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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7. 제 4강
I.
1687년 공자 삽화.
confacius(공자) sinarum(중국) philosophus(철학자) paris 라는 책에 들어 있는 것.
이 책에서 공자를 철학자라 지칭 함. 동아시아에서는 공자를 철학자라 부르지 않았다. 宋代(960년~)이후에서는 공자를
孔夫子(우리 공선생님)라 불렀을 뿐이다. 공자등 소위 '~子'자 붙은 동아시아 고대 성현들이 서양에서 '철학자'들로 불
리던 싯점이 이 때부터 였다.
우리가 동양 고전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반성
우리는 동양 고전을 대할 때 (공자와 맹자) : (노자와 장자)를 대비하며 읽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읽는다고 우리 사회에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무의미한 방식으로 책을 읽고 있는게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러한 독법이 형성된 것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이며 대학의 강의나 서점에 나와 있는 중국고전과 관련된 많은 교양서
의 차례와 내용이 이를 따른 것이라 한다.
19세기말~20세기초에 형성된 동양(사실상 중국) 철학공부의 체계
1.논어
먼저 정의를 내린다. 인이 뭐냐? 克己復禮,爲仁이다. 다음에 용례를 든다. 자기 욕심 안 내세우고, 배고파도 어른 먼저
드시는 거 먼저 보고 수저를 들고..등등. 다음에는 정리한다. 공자의 인간관,자연관,사회역사관,우주론,인식론을 논한
다. 이것이 체계적인 학문이라 하는 거고 공자의 철학이라 칭힌다. 여기에서 학자들은 공자를 상징하는 중심적
인 '개념'을 잡아 낸다. 그 것은 '仁義'이다.
2. 맹자
공자의 '인의'개념을 확장하고 본성이야기를 한다. 만물에는 본성(萬物之性)이 있어 사람에게도 사단(四端)이 있다.
사람에게 사단이 있어 인의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측은지심이 있어 인을, 수오지심이 있어 의를, 사양지심이 있어 예
를 시비지심이 있어 지를 행한다.
3. 묵자
유가의 차별적인 사랑에 반대하고 보편적 사랑으로서 '겸애'를 주장한다.
4. 노자
공자의 '인의'자체를 부정하고 무위자연을 주장한다.
'개념사 중심의 독법'의 문제
원본을 읽지 않고 논문과 역사책을 읽어도 고전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원본을 통해 저자와의 대화를
차단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독법이 우세를 떨치는 이유가 바로 시험에 개념적 지식을 묻는 식으로 나오
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사 체계의 글들이 나온 배경
19세기말~20세기초는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이 동양의 문명을 압도하던 시기이다. 당시 근대라 함은 서양의 그것이었고 동양에는 그것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근대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그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역사라 했을 때 서양에는 역사가 있었고 동양에서는 그 역사를 갖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서양세력이 '너희들은 이런 거 없었지?'라는 말을 동양은 들었고 당시 지식인들의 허무감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렇지 아니한가! 수천년 찬란한 문화와 역사와 전통이 서구의 논리로 따지면 무용한 것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니 서양에서 이야기하는 철학자가 중국에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공자였다. 증거는 정리글 앞에 나오는 1687년 서양의 저술서다. 동양지식인들은 서양의 개념사와 논리학 체계를 빌어 동양의 철학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것이 앞에 이야기한-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공부해 온 철학사 체계가 된 것이다.
공자를 통해서 동양에도 문명의 진화가 있었고 역사가 있게 된 것이다. 20-30년대 지식인들이 그렇게 외친 '문명의 전환'등이 서구 문명에 대응한 동양 문명의 복구,자존심의 회복의 다름 아니고 이에 근거하여 중체서용,동도서기론을 주장하기에 이른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삶의 관점'에서 책읽기
교수님께서는 이러한 고전을 바라보는 시각이 1997년 이후에 바뀌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즉, 논문이나 시험은 여전히 개념 중심, 철학사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시민들의 책읽기는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책읽기는 한자몰라도 되고 서양철학언어 몰라도 되고 말이 어려운 이전 논리를 따라가지 말고 영어 몰라도 되고 그냥 고전(논어)라는 책을 읽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의 관점'에서 책읽기. 구체적 역사적 현실을 이해하고 따라가며 고전을 다양한 측면에서 해석하고 나라면 어떻게 해 나갈건지 상상하며 읽기가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닐가 한다.
논어를 예로 든다면 이렇다. 기원전 2세기에 쓰여진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 사이에서 오고간 내용을 대화체로 쓴 것이다.공자가 화두를 던지고 제자가 암송한 것을 후대에 전하게 되매, 기록이 유실될 까봐 이를 편집한 것이 고전 '논어'라는 것이다. 당시 문자는 기본적으로 왕의 것이었고 왕과 제후들이 통치의 수단으로 전유한 것을 바깥으로 유학자들이 유통시킨 것이 '논어'같은 책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트위터등 SNS혁명에 버금가는 것이리라(교수님은 고대의 출판보다 트위터가 더 혁명적일 수 있다고 함). 그래서 논어를 읽을 때 사기열전등등의 역사책을 같이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어의 극기복례 위인이라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제를 제기하여고 말한 건지를 따지는 것이 삶의 관점에서 책읽기인 것이다.
개념-논쟁-진보라는 철학사를 통해 문명이 발전해 왔다는 주장은 동아시아 역사를 무화(無化)시키는 것이며 고전을 추상화 건조시켜 삶의 내용을 모르게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II.
오늘은 노자 도덕경 4장과 5장이 진도가 나갔습니다.
4 장은 도올 김용옥선생께서 해석한 내용을 옮겨 적습니다.
" 도는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
그윽하도다!
만물의 으뜸 같도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도다.
그 빛이 튀쳐남이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네
맑고 또 맑아라
저기 있는 것 같네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몰라
하나님보다도 앞서는 것 같네"
도올과 김시천교수의 해석차이
도올은 이 장에서 도를 허(虛,빔)로 해석하고 채움속에 비움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 서양의 꽉 채운 경배의 대상인 초월적 존재보다 나은 것이라 주장한다.
교수님은 노자는 기본적으로 정치사상서로서 너무 고차원적으로 읽으면 놓치는 것이 많다고 이야기 한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고 전개되었는지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남자에 나오는 조양자이야기
해남자에 조양자라는 제후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분이 밥먹고 있는데 부하 장수가 급히 들어와 적국의 성 두개를 빼앗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자 이 분이 숟가락을 놓고 탄식하며 하는 말이 " 내가 덕이 부족한데 영토가 늘어나 걱정이 된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조양자가 영원히 번성할 것이라고 이야기 했단다.그러나 진짜 그럴까? 그런 척 한 건 아닐까?
마찬가지로 4장 '도충이~'로 시작하는 이 문구는 '~인 척'하기로 읽어야 맞다고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주식에 투자한 친구가 줏가가 올라 큰 돈을 벌었는데 이 친구가 쓸 줄도 모르는데 돈이 들어온다고 너스레를 떨고 밥도 안 사고 집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한마디로 재수없~다.고 생각.
(시간이 지나 문맥이 연결이 안되네요.ㅜㅜ. 공부 더 해서 연결해 보겠습니다. 혹시 이부분 보충 하실 수 있는 분은 댓글 달아주세요.)
왕필의 주석
왕필의 주석은 왕이 온 힘을 다해 혼자 다 하지 말고, 하늘과 땅이 서로 조화롭게 일을 해 나가듯이 신화와 함께 분업해서 일하자는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왕권에 대해 신권의 요구로 이해하는게 맞을 듯 싶다. 이러한 주장을 적나라하게 하면 곤장 맞을 일이니 대체로 비유와 은유를 거창하고 화려하게 하는 것이란다. 이것이 수사학이고 정치라는 것이다.
수사학의 예를 유방과 한신의 대화를 든다. 왕인 유방에게 장군인 한신이 말하기를 "당신은 3~4명을 거느릴 역량 밖에 없으나 나는 많을수록 좋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이 뽀로퉁하자 한신이 또 말하기를 " 나 같은 장수 3~4명을 거느리지만 나는 수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는 것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자 유방이 히히~~했겄죠?
옳은 것을 옳게끔 설득시키는 것이 수사학이고 이 것을 통해 '이슈를 선점'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수사학이 기교를 부리다 원칙을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결과로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정치란 결과가 좋으면 되는 것이다.
5장은 노자주소에 있는 것을 옯깁니다.
"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꼴과 개처럼 여기니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꼴과 개로 여긴다,.
하늘과 땅의 사이는 아마도 풀무와 피리와 같지 않은가?
비어 있으나 쪼그라들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온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가운데를 지키느니만 못하다."
천(天)은 왕(王),지(地)는 재상(宰相)
여기에서는 왕필의 주석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정치적 측면에서 도를 논하고 행할 때 주체인 천지에서 천(天)은 왕(王),지(地)는 재상(宰相)으로 봐야 한다. 이 둘이 분업을 해서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에서 불인은 왕필이 임자연(任自然)으로 해석했다.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만물이 알아서 자기 일을 한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짐승들을 위해 꼴을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짐승들이 꼴을 먹을 뿐인 것이다. 이것에 꼴은 짐승들을 위해 있는 거라고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고 짜 맞추지 말라는 것이다.
성인불인(聖人不仁) =성인임자연(聖人任自然)
성인불인(聖人不仁,여기서 성인은 변화의 양상을 미리 알아 실천하는 이,왕이겠지!)도 마찬가지. 백성들을 어떤 자신의 목적하에 억지로 짜 맞추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예를 하나 든다.백성이나 관료중에 누가 이 사업을 자기가 하고자 하다고 왕에게 이야기 한다. 왕이 좋다고 따른다. 근데 다른쪽에서 다른 말을 한다. 왕의 마음이 흔들리고 생각을 바꾼다. 그러면 이쪽에서 대든다. 또 왕이 흔들린다. 그러면 세상사람들이 하는 말" 병~신~". 이런 경우 그 쪽과 상의해서 결정해 보라고 하고 임자연하면 되는 것이다. 왕은 무릇 그러하면 되고 일은 밑에서 알아서 하게 하라는 이야기다.
피리부는 사나이
피리와 풀무이야기가 나온 후에 다언삭궁 불여수중(多言數窮 不如守中)을 설명할 때는 거의 전율이 돋는다. 한마디로 피리는 왕이고 그것을 부는 사람은 왕필,즉 유학자,신하,재상이 된다. 조선의 왕과 달리 왕권이 강했던 중국에서 이런 말을 직설적으로 했다간 참수대상. 고차원적이고 아주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이야기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적 의도를 놓치고 교(敎)나 경(經)으로 생각하여 문장을 너무 수준 높게 해석하면 엉뚱한 곳에 가서 헤매고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위나라 유학자 왕필
실제 교수님은 이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시는데 이것을 어떻게 옮기나. 그래도 한번 해보자. 틀린 것은 나중에 고치자 당시 왕필이 살았던 시절은 기원후 2세기 위나라때. 조조가 무제가 되고, 아들 조비가 문제가 되고, 그 아들 명제가 된다. 근데 명제가 어린 아들 해제를 놔 두고 일찍 죽게 되자 사마의와 조상을 불러 유신(遺信?)을 한다. "해제를 잘 챙겨돌라~". 사마의는 조조와 조비때 활동했던 백전의 노장이며 당대의 스승이다. 조상은 군권을 가지고 있고 조씨 계열의 황제 족보다. 처음에는 조상이 어르신 사마의에게 잘하다가 꼬봉들 농간에 놀아나 사마의와 대립하게 된다. 그러다 조상이 외국 원정을 나간 틈에 사마위가 정권을 찬탈하게되고 이를 계기로 진(晋)나라가 세워지게 된다. 이게 우리(특히 조선)와 중국의 차이. 곁가지이긴 하지만 이순신이 좀 역모를 꾸며 정권을 찬탈했으면 어쩔가 싶은데 말이다.
한편 당시 2부 상소(?)직책으로 인사권자인 하안이라는 유학자이자 권력자가 있었는데 조조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가 바로 왕필을 후원한 사람이다. 그는 논어의 현존본을 만든 사람이기도 한단다. 그를 비롯한 유학자 사단들은 많은 유교경전을 정리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유학자들이 정치주도세력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필의 도덕경주해도 그것들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왕필 주해는 당시 유학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왕필의 주해는 왕권이 약해진 틈을 타 재상권과 신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일단 여기 까지~ 일단 의무는 다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개발 새발 정리글을 썼습니다. 이런~ 1시간 더 되었네..자야 겠다. 오늘도 고단한 하루다. 다들 내일 봅시다요...)
첫댓글 허~참, 속기사여? 녹음기여?
부부쌈 할때 유리하겠는데.
난 내가 한 말도 다 잊어버려서 늘상 불리한데.
뭐 잘못했나도 모르면서 사과하는데
이렇게 정성껏 정리해주셔서 올리신 글을 편히 읽으려니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할 일입니다. 같이 성장할 일입니다.
놀라우면서도 무섭네요^^ 이러다 강의 시간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기록되면, 혹 구설수? ㅋㅋ 농담입니다. 어떻게 손이 말을 따라갈수 있는 것인지.. 제말이 느린편도 아닌데...
와~ 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