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어른들이 부르는
육자배기 노랫가락이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모른다. 학교에서 배운 창가(唱歌)나 유행가에 비해 청승맞고 미숙하게 느껴졌다. 악보도 없고
풍금에도 맞출 수 없는 노래곡조는 음악이 아닌 것으로 여긴 것이다. 창(唱)에는 그에 걸맞은
가야금과 퉁소가 있고, 조상들의 깊은
정서와 아릿한 한이 서려 있음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다.
요즈음 TV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랩'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빠른 노랫말은 뜻을 알아들을
수 없고, 고저장단이 분명치 않아 음률적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얼마 전 처제네 가족과 노래방에 갔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조카가 김건모의 랩 풍 노래
'핑계'를 흥격베 잘도 불렀다.
그 아이들에게 '랩'은 분명히 즐거움을 주는
멜로디로 소화되고
있다. 세대 차이는 듣는 감성까지 이처럼
달라지게 한다.
1910년, 치욕스런 한일합방으로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이른바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단발령이 내려졌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과
머리털 한 점인들 손상시킬 수 없다며 식음을 폐하고 ㅅ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있었던 일은
한 맺힌 우리 역사의 한 자락이다. 이제는
청학동 산골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상투머리가 어찌
목숨만큼 소중했던 것이었는지, '가치관의
변화'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디자인을 공부하는 막내 놈이 군대를 마치고 돌아온 후, 턱수염을 기르고 쥐꼬리 머리를
늘어뜨린 모습을 했을 때, 제 어미와
이모들은 "보기 흉하니 잘라 버리라"고
한 마디씩 했다.
마치 불량소년을 대하듯, 노운 눈길을
줄 수 없는 것이 기성세대의 시각인데 막상 본인은 그게
아니다. 광대라고 천시했던 연예인이
스타요 영웅이 된 영상매체 시대에 길들여진 20대
청소년으로서는 한 때 그런 모습으로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얼마 후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그놈의 별난 취향은 제풀에 사그라지고 말았지만, 이는 나이 따라 변해가는 모습이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어느 여가수가 유행시켰다는 미니스커트는 우여곡절이 많다. 제복 입은
경찰이 잣대를 가지고 길 가는 아가씨들의 치마 길이를 재던 시절이 있었던 일을 50대 이상은
기억한다. 여인이 살갗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음란스런 행위로 여겨온 전통적 시고와,
그 시대를 지배하던 군사정부의 보수적 경직성이 빚어낸 시대적 해프닝이라고 하기엔 우리
일상에 너무 깊숙이 들어온 사회 문제였다. 장발족에
대해 단발령이 내려지던 시절, 젊은이들의 긴 머리를 자르는 풍경을 길거리에서나 예비군 훈련장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무렵이었다.
누군가 "유행은 꾐에 빠진
전염병"이라고 했다. 길었다 짧아직, 넓었다 좁아지며, 커졌다
작아지는가 하면 노란색이 검정색으로, 밝은
빛이 어두운 빛깔로. 이런 달라짐은 진득하게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변덕과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현대적 상술이 만나 변동의
주기까지
단축시킴으로써 서민들이 호주머니를 털고 있다. 울며
겨자 먹기, 웬만큼 주체적 자아의식으로
무장되지 않은 속인들로서는 그 우람한 유행의 공동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회적
동물이 갖는 한계인지 모른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변화이 속도에도
가속이 붙었다. 10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이 1년이면
몰라보게 달라지고 잇음을 여기저기서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상둥이도 세대차를
느낀다"는 농담이 통하는 시대에 살고 잇다. 라이트
형제가 천으로 만든 날틀에 올라 하늘을
처음 날던 때가 20세기 초였는데, 5천 개의 인공위성이 무주창공(無主蒼空)을 날고 있는
오늘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고 있는 IT문명은 대학원을 공부한 70대의 석사 나으리를
무식쟁이로 전락시킬 판이다.
우리네 생활 모습만큼 달라진 것도 드문 것 같다.
50년대에 전쟁을 치르면서 '헬로 기브미
초콜릿'으로 대변되는 호구지책을 구걸하던
시절, 춘궁기가 되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하루
한 기를 때우던 처참한 가난을 살아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 세대 동아, 지금 우리는 영양
과잉을 고민하고 자동차 홍수로 교통지옥을 한탄하며, 과소비 관광으로 어그리 코리언을
연출하고 있다. 외형적인 경제 발전과 '참으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상호 함수관계의
매듭을 풀지 못한체, 도도히 흐르는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가고 있다.
인생무상(人生無常), 권불 10년(權不十年), 상전벽해(桑田碧海), 변화불측(變化不測), 행운
유수(行雲流水), 무화백일홍(無花百日紅), 만세불역(萬世不易)…. 인간과 우주만상의
변화
무쌍함을 일컫는 말을 보면 우리 조상들도 변화의 철리를 깨달은 지 오래인 것 같다.
먹고 사는 의식주부터 정치·경제·사회·도덕·윤리·교육·과학·예술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진리와 정의가 시운을 다라
모습을 달리하기도 하고, 선과 악이 뒤비귄 때도 있다.
지주는 사라지고 재벌이 등장하는가 하면, 귀족은
물 건너가고 만민 평등사상이 동서양을
뒤덮는다. 절대 권력의 화신이던 전제군주는
좇겨나고, 세계 재패를 노리던 공산체제도
무너졌다. 무소불위의 절대자, 신(神)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도 시대와 정권, 인종과 지역에
따라 성쇠를 달리했다.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왕조에 이르기까지 국민신앙의 기둥이었던 불교는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抑佛崇儒) 정책에 의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 것이 대표적
예다. 서벙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에 의해 300여 년의 세월을
갖은 학대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기독교는 콘스탄티
누스대제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된 이후, 지구상에서
큰 영향력을 갖는 매머드 종교로 거듭난
것은 서양종교의 경우다.
구태의연한 사고방식, 종전 방식의 답습, 제품의 모방, 예술작품의 표절 -
이는 발전을 저해
할 뿐 아니라 때로는 법의 제재를 받기도 하며 악덕으로 치부한다. 창작·발명·발견·개발·신기록
·새세상·신천지·개척 - 이는 창조적
변화를 의미하며 인류 역사에 공헌하는 미덕으로 칭송되고
있다.
신(神)을 제외한 모든 것은 변한다고 했던가. 시간은 변화를 낳는다. 변화에는 좋은 변화가
있는가 하면 바람직스럽지 못한 변화도 있다. 진보를 가져오는 변화는 멋진 변화다. 새로운
요리가 식욕을 돋우듯, 발전적 변화는
신선함과 함께 인간의 욕구 충족을 돕는다.
유전공학이 호박보다 큰 감자를 만들어 내고, 컴퓨터
시스템이 집안 살림과 사무를 자동처리
해 주며, 인공 장기로 신체 내장을
갈아 기우고, 여남은 시간이면 지구 반대편을 날아갈 수
있는 문명화된 세상. 오늘을 사는 우리는 21세기 지구촌의 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간절하다.
그러나 크나큰 걱정거리가 뒤다르고 있다. 진보와
발전을 상징하는 텔레비전·낸장고·컴퓨터·
로봇· 오토시스템·고층건물 · 마이카 · 레스토랑 · 별장 · 콘도미니엄 · 바캉스
· 레저 … .
이런 것들은 생활을 편리하고 여유롭게 하지만, 이로부터
파생되는 부정적 소산물은 '행복
지수'를 급격히 떨어드리고 문명화에
회의를 느끼게 한다.
14세 된 소녀가 12세 소년에 의해 설해당하고, 그 어린 소년은 자신이 소속된 '갱' 단원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똔 대문에 애비를 죽이는 아들이 있는가하면, 잘
사는 사람이 미워 살인공장을 차려놓고 인간도살을 자행한 휴악범죄는 몇 해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인간의 이기적 용망과 문명화의 산물은 독선 · 지배 · 음모 · 질투 · 협잡
· 기만 · 폭력 · 마약
· 환경오염 · 공해 · 부패 · 타락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서로 상승작용을 하고
있다. 국가권력과
법, 종교와 교육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현세의 한계 상황인가, 아니면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긴의 멍에인가.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제3의 물결'은 우리를 산업사회 이후의 새로운 사회구조로 몰아가고
있다. 정보사회에서는 비도덕화, 탈도덛화의 경향이 높아진다는 현실 진단을 외면한 채, 농경
시대의 도덕교범인 명심보감을 주장함은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 할 수 있다. 하드웨어에
걸맞은 소프트웨어의 개발, 물질문명과
조화를 이룰 정신문화의 재건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역사 발전의
가닥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철학적 통찰과 지혜가
요청되는 시기이다. 산업문명에 발맞추어
인성 개발에 힘쓸 일이며. 현대 시민 윤리에 알맞은
명심보감을 다시 써야 한다.
고인 물은 썩고, 정지한 자전거는 넘어진다. 세상은 변해야 하고, 변하는 세상을 막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변하면서 그 올바름을 잃지 않는 것이다. 옛것이 모두 옳은 것이 될
수
없듯이, 새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건전한
상식이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
세월이 가면 너는 무엇으로 변하는가.
세상이 변하면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물은 흘러도 여울은 여울대로 남듯. 긴
여정을 두고 오래 간직해야 할 것을 지니고 싶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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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문인 101명이 대표작> (청색시대 제16집) 현대수필문인회(20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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