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8:1~11, 예수님의 목적 2011.9.4.
오늘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정체성이 그 사람의 행동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개나리는 희망, 과꽃은 추억, 국화는 명복, 금낭화는 수줍음, 금잔화는 겸손, 나팔꽃은 허무한사랑, 상사화는 순결, 도라지꽃은 성실, 동백꽃은 신중, 라일락은 첫사랑, 루드베키아는 영원한 행복, 맨드라미는 열정, 모란은 부귀, 목련은 우아, 무궁화는 일편단심, 물망초는 나를 잊지 마세요, 백일홍은 꿈, 백합은 순결, 사르비아는 정열, 상사화는 이별, 수련은 신비, 아카시아는 우정, 안개꽃은 약속, 옥잠화는 추억, 장미는 사랑, 접시꽃은 풍요, 채송화는 순진, 코스모스는 순정, 포인세티아는 축복, 프리지아는 순결, 해바라기는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꽃마다 그 꽃이 상징하는 꽃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꽃말에 맞게 장례식장엔 국화, 어머니날엔 카네이션, 성탄절엔 포인세티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장미, 부활절엔 백합꽃을 사용합니다. 어디에서 씨앗이 날라 왔는지 꽃밭에 채송화가 피어 있습니다.
꽃말을 생각하며 쪼그려 앉아 채송화를 들려다 봅니다. 과연 채송화는 그 모습이 참 순진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상징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나의 존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붙잡히신) 하나님이십니다(6).
예수님은 자신을 팔 자, 가롯 유다가 군인들과 함께 자신을 잡으려 올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4,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의 동산으로 가셨는데,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1~2)이요, 더군다나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고”(2)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붙잡힐 줄을 아시고도 그 동산에 가셔서 평소처럼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에 가롯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3) 왔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붙잡히실 것을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도리어 그들에게로) 나아가”(4)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괜히 물어 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시기 위해서 그를 잡으려 온 자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5), 예수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잡으려 온 자들에 주저 없이 “내가 그니라”(5)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두렵습니다. 사람들에게, 군인들에게 붙잡힌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어떤 청년은 어떤 할아버지가 쳐다봤다고 해서 두들겨 팼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륜이니 도덕이니 그런 것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들어났을 뿐입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 청년들이 성실하게, 정직하게, 어른을 섬기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많은 청년들은 여러 사회복지 기관을 찾아가 봉사하는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좌우지간 예수님은 그를 잡으려 온 사람들, 특히 군인 앞에서 “내가 그다”고 조금도 주저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절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라고 말씀하시자, 어떤 강한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공중에 붕 떠서는 저만치 땅에 엎드려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히셨습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은 그 부끄러운 저주받은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강도처럼 붙잡히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붙잡힐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9).
저는 새벽에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예수님은 8절에,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같이 붙잡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예수님만 붙잡아 가고, 나머지 제자들은 다 돌려보내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9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9).
예수님은 종종 “내게 주신 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성도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같이 다 다시 살아나 영생을 누리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붙잡히는 순간에도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죽을지언정 여러분은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셨습니다(11).
붙잡히시는 예수님께는 그를 잡으려 왔던 군대보다도 더 강력한 하늘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마 26:53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베드로에게 수사적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절대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1군단은 6,000명이니, 적어도 7,000명 이상의 능력있는 천사들을 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는 것”(11)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잔을 마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칼도, 하늘 천사들의 군단도 포기하셨습니다. 스스로 그 능력을, 하나님 됨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 되시고, 죄의 결과인 사망을 당하셨습니다. 고통의 쓴 잔을 마시기 싫어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에 순종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통해서 스스로 그 죄 값을 다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 살리는 고통의 쓴 잔을 다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