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 (9)
아들의 소원, 아버지의 소원
“원장님, 저희 어머니 언제까지 살겠습니까?”
보호자인 아들은 만날 때마다 물었다.
“이 나이가 되면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밤에 자는 동안 돌아가시는 분도 종종 있고요.”
환자는 고관절 골절로 병상에 누운 채 치매가 심하여 아들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고 음식도 잘 못 먹어 요양보호사가 겨우 미음을 떠먹이는 상태였다.
하루는 환자 면회를 마치고 보호자가 찾아왔다.
“원장님, 저희 어머니 언제 돌아가시겠습니까?”
보호자는 하소연을 하였다.
“저는 스물일곱에 이 직장에 들어와 지금까지 35년간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들어간 주변 동료들 경조사비만 해도 집을 몇 채는 샀을 것입니다. 부모상, 자녀결혼 등 경조사가 크게 네 번 있어 벌써 네댓 번이나 경조사비를 탄 친구도 있는데 전 아직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지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서른이 넘은 자식놈들은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어머니 모친상 하나 남았는데 제가 올 8월에 정년퇴임을 합니다. 이런 말 하면 불효가 되겠지만 어머니가 이왕 돌아가실 것 같으면 제 퇴직 전에 돌아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회복 가능성도 없고 통증으로 고통만 겪고 있는 것은 원장님이나 저나 어머니나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장인, 장모상도 경조사에 포함하지 않습니까?”
“장인, 장모님은 아직 건강하셔서 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딱한 상황이었다. 입장을 바꾸어서 보면 나라도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 편안히 먹고 계십시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의미한 연명술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어머니도 원하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해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면 정년을 앞둔 이런 보호자들을 가끔씩 만나게 된다. 연로한 부모가 아들 재직 중에 돌아가시면 제일 좋긴 한데 그것이 어디 뜻대로 되는 것인가?
이분이 이번 주에 또 찾아왔다.
“원장님, 이번 주 일요일에 조카 결혼식이 있어 어머니가 이번 주말에는 돌아가시지 않게 해주십시오.“
조카 혼사기간은 피해서 방학이 끝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금상첨화겠지만 정말로 하늘나라 가는 시간은 우리도 잘 모르고 어찌 할 수도 없다.
나의 아버지는 농촌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셨다. 아버지는 72세에 중풍을 맞아 거의 10년이나 집에 누워서 지내셨다. 종종 방문하면 아버지는 누워 지내다 보니 소화불량, 피부건조증과 가려움증으로 고생을 하셨다. 피부연고를 바르는데도 가려움을 참지 못해 손으로 긁어 전신에 진물이 나고 하여 어머니가 간병하느라 오랫동안 고생하셨다. 국내 최초로 중풍 등 노인병을 전문으로 보는 인천은혜요양병원이 개원한 때가 1993년이었으니 요양병원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2~3년 전부터는 욕창과 변비, 가려움증으로 너무 힘들어하셨다.
“아들아, 제발 날 편안히 보내줄 수 없겠니? 내가 널 중도하차 안 시키려 뒷바라지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 제발 내 소원을 한 번만 들어다오.”
내가 고개를 외면하자 아버지는 동네를 한번 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업었다. 아, 아버지가 이렇게 가벼우셨던가? 항상 태산같이 생각되었던 아버지의 무게가 이렇게 가볍다니 눈물이 났다. 대문을 나서니 앞으로 논이 보이고 엉성한 옷을 입은 허수아비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물을 지나니 골목길에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했다. 등이 축축해지는 것을 보니 아버지가 우시는 것 같았다. 마을의 끝에는 남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몇 달 더 고통 속에 살다가 눈을 감으셨다.
요양병원 근무자의 주 업무 중 하나가 환자의 몸에 각종 연고와 크림을 발라주는 것일 만큼 노인피부관리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요양병원이 진작 있었더라면 아버지가 더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낼 수 있었을 테고 어머니도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