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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재단에서 지원하는 2012활동가재충전 프로그램에 선정되었습니다. 활동정산을 하며 올린 소감문입니다.
선정된 사람은 김우영 사무국장입니다.
오랜만의 삽질을 오전내 했더니 온 몸이 땀으로 목욕을 했다. 닭똥 냄새를 맡으며 잠시 먼 산을 아무 생각없이 한참 바라보았다. 어쩌자고 이 먼 카트만두에 와서 양계장의 닭똥을 치우고 있나. 6개월 전부터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외국인노동자들의 한국생활을 지원하는 센터를 만든 지도 10년이 지났다. 남의 사무실 한 켠을 막아서 상담만 하던 시절부터 해서 피부병이 생겨 회사에서도 내쫒긴 스리랑카 노동자를 소파에서 재우기가 안쓰러워 덜컥 빈 사무실 하나를 얻어 쉼터를 열고, 세 번의 이사를 하며 100여평의 공간에 결혼이주민 상담까지 하는 곳이 되었다. 하다보니 어찌어찌 계획없이.
10년 전이나 크게 변함없는 노동상담을 항상 시간에 쫒겨가며 해 왔지만 점점 소진되는 느낌의 반복들이 두려워졌다. 더 이상 이대로 가다가는 활동가들도, 이주민들도 행복하지 않겠다는 위기감이 점점 커졌다. 새로운 10년을 준비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그만두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훨씬 좋은 여건으로 이주민들을 지원하는 곳들이 많아졌으므로.
그런 쪽에 별로 소질이 없는 나를 위해 우리 재간둥이 실무자가 아름다운재단의 지원프로그램을 찾아주었다. “국장님 같은 사람은 영순위래요”. 공고날짜 챙겨서 신청서도 찾아 주고 작성요령까지 코치해가며. 꽤나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그래서 평생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남의 여권만 만지다가 여권도 처음 만들고. 10년의 전망 준비 등등 꽤 뻥을 섞어서 실무자들과 업무조정을 하고. 드디어 바람 찬 겨울 날 새벽에 걱정스런 표정의 마누라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설렌다. 오랜만의 설레임이다. 해외여행을 간다는 것보다는 뭔가 새롭고 가슴 뛰는 일을 한다는 설레임이다.
콜롬보 공항은 후덥지근했다. 역시 옷의 선택은 실패. 마중을 나오기로 한 스리랑카 친구들은 전화를 했더니 벌써 도착했냐며 조금 기다리라고 하더니 한 시간 만에 도착한다. 한국에서나 자기 나라에서나 시간 약속 안 지키는 건 여전하다. 공항 근처에 사는 라닐의 집에 오밤중에 도착하니 벌써 술상을 봐 놓고 코코넛향이 진한 음식들이 대기중이다. 스리랑카 여정 내내 이 코코넛향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길거리 아무데서나 지천으로 파는 싱싱한 열대과일들 빼고는.
다음날부터 리오의 불안한 차를 타고 콜롬보, 마타라, 함반토타, 누와르랠리야, 캔디, 감파하, 네곰보를 거쳐 다시 콜롬보로 오는 여행일정을 10일간 진행하면서 리오,아이완,라닐,삼파드,파드미니,니샨타,산지와,로샨,엘지,마힌다,시라니,... 20여명 정도의 스리랑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모두들 평택에서 일하며 스리랑카 공동체 활동을 하던 친구들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자기 사업을 하거나 반백수 생활들을 하고 있었다. 알미늄재활용수거업, 양계장, 컴퓨터가게, 음식점, 패스트푸드 유통업, 브로커 등 직업들도 다양했으며 한국으로 다시 돈 벌러 갈 기회를 엿보는 친구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국에서 틈나는대로 얘기를 나누었던 사회봉사나 타인을 위한 활동을 하는 친구들은 물론 없었고, 그만큼 자기 가족 먹여 살리는데도 벅차거나 그런 일에 대한 가치부여는 낮아 보였다.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의 독재와 부패가 여전하고, 어차피 누군가가 가져 갈 이권과 특권을 운 좋고 발빠르게 자신이 가져오는 것에 별 망설임도 없어 보이고.
뜨거운 섬나라라서 유명한 해변에는 거의 유럽인들이 즐기고 있었다. 포르투갈, 네델란드, 영국으로 이어지는 오랜 식민지 경험에서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구화된 편이고, 동네마다 집들이 깔끔하고 거리도 깨끗한 편이다. 인도양의 푸른 바다와 등대가 있는 방파제에서 구멍치기로 용치놀래미도 낚아보고, 지나는 과일천막마다 들러서 촌스럽게 십여종이 넘는 바나나만 먹어도 보고, 김병만이 먹었던 코코넛 나무술도 동네 건달이 몰래(불법이라고) 안내한 농가에 직접 가서 마셔 보고, 산 하나가 온통 차나무인 캔디의 광활한 차밭 동네를 오후 내내 등반하기도 하고. 바쁘게 다닌 탓에 짧은 여정에도 스리랑카의 자연을 그런대로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아침부터 자는 사람들을 깨우고, 약속 잡고, 채근을 해야 그나마도 가능했다. 그러지 않으면 오전은 쉬고 오후에나 슬슬 움직여서 해지면 또 내일로 미루는 사람들이라는 걸 한 삼일 지나서야 깨달았다. 한국에서의 그 바쁜 공장 일들을 어찌 견뎠는지.
떠나기 이틀 전 밤에 아이완과 파드미니의 집 마당에 모두들 모여서 수산시장에서 사 온 싱싱한 이름 모를 생선들과 스리랑카식 삼겹살로 파티를 했다. 숟가락을 안 주는 파드미니에게 숟가락 달라 했더니, “우리도 한국에서 숟가락 쓰느라고 힘들었어요. 오빠도 손으로 드세요 ”하며 놀린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모인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인사나누기도 바쁘다. 한국에서 온 후 처음 만나는 친구들도 있단다. 나라에 가면 바로 스리랑카-평택 모임을 만들겠다던 리오는 건배사를 통해 “형이 왔으니까 이제 모임을 만듭시다 ”라고 했다가 모두의 야유를 받기도 했다.
스리랑카 대통령과 고향 친구라고 하는 NG0사람도 만나고, 만난 친구들과 여러 가지 전망들을 얘기해 봤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을 안고 짧은 일정을 끝낼 수 밖에 없었다.
14일 콜롬보를 출발, 인도의 캘커타에서 쉬었다가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스리랑카에서완 달리 1시간이나 기다리고 있던 람,라쥬,라릿. 그만큼 입국절차가 오래 걸렸다. 국제공항이라기보다는 지방의 터미널 정도랄까. 여하튼 오히려 정겨워 보였건만 조금씩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나니 느긋한 여행자가 못되는지라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한다.
람의 집은 공항에서 이십분.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달리는데 거리의 매연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다. 약간 여유가 생겨 사람들을 보니 다들 마스크를 쓰고 달린다. 그 유명하다는 카트만두 시내의 먼지와 매연을 온 몸으로 느껴보았다. 람은 내가 아는 네팔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빈 방이 있는 집에 살고 있기도 하지만, 가장 믿음이 가는 순박한 친구이기도 했다. 부인인 비슈누와는 평택에서 만나 연애를 하다가 동거 중에 개구쟁이 아들 이샨을 낳고, 람이 불법체류자로 단속되는 바람에 급히 귀국한 친구들이다. 화성보호소에 있을 때 통화만 하고 면회도 못 가서 미안했었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소식을 듣고 카트만두에 사는 네팔 친구들이 다들 모였다. 라릿,나리스,비슈누,쉬레스타,라쥬,람,루드러,림부,모한. 그 중에 백수는 넷. 한국에서 번 돈을 땅투기 막차를 탔다가 팔리지도 않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친구들,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짓고 돈이 떨어진 친구, 섣불리 사업을 하다 말아먹은 친구, 몇 년째 뭘 할지 연구만 하고 있는 친구 등이 있는 반면에 신발가게를 잘 해서 성공하거나 한국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도 있었다. 스리랑카와 마찬가지로 구심점은 없고, 가끔 연락들만 주고 받는 정도였다.
네팔에서는 일정도 짧고 교통사정도 좋지 않아서 카트만두에서만 보냈다. 에베레스트는 오토바이로 한시간 정도 걸리는 나가르코트라는 산의 전망대에서 보는 걸로 때웠다. 많은 서양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들르는 유명한 관광코스라고 한다. 그 외에는 카트만두 시내의 유명한 절 네 곳을 관광하고, 타멜이라는 명동 거리 비슷한 시내를 가 보고, 주로 바우더 절 근처에서 네팔의 상점과 병원과 시장과 학교와 공장과 뒷골목들을 다녀보았다.
네팔은 워낙 다민족사회라서 외국인이 돌아다니기에 별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스리랑카에서는 한발짝만 나서도 모든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조용히 웃느라 정신없었는데, 네팔은 동네 꼬마들도 친근하게 다가와서 영어로 물어보고 같이 놀곤 한다. 시내에 나가서도 관심을 두는 건 오직 상인들이 호객을 할 때뿐이다. 니하오나 곤이찌와를 했다가 대꾸를 안 하면 그걸로 끝이고, 가끔 안냐세요도 하는 이가 있지만 웃어 주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아침에 세수 안 하고 대충 입고 가방 같은 건 안 들고 있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며칠 여행하는 동안 많이 타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스리랑카에서는 많이 느끼지 못했던 의욕이 네팔에서는 샘솟는다. 거리는 쓰레기 천지다. 집집마다 비닐을 비롯해서 모든 생활쓰레기는 대충 집 앞에서 태운다. 시내의 많은 쓰레기는 밤새 도로변에 널려 있다가 아침에 쓰레기차가 실어서 바로 근처의 도심을 흐르는 비그마티 강가에 쌓아 놓는다. 비가 와서 비닐이며 음식찌꺼기며 온갖 쓰레기들이 강에 떠다녀서 그야말로 쓰레기강이다.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아무 생각 없이 버린다. 개들은 어찌 그리 많은지. 병들고 지저분한 개들이 어디서나 어슬렁거리고 소들도 차와 함께 걸어 다닌다. 굴러갈지 싶은 승합차와 버스들과 택시들이 매연을 뿜으며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아직은 도로에서 차보다 우위를 점한 오토바이들은 그 좁은 틈새들을 비집고 참 잘도 달린다. 대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이들이며 젊은 사람들이 인도와 차도의 구분도 부족한 온 거리에 가득하게 바삐 오간다. 카트만두의 풍경이다.
사람들이 사는 곳만 어디든 그렇다. 빨간색 황토벽돌과 붉은 색 옷을 입은 아줌마들. 아,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빨간 색이 이거였구나.
물가는 비싸다. 전기는 6시간 간격으로 들어오고 가스집과 주유소엔 긴 줄이 늘어서 있다. 공장이라고는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제조업이 거의 없다. 인도와 중국에서 수입한 공산품들은 거의 한국 수준의 가격이다. 농산물이나 과일, 고기도 비싸다. 닭고기 1키로에 한국돈 3500원 정도니, 막노동 일꾼 월급 십오만원을 받아서 고기를 자주 사 먹기는 힘든 일이다. 교육열은 높아서 아침 출근시간에 나오면 거리가 온통 등교하는 학생들의 물결이다. 반면에 변두리 동네인 바우다에서 라릿 친구가 운영하는 카펫공장이나 수공예품 공장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학교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일하고 있기도 한다.
네팔에 비하면 스리랑카는 그런데로 잘 사는 나라다.
전세계에서 많은 NG0 단체들이 네팔에 와서 활동을 하고 있다. 함께 하는 현지인들도 많다. 람의 집 2층에 사는 집주인도 독일NG0에서 운영하는 친환경농업 관련한 단체의 네팔책임자라고 한다. 돈을 많이 번다고. NGO단체 대표일을 해서 무슨 돈을 많이 번다는 건지. 네팔에서 NGO는 그런 의미로 통하고 있는게 현실이라고 한다.
곧 올 거라는 인사와 며칠간 정들었던 비슈누와 이샨의 눈물을 뒤로한 채 네팔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상으로.
3월 13일. 곧 간다는 약속을 지켰다. 스리랑카에는 아직 못 지키고 우선 네팔만. 열흘간의 일정으로 다시 찾은 네팔에는 나보다 이틀 먼저 일년간 파견근무로 나온 우리 실무자가 기다리고 있다. 네팔에 자립형 NGO를 만들기로 하고 준비과정의 첫 번째 사업으로 자연양계를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국제전화로 여러 번 점검하고 재촉한 땅 임대 건은 전혀 진행이 되지 않고 있었다. 계획을 전부 수정하여 도착한 날부터 5일간 카트만두 주변의 땅들을 찾아다니며 겨우 마음에 드는 땅을 찾아 계약을 마쳤다. 다음날부터 양계장을 짓기 시작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강행군한 끝에 4일만에 80% 정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후의 작업 일정을 상세히 알려 주고 어쩔 수 없이 귀국했는데, 이 후 완성까지는 한달이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4월 20일 첫 시범양계로 병아리 1000마리를 입추했고, 6월 12일 첫 출하를 앞두고 세 번째 방문을 온 것이다.
그 동안 평택에서도 네팔공동체 회원들 중에서 네팔에 귀환하여 가족이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며 NGO를 함께 운영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13명이 참여하여 매주 교육과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귀환 후의 전망은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민들의 오랜 숙제라서 관심이 대단하다. 오히려 한국에서의 공동체활동이 활성화되는 결과로 이어져서 매주 북적이고 있다.
6개월만에 다시 세 번째 온 네팔인데 만만치는 않다. 네팔친구들의 특성과 고집, 그간의 편견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무엇보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최대의 숙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웃과 사회를 위한 배려에 눈돌릴 여유들이 부족하다. 계획은 거창해지고. 나는 조급하고.
자연양계와 닭똥거름공장과 닭똥을 이용한 친환경 야채재배농장을 순환적으로 배치하여 가족형농장을 회원들의 기본사업으로 운영한다. 수익의 일부는 NGO 기금으로 사용하며 NGO에서는 환경운동,적정기술센터,소외계층지원,한국어학원을 중심사업으로 한다. 최소한의 비용만 한국에서 마련하고 네팔인들이 스스로 운영하는 자립형단체를 만들어가는 게 목표다.
어렵게 현지파견 실무자를 배치했고 자연양계 1차 1000마리를 나름 성공하고, 2차 1500마리 입추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어학원에서 사용할 교재를 번역하고 있고, 네팔에 있는 다른 NGO들도 모니터링하고 있다.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몸은 왜 요즘 들어 이리 삐걱거리는지.
네팔로 3차 방문을 오기 직전에 스리랑카의 리오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통령 영부인과 친한 사람이 연락이 왔는데 타밀반군지역에 보낼 아이들 옷과 학용품을 보내주면 세금 안내고 받을 수 있다고. 직접 가서 사진도 찍고 인터뷰도 하고 전달과정과 장기 플랜까지 세워서 보내라고 했다. 보내면 어디로 샐지 모르니. 워낙 통만 큰 놈이라 당최 믿음이 안 간다.
땀을 식히며 람과 함께 네팔 막걸리인 창을 한잔 마신다. 동네 꼬마들이 또 모여든다. 요놈들, 오늘도 학교 안 갔구나. 아니랜다. 오늘 노는 날이란다. 어찌 노는 날은 그리도 많은지. 스리랑카 애들도 이 녀석들처럼 귀여운데... 얘들은 커서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떠나 남의 나라로 가야 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오늘 안에 저 닭장을 다 정리할 수 있을까. 애고 삭신이야. 10년 활동을 통해 소진되고 망설이는 활동가에게 또 다시 적어도 10년은 펌프질할 것 같은 마중물을 보내준 아름다운재단의 프로그램이나 원망해야지.
그래도 행복하다. 다시 삽을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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