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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14: 최억조(女, 88세, 대구광역시 중구 지저동) | |
*최초증언일: 1996. 9. 26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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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방공호와 터널을 팠고 여자들은 주로 식당에서 일했지! 젊은 사람들이 일하다가 배고프면 찾아와요.- |
최억조씨 가족: 왼쪽부터 본인 최억조, 장남 이재우, 장녀 이선우, 차녀 이순연, 차남 이재필.
최억조 할머니를 방문했던 1996년은 포도가 무르익고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였다. 큰 아들 이재우씨는 대구 시내에서 거주하고, 어머니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옛집이 있어 공기 맑고 조용한 곳에서 사시도록 하고, 형제들이 종종 다닌다고 했다. 자동차로 20여분을 달렸다. 전원적인 마을 가운데에 알뜰살뜰 꾸며 놓은 소담스런 집에서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울타리 밖 포도밭에서 막 따내 온 포도는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 보다도 맛이 좋았고 역사적 의미도 담겨 있었다. 대한민국의 호적도 생년월일도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할머니는 연세가 88세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했고 눈이 어두웠으나 기억력은 어느 젊은이 못지않게 좋으셨다. 필자는 할머니의 맏아들 이재우씨와 맏딸 이선우씨 그리고 진상규명회 이진견 사무국장과 동행했다. 할머니 거처에 당도하기 전에 이미 장남 이재우씨 집에서 막내아들 이재필씨와 한 자리에서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 충분한 얘기를 나눈 뒤였다. 안방에 들어간 일행은 할머니와 마주 앉았다. 맏딸인 이선우씨가 어머니한테 방문 경위와 목적을 간단히 소개하니 할머니는 흥분을 일으키며 일본에서 고생했던 시절과 우키시마호폭침사건에 대해 거침없이 쏟아 놓으셨다.
「할머니! 여기 오기 전에 큰 아드님 집에서 한참이나 얘기하다 왔습니다. 여섯 식구가 일본에서 살게 된 연유를 좀 말씀해주세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순지리가 내 고향이라오. 내가 결혼하여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일정(일제식민통치시기)때라 살림살이가 이루 말 할 수 없이 어려웠어요. 다들 아는 형편이잖아요. 그 때 남편이 일본 동경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아들을 업고 찾아갔지요. 그 때가 아마 30년대 초반일 게요. 그 뒤로 줄곧 일본에서 살면서 딸 둘과 아들을 얻었으니까 우리 식구는 모두 여섯 명이 된 겝니다. 가족 여섯 명이 함께 살다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로 옮겼는데 돌아오기 전에 3년 정도 오미나토에서 살았어요.」
「오미나토로 이사해서 할머니께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남편 공사장 인부들의 식사를 챙기는 일이었지요. 나 뿐 만 아니라 조선에서 와 토목공사를 맡아 일했지요. 다른 조선 여성들도 남편의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 줘야 했기 때문에 거의 다 식당에서 일했어요. 한 끼니에 몇 십 명이 먹을 밥을 지어야 했으니까 밥 짓는 일도 쉽지 않았다오. 물론 내가 식당을 운영했으므로 식대는 받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일하다가 배고프면 찾아와요. 같은 조선 사람들이니 참 비참하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따질 일이 아닌거예요. 실컷 먹으라고 다 내줘도 어디 양이 차기나 했나요? 한참 힘쓰며 일할 나이에 밥 한술이야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건 뻔하지요. 아이들이 소학교를 다녔으나 뒷바라지라곤 어려웠지.」
「그 때 조선 사람들은 무슨 일을 했나요?」
「그 때 오미나토에는 조선 사람이 많았지요. 남자들은 방공호 파고 터널도 팠고, 여자들은 주로 식당에서 일했지만 공사장에도 많이 나갔어요.」
「우키시마호에는 어떻게 탔습니까?」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에서 4남매를 키우며
남편의 공사장 인부들에게 식사를 챙겨주던 그 때를
회상하며 우키시마호가 침몰할 때 정황을 생생하게
증언하시는 최억조 씨.(1996. 9. 26)
「그 배는 큰 배라서 바다 가운데다 띄워놓고 작은 배로 사람과 짐을 실어 날랐지. 근처에서 일하던 조선 사람이 다 탔는데 사방 20리에 있는 사람은 모두 다 타라고 했다지 아마. 우리 식구 여섯 명이 한 번에 다 탔어요. 나는 그 때 정황으로 봐 강제로 태우지 않았나 생각햐.」「배가 폭파되었을 때 사람들이 울부짖던 정황이 생각나시나요?」
「배가 파산할 때 사람들이 부상당하여 피를 개 잡듯 흘렸지. 어린아이들은 거의 다 죽었어요. 모두들 비명소리를 지르며 죽어갔어.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다가 미끄러지면 바다 속으로 빠져 죽었지. 나는 막내둥이를 안고 자꾸자꾸 높은 곳으로 기어서 올라갔지. 아 좀 있으니까 쬐그만 배 하나가 가까이 오더니 타라기에 탔는데, 우리 식구는 여섯 명이 다 살아났어요. 어떻게 살아났는지 꿈만 같아요. 우리야 다행한 일이지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어쩌겠어? 그나마 구조선을 타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야. 안고 있던 막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시간이 지나니까 살아나더라고. 모두들 발가벗고 걸었는데 얼마나 걸었는지 모두 숙소에 당도했나봐.」
「배에서 어떤 이상한 일은 없었나요?」
「어허! 그래요. 봤어요. 배가 오미나토에서 나와서 바다를 지나갈 때 군인들이 소지품을 바다에 던져버리더라고. 배가 파산되기 전에 해군들은 다 도망쳤어.」
할머니는 다시 말한다. 배가 파산당할 때 살아나기는 했지만 여섯 식구가 살아갈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행 배를 타려고 며칠을 기다렸는데 먹을 거라며 삶은 콩을 한 움큼씩 나눠줬단다. 우리 가족은 모두 살아왔으니 불행 중 다행이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처참하게 죽었어요. 그들을 위해 마땅한 조치가 있어야 해요. 최억조씨는 슬하에 맏아들 이재우, 맏딸 이선우, 둘째딸 이순연, 막내아들 이재필을 두셨다.◼
▣증인-17: 이재우(李在雨, 男, 1927年 6月25日生 대구시 중구 지저동) | |||||||||||||||||||||||||
*최초증언일: 1996. 9. 26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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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들어가느냐?’고 물으니까 ‘물 때문이다.’고 해군들이 해군들이 일제히 구명보트를 타고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밤 늦게서야 식당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1933년 여섯 살 때에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16세 때인 1943년에는 가족 6명이 동경에서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지자키조에서 하청 받은 일을 하셨는데 주로 군사시설 공사였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며 한국인 노동자들의 식사를 마련했다. 우리 집은 우소리천 근처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면 인부들이 와서 먹었고, 점심으로는 도시락을 싸 주기도 했다. 힘들었던 일은 기억나지 않으나 당시 한국인들의 생활은 아주 곤란했다. 내 기억으로도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다. 밤 늦게서야 식당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오미나토항에서 배를 탔는데 승선하기 전에 ‘이 배가 무사하게 한국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일본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나는 배 한 가운데에 탔었다. 여름이라 하도 더워서 밖으로 나왔는데 그 때 이미 배는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배가 들어가다가 멈춰 섰는데 그 때 내가 ‘왜 여기로 들어가느냐?’고 물으니까 ‘물 때문이다.’고 해군들이 말했다. 해군들이 일제히 구명보트를 타고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잠시 후 폭발소리가 들리며 가운데부터 가라앉았다.◼
내가 열한 살 때인 1943년에 가족들과 함께 동경에서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로 이사갔다. 소학교 5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6학년 때는 수류탄 던지기와 총검술도 가르쳤다. 해군들이 자신들의 소지품을 마구 버리면서 “이 배를 없애야 하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한테 물건을 주는 것이다.”고 말했다. 어쨌든 일본 군인들이 배를 없앤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갈 때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배를 보았는데 그 배의 크기는 우키시마호의 1/5정도였다. 서로 손을 흔들며 손 인사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 배가 먼저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아마 바위에 부딪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배가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가다가 멈췄는데 해군들이 구명보트를 타면서 '물이 필요해서 가지러 간다.'고 했다. 잠시 뒤에 폭발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는데 나는 그만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바다 가운데 기름위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아버지는 막내 동생을 업고 헤엄쳐 나가자고 했으나 어머니가 함께 기다려 보자고 했다. 구조에 나선 일본인 어선들도 몇 번이나 뒤집혔는데 이 때 일본 사람도 죽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여 한참이 지났는데 해군 함정 한대가 다가와서 사람을 짐짝처럼 던지며 옮겨 실었는데 이때에도 바다에 떨어진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 죽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돈가방을 챙겨 나가려 하니까 해군들이 “가방을 버리지 않으면 바다에 밀어 넣겠다.”고 위협하여 아버지는 가방을 바다에 던졌다. 구조된 사람들에게 다시 배를 타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 수용소로 우리를 데려 가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우리는 그 배를 타지 않았다. 그 배를 타지 아니한 사람은 모두 맨발로 밤새도록 걸었는데 옆에서는 총 끝에 검을 꽂은 군인들이 인솔하였다. 수용소에 도착하니 이미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와 있었다. 이 때 군복과 담요를 한 장씩 줘서 둘러쓰고 있었다. 1차 수용소에서는 3∼4일 있었는데 그 곳은 구조된 해변에서 반대편에 있는 해군기지였다. 침몰되기 훨씬 전에 해군들이 바다에 물건을 마구 던져 버렸다. 그래서 내가 버리지 말고 달라고 하니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줄 수 없잖느냐.”며 나에게 주질 않았다. 우키시마호에 승선하기 전에 오미나토에서 시모노세키까지 기차를 타고 갈 경우에는 15세 이상에 한하여 가방 한 개만을 허용했으나 우키시마호를 탈 경우에는 짐을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우키시마호를 탔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가족들과 함께 아오모리현으로 이사했다. 몇 해인가 지내고 보니 광복을 맞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가족들 모두 배를 탔다가 도중에 사고를 당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그 때 내 나이 아홉 살이었다. 배가 사고를 당했을 때 사람이 수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끔찍했던 모습들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오빠와 언니들의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인데, 일본에서 아버지는 큰 공사를 하청 받아 일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었기에 가족들도 별 어려움 없이 생활했다고 한다. 그 같은 끔찍한 일이 우리들에게 또 닥치지는 않을지 늘 걱정하며 살아 왔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내가 해방되어 돌아올 때 배가 폭파 침몰될 때는 네 살이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배 사고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어 알고 있을 뿐 당시의 기억은 없다. 그저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건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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