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문인 광북루를 사이에 두고 길게 뻗어진 성곽
공산성의 파란만장한 역사
공산성의 역사는 백제가 공주로 천도해 오면서 시작된다. 당시의 왕궁은 지금의 쌍수정 앞 광장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성 안에 왕궁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공산성이 곧 왕성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왕성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공산성의 출발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다른 일반적인 산성과 같이 높은 산봉우리에 자리한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성벽의 규모는 2.5㎞에 이를 정도로 두드러지게 컸다. 예사 성곽이 아니었음을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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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서루에서 공산정에 이르는 성곽
그러나 그 이후 공산성은 굴곡진 역사를 이어왔다. 백제가 망하고 통일신라가 들어섰을 때에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반란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충청 감영이 공주로 옮겨오게 되었을 때에는, 한때 감영이 공산성 내에 자리하던 적도 있지만 끝내는 성 밖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때부터 아마도 공주 정치의 1번지에서 공산성이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뒤 인조 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피난 왔을 때에 잠시 머무르기도 했지만 정치 1번지로서의 공산성의 위상은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 백제 토성이 남아 있는 영동루 옆 성곽
토성에서 석성으로
굴곡진 공산성의 역사는 성벽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공산성의 동벽은 토성으로 되어 있다. 그것도 안쪽과 바깥쪽의 이중성벽으로 되어 있는데, 이중의 성벽이 모두 토성으로 되어 있다.
그에 비해 남벽과 서벽, 북벽은 석성이다. 토성벽이 백제 때 성벽이고, 석성벽이 조선시대 때 고쳐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토성에서 석성으로 변해갔다는 뜻이다.
실제로 성내에 남아 있는 비문(碑文)에 의하면 현재의 성벽은 조선 선조(宣祖) 35년(1602)에 축성되었다고 한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선조(宣祖) 36년에 축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1602년이나 1603년에 현재의 모습처럼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다. 7년 동안의 왜란이 끝나고 나서 외침에 대비해 현재의 모습처럼 공산성을 석성으로 고쳐쌓았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발굴조사를 위해 땅을 파 본 결과 현재의 지면에서 3~4m 아래에서 또 다른 석성벽이 확인되었다. 이 석성벽은 지면 아래에 남아 있어서 현재 우리가 공산성에 가면 볼 수 있는 성벽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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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덮인 겨울에도 시민들이 즐겨찾는 공산성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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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문인 진남루 옆 성곽에 핀 민들레
현재 볼 수 있는 성벽이 조선 선조 때 고쳐 쌓은 것이라면, 그 아래쪽에 남아 있는 석성벽은 그 이전에 쌓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백제 때 동벽은 토성으로, 나머지 성벽은 석성으로 쌓았든지, 아니면 백제 때는 토성으로 쌓았다가 임진왜란 이전에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기가 어느 때인가는 앞으로의 조사를 통해 밝혀야할 부분이다. 우리 곁에 있는 자랑스런 백제 문화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랑하기에 앞서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