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존재를 일깨워준 <해운대라이프 24년>
“물질계에서 모든 생명체는 3단계를 거친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그리고 돌아간다”
1997년 처음 마주한 해운대 신시가지는 막 태어난 아기였다. 탯줄도 자르지 않은 상태였다. 허허벌판에 성냥갑 같은 아파트만 줄지어 꽂혀 있었다. 도로도 제대로 깔리지 않았으며 편의시설도 많이 부족했다. 아파트 단지 외에는 밭이나 공터로 간간이 가건물 형태의 가구공장들이 존폐 기로에 서 있었다. 이런 황무지에 신문 시안 하나 달랑들고 입성한 <해운대라이프>(당시 <신도시라이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현실은 냉혹했다. 이름 없는 매체로 광고를 섭외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몇 번의 휴간으로 재충전한 뒤 다시 덤벼들었다. 1997년이 지나며 신시가지와 해운대를 위해 생겨난 크고 작은 모임이 구심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신시가지가 울음을 터뜨리는 시점이었다. 함께 신시가지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작은 노력이 신시가지 발전과 신문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후 2001년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신도시는 본격적인 부흥의 시대를 맞았다. 중심상업지 내 옥수수밭이 어느 순간에 고층건물로 바뀌면서 <신도시라이프>도 많이 바빠졌다. 바빠진 만큼 광고는 늘었지만 이번엔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처음부터 광고 영업에 초점을 맞춰 명함을 아예 영업부장으로 다닌 참이라 광고는 늘었지만 기사가 너무 충실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주민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사실 지역 기사는 몸으로 익히지 않으면 제대로 잡아낼 수가 없다. 그렇다고 번듯한 기자를 채용할 입장도 아니어서 이 부분에 적잖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편집위원제였다. 지역 현안에 관심이 많고 또 밝은 인사들을 모셔 함께 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무보수 봉사는 상호 상당한 피로감을 만들어 냈다. 결국 스스로의 질량 부족으로 첫 번째 <신도시라이프> 편집위원회는 해체되고 이동호 위원(탑서울 치과 원장)만이 남았다. 남은 둘이서 신문을 위해 동분서주하다 진이 다 빠지는 상태에 이르렀다.‘여기까지’라는 생각과 밀려오는 신문 발행에 대한 심한 압박감으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광고주들의 응원을 받았다. 광고 금액을 스스로 높이는 광고주부터 최신 디지털카메라를 손에 쥐여준 광고주까지 만났다.
다시 보조엔진을 가동해 신문 발행을 이어갔다. 광고영업과 신문발행 그리고 배포로 이어지는 날들이 계속되었지만 사무실의 형편은 펴지지 않았다. 광고 활성화에 따라 조금 여유가 생기면 신문의 질을 높이는 일과 배포통 확충에 다 소요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문 발행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그냥 반복적인 삶을 살았다. 해운대 지역 발전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그리고 내게 주어진 사명감 따위도 없었다. 단지 지역신문 발행으로 들리는 좋은 평판을 더 좋게 해석하여 스스로 자만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진짜 한방 맞았다. 맞아도 크게 맞았다. 신장이 망가져 해운대백병원에서 투석을 받았다. 주 3회 병원을 드나들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전히 남을 탓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고집이 덩어리가 되어 산 만큼 커졌는데도 나만 모르고 여전히 모든 이에게 나의 잣대를 가져다 댔다.
다시금 느끼는 바지만 하늘은 결코 사람을 함부로 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이 내가 끌어들여 내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한선자 실장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또 지역 발전을 위해 재능기부하는 편집위원께도 경의를 표한다.
병원문을 나서며 나에게 다짐에 다짐을 했다. 앞으로 이웃을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 내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겠노라고. <해운대라이프> 지령 500호는 나에겐 새로운 시작이다.
/ 예성탁 발행.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