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맥리호스트레일 샤프피크코스-1
꼭꼭 숨겨진 비경 속에서 ‘평화로운 여유’를 즐기다
호텔 앞에서 홍콩 북동쪽에 있는 작은 항구도시 사이쿵(西貢, SaiKung)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맥리호스트레일 샤프피크코스를 걷기 위해서다. 아침 출근시간이라 정류장마다 승객들이 탔다 내리기를 반복한다.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어있는 홍콩은 시민들이 자가용으로 출퇴근하기보다는 시내버스나 지하철을 주로 이용한다.
스쳐지나가는 바깥풍경은 처음 와보는 곳이라 새롭고 흥미롭다.
홍콩시내와는 달리 홍콩 북쪽 사틴(沙田) 신도시에는 싱문강(城門河)이 유유하게 흘러간다.
강변에서는 아침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고, 강에서는 조정을 하고 있는 배들이 잔잔한 강물을 가른다.
어느새 싱문강은 사틴해로 흘러들면서 바다에 합류한다. 삼면이 육지로 둘러싸인 사틴해는 깊숙한 만(灣)을 이루어
호수 같은 느낌을 준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해변을 구불구불 돌고 돌아가며 실시간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홍콩의 북동쪽 해변을 달리던 버스는 잠시 바다와 헤어져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어서자 구룡반도 동쪽 끝을 장식한 사이쿵반도에 둘러싸인 사이쿵해(西貢海)가 펼쳐진다.
해변에 차를 세우고 경이로운 자연을 충분히 즐기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대중교통이라 불가능한 일이다.
아쉬운 대로 차창을 통해서만 보아도 푸른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이 충분히 아름답다.
홍콩시내에서 조금 벗어났는데, 자연이 잘 살아있는 해안과 해변의 작은 마을,
고요하고 안온한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지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풍경을 즐기며 달리다보니 어느새 사이쿵에 도착해 있다.
사이쿵은 홍콩시내에서 자동차로 1시간 가까이 걸리는 작은 해안도시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늘 붐비는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이쿵에 가면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이고, 각종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고,
부두에서 페리를 타고 주변의 섬이나 해변을 여행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처럼 맥리호스트레일을 걷기위해서는 거쳐 가야할 마을이기도 하다.
사이쿵부두에는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고, 작은 배에서 해산물을 고객들에게 직접 판매하기도 한다.
부두 옆 해안가에는 살아있는 해산물을 직접 요리하여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있다.
오늘 트레킹을 마치고 이곳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식당 수족관에는 대게, 바다가재를 비롯한 각종 어패류, 생선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부두를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오니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맥도날드 같은 레스토랑이나 카페들도 성업 중이다. 식당에 들어가니 아침식사를 하는 관광객이 꽤 많다.
우리는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한 후 맥리호스트레일 출발지점인 서만정(西灣亭)으로 가는 24인승 미니시내버스를 탄다.
오전에 네 번 밖에 없는 시내버스를 운 좋게 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시내버스 승객은 우리 일행 6명과 사이완빌리지(西灣村) 마을주민 한 분이 전부다.
중간에 타고 내리는 사람도 없다. 시내버스는 운치 있는 해변을 따라 달리다가 산속으로 빠져든다.
산속에 접어들자 길은 미니버스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아진다.
산비탈 아래로는 홍콩에서 가장 큰 호수인 하이아일랜드저수지(萬宜水庫)가 잔잔하고, 호수 너머로 푸른 바다가 출렁인다.
사이쿵에서 20여분을 달려 자동차가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인 서만정에 도착했다.
시내버스가 사이쿵으로 돌아가고 나니 세상에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
서만촌 마을주민 한 분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출발해버렸고, 우리는 느긋하게 걸을 채비를 한다.
오늘 우리는 맥리호스트레일(麥理浩徑) 2코스를 거쳐 샤프피크 정상을 밟을 예정이다.
맥리호스(MacLehose)는 1979년 당시 홍콩 총독으로, 홍콩을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하는 협상을 이끈 인물이다.
당시 성공적 협상과 함께 홍콩 발전의 초석을 다져 놓은 공로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아시아영웅 65명’에 뽑히기도 했다.
협상과정에서 협상내용에 대하여 반발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맥리호스트레일은 반환협상 당시
반발하는 시민들을 도시외곽에서 트레킹으로 풀라는 의미로, 총독의 이름을 따서 조성했다고 한다.
등산로 초입에는 사이완(西灣) 이정표가 서 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시멘트길이 이어진다.
홍콩의 트레일은 시멘트길이 많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 빗물에 길이 씻겨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인공적인 소리라고는 전혀 들리지 않는 오지에서 자연의 소리는 적적하고 고요하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명상음악처럼 들려온다.
서만정에서 출발하여 10여 분 걸었을까? 조금 전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하이아일랜드저수지(萬宜水庫)가 길 아래로 펼쳐진다.
이 호수는 홍콩 시민들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
동쪽과 서쪽 두 군데에 댐을 막아 만들어진 하이아일랜드저수지는 주변 산봉우리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이런 풍광을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잔잔한 호수와 붕긋붕긋 솟은 산봉우리들이 조화를 이루고, 호수 가운데에는 커다란 섬도 하나 있다.
하이아일랜드 동댐 근처는 거대한 화산 유문암층이 있는 곳으로 2009년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호수와 헤어져 잠시 추이퉁아우(吹簡坳)라 불리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동북쪽 골짜기 뒤로 사이완(西灣)이 내려다보인다.
이 고개에서부터는 맥리호스트레일 2코스의 공식구간이다. 푸른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이 자꾸만 빨라진다.
사이완빌리지(西灣村)에 도착하니 ‘사이완관광정보센터’ 간판이 붙은 건물이 눈에 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공휴일 10:30~16:00에만 개방한다고 쓰여 있다.
주변에는 대여섯 가구를 넘지 않을 민가가 있을 뿐 한적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곧바로 해변으로 나아간다. 해변 백사장을 만나면 나이를 불문하고 천진난만해진다.
사이완은 육지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만(灣)을 이루고 있고, 아담한 크기의 백사장은 산줄기에 감싸여있다.
가끔 지나가는 트레킹족을 제외하고는 사람 한 명 찾아볼 수가 없다.
모래해변과 잔잔한 바다가 모두 내 것 같다. 우리는 부자가 된다.
이제까지는 산길을 따라 왔다면 지금부터는 한동안 해변길을 따라 걷게 된다.
길을 걷다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열대성 과일들이 나무에 매달려있다.
사이완 해변은 잠시 바위지대를 지나면 다시 모래해변을 만난다. 민가 한 채 없는 고운 백사장은
천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바다 정면에는 두 개의 작은 섬이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등대역할을 한다.
나는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이런 곳에서 ‘평화로운 여유’를 마음껏 누린다.
모래해변을 지나 해변 산비탈을 돌아간다. 산길을 걸으면서도 두 개의 백사장으로 이뤄진
사이완해변과 푸른 바다를 바라보느라 자꾸만 뒤돌아본다.
풍경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볼 때 더 아름답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사이완을 둘러싸고 있는 사이완산(西灣山, 314m)을 비롯한 여러 산줄기가 바다와 어울려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다.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며 바다로 스며드는 산줄기는 거대한 코끼리가 긴 코를 물가에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것 같다.
작은 언덕을 넘으니 송곳처럼 뾰쪽하게 솟은 샤프피크(蚺蛇尖, Sharp Peak, 468m)가 고개를 내밀더니
천하절경을 이룬 풍경화가 펼쳐진다. 육지 속으로 파고든 두 개의 만(灣), 함틴완(鹹田灣, Ham Tin Wan)과
타이완(大灣, Tai Wan)이 에메랄드빛을 띠고, 육지에서는 샤프피크를 정점으로
사이쿵반도 끝자락으로 뻗어나가는 산줄기가 행복하게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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