거한 사람을 죄주고 과연 어질면 중요한 직임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천거에는 잘못 천거되는 것이 없고 초야에는 버려둔 어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조종(祖宗) 때에는 양과의 출신이 아닌데도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는 자가 있었고, 문음(門蔭)으로도 문관(文官)의 벼슬에 있는 자가 있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반드시 어진 사람을 임용하는 데 차별이 없고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야 하니, 그래야 이상적으로 잘 다스려진 정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한 반드시 위에서 먼저 덕을 닦아 그가 어진 사람인 줄을 환히 알고서 위임하여 성취를 요구한다면, 어찌 제 집처럼 나라를 근심하여 위로는 임금의 덕을 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는 선비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신이 한림(翰林)이 되었을 때에 정청(政廳)309) 에 들어가면, 벼슬에 제수되는 자가 현명한가 우매한가는 묻지 않고 청탁한 자의 높낮이에만 따라서 주의(注擬)하는 것을 번번이 보았습니다. 사풍(士風)이 오로지 이 때문에 아름답지 못하고 염치가 이로 말미암아 크게 무너져서, 조급히 나아가려는 젊은 무리가 부형의 세력에 의지하여 갑자기 벼슬길에 오르고 몇 해만 지나면 곧장 수령이 되므로 학식이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는 것은 오로지 수령이 마땅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젊은 사람을 주의하지 말게 하되, 주의하는 자가 있거든 전조(銓曹)도 아울러 죄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정하지 않은 폐단이 많으므로 사람을 등용할 때에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전조는 살펴서 해야 하겠다."
하였다. 심영이 아뢰기를,
"근래 탐욕하는 풍습이 크게 행해져서 버젓이 뇌물을 주고받으므로, 법을 어긴 수령이 있더라도 심상하게 보고, 장죄(贓罪)를 입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도리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행해지겠습니까. 위에서 능히 선을 표창하고 악을 징계하여 선악을 구별하신다면 이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9책 224면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註 305]
송 태조(宋太祖) 때에 왕언승(王彦昇)이 한통(韓通)을 죽이자, : 조광윤(趙匡胤:송 태조(宋太祖))이 북정(北征)하러 가다가 진교(陳橋)에서 제군(諸軍)에 의하여 천자로 추대되었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돌아오는데, 군교(軍校) 왕언승이 먼저 경도(京都)에 들어와서 길에서 한통을 만나, 사람을 다치지 말라는 태조의 명을 어기고 한통을 집까지 쫓아가서 죽였다. 송 태조가 이 말을 듣고도 개국 초이기 때문에 차마 죄주지는 못하였으나 종신토록 절월(節鉞)을 주지 않았다. 《송사(宋史)》 권250 왕언승전(王彦昇傳), 《송사(宋史)》 권484 한통전(韓通傳). 절월은 모절(旄節)과 부월(斧鉞)로 모절은 막대 끝에 털로 몇 마디의 장식을 달아 만들고 부월은 도끼와 같이 만든 것인데, 지방의 절도사(節度使)가 부임할 때에 임금이 지휘·생살의 권한을 위임하는 뜻으로 준다. 왕언승은 방어사(防禦使) 등을 지냈으나, 끝내 부월을 주지 않아 생살을 천단(擅斷)하지 못하게 하였다.
[註 306]‘정치라는 것은 포로(蒲蘆)이다.’ : 정도(政道)가 빨리 유행하는 것이 마치 생장이 빠른 부들[蒲]·갈[蘆]과 같다는 뜻. 《중용(中庸)》.
[註 307]여알(女謁) : 여인의 청탁. 궁녀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은밀한 청탁을 하는 것.
[註 308]동경(東京) : 동한(東漢).
[註 309]정청(政廳) : 이조(吏曹)·병조(兵曹)의 전관(銓官) 등이 정사(政事:관리의 임명·전보 등에 관한 행정)를 위하여 모여 의논하는 청사. 궁궐 안에 있으며, 이조와 병조의 정청이 따로 있다.
148.선조실록 10권, 선조 9년 6월 24일 을유 1번째기사 1576년 명 만력(萬曆) 4년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보고 상이 괴이하게 여겨 토론에 부치다
상이, 경연관이 아뢴 바에 따라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을 가져다 보고 나서 삼공을 불러 전교하기를,
"이제 이른바 《육신전》을 보니 매우 놀랍다. 내가 처음에는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아랫사람이 잘못한 것이려니 여겼었는데, 직접 그 글을 보니 춥지 않은 데도 떨린다.
지난날 우리 광묘(光廟)034) 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中興)하신 것은 진실로 인력(人力)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 남효온이란 자는 어떤 자이길래 감히 문묵(文墨)을 희롱하여 국가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하였단 말인가? 이는 바로 아조(我朝)의 죄인이다. 옛날에 최호(崔浩)는 나라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했다는 것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으니,035) 이 사람이 살아 있다면 내가 끝까지 추국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 기록된 내용 가운데 노산 군(魯山君)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유년036) 에 출생하여 계유년037) 까지 그의 나이가 13세인데도 16세로 기록하였으며, 광묘께서 임신년038) 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었는데 여기에는 부음(訃音)을 가지고 중국에 갔다고 기록하였다. 또 하위지(河緯地)가 계유년에 조복(朝服)을 벗고 선산(善山)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광묘께서 즉위하여 교서(敎書)로 불렀기 때문에 왔다고 하였다. 하위지가 갑술년039) 에 집현전(集賢殿)에서 글을 올린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 왜곡되고 허탄함은 진실로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가슴아픈 것은 뒷사람들이 어떻게 그 일의 전말(顚末)을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한번 그 글을 보고 곧 구실(口實)로 삼는다면, 이 글은 사람의 심술(心術)을 해치기에 적당한 것이 될 것이다.
또 한가지 논할 것이 있다. 저 육신(六臣)이 충신인가? 충신이라면 어째서 수선(受禪)하는 날 쾌히 죽지 않았으며, 또 어째서 신발을 신고 떠나가서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먹지 않았단 말인가?040) 이미 몸을 맡겨 임금으로 섬기고서 또 시해(弑害)하려 했으니 이는 예양(豫讓)이 매우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041) 그런데도 저 육신은 무릎을 꿇고 아조를 섬기다가 필부(匹夫)의 꾀를 도모하여 자객(刺客)의 술책을 부림으로써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랐고, 그 일이 실패한 뒤에는 이에 의사(義士)로 자처하였으니, 마음과 행동이 어긋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열장부(烈丈夫)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헛되이 죽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것이 덕을 갚는 것만 못하다. 성삼문(成三問) 등은 그 마음에 잠시도 옛 임금을 잊지 않고 있었으므로 아조(我朝)를 섬긴 것은 뒷날의 공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라고도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진실로 공을 이루는 것만을 귀히 여기고 몸을 맡긴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삼인(三仁)042) 도 반드시 서로 모의하여 머리를 굽히고 주(周)나라를 섬기면서 흥복(興復)을 도모했을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이들은 자기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후세에도 모범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제 드러내서 아울러 논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은 각기 군주를 위하는 것인데 이들은 아조(我朝)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역적이니 이들은 오늘날 신하로서는 차마 볼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누구든 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그도 중하게 죄를 다스리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다. 회계하기를,
"신들이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니 놀라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일찍이 《육신전》에 대해서 경연 석상에서 아뢴 자가 있다는 것을 듣고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습니다. 지금 상의 분부가 애통하고 간측한 것은 진실로 천리(天理)에 합당한 일입니다. 다만 이 글의 잘못된 점과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진실로 성유(聖諭)와 같더라도 여염(閭閻) 사이에 드물게 있는 책이며 또 세월이 오래되어 점차 없어져 가는 끝인데 만약 수색하는 일을 시행한다면 반드시 큰 소란이 일어나서 끝내는 이익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이 요망스러운 책을 진실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서로 이야기하겠습니까?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금한다는 법이 일단 내리게 되면 풍속이 각박한 이런 때에 고알(告訐)하는 길이 이로부터 열리게 되고 무고(誣告)하는 폐단도 또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외의 사람들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 들으면 마땅히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금령(禁令)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중지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말하니 지금 우선은 따른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1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339면
【분류】
출판-서책(書冊) / 변란-정변(政變)
[註 034]광묘(光廟) : 세조(世祖).
[註 035]최호(崔浩)는 나라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했다는 것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으니, : 최호는 후위(後魏) 사람으로 자는 백연(伯淵)인데 학문을 좋아하고 지모가 많았다. 벼슬은 사도(司徒)에까지 이르렀는데 뒤에 《국서(國書)》를 저술하고 비석의 글을 쓰면서 직필(直筆)했다는 것으로 복주(伏誅)되었다. 《북사(北史)》 권21 최호열전(崔浩列傳).
[註 036]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037]계유년 : 1453 단종 1년.
[註 038]임신년 : 1452 문종 2년.
[註 039]갑술년 : 1454 단종 2년.
[註 040]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먹지 않았단 말인가? : 어째서 세조(世祖)를 등지고 깊은 산속으로 숨지 않았느냐는 뜻. 서산은 수양산(首陽山)을 말한다.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인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치자 주(周)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註 041]예양(豫讓)이 매우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 일단 신하가 되었으면 그 임금을 시해할 수 없다는 뜻. 예양은 전국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지백(智伯)을 섬겨 총애를 받던 중, 조양자(趙襄子)가 지백을 쳐 섬멸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일을 다하였다. 그 때 친구가 "그대의 재능으로 조양자를 섬기면서 기회를 보아 시해하면 쉽지 않겠는가?" 하니, 예양이 "섬기면서 시해하라는 것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두 마음 품은 자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사기(史記)》 권86 자객열전(刺客別傳).
[註 042]삼인(三仁) : 미자(微子)·비간(比干)·기자(箕子)인데, 모두 은나라 말기의 충신(忠臣)이다. 미자는 멀리 떠났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한다. 《논어(論語)》 권80 미자(微子).
149.효종실록 9권, 효종 3년 11월 13일 신사 2번째기사 1652년 청 순치(順治) 9년
전 판서 조경이 분부에 응해 올린 궁장의 폐해, 사육신의 정려 등에 대한 상소
전 판서 조경이 포천(抱川)에서 분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나이 일흔에 죽을 때가 다된 늙은 신하가 궁벽한 산중에서 병들어 있으므로 국가의 소식을 듣지 못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난달 본현(本縣)의 저보(邸報)를 얻어 재앙을 만나 직언(直言)을 구하시는 말씀을 읽건대, 전하께서 천위(天威)에 크게 경동(警動)하심이 지극하다 하겠으나, 신의 마음에는 근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신이 그 직위에 있지는 않으나 두 조정의 도타운 은혜를 입어 일찍이 대부(大夫)의 반열에 있었으니,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정성을 죽기 전에는 스스로 버릴 수 없거니와, 한마디 말씀이라도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시는 데에 다소나마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홍무(洪武) 9년153) 에 고황제(高皇帝)가 손수 쓴 직언을 구하는 도서를 내려 ‘근래 사천감(司天監)이 오성(五星)의 도수(度數)가 어지럽고 일월(日月)이 서로 범한 것을 아뢰었다. 그래서 고요히 스스로 살피건대, 고금에 천도(天道)가 변화하여 재앙을 보이는 것은 임금에게 달려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두려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신민에게 고하여 내 허물을 말하는 것을 허가한다.’ 하였습니다. 고황제는 명성(明聖)하고 위무(威武)한 자질로서 천하를 평정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거니와, 안으로는 조정의 백관에 다 마땅한 사람을 얻었고 사이(四夷)·팔만(八蠻)이 다 이미 빈복(賓服)하였으며 정사가 수명(修明)하고 기강이 진장(振張)하며 천지가 개벽하고 백성이 편안하며 사해(四海) 안이 감화하여 태평해졌는데도 한번 별의 재변을 당하니 두려워 전전긍긍하여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고 싶어하듯 자기 허물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오늘날 직언을 구하신 것을 고황제에 견주면 늦은 듯하다고 여깁니다.
신이 듣건대, 올해 6월에 양남(兩南)의 풍재(風災)가 을해년154) 과 다름 없었다 하니, 이것은 더욱 두렵습니다. 신이 을해년 겨울에 외람되게 암행(暗行)의 명을 받아 풍재당한 곳에 들렀더니 1 백년 된 큰 나무의 뿌리가 바위를 안고서 마치 어지러운 삼대처럼 쓰러졌고, 기타 뿌리가 튼튼하여 곧바로 쓰러지지 않은 것들도 바람에 갈라져 마치 노끈처럼 가닥났으니, 참으로 고금에 듣지 못한 재앙이었습니다. 역졸 같은 무식한 사람들도 보고서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래지고 낯빛이 변하며 ‘장차 어떤 변이 있을 것인가.’ 하였는데, 이듬해에 과연 병란이 있었으니, 재앙이 어찌 헛되이 일어난 것이겠습니까. 그 뒤 내외의 크고 작은 변고에도 반드시 태백성·지진·풍수의 재변이 먼저 있어서 그 응험(應驗)이 마치 부고(桴鼓)155) 의 영향처럼 빨랐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천도(天道)가 멀다는 것은 거짓말일 뿐입니다. 어찌 하늘이 우리 동방을 인애(仁愛)하여 여러번 재변을 내어 견고(譴告)함이 이처럼 정녕합니까. 올해로 말하면 한 해 안에 큰 가뭄과 큰 홍수가 잇달고 양남에 지진이 있고 10월에 겨울 천둥이 또 일어나서 비상한 변이 전보다 훨씬 더하므로 낮은 백성도 오히려 놀라고 두려워서 분주하며 서로 전하여 말하니, 전하께서 자신을 책하여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시는 것은 극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송(宋)나라 신하 호안국(胡安國)이 《춘추전(春秋傳)》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잘못되어 천변이 위에서 응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인사가 아래에서 잘못된 것을 신이 어둡기는 하나 조금 들은 것은 있습니다. 예전에 마주(馬周)가 당 태종(唐太宗)에게 간하기를 ‘제왕(諸王)을 총애하심이 지나치게 후합니다.’ 하였는데, 신도 전하께서 공주와 부마를 부유하게 하시려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익평(益平)156) 의 궁노(宮奴)는 완산(完山) 등에 전장(田庄)을 설치하고 청평(靑平)157) 의 궁노는 호내(湖內) 등에 전장을 설치하였다 합니다. 나라안의 작은 전지라도 어찌 임금의 땅이 아니겠습니까. 산택(山澤)이 개간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으나, 개간되었다면 백성이 그 가운데에서 대대로 갈아먹되 공전(公田) 사전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입안(立案)하여 준 내수사 소속의 기름진 전토가 분명히 부족한 것이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불분명한 민전을 침탈하여 그 근방에 사는 신구(新舊) 백성이 집을 헐고 유리(流離)하게 합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원망은 큰 데에 있지 않으며 또한 작은 데에 있지 않다.’ 하고, 또 ‘일반 백성들이 스스로 다함을 얻지 못하면 백성과 임금이 다함께 그 공을 이루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이 몇 고을 백성이 원망하는 것만으로도 어찌 천지의 정기(精氣)를 감응시켜 천재를 부르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신의 말을 늙은이의 말이라 여기지 말고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신이 광해(光海) 때에 호우(湖右)158) 에 유락(流落)하면서 직접 보니 길가의 전야는 다 권귀(權貴)나 궁가(宮家)의 농장으로 양민에게 미치는 폐해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얼마 후에 들러 보니 폐허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은감(殷鑑)이 아니겠습니까. 국가가 백성을 사랑으로 배양하여 인심(仁心)이 백성에게 골고루 미쳐 끝없는 복으로 결속시키면, 왕실의 지친과 공주·부마의 집이 어찌 부유하고 안락하지 못할까 근심하겠습니까. 만약 이와 반대라면 여러 궁가의 소유가 크게 훔쳐서 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신은 전하께서 오늘날의 백성을 괴롭다고 생각하시는지 즐겁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이제까지 백성의 고락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판이해진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자이건 지혜로운 자이건 다 알고, 다 말합니다. 국가의 모든 백성 중에 어찌 한 사람이라도 남북의 지공(支供)에서 고혈(膏血)을 피할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백성이 탄식하고 원망하는 것을 또한 상상할 만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백성도 사람이니 어찌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우리에게서 말미암지 않는 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백성에게 포정(布政)하는 자가 조금이라도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있다면 백성이 원망하고 욕하여 변란을 생각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또한 굽어살피시기 바랍니다.
신이 듣건대, 검소는 덕 중에서 큰 것이고 사치는 덕을 해치는 것이라 합니다. 예로부터 국가나 가정을 소유한 자로서 검소하여도 흥하지 않거나 사치하여도 망하지 않은 자는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일국을 굽어보시면 바야흐로 사치가 성한 것을 어찌 살피지 못하시겠습니까. 도성(都城) 안은 위로 경대부(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시정의 천인까지 모두가 지극히 사치하여, 벽에 바르는 것은 외국의 능화지(菱花紙)가 아니면 쓰지 않고, 입는 옷은 능단(綾段)·금수(錦繡)가 아니면 쓰지 않고, 타는 말은 모두가 상승(上乘)이고, 먹는 음식은 모두가 맛나고 기름진 것이니, 가의(賈誼)가 이른바 백 사람이 만들어서 한 사람을 입히지 못하고, 한 사람이 농사지은 것을 열 사람이 모여서 먹는다는 것은 바로 오늘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갖 물건이 비싸고 백성이 고달픈 것은 다 이 때문인데, 신은 이것을 길이 하면 어디에서 그칠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장로(長老)의 말을 듣건대 ‘우리 나라의 열성(列聖)은 모두 몸소 검약(儉約)을 실천하셨으므로 뭇 신하가 교화되어 당시의 경대부와 서인도 모두 사치를 부끄러워하고 검소를 귀하게 여겼다.’ 하는데, 광해 때에 이르러 사치한 버릇이 크게 성하여 마침내 나라를 망치게 되고야 말았으니, 그 해독이 실로 천재보다 심합니다. 어찌 성명(聖明)께서 임어하신 때에 사치한 버릇이 또 광해 때보다 줄지 않을 줄 알았겠습니까. 신은 임금이 모범을 보이는 방도가 미진해서라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상방(尙方)을 시켜 아름다운 무늬를 취하지 말게 하시면 사대부가 어찌 감히 금수를 답습하겠으며, 전하께서 태복(太僕)을 시켜 외국에서 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말게 하시면 사대부가 어찌 감히 그 말을 아름답게 꾸미겠습니까. 그 밖에 혼인과 음식의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금단하는 일을 전하께서 먼저 궁중부터 다스리시면 뭇 신하가 어찌 감히 분수를 넘어서 함부로 행하겠습니까. 대개 사치하는 자는 거의 다 참람하게 절도 없이 위를 본뜨는데, 계속 참람하게 위를 본뜨다 보면 어찌 끝까지 가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여기에 성의를 깊이 두어 이 폐단을 힘껏 고치시기를 신은 바랍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부지런히 강구(講求)하신 것이 어찌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서 벗어나겠습니까. 지금의 치효(治效)를 보면 옛 임금들이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린 도리에 아주 못 미치는 듯합니다.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이 하며, 엄숙하여 늘 생각하는 듯이 하며, 말을 안정(安定)하게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풀이하여 ‘군자가 몸을 닦는 요체는 이 세 가지에 있고 그 효과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만하다.’ 하고, 여대림(呂大臨)은 ‘세 가지가 바르면 어디에 가도 바르지 않은 것이 없으니, 천하가 크기는 하나 이것으로 몸을 닦으면 부족할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우선 이따금 저보(邸報)에서 본 것과 항간에서 전하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뭇 신하와 수답(酬答)할 때에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데에 치우치고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데에 치우치신다면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에 어그러질 것입니다. 거둥하실 때에 급한 언덕을 달려 내려갈 뜻이 있고 화란(和鑾)159) 이 음률에 알맞게 할 절도가 없으시다면 엄숙하여 늘 생각하는 듯이 한다는 것은 아마도 이러하지 않을 듯합니다. 뜻에 거스르는 말을 한 번 들으면 문득 당장 깔보고 욕하는 위엄을 보이고 조용히 타이르는 덕이 없으시다면 말을 안정하게 한다는 것은 또한 이러하지 않을 듯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전하께서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는 도리가 옛 임금에 못 미치신다는 것입니다. 아, 상(商)나라에 치구(雉雊)160) 의 재앙이 있었으나 중종(中宗)이 엄숙하고 공경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여 안정시켰고, 주(周)나라에 운한(雲漢)161) 의 재앙이 있었으나 선왕(宣王)이 두려워하고 삼가며 행실을 닦아서 안정시켰습니다. 전하께서 이 재변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깨달아 온갖 조치에서 겉치레와 말단의 일을 버리도록 힘쓰고 하늘에 응답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여 실질적인 은덕과 은혜가 있는 것만을 헤아려 행하신다면, 어찌 재앙을 막고 없앨 뿐이겠습니까. 국가의 억만년 그지없는 사업이 여기에서 터잡을 것입니다.
이어서 생각해보면, 신은 너무 늙었고 병도 이미 깊어졌습니다. 다시 당세에 쓰일 생각을 할 수 없으나 바로 군신의 분의(分義)에 감격, 직언을 구하실 때를 당하여 엉겁결에 참으로 꿈속의 잠꼬대 같은 말을 하게 되었으니, 신은 실로 황공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남은 생각이 있으니, 선언을 하여 세 가지를 부탁한 증자에 비길까 합니다162) . 우리 나라에서는 충신·열사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포장(褒奬)하고 뛰어남을 정표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전조(前朝)의 사절(死節)한 신하 정몽주(鄭夢周) 등에게도 다 아름다운 시호를 주고 자손을 거두어 썼으니, 이것이 어찌 천지의 사(私)가 없는 도량으로 본조나 다른 왕조를 차별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신의 어리석은 마음에 간절한 것은,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여섯 신하들이 천명(天命)이 돌아간 것을 모르기는 하였으나 그 섬기는 바를 위하여 죽은 대절(大節)은 뚜렷이 빛나는데 정려하는 은전이 아직 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니, 어찌 겨를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명나라 문황제(文皇帝)163) 가 방효유(方孝孺)·연자령(練子寧) 등을 정표하고 마침내 말하기를 ‘연자령이 살아 있다면 내가 등용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력 황제(萬曆皇帝)164) 가 즉위 초에 대종백(大宗伯)165) 에게 제조(制詔)하기를 ‘고인이 된 파직되고 죄받은 제신(諸臣)은 섬기는 바에 충성하고 형륙(刑戮)을 달게 받았으니, 유사(攸司)와 소재관(所在官)을 시켜 분묘에 제사하고 생존한 후손을 후히 돌보고 등용해서 충신을 정표하여 신하의 절의를 장려하라.’ 하였습니다.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도 하교하여 여섯 신하의 후손을 등용하셨으니, 넓은 덕이 신종 황제와 도리를 같이하셨습니다마는,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 분묘에 제사하고 충성을 정표하여 성의(聖意)를 넓혀서 거행하지 않은 것을 한탄할 뿐입니다. 신이 예전에 홍주(洪州)에 살았으므로 상세히 물어 보니, 성삼문은 본디 홍주 사람인데 그 옛집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합니다. 이때에 덕음(德音)을 내어 상용(商容)의 집에 정표한 것166) 처럼 하신다면, 어찌 지하의 썩은 뼈를 위로할 뿐이겠습니까. 실로 선왕의 남은 교훈을 드날려 천하 후세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할 것이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습니까. 바야흐로 인심과 세도(世道)가 어리석고 어두워서 점점 깊은 밤중으로 들어가므로 충효가 어떠한 것인지 전혀 모르니, 신의 이 말이 교화에 조금도 보탬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유의하소서.
또 생각건대, 어려움을 당하여 신하가 죽는 의리를 안 자는 고상(故相) 김상헌(金尙憲)과 고(故) 참판 정온(鄭蘊) 두 사람뿐입니다. 정온은 그때 병든 몸으로 시골에 내려간 뒤에 죽지 못한 것을 스스로 허물하여 처자를 물리치고 사는 집을 버리고 궁벽한 산중에서 혼자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고난을 받으며 절조를 지킨 것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죽지 못한 유감을 보상하기에 충분한데 아직 증시(贈諡)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또한 어찌 성조(聖朝)의 부족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유사에 명하여 조헌(趙憲)의 예에 따라 특별히 증시하고 후손을 등용하게 하소서. 정온의 평생 지절(志節)이 어찌 죽은 뒤의 시호를 명예롭게 여기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이 직위에 있지 않으면서도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이러하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한다.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86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왕실-종친(宗親) / 농업-전제(田制) / 재정-상공(上供) / 윤리(倫理)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註 153]홍무(洪武) 9년 : 1376 우왕 2년.
[註 154]을해년 : 1635 인조 13년.
[註 155]부고(桴鼓) : 북채와 북.
[註 156]익평(益平) : 효종의 둘째 딸 숙안 공주(淑安公主)의 부마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
[註 157]청평(靑平) : 효종의 세째 딸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부마 청평위 심익현(沈益顯).
[註 158]호우(湖右) : 호서.
[註 159]화란(和鑾) : 임금의 수레에 달린 방울.
[註 160]치구(雉雊) : 꿩이 운다는 뜻. 은 고종(殷高宗) 때 융제(肜祭:정제〈正祭〉 이튿날에 다시 지내는 제사)하는 날에 정이(鼎耳)에 올라 앉아 우는 꿩이 있으므로 어진 신하 조기(祖己)가 하늘의 꾸중이라 생각하여 고종에게 간하여 고종이 덕을 닦으니, 은나라가 이 때문에 중흥하였다. 《서경(書經)》 상서(商書) 고종융일(高宗肜日) 《후한서(後漢書)》 권106 조절전 주(曹節傳注) 본문에 ‘중종(中宗)이……’ 하였으나 중종은 은나라 제9대 임금이고 이때에는 상곡(桑穀)의 재앙이 있었으며, 고종은 제22대 임금이다.
[註 161]운한(雲漢) : 《시경(詩經)》의 편명. 운한편은 주 선왕(周宣王) 때에 한재가 있으므로 임금이 두렵게 여겨 행실을 닦으니, 백성이 임금의 교화가 다시 행해질 것을 기뻐하여 지은 시라 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운한(雲漢).
[註 162]선언을 하여 세 가지를 부탁한 증자에 비길까 합니다 : 증자(曾子)가 임종에 가까워서 문병하러 온 맹경자(孟敬子)에게 세 가지를 경계하여 "새가 죽어 갈 때는 울음 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착한 말을 한다. 군자가 중하게 여기는 예도(禮道)가 셋이 있는데, 용모를 움직일 때는 사나움과 태만함을 멀리하고, 낯빛을 바꿀 때는 성실함에 가깝게 하며, 말을 할 때는 비루함과 도리에 위배되는 것을 멀리 해야 한다." 하였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여기서는 조경 자신도 죽음을 앞두고 진심으로 부탁하겠다는 것이다.
[註 163]문황제(文皇帝) : 성조(成祖).
[註 164]만력 황제(萬曆皇帝) : 명 신종(明神宗).
[註 165]대종백(大宗伯) : 예부 상서(禮部尙書).
[註 166]상용(商容)의 집에 정표한 것 : 상용은 은 주왕(殷紂王) 때의 대부로서 직간하다가 폄출되었는데,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쳐서 평정한 뒤에 상용의 여문(閭門)에 정표하였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무성(武成).
150.숙종실록 38권, 숙종 29년 10월 13일 을유 3번째기사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경상도 유학 곽억령이 함안에 조여의 사당을 짓도록 요청하는 상소
경상도 유학(幼學) 곽억령(郭億齡)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세상을 격려하는 도리는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절의를 숭상하는 것은 보사(報祀)를 숭상하는 일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던대, 경태(景泰)593) 연간에 진사(進士) 신(臣) 조여(趙旅)가 함안(咸安) 땅에서 자취를 감추고 숨어서 살다가, 그 지방에서 지조(志操)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또 거기에 이른바 백이산(伯夷山)이란 것이 있습니다. 아! 조여의 절개가 고죽군(孤竹君)594) 에 양보할 것이 없고, 이 산의 명칭이 우주를 초월해 서로 부합되므로, 마침내 온 도내(道內)의 장보(章甫)들과 서로 모의하여 그의 영혼을 편히 모시고 그 절의(節義)를 제사지낼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서로 의논하기를 단종(端宗)께서 손위(遜位)하던 날 죽음으로 절개를 온전히 한 이로는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成源)·유응부(兪應浮) 6신(六臣)이 있고, 살아 있으면서 의리를 지킨 이로는 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 및 조여(趙旅) 여섯 명이 있는데, 저 성삼문·박팽년 등 육신은 무덤을 한 곳에 만들고 당도 한 곳에 만들어 제향하고 있으니, 이 여섯 명도 또한 마땅히 그들의 예에 따라서 모두 제사하도록 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새로 사당을 세우는 일을 금하였으므로, 감히 곧장 마음대로 시행할 수가 없어 이에 감히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러러 간청합니다. 이 여섯명의 사적(事跡)의 전말은 고(故) 장령(掌令) 신(臣) 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노릉지(魯陵誌)》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는데, 근년에 장릉(莊陵)이 복위(復位)되던 날 성명(聖明)께서도 일찍이 명하시고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섯 명의 특출한 지조와 고고(孤高)한 절개는 진실로 성삼문·박팽년 등 여러 신하들과 서로 비슷하여 우열(優劣)이 없는데, 사생(死生)의 차이 때문에 그 보답을 다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단종 대왕(端宗大王)은 보위(寶位)를 추복(追復)하였고, 성삼문·박팽년 등 여러 신하들도 묘정(廟庭)에 배향하는데, 유독 함께 충절을 지킨 이로서 배향을 받지 못한다면, 충절에 보답하는 도리에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성삼문·박팽년 등 여러 신하들은 본래 동향인(同鄕人)이 아닌데, 그 중 박팽년이 대구(大丘) 사람인 관계로 거기에 사당을 세우고 모두 같이 제사를 지냅니다. 지금 조여(趙旅)는 함안(咸安) 사람이니, 바로 그곳에 두어 칸의 사당을 지어 여섯 명을 함께 제향한다면, 새로 만드는 규정에 해당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이른바 백이(伯夷)란 그 이름이 옛시대와 부합하여 천 길 높이 우뚝 서서 여섯 신하의 절개와 함께 영원히 보존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조여(趙旅)의 사당을 세우지 않을 수 없고, 이 사당에 여섯 신하를 모시어 제향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미 자명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령(條令)에 구애되지 마시고 특별히 윤허하시는 비지(批旨)를 내리시어, 이 밝은 시대의 훌륭한 은전에 모자람이 없게 하소서. 그리하여 열사(烈士)의 영령(英靈)으로 하여금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있게 한다면, 아름다운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예조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5책 38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1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윤리(倫理) / 인물(人物) / 역사-전사(前史)
[註 593]경태(景泰) : 명(明)나라 경제(景帝) 때의 연호.
[註 594]고죽군(孤竹君) : 원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아버지이나, 여기서는 바로 백이·숙제를 가리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