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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존중과 사랑의 연대
-문정희 시인의 자선시를 중심으로
박현솔
생명이 자기자율성에 따라 스스로의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라면, 생명의식은 생명을 가진 존재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우주 속에 존재하는 사물과 현상들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생명에 대한 사유는 동양과 서양이 유사하지만 생명의 범위를 인간, 짐승, 식물에만 제한을 둔 서양의 사고방식과 달리 동양의 사고는 자연, 영성까지도 생명으로 보는 포괄적 인식이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노장사상과 도가사상, 불교사상, 무속 등에서 이러한 생명의식이 드러나는데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군부독재, 민주화운동 등이 이어지면서 수많은 목숨들이 희생되었고, 산업화시대에는 개발의 붐과 자본주의의 폐해로 인간 생명이 도구화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으로 피폐해진 생태계의 질서를 회복하고 과학의 발달과 자본주의 억압을 극복할 대안으로서 생태주의와 에코페미니즘이 대두되었다.
한국의 현대시에서 인간 생명의 요소들과 인식을 중요시한 유파로 생명파를 들 수가 있다. 생명파는 서정주, 유치환을 중심으로 인간성을 옹호하고 생명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들은 유미주의와 주지주의를 내세우던 시문학파의 반생명성 기교에 반기를 들면서 생겨났다. 이 생명파 이후로 생명의식을 여성의 몸과 자연으로 확장시킨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문정희 시인을 꼽을 수가 있다. 문정희 시인은 1965년에 시집 꽃숨으로 등단하였고 이후에는 활발하고 당당한 시적 사유와 섬세한 언어, 대담한 발상을 통한 생명의식을 드러내는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여성시인이지만 시적 언어가 자유롭게 비상하려는 의지를 가진 것이나 원시적 생명성, 본능적 직관의 표출, 직정적 언어의 사용 등은 스승인 미당 서정주의 시적 자장 안에 그녀의 시가 위치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서정주의 「소연가」에서 착상을 얻어서 「석남꽃」을 쓴 것이나, 서정주의 「견우의 노래」에서 시적 영감을 얻어서 「찔레」를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정희 시인은 스승 미당의 시적 재능과 성취를 존경하였고 자신이 미당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기에 그의 생명의식은 자연스럽게 문정희 시인에게로 이어졌고 당대의 여성 시인으로서는 독보적인 시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문정희 시인은 등단 초기에는 허무주의와 죽음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었고, 90년대 이후에는 페미니즘적인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에는 생명과 여성의 정체성에 주목하는 에코페미니즘 경향의 시를 창작하였다. 그녀는 여성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고, 여성의 주체적인 자각과 함께 여성의 특성에 대한 남성의 태도와 인식 변화를 유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사랑의 연대를 통해서 남성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시도함으로써 무한한 사랑과 화해를 통한 통합적이고 균형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세상에 큰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코미디를 보다가 와락 운 적이 있다
늙은 코미디언이 맨땅에 드러누워
풍뎅이처럼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그만 울음을 터트린 어린 날이 있었다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코미디를 보고 운다고...
그때 나는 세상에 큰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웃음과 눈물 사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어두운 맨땅을 보았다
그것이 고독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그런 미흡한 말로 표현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맨땅에다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
늙은 코미디언처럼
거꾸로 뒤집혀 버둥거리는
풍뎅이처럼
- 「늙은 코미디언」 전문
문정희 시인의 시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이 내재되어 있고 자신과 다른 존재들도 따스히 끌어안으려는 소통의 의지와 공감능력이 있다. 이러한 감성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타자와 대상에 대한 이해는 심화되고 발전하였고 결국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살게 된다. 여기에서 “세상에 큰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어떤 굴욕도 감수해야 하는 인간 존재의 비애와 살벌한 경쟁구도를 어린 시절에 미리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독이나 슬픔이라는 단어에 제한되지 않는 특별한 표현을 찾기 위해 “시 같은 것”을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와 같이 「사각의 링」이라는 시에서 “김득구 사망”에 관해서 자신만의 언어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사우스코리아 헝그리 복서의 시신 위에는/대머리 독재자의 훈장이 수여되고/피 묻은 글러브가 날아다니는 사각의 링은/아직도 인간의 세상 어디에든 있지/물론 오늘 여기에도 있지(…)지금 당신이 서 있는 사각 사각(四角)의 링을 보라구/힘이 없는 것은 죽어야 하는 사각(四角)을 보라구”(「사각의 링」 부분)에서 인간 존재가 끝없는 경쟁과 죽음 속에 내몰려 있음을 존재론적으로 일깨우고 있다. 이렇게 인간은 세계 혹은 타자들과 투쟁하고 쟁취하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의 몸과 영혼은 한없이 나약하고 작으며’ 언젠가 이 세상에서 소멸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정신보다는 망령뿐이고/육신이라기보다 넝마인/이것이 신의 작품의 끝 장면이라고?/쓰린 상처와 가시를 헤치고/결국 아무것도 아닌/이게 뭐지? 이게 다야?”(「그의 마지막 침대」 부분)에서도 육체의 허무를 누군가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존재가 처한 현실임을 자각하게 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함께 잘 살아가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운명이기에 살아있는 동안에라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그녀의 시는 전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세상의 강물을 나눠 마시고/세상의 채소를 나누어 먹고/똑같은 해와 달 아래/똑 같은 주름을 만들고 산다는 것이라네/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또 하나의 이유는/세상의 강가에서 똑같이/시간의 돌멩이를 던지며 운다는 것이라네/바람에 나뒹굴다가/서로 누군지도 모르는/나뭇잎이나 쇠똥구리 같은 것으로/똑 같이 흩어지는 것이라네”(「사랑해야 하는 이유」 부분)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함께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모두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고 죽은 후에는 아무런 존재의 의미 없이 하나의 미물로 흩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정희 시인은 인간의 존재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정과 그리움 같은 것에 주목하면서 모든 삶의 의미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그녀만의 사유를 펼쳐나간다. “사람을 피해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그리워한다/사람, 너는 누구냐(…)내가 당도해야 할 허공은 어디인가/허공을 뚫어 문 하나를 내고 싶다/어느 곳도 완벽한 곳은 없었지만/문이 없는 곳 또한 없었다”(「사람에게」 부분)에서 자신의 지향점이 사람을 향해 있고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시, 감동시킬 수 있는 시를 쓰고자 노력할 것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①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마라
푸른 하늘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러고는 쉬이쉬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 「물을 만드는 여자」 전문
②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 「율포의 기억」 전문
문정희 시인이 인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황폐화된 자연의 입장에 선 것은 인간이 근대과학과 이성주의의 최대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화 시대에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 인식 체계를 가지고 있는 남성들이 자연(여성)을 경제적인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자연과 여성이 동일한 지배구조에 의해 생명력이 파괴된다는 인식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에코페미니즘 시가 발생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 여성성과 자연의 회복을 통해서 조화롭고 다양하고 공존 가능한 질서를 보여주는 상상력으로 확대된다. 즉 생명과 생명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환경문제와 함께 여성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운동이 에코페미니즘이다.
①에서 “딸”과 “대지”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몸속의 강물”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황폐화된 대지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여성의 몸을 거친 “오줌”을 통해서 치유 받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가 상처를 다독이고 그것들의 고유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것만이 자연과 여성성을 회복하는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②에서 화자는 바닷물이 빠져나간 “뻘밭에”서 “숨 쉬고 사는 것들”과 그러한 “먹이를 건지는” 인간의 “슬프고 경건한 손”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이 서로 공존해야 하는 관계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딸을 키우는 “어머니”와 숨 쉬는 것들을 키우는 “뻘밭”의 만남은 생명을 키우는 두 주체의 만남이라는 것에서도 의미가 있다.
미당 서정주의 시가 원시적 생명의식에 집중하고 있다면, 문정희의 시는 생명의식이 자연과 여성을 통해서 그 본질과 가치를 형상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생명의식에 경도되기는 하지만 서정주는 남성 특유의 당당함으로 밀고 나간 반면에 문정희 시인은 여성이라는 자의식으로 인해 자연과의 동질성이라는 우회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존재와 존재, 존재와 사물의 소통과 공존의 시각에서 볼 때 문정희의 시가 훨씬 따뜻하고 대중에게 한발 더 다가간 측면이 있다.
문정희 시인의 생명의식이 확연하게 드러난 다른 시를 살펴보면 “가을이 오기 전/뽀뽈라로 갈까/돌마다 태양의 얼굴을 새겨놓고/햇살에도 피가 도는 마야의 여자가 되어/검은 머리 길게 땋아내리고/생긴 대로 끝없이 아이를 낳아볼까/풍성한 다산의 여자들이/초록의 밀림 속에서 죄 없이 천 년의 대지가 되는/뽀뽈라로 가서/야자잎에 돌을 얹어 둥지 하나 틀고/나도 밤마다 쑥쑥 아이를 배고/해마다 쑥쑥 아이를 낳아야지”(「머리 감는 여자」 부분)에서 다산의 여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강한 생명력이 화자에게도 전이되면서 여성성과 대지의 합일을 통한 생명 탄생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인의 생명의식은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감동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죽어가는 생명에게서도 포착되는 양상을 보인다. “단 한 번의 자유를 위해/머리에 심은 뿔, 고목처럼 그대로 주저앉히고/보이지 않는 피의 거미줄에 걸린/흑인 오르페처럼 떠나리/어쩔 수 없다/눈에서 떨어지는 누우런 불덩이/저 하늘 /실은 이미 순하게 꿈에 들었고/삐걱삐걱 뼈로만 그저 걸어서/한 번 가면 다시는 오기 힘든 곳으로/떠나가는 소야! 소야!/여기 나는 어쩐 모습이냐?”(「소」 부분)에서 생명을 죽임으로써 이득을 얻고자하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한 화자의 모습이 소에게는 어떻게 비춰지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소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것 하난/용납하시리”와 같은 변명을 하고 있는 화자 자신의 모습을 고발함으로써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를 보인다.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 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사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위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화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에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전문
문정희 시인은 등단 후부터 1980년대까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색채를 띠는 시들을 주로 썼으나 1990년대 이후부터는 점차 생태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페미니즘의 단계를 확장해간다. 기존의 페미니즘이 남성의 억압 아래 차별을 받는 여성의 실상을 폭로했다면, 에코페미니즘은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나 억압이 다양하게 표출되어 생태적인 문제로 나아가서 여성성과 자연이 회복되는 시적 상상력을 발현시킨다.
이 시에서도 여학교를 졸업한 능력 있는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명제를 던짐으로써 여성들이 직면한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와 사회적, 제도적 문제들을 환기시키고 있다.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활약을 하고 있지만 여성의 삶은 남성에 비해 너무나 제한적이어서 능력이 있어도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국회위원도 장관도 의사도” 되지 못하는 여자의 삶이 안타깝고 기운이 빠지는 것은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자유와 개성이 존중되는 시대에 아직도 옛 사고방식을 강요당하는 여성들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여성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삶을 바라면서 그들을 소외시키는 더 큰 억압 구조들이 있다면 그것들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시들에서도 여성의 존재감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시들이 있는데 이들은 프리다 칼로, 황진이, 처용 아내, 여시인 등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렸지만 남성의 가부장적 억압과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피해를 본 여성들이다. 이들이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살펴보면 「지금 장미를 따라」에서 “유명한 여자의 집은/으깨어진 골반 위에 세워진다(…)이마에 박힌 호색한 남편은 신이요 악마/결혼은 푸른 꽃 만발한 고통의 신전//피 흐르는 자궁을 코르셋으로 묶어 놓고/침대에 누워/그림만 그림만 그리다가/강철같이 찬란한 그림이 된/한 여자의 집”(「지금 장미를 따라」 부분)에서 잘못된 결혼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간 프리다 칼로의 삶을 그리고 있다.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남편에게 버림받고 그 사랑을 끝내 버리지 못해서 자신을 지옥 같은 삶에 가두었던 프리다 칼로에 대한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황진이의 노래 1」에서는 “담도 높은 대궐 안엔/문도 많은데/문마다 모두 열어젖히고 싶어요//닿는 것마다/흔들고 싶어요//지체 있는 뭇 별들을/죄다 따고 싶어요//아니어요//작은 햇살에도 얼굴 부끄러운/풀꽃 같은/사랑 하나로//높은 벽에 온몸 부딪고/스러지고 싶어요”(「황진이의 노래 1」 부분)에서 여성 화자의 욕망과 순수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황진이는 남성을 뛰어넘는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기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녀의 작품이 후대에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였다.
다음으로 처용 아내의 사연을 들어보면 “사람들은 역신과 자고 있는 아내를 보고도/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처용의/여유와 담대와 관용을 기리며/그날부터 부엌이건 우물이건 질병이 도는 곳에/처용가를 써 붙이고 야단이지만/사실 그날 밤 제가 안고 뒹군 것은/한 달에 한 번 여자를 찾아오는/삼신 할머니의 빨간 몸 손님이었던 건/누구보다 제 남편 처용랑이 잘 알아요/이 땅, 천 년의 남자들만 모를 뿐/천 년 동안 처용가 부르며 낄낄대고 웃을 뿐”(「처용 아내의 노래」 부분)에서 남성들의 잘못된 오해로 인해서 후대에까지 역신과 동침한 여자로 낙인찍힌 처용 아내의 억울함이 토로되고 있다. 사건의 전말이나 진실 따위는 안중에 없고 “천 년의 남자들”에 의해 서 재미 위주로 전해진 이 설화가 단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봤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뿌리깊이 작용하여 수많은 여성들을 억압해 왔음을 알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시를 쓰는 것은/비상벨을 눌러/감히 신과 키스를 하려는 것과 같다/이것은 죄는 아니지만 위험한 일이므로/문학사는 오랫동안/여자의 시를 역사 밖으로 던져 버렸다/여자의 시는 비와 눈과 안개와 폭풍처럼/천재지변처럼/우주를 떠돌았다/문학사의 낡은 페이지보다/눈부신 처녀림으로”(「불을 만지고 노는 여자」 부분)에서 여성의 글쓰기가 남성들에 의해 억압되고 조작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남성의 가부장적 세계관에 맞서는 여성의 자유의지와 창의적 시선은 애초에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역사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가부장적 억압과 사회적, 제도적 편견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꿈과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은 언젠가 불평등이 해소되고 평등한 삶을 살아갈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예쁜 여자의 신화 속에 스스로를 가두니
입술을 자주색으로 칠하고 나니
거울 속에 속국의 공주가 앉아 있다
내 작은 얼굴은 국제 자본의 각축장
거상들이 만든 허구의 드라마가
명실 공히 그 절정을 이룬다
좁은 영토에 만국기 펄럭인다
금년 가을 유행색은 섹시브라운
샤넬이 지시하는 데로 볼연지를 칠하고
예쁜 여자의 신화 속에
스스로를 가두니
이만하면 음모는 제법 완성된 셈
가끔 소스라치며
자신 속의 노예를 깨우치지만
매혹의 인공 향과 부드러운 색조가 만든
착시는 이미 저항을 잃은 지 오래다
시간을 손으로 막기 위해 육체란
이렇듯 슬픈 향을 발라야 하는 것일까
안간힘처럼 에스테 로더의 아이라이너로
검은 철책을 두르고
디오르 한 방울을 귀밑에 살짝 뿌려 마무리한 후
드디어 외출 준비를 마친 속국의 여자는
비극 배우처럼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 「화장을 하며」 전문
우리나라는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자연과 여성을 자본주의의 속성에 따라 이용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자연의 생명성보다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이 우세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이상적인 여성의 몸이 제시되면서 자본주의와 상업적인 대상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경향이 짙어진다. 문정희 시인은 1970년대~1980년대에 시대적 아픔을 내면화하면서 자유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여성에 대한 구조적 억압과 불합리로 인해서 허무의식과 죽음을 통찰하게 된다. 이 시기에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었고, 미국 유학생활 동안 여성학에 대한 이론적 천착이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의 시를 쓰게 된다.
이 시에서 여성의 얼굴은 고유의 개성을 지니기보다 “국제 자본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렇게 된 데에는 화자가 전통적인 여성의 삶에서 빠져나와 자유로운 외국의 문물과 화장술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 화장술은 자본주의의 속성인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여성을 상업적인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즉 매스미디어가 제시하는 아름다움의 덫에 화자가 자발적으로 걸어들어 가서 갇힌 셈이다. “거상들이 만든 허구의 드라마”에 “속국의 여자”는 “비극 배우”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다.
비극배우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 화자에 대한 또 다른 시가 있는데 “인생은 짧고 결혼은 왜 이리 긴가/가도 가도 벌판/허공은 또 왜 이리 많은가//새들아 대신 울어 다오/나 깊은 울음 더 퍼내기 싫어/앙상한 광채로 흔들리는 갈대들아/하늘 향해 미친 손을 휘저어 다오//봄은 가는데/꽃들은 얼마를 더 소리쳐야 무덤이 될까”(「비극 배우처럼」 부분)에서 결혼 생활에 대한 지루함으로 가정이라는 굴레 속에서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모두 허비해야 하는 현실을 깊이 탄식하는 여성 화자를 만날 수가 있다. 그리고 「유령」이라는 시에서도 여성화자는 비극적 인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나는 밤이면 몸뚱이만 남지//시아비는 내 손을 잘라 가고/시어미는 내 눈을 도려 가고/시누이는 내 말(言)을 뺏아 가고/남편은 내 날개를/그리고 또 누군가 내 머리를 가지고/달아나서/하나씩 더 붙이고 유령이 되지”(「유령」 부분)에서도 여성 화자를 억압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시댁 식구들이다. 화자는 육체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있고 심리적으로는 우울로 인한 좌절감 속에 놓여있다. 이것은 시댁 식구에 대한 전근대적인 사고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과 거의 유사하게 타자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시로 「작은 부엌 노래」가 있다. “세상이 열린 이래/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소리치고/한 사람은/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부엌에 서서/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작은 부엌 노래」 부분)에서도 남편과 자신의 위치를 이분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시는 시인이 페미니즘에 깊이 경도된 시기에 쓴 시로서 비유나 시적 기법이 절제된 직접적인 언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처음부터 불평등한 위치에서 출발한 부부는 시간이 흘러도 상하관계 혹은 수직적 관계가 개선되지 않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비극적인 세계 속에 놓여있는 화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일관할 가능성이 높은데 “진종일 돌아다녀도 개들조차 슬슬 피해 가는/이것은 나이가 아니라 초가을이다/잘하면 곁에는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어/가장 완벽한 나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지만/꽃병에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반쯤 상처 입은 꽃 몇 송이 꽂혀 있다/두려울 건 없지만 쓸쓸한 배경이다”(「오십 세」 부분)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처럼 문정희 시인의 초기시에서 보이는 관계의 불균형은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아주 일상화된 것들로서 남성 이데올로기의 억압체계나 사회제도 혹은 구조적인 시스템의 부재로 인한 편견과 무관심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 것이었는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오랜 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지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겁 속에
꼭꼭 싸매 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왔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 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 「유방」 전문
몸은 실존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요건으로서 소통의 열망과 고통을 동시에 보여주는 감각체계이다. 페미니즘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발견과 해방을 추구하는 것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매스미디어의 편견 속에서 억압되었던 여성의 몸을 회복함으로써 오롯이 ‘전신적 기쁨’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문정희 시인은 2000년대 이후부터 인간의 ‘몸’에 대해서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발견과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던 여성의 몸이 어떻게 스스로의 실존을 증명하는지에 대해 특유의 감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시대의 여류 시인들이 보여주었던 몸에 대한 환몽, 절지 등의 비상식적인 몰두가 아닌 몸의 본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대담하고 자유롭게 몸의 담론을 써나가고 있다.
다음은 문정희 시인이 2007년 3월 문학사상에 「관능시 또는 에로티즘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사랑보다는 성(性)과 변종된 욕망들이 더 많이 범람했지만 그러기 때문에 나는 더욱 진정한 생명의 에너지로서 관능을 한국어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관능에 대한 나의 관심은 경험보다는 나이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제 사랑과 관능을 제대로 좀 다룰 수 있는 때가 된 것 같다는 겁 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인지 문정희 시인의 시에서 관능은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인간의 근원적 몸의 욕구를 말하고 있기에 그 관능이 부끄럽기보다는 건강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면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된다.
반면에 미당 서정주 시에서 관능은 강렬하고 원색적인 것으로서 원시적이고 퇴폐적인 정서를 표출하며, 「화사」에서는 인간의 원죄 의식과 원초적 생명력을 통한 관능적 욕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즉 보편적이지 않은 극도의 개인적인 욕망의 분출이 치달으며 생성된 관능은 당당하거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기보다 왠지 부끄러운 느낌을 갖게 한다. 두 시인의 시가 인간의 원초적 생명과 함께 발현되는 관능적 욕망에서 과감하게 출발하고는 있지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이들이 표현하는 관능과 욕망을 타자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유방”이 “오랜 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동안 몸의 주체가 나 자신임을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여성의 몸이 “남자”와 “아기”를 위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달 속의 흑점을 찾”기 위해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있는 상황에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이 있고나서부터 화자는 몸에 대한 주체로서 당당한 사고와 분별력으로 자신의 열정과 관능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시인의 몸에 대한 사유와 관능에 대한 상상력이 어떻게 뻗어 가는지 살펴보는 데에는 「“응”」과 「두 조각 입술」, 「알몸노래」만한 시가 없다. “햇살 가득한 대낮/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네가 물었을 때/꽃처럼 피어난/나의 문자/“응”//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있고/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있는/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응”」 전문)에서 환한 대낮에 화자에게 날아온 문자 “응”에서 언어적 관능이 피어나고 있다. 무심결에 내뱉어진 말에서 시적 감각으로 뻗어간 이 관능을 누가 부끄럽다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생명이 생명을 탐하는/저 밀착의 힘(…)탱고처럼 짧고 격렬한 집중으로/두 조각 입술이 만나는/숨 가쁜 사랑의 순간”(「두 조각 입술」 부분)에서 키스를 춤에 비유하고 있는데 밀고 당기는 탱고의 춤사위가 연상되면서 아름다운 공연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마지막으로 “추운 겨울날에도/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내가 따뜻한 사람이었으면(…)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저 살아 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 텐데/돌려드리기 전 한 번만 꿈에도 그리운/네 피와 살과 뼈를 만나서/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 텐데”(「알몸노래」 부분)에서도 화자는 인간의 마지막 육체의 죽음 속에서 사유되는 인간적인 관능을 말하고 있다.
①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띄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리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 「한계령을 위한 연가」 전문
②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 더 튼튼하고
좀 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뜩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눈 속의 불
천년의 역사에다 당겨 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 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전문
문정희의 시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되고 진정한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의 연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전기시에서부터 최근의 시까지 시인의 일상과 정신, 생명성, 여성성, 관능, 화해 등의 주제를 하나로 꿰는 것은 사랑이다. 사물과 타자와 세상과 고통까지도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랑의 확장은 그녀가 자유의 노마드를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녀의 사랑에 대한 사유는 산문집 살아있다는 것은에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인간은 본래 나약하기 짝이 없는 가엾은 존재라는 것, 그리고 인간의 삶은 근원적으로 우수의 표정 위에 떠있는 숙명을 안고 시작하고 끝난다는 것, 이런 자각이야말로 바로 무한한 사랑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명예와 돈, 권력은 진실로 인간 본질의 우수나 고통을 위무하고 치유하기는커녕 어쩌면 그 우수와 고통을 더욱 더 깊게 할 수도 있다.(…)그 모든 것을 헤치고 샘솟는 사랑은 우리의 목숨을 꽃처럼 향기롭고 아름답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삶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문정희,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부분)에서 문정희 시인이 왜 사랑을 향해서 끝없는 집념을 가지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생의 허무와 고통 속에서 끝까지 붙들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 사랑이고, 사랑을 지닌 자는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비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누구를 사랑해야 하고 누구를 향해 끊임없이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시인이 살아가는 삶의 동기가 되고, 고통이 되고, 미래를 함께 할 사람 바로 남성이다. 가부장적인 억압으로 여성을 고통 속에서 살게 했고 현재에도 그 편견이 끝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인식의 교정을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할 바로 그 남성 말이다.
①에서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와 같은 표현을 보더라도 여성 화자가 갑자기 닥친 자연재해 속에서 함께 숨고 싶은 대상이 남성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시외에도 남성에 대한 이해가 드러나고 있는 시로 「남자를 위하여」, 「오빠」가 있다. “남자들은/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결별한다/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딸에게 뽀뽀를 하며/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남자들은/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아름다운 어른이 된다”(「남자를 위하여」 부분)에서 딸의 출생과 양육과정을 통해서 남성이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헐떡임이 사라지고/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비단 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는/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나 이제 용케도 알아 버렸다”(「오빠」 부분)에서도 화자는 여자가 아닌 여동생을 자처할 때 한없이 약해지는 남성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
②에서 세상의 사나이들과 다른 삶을 살다 간 사마천은 “꼿꼿한”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남성이다. 화자가 사마천에게 끌리는 이유는 “투옥당한 패장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을 잘리는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史記)>를 써서 “인간이란 무인가”를 규명해낸” 사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마천의 행적은 세상의 사내들이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사는 것과 대조적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천년의 역사”에 새긴 그 집념이 바로 “천년 후의 여자”를 매료시킨 것이다. 이 시의 사마천과 같이 매력적인 남성상에 대한 시가 몇 편 더 있는데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싱싱하게 몸부림치는/가물치처럼 온몸을 던져 오는/거대한 파도를……/몰래 숨어 해치우는/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뿐/눈에 띌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뿐/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여자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걸/갈증처럼 바람둥이에게 휘말려/한평생을 던져버리고 싶은 걸”(「다시 남자를 위하여」 부분처럼 “온몸을 던져 오는” “눈부신 야생마”를 기다리는 여성화자의 심리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지구를 다 돌아다녀도/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이 남자일 것 같아/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가장 많이 먹은 남자/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남편」 부분)에서 화자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을 공유하고 영향력을 끼친 남편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고 있다.
문정희 시인의 무의식의 기저에는 남성에 대한 이해와 연민, 사랑의 연대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어차피 인생에서 남성을 빼버릴 수 없다면 그들의 고착적인 무의식을 뒤흔들고, 새롭게 인식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여성성을 바로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이해와 남성성에 대한 올바른 앎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현실을 살아갈 때 불협화음은 줄어들고 모두에게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이것이 그녀가 꿈꾸는 양성 평등의 프로젝트이고 사랑의 연대로 나아가려는 의지이다.
미당 서정주도 자신의 시에서 다양한 여성들을 형상화하였는데 그녀들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이나 관조적 여성상과 초월적 여성상 등 여성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에 대한 여러 편의 시에서 안쓰러움과 미안함, 깊은 애정을 드러내기도 하였고, 늙은 아내가 죽으면 자신과의 인연이 저 세상에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볼 때 서정주는 이상적인 여성상과 현실적인 여성상을 함께 추구하면서 여성 특유의 성 정체성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스승의 진정성 있는 여성성 탐색을 문정희 시인이 깊이 공감하면서 의미 있게 생각하였고 이를 자신의 시세계에도 적용해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미당 서정주의 여성성에 대한 사유는 문정희 시인에게 부분적으로라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최대의 난제는 ‘생명’의 문제로 이는 자연의 생태환경과 인간의 생명 문제와도 연결이 된다. 그간 인간중심주의는 자연과 생태계를 도구화시키고 억압함으로써 큰 위기를 불러왔고 다시 자연중심주의로 회귀하려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이 요구되고 있다.
등단 50년이 넘는 시력을 가진 문정희 시인은 다양하고 개성적인 시세계를 확보하였고 현재에도 당당한 시적 사유와 섬세하고 대담한 관능, 사랑의 예찬, 시인으로서의 자각 등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에서 시작하여 에코페미니즘의 성향을 띤 시들까지 창작함으로써 여성이 결혼과 함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서 주체로 서기 위해서 미국행을 결심하고, 거기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페미니스트들과도 소통을 하게 된다. 이는 문정희 시인이 에코페미니즘의 시세계를 갖는 동기가 되었고 여성과 자연을 통한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또한 그녀의 시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사유가 남성적 가부장제에 의해서 압박을 받거나, 모성성을 간직한 대지모(大地母)로서의 역할을 하거나, 생명의 주체로서 열정과 관능으로 사랑을 예찬하는 등 다양한 경로로 뻗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인생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사랑이 제시되고 그 대상인 남성에게 여성성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고 여성의 특징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함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문정희 시인이 원하는 사랑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이고, 사랑의 연대를 통해서 높은 경계를 무화시키는 것이다.
한편 문정희 시인의 시가 생명과 관능, 사랑과 여성의 주제를 탐색하게 된 것은 스승인 미당 서정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두 사람의 인연과 함께 여러 작품의 언어와 기법, 경향들을 살펴봤을 때 매우 유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미당의 시가 개인의 미학적, 시적 성취에 가치를 두고 있다면 문정희 시인의 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냄으로써 상생과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적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현솔
제주 성산 출생. 아주대 대학원 졸업(국문학 박사).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2001년 <현대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달의 영토>, <해바라기 신화>,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와 시론집 <한국 현대시의 극적 특성>이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2005년, 2008년). 경기시인상 수상. 현재, 계간 <문학과 사람>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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