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위실에는 뒤통수가 산다.
1.유씨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창 밖 풍경이 마냥 감미롭다.
역시 풍경이란 발밑에 깔고 보아야 감칠맛이 나는 모양이다. 잘 자랐다기보다는 잘 다듬어진 향나무 사이로 가을볕이 풀 섶에 내려앉고 있다. 멀리 경비실 앞에 수위영감이 낙엽을 아니, 늦가을 볕을 쓸어 모으고 있고 나는 팔짱을 끼고 창가를 서성이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어깻죽지에 내려앉는 빛이 마냥 따사롭다. 혼자 쓰는 전무실, 중후한 디자인의 소파가 놓인 접견실 뒤에 핑크빛 커튼이 드리워진 간이침실까지 갖춰 놓은 이 공간이, 딱 한마디로 마음에 든다. W전자의 일층 사무실, 그것도 서른 명이 넘는 직원이 함께 쓰던 컴컴한 창고형의 사무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볕이 잘 드는 이층 남향 집무실이다.
인간이 혼자서 거느릴 수 있는 공간은 한계가 있다. 집무실이 너무 크면 허허로워 순간적으로 가위눌림을 당하기 십상이고 또 너무 좁으면 어딘가 모르게 답답하여 우울증에 걸리기 딱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전무실의 크기와 집기 위치를 비롯하여 접견실의 공간은 혼자 쓰기에 참으로 적당하게도 풍성하다.
돌이켜보면 소蘇사장은 사업에 관한한 이제 막 부화한 병아리에 불과하지만 공간을 꾸미는 감각 하나는 탁월하다. 하긴 이런 감각 없이 미대출신이라 하겠는가. 그리고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원청회사의 멀쩡한 부장을 이 코딱지만한 회사에 전무로 영입하려면 이 정도의 공간은 심사숙고하여 갖추는 게 당연한 예의일 것이다. 헌데, 저 간이침실을 쓸 일이 있을까, 반반한 여사원들 결재 받으러 올라오면 회춘용으로 쓰라는 얘긴가 뭔가. 그런 일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삼년 전부터 전립선이 비대해져서 그런 용도로 쓸 수가 없다는 애석한 사연이 있다는 걸 뭇사람들은 모를 터. 생각하면 적막하다. 적막한 건 마음뿐만 아니라 허리 아래쪽도 마찬가지다.
수위영감이 쓸고 간 자리에 낙엽이 우수수지고 있다. 곧 W전자의 구조조정이 있고 간부들 또한 저 낙엽과 다름없으리라.
창 밖에 주고 있던 눈길을 거두고 수화기를 든다. 신호가 간다. 늙어도 귀는 제대로 들리는지 전화를 받으러 들어가는 수위영감의 동작이 좀 민첩해졌다. 낙엽을 쓸던 빗자루를 팽개치고 벨이 다섯 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는다.
“예! 수위실입니다.”
전화를 받는 찰라 끊어버린다는 것이 좀 늦었다.
“나, 유전문데........아니, 아니야. 내 다시 전화하지.”
전열판 위의 실험물체처럼 꼭 자극을 주어야 반응을 보이는 인간, 나는 저런 인간은 딱 질색이다. 저런 인간은 거지 근성이 잔뜩 묻어있어 거지나 진배없다. 인간을 두고 면밀히 관찰해보면 거지는 거지가 될 수밖에 없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나는 거지를 보면 동정심이 일지 않는다. 거지 중에서 늙은 거지, 그것도 사지가 멀쩡한 인간이 구걸하는 꼴을 보면 동정은커녕, 경멸한다. 특히, 고속철역 앞이나 길거리에서 손을 벌리는 늙은이를 보면 꼬질꼬질한 손바닥에 돈은 고사하고 가래침을 칵, 뱉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나 같으면 쥐약이라도 털어 넣고 시궁창에 머리를 박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인간들의 아래위를 훑어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내 얼굴에 그렇게 씌어있어서인지 내가 지나가면 손을 벌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저 수위영감 또한, 경멸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다.
생긴 건 멀쩡한데 저 나이가 되도록 남의 공장에 문지기나 하는 꼴을 보면 어떻게 살았는지 눈에 선하다. 반백의 머리에, 중학교 도덕선생 같은 낯짝을 후광으로 삼아 눈 먼 여자들이나 홀리다가 세월의 사슬에 묶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 테고, 아랫도리 힘이 떨어졌으니 별 수 있으랴, 특별한 기술 하나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니 밤새 문이나 지키는 한심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저 늙은이다, 틀림이 없다. 한 눈에 보아도 척이다.
한심한 건 어디까지나 저 늙은이의 일이고, 오늘 첫 출근에 기분이 팍 잡치지 않았으면 숫제 말을 않겠다. 전무이사로 스카우트되어 들어오는 귀재을 몰라보고 뉘 집 개가 지나가나 하는 투로 신문에 코를 박고 있다니, 아무리 코딱지만한 공장이지만 그게 정문 근무자로서 할 일인가.
차를 세우고 불러서야 게으르게 나오더니, 사무실이 어디냐고 묻는데 대답은 않고 남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 오히려 어디서 왔냐고, 더듬거리며 반문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옛날 같으면 손바닥이 귀싸대기로 철썩 올라갔으련만, 나도 성질 참 많이 죽었지. 직원들 출근을 다하고 난 코딱지만한 회사에 열 시가 다 되어 에쿠스를 끌고 들어올 만한 사람이 첫 출근하는 전무 밖에 더 있겠는가. 오늘이 내가 첫 출근하는 날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터. 아니, 한 눈에 보아도 척 알아야 될 일이고 당연히 두어 시간 전에 수위실 밖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차가 들어오면 경례를 척 붙여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스카우트되는 마당에 기사하나 붙여주지 않는 것만 해도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판인데 수위에게까지 누구인가를 밝히고 통과하는 무시를 당하다니 말이 되는가?
하여튼, 작은 회사일수록 저런 사소한 부분에서 체계를 잡아야 하는 법이거늘, 내 자리를 견고하게 확보하기 위해 단단히 고비를 조아야 할 일이다. 한韓과장이라는 자식 또한 마찬가지, 오전에 생산 효율성 촉진에 대한 전체적인 브리핑을 받고 인력 효율성에 대해서 몇 가지 얘기를 한 뒤 수위실에 대해서 언급하는 과정에 수위영감이 수위실 밖에서 출입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더니, 뭐라구? 그 분 연세도 계시고 어쩌고저쩌고, 관리과장이라는 작자가 수위영감 하나 딱 부러지게 군기軍氣를 잡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꼴이라니, 참 가당치도 않아서........
“누가 연세 처먹고 저런 짓을 하랬어? 그럼 젊은 놈으로 갈아 치워!”
첫날부터 한바탕 분위기를 잡느라 호통을 쳐서 내보냈지만, 한 과장이란 저 자식도 우유부단한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저러니 만년 과장이지. 소 사장은, 한 과장을 두고 창업멤버로서 생산직으로 들어와서 30년 가까이 넘게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지만, 그것도 소 사장이 철부지 애송이의 눈으로 잘못 본 거야. 성실성과 능력 한계성의 모호함을 영악하게 헤아리지 못하고 과대평가를 하고 있을 뿐이다.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으로 정원 향나무 가지 위에 은행잎이 내려앉는다. 이제 곧 겨울이 닥칠 모양이다. 올해는 좀 훈훈한 겨울이 되겠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지만 시기도 잘 타고나는 편이다. 9년을 근무한 W전자의 명예퇴직금을 서운치 않게 받아서 신용불량자가 된 아내의 빚을 다 갚았고 또 하청업체인 이 회사로 옮기면서 스카우트비로 좀 챙겼다. 그 뿐이랴, 이제 두 달 반만 있으면 일년 치의 연봉이 전무님이신 내 계좌로 꽂히게 된다. 이제는 차압이 되어 월급의 반이 뭉텅 잘려나가던 봉투를 받는 스트레스는 없어졌다.
쥐꼬리만한 월급타령하면서 아내가 화장품 대리점을 벌이고 꼬인 가계였다. 정말이지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빚잔치였다. 역시 바깥일은 남자가 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아내에게 맡겨두었다가는 평생 신용불량자로 남았을 것이다. 낙엽은 우수수지고 계절은 분명히 오고 있지만 유난히 따스한 겨울이 될 것이다.
수화기를 집어 들고 다시 202번을 누른다.
수위실로 연결되는 전화다. 수위영감이 다시 빗자루를 팽개치고 수위실 창을 통해 전화를 받는다. 벨이 네 번 울리고 받는다. 동작이 민첩해진 걸 보니 한 과장이 교육을 제대로 시킨 모양이다.
“나, 유전무인데! 한 과장 나가면 곧바로 전무실로 연락하라구.”
수위영감의 우물쭈물하는 대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끊어버린다.
소 사장은 지금쯤 W전자의 품질관리부서에서 쩔쩔 매고 있을 것이다. 오늘 중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품질검사에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그런 각본 없이 이른바 ‘사오정’이 될 멍청한 작자는 아니지. W전자의 김 대리는 믿을만한 인물이다. 충분히 잘 해내고 터. 후임자 좋다는 게 뭔가. 상부상조하고 살아야지, 이 험난한 세상에,
내가 W전자에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김 대리가 걸어놓은 브레이크를 풀지 않을 것이고 애송이 소 사장은 품질하자에 걸린 크레임을 풀려고 낑낑대다가 안 되면 한 과장까지 동원시키겠지. 품질관리에서 꽉 잡고 있다는 한 과장이 들어간다고 그 일이 해결되나? 턱도 없는 말씀, 각본상 그렇게는 안 된다. 사장은 저녁 무렵에서야 나에게 지원을 요청하겠지. 아니다. 어쩌면 혼자서 낑낑대다가 내일쯤 방아쇠는 넘겨줄지도 모르겠다. 어리지만 다소 대범한 구석이 있고 끈질긴 데가 있는 작자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김 대리라는 시건장치를 풀고 보란 듯이 단 한방에 ‘피융~’ 명중시키고는 총구에 흩날리는 연기를 후~ 불면서 들어오면 되는 일. 회사의 직원들과 소 사장은 내 능력을 인정할 터,
전화벨이 울린다.
수위실의 전화다.
“ 저어 수위실인데........ 한 과장이 W전자에 급한 볼일로 나갔다고....... 보고 하라고 해서........”
“알았으니까 근무 잘 하라구.”
한마디로 말꼬리를 자르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모든 일이 각본대로 술술 풀려가는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사람이 밥값은 해야지. 들어온 지 두 달 만에 연봉을 다 받아가기도 낯간지러운 일이고, 이렇게라도 실적이라도 올리고 유 전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야지. 그럼 그렇고 말고. 자기자리는 스스로 만들어 지켜야하는 거야.
& nbsp;
& nbsp;
& nbsp;
2. 맹씨
똥이 나오지 않는다.
쾌변이라고 명명할 만큼의 거사를 치른 지가 사흘이 넘었다.
장이 안 좋은 건가? 술 먹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대여섯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도 정작 일을 치르지 못한다. 가스만 차고 아랫배만 묵직한 게 변기 위에 앉아 있어야 맘이 편할 정도이다. 들고 들어온 신문지의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좀 느긋하게 앉았다가 들어가야겠다.
유 부장이 없으니 화장실에서도 맘이 편하다. 치통 앓는 시어머니처럼 꿍하고 있다가 꼭 자리를 비울 때만 찾아대던 치모가 없으니 똥은 나오지 않아도 맘은 편하다는 얘기다. 치통시모齒痛始母, 입을 꾹 다물고 눈만 휘번득거리는 시어머니 같은 유 부장을 두고 어느 회식자리에서 내가 끌어다 붙인 별명인데 직원들 사이에는 치통시모가 줄어서 치모라고 불리고 있다. 치모가 무슨 뜻인가 언젠가 사전을 찾아보니 비웃고 업신여긴다는 뜻인데 의미상으로도 제대로 맞아들었다. 물론 유 부장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부를 수 없다. 아니, 없었다는 과거형을 써야 마땅하다. 치모는 H전자에 전무이사로 발탁되어 갔다. 무늬만 발탁이지 사실은 쫓겨날 자리를 만들어 간 것이다. 스무 개가 넘는 하청업체를 거느린 전자회사의 관리부장이 된다는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이다. 그 자리를 점지해주는 것까지는 신의 몫이고 자리를 지키는 건 선택받은 자가 굳건히 감수해야할 몫이라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치모는 신으로부터 선택만 받았을 뿐이지 그 자리를 스스로 지키지 못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유 부장이란 작자의 책상이 빠진 건 당연한 귀결, 자업자득이다. 우리 관리부 안에서 그 누구도 치모의 책상이 빠진 걸 애석해하지 않는다. 입은 다물고 있지만 모두들 고소해 하는 눈치다. 하청업체에 챙겨도 너무 챙겼지. 아예 목을 내놓고 설쳤으니 상무이사 눈 밖에 나는 거야 당연한 이치. 세상에 철밥통 자리가 있던가? 그렇게 저질러 놓은 자리가 온전할 수가 없지.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책상 하나 빠지는 건 송아지 기침하듯 예삿일이 아니던가. 유 부장이 나가고 부장 자리는 아직 공석이다. 공석이라, 딱 부러지는 말로 감미로운 자리다. 저 자리는 분명 내 자리가 된다. 품질관리부에서 잔뼈가 굵었으니 적임자는 나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 단언하건데, 지금 나는 부장 대우 차장이고 신으로부터 곧 선택받게 된다.
치모도 사실 그렇게 나쁘게 나간 건 아니다. H전자의 전무이사 자리를 만들어서 나갔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자리를 만드는데 꽤나 많은 공을 들였다. 드러내놓고 얘기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를 만들어내기까지 신경전의 극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치모가 처음에 노린 자리는 H전자의 전무자리가 아니라 M정밀의 상무자리였다.
M정밀은 H전자보다 규모가 크고 몇 개 전자제조업체에 제어기판을 납품을 하는 건실한 중소기업이다 그런 회사의 상무자리라면 이 W전자의 관리부장 보다 못하지도 않다. 구조조정이 얘기가 사내에 극비로 돌자 치모는 도둑놈 제 발 저리다고 뭔가 찔리는 부분이 있는지 하청업체에 자기가 갈 자리부터 물색하고 다닌 모양이다. 자기가 명예퇴직하고 M정밀과 같은 제어기판을 납품하는 공장을 만들겠다고 떠벌리고 다니자 M정밀에서 재깍 반응이 나타났다. M정밀의 반응은 실로 속이 후련한 거였다. 우리 회사로 납품하는 물량을 줄이고 경쟁업체에 납품하는 물량에 주력하며 연구개발 하겠다는 쪽으로 사업방향을 급선회해버린 것이다. 치모는 그야말로 지붕 쳐다보는 개꼴이 되어버렸다. 월급의 반이 차압되어있는 유 부장에게 그런 회사를 설립할 만한 재력과 능력이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터인데. 그런 소문을 퍼트리면 M정밀에서 상무자리라도 내주고 영입하지 않을까하는 참으로 삼척동자 같은 속셈이었다. 그러나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씀이 되어버렸고 오히려 우리 W전자가 M정밀의 눈치를 보는 적반하장이 되었으니 치모는 제 명을 재촉한 거나 다름 아닌 꼴이 되어버렸다.
H전자로 가는 데도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H전자에서 납품하는 물량에 몇 번이나 크레임을 걸고 따낸 자리다. 그 중간에서 이 맹두석의 역할도 만만치 않다. 지금 소 사장의 조부이신 소정식 사장을 찾아뵙고 유 부장을 기술이사로 영입하면 불량도 줄일 수 있고 전관예우도 있을 터이니, 더 험한 꼴이 되기 전에 스카우트 형식으로 영입하면 어떠냐고 제의한 게 바로 나다. 그 인사 프로젝트는 석 달을 밀고 당긴 끝에 결정되었다. 사실 나도 냄새나는 직속상관 하나를 날려버렸으니 나쁠 거야 없는 일이고,
그러나 저러나 소 사장이 참치횟집에서 기다리겠다.
오늘 아침부터 품질관리부에 들락거리는 소 사장을 슬쩍 불러서 나가서 다른 볼일을 보고 퇴근 시간에 맞추어 참치횟집에서 간단하게 소주 한잔 하자고 넌즈시 던져두었다.
아침부터 품질 검사에서 하자 허용치를 대폭 줄인다며 여태까지 문제없이 납품되던 멀쩡한 제품을 불량이라며 회수하라고 통보했으니 소 사장이 허둥댈 수밖에........ 이건 분명히 치모의 장난이다. 나는 알고 있다. 그 작자가 오늘 H전자에 첫 출근을 하고 뭔가 실적을 만들기 위해 품질관리 담당인 김 대리를 시켜서 한 짓이란 걸 알고 있다. 김 대리는 전관예우 차원에서 거절하지 못하고 깐깐하게 물고 늘어질 것이고.......... 오늘이 25일이니 오늘 납품이 되지 않고 내일로 밀린다면 납품대금의 결재가 보기 좋게 한 달 밀리는 것이다. H전자로선 답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몇 가지 치수가 다른 종류의 전열선 뭉치를 납품하는 회사는 H전자뿐이다. 아직 한 이틀의 재고가 있으니 멀쩡한 제품을 두고 불량이니 어쩌니 하는 것이지만 재고가 떨어지면 우리 회사 담당자가 직접 H전자의 생산라인에 서 있다가 제품을 받아와야하는 실정이다. 벌써 이십년 전의 얘기지만 전열선 뭉치 가공도 우리 W전자에서 직접 했었다. 그때 한창 노조가 연례행사처럼 파업을 할 때 인력가공으로 손이 많이 가는 공정을 외주로 돌렸다. H전자도 그때 생겨난 중소기업인데 소 사장 조부인 소정식사장이 꼼꼼하게 제품을 연구하며 줄곧 우리 회사에 납품을 한 건실한 중소기업이다.
그러나저러나 똥이 나오질 않는다. 나는 담배를 물고 다시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들고 있던 신문을 뒤적인다.
“아우! 담배냄새, 미스 김! 화장실에서 담배 피는 여사원이 누군지 파악 좀 해봐봐!”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누군가가 뒤따라오는 듯한 미스 김이라는 알 수 없는 여자에게 한 말이다.
아뿔싸! 여기가 여자 화장실인가?
또각또각 타일바닥에 박히는 발자국소리로 미루어 여기가 숙녀용 화장실이 틀림이 없다. 헛기침이라도 했다가는 여자 화장실이나 기웃거리는 변태로 오인받기 십상이다. 이거, 낭패다.
화장실 출입구와 내부수리를 하고난 뒤에 나도 모르게 가끔 숙녀용화장실로 들어서게 되는데 오늘도 급한 김에 별 생각 없이 들어와서 엉덩이를 까 내린 모양이다. 나는 담배를 조심스레 끄고 숨을 죽인다. 바로 옆 칸의 변기에 부딪히는, 어느 여성의 것인지 모를 꽤나 센 오줌발 소리를 고스란히 듣는다. 그리고 물 내리는 소리를 들은 뒤, 한숨을 삼킨다.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가나? 고민이다. 도둑고양이처럼 빠져나가는데 어느 여사원이 들어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체면이 영 말씀이 아니게 된다. 어느 녀석이 화장실 출입구 설계를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줄기차게 들락거리던 내 습관이 영 길들여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거 낭패다. 소 사장이 지금쯤 참치횟집에서 기다릴 것인데, 나는 바깥 동정을 살피느라 화장실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 nbsp;
& nbsp;
& nbsp;
3. 한씨
오후 세 시가 좀 넘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늘 그렇지만 오늘은 유독 시간이 더디게 간다. 전무이사 첫 출근이어서 간부회의가 있을 걸로 예상했지만 사장님은 아침부터 W전자에 불려 들어갔다. 사장님이 W전자에 불려 들어가면 회사는 초비상상태에 돌입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W전자에 있어야할 사장님께서 이 시간에 횟집에서 나를 부른 것이었다. 분명히 충무참치로 오라고 했다. 뭔 일인지 도통 모르겠다.
“저....... 지금 근무시간인데........”
참치횟집에 있으니 곧바로 오라는 사장님의 전화를 받고 나도 모르게 뱉은 말이다.
“거....... 목소리 좀 낮추고, 유 전무 아직 회사에 있지요?”
“그렇긴 한대요.”
“그럼 유 전무한테는 W전자에 긴박한 문제가 생겨서 내가 부른다고 말하고 이리로 와요.”
사장의 목소리에는, 오전과 달리 그렇게 다급함이 배어있지 않았다. 사무실을 나오기 전에 사장과 통화한 내용인데 무슨 꿍꿍이들인지 모르겠다. 첫 출근한 유 전무한테 품질 크레임이 걸렸다고 보고했는데 자기가 알아보겠다는 말만하고 쇠귀에 경 읽듯 들어버리고 인력효율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질 않나, 제품에 하자가 걸려서 납품이 보류되고 있는 마당에 사장이란 사람은 술집에서 관리과장인 나를 불러내고 있으니 회사 돌아가는 꼴이 콩가루가 되는 것이 아닌가. 소정식 회장이 계실 때는 이런 일이 좀체 없었는데 젊은 소사장이 들어오고부터 어쩐지 회사에 얼음장 금가는 소리가 쩌정쩌정 들리는 듯하다.
참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늘 품질에 걸린 크레임에서 사장 혼자서 통과시키려고 애를 쓰다가 실의에 차서 자포자기하고 일찌감치 한 잔 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관리과장인 내가 발 빠르게 W전자에 들어가서 품질에 생긴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을 해야 할 터인데, 아니다 그 문제가 아주 간단히 해결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장님의 목소리가 그렇게 밝을 리가 만무다.
제품에 하자란 있을 수가 없다. 내가 근 20년간 만들어온 품목인데 하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저기 장사치한테 납품하는, 가위로 대충 잘라 만드는 엿장수 물건도 아니고, 자동화 시스템을 갖추고 정확한 회전수에 의해서 정확한 인장력이 측정되어 생산되는 제품인데 어느 날 느닷없이 하자가 걸린 원인을 모르겠다는 말씀이다. 오전 내내 재료에 이상이 있나 싶어 꼼꼼히 살피고 자동화 시스템의 회전수와 인장력을 체크하고 가공온도를 검사했었다. 이 한상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무 곳에도 이상이 없었다. 납품업체보다 더 꼼꼼히 체크하는 우리 회사 검사실에서 전열뭉치의 가공 밀도, 크기, 무게조차도 아무런 이상 징후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W전자 품질관리부의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 게 분명하다. 억지로 골탕을 먹이기 위해 멀쩡한 제품의 품질을 걸고넘어지는 게 분명하다. W전자의 검사소에 그렇게 장난을 칠만한 인물이 있나 짚어보지만 감이 잡히질 않는다. 품질관리부의 어느 인사의 주머니가 비어서, 거듭 말하지만 술값이 궁해서 억지로 투정부리는 일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W전자 품질관리부의 김 대리? 김 대리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김 대리는 바로 지난 주 토요일저녁에 나와 같이 한잔했다. 그때 우리 회사 제품은 사실 검사가 필요 없을 만큼 꼼꼼하다고 극찬을 하지 않았던가. 또 김 대리가 제품에 이상 징후를 발견했다면 곧바로 우리 H전자로 달려와서 공정을 스톱시키고 하자문제를 상의할 것이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유전무가 W전자의 부장으로 있을 때는 한두 번씩 그런 문제가 생겼지만 단 몇 시간 만에 쉽게 해결되곤 했었다. 눈치로 때려잡은 거지만 사장이 직접 봉투로 해결하거나 술집에서 결재가 되곤 했지만 지금 그 유 부장은 전무가 되어 우리 회사에 있지 않는가? 도대체 크레임이 걸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태까지의 브레이크도 유전무의 짓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해결이 되었으면 속이 후련하련만........
사장님이 참치횟집으로 오라고 했으니 차를 가져가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다. 횟집이라고 했으니 이유야 어떻든 간에 사이다 놓고 회를 먹는 건 아닐 터이고 소주라도 한 잔 하는 날에 차라는 물건이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술을 먹지 않으면 사장님 차를 내가 운전해서 들어오고 술을 먹게 되는 날에는 대리운전을 한사람만 불러도 되니까 차를 두고 가기로 마음을 먹고 나섰다.
“한 과장 어디 출장 가시는가?”
혹 필요할지 몰라서 제품 사양서와 허용치수 검사서를 챙겨서 수위실을 나설 때 어르신께서 창을 내다보고 존대도 아니고 하대도 아닌 어정쩡하지만 듣기 싫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예 저어..... W전자에 좀 들어갑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다녀오겠습니다.”
대충 얼버무리고 나와서 회사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서 늙수그레한 운전기사의 반백의 뒤통수를 보며 말한다.
“저어 대신동 충무참치로 좀 갑시다.”
그렇게 목적지를 일러주고 등받이에 어깨를 묻고 눈을 감는다. 수위실을 나설 때 어르신, 아니 선생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귀에 찬찬히 풀어진다.
‘차를 가져가지 않는 걸 보니 또 술 먹을 일이 있겠구만, 몸 좀 챙기시게! 한 과장,’
수위실을 지키시는 분은 나의 중학교 은사님이시다. 뒤통수라는 고약한 별명을 지니신 중학교 이 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셨다.
“공부는 무기가 아니다. 공부 좀 한다고 버르장머리 없이 놀지 말라. 꼴찌 하는 놈이 있어야 일등 하는 놈이 있는 법이거늘, 공부 못하는 놈은 용서할 수 있어도 인간이 안 될 놈은 용서할 수 없다”
담임을 맡아서 처음으로 인사말씀을 하실 적에 뒤통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스승의 뒤통수는 제자가 칠 수 없어도 선생의 뺨은 학생이 때릴 수 있다는 얼핏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지론으로 선생과 스승, 학생과 제자에 대한 정의를 명쾌하게 내리신 선생님은 자신이 스승이 되길 참으로 고집스럽게 고집했고 우리들에겐 제자가 되기를 지독하게 강요하셨다. 뒤통수라는 별명은 그저 붙은 게 아니다. 선생님 앞에선 뒤통수를 조심해야했다. 수업시간에 조는 놈이나 조회시간에 떠드는 놈은 어김없이 뒤통수를 강타 당한다. 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의 주특기는 뒤통수치기다. 졸다보면 어느 틈에 다가섰는지도 모르게 살금살금 다가와 손바닥이 뒤통수로 철썩 올라간다. 물론 나도 몇 번 맞아본 적이 있어 그 손맛이 얼마나 매운지를 안다.
그 뒤통수 선생님이 재작년에 수위실에 들어오셨다. 나는 한 눈에 선생님을 알아봤다. 제자의 얼굴을 기억 못하시는 선생님께 어느 학교 몇 회 졸업생이라고 인사를 드리자 곧장 나는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수위실로 들어갔다. 그 날 선생님은 제의 하셨다. 사제지간이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같이 근무하는 동안만 어르신으로 불러달라고,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내내 유순한 제자가 되어 뒤통수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날 뒤통수를 감싸고 억지춘향으로 약조한 약속은 아직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나는 택시 시트에 등을 묻은 채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수위실에는 뒤통수가 산다고,
& nbsp;
& nbsp;
4. 소씨
하청업체의 경영자란 언제나 원청의 눈치로 먹고 살아야하는 법, 원청인 W전자의 맹차장이 먼저 눈치를 주었다. 화장실 가는 척 하며 따라와서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 던졌다.
“그냥 조용히 나가서 충무참치에서 기다리시죠. 소 사장, 고생했어요. 오늘은 내가 한 잔 사지.”
희끗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계면쩍게 던진 말은 품질관리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을 두고 걱정 말라는 투였다. 아침부터 오금이 저리도록 품질 관리부를 들락거렸는데 그 한마디에 맥이 탁 풀리고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더러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다니 누군가의 장난인 듯하다.
나는 곧바로 W전자를 빠져나와 충무참치로 향했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이 시간에 참치횟집에 들어서니 주인마담이 웬일이냐는 듯이 뜨악한 눈길로 맞았다.
W전자를 나서면서 한 과장을 이리로 불렀다. 아침부터 마음고생이야 한 과장이 훨씬 심했을 것이다. 긴장이라도 풀어 주어야할 일이다. 나는 횟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인아주머니를 불러 청하 한 병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먼저 시켰다. 오늘 먹은 것이라곤 아침에 정문을 나설 때 수위실 할아버지께서 차창을 열고 슬며시 던져준 초코파이 하나와 우유 하나가 전부였다. 그것도 달리는 차안에서 운전을 하면서 먹었다.
수위실 할아버지라....... 말이 좀 이상한 감이 있는가. 수위실에 근무하시는 분은 나의 할아버지시다. 외조부. 정확하게 나의 외조부님께서 재작년부터 수위실에 격일제로 근무하고 계신다. 전직 중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삼 년 전에 정년으로 퇴임을 하시고 난 뒤 삼 년을 쉬시다가 일을 하고 싶다고 친구이자 사돈사이가 되는 할아버지를 어떻게 졸랐는지 수위실을 차고 앉은 것이다. 사돈 사이에 사장실과 수위실을 차고앉은 좀 웃기는 중소기업이 바로 우리공장이었다. 그런데 올 봄에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누우시고 내가 사장실을 차지했으니 외손자와 외조부가 사장실과 수위실을 차지하고 있는, 더 웃기는 공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께서 내 주위에 계신다고 생각하니 든든한 기분은 든다.
공장은 할아버지께서 일흔 평생을 공들여 일궈낸 것이다.
우리 소씨가계의 내력을 잠시 언급하자면, 할아버지는 작은 공장을 만들어 키우시고 아버진 교환 교수로 나갔다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눌러앉으셨다. 올봄에 할아버지 중풍으로 쓰러지시면서 공장은 억지스럽게도 경영에 ‘경’자도 모르는 미대 출신의 나에게 넘겨졌다. 사실, 조형을 전공한 나는 회사일이나 경영에 대해선 솔직히 문외한이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저 병상에 계신 할아버지의 조언을 받고 한과장과 상의하여 공장 일을 그때그때 처리한다. 오랜 신뢰를 구축한 납품업체가 있고 재정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와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공장이라 큰 무리 없이 끌고 가지만 앞으로 할아버지의 병세가 깊어지면 어떤 일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게 불안하다. 유 전무를 새로 영입했지만 믿고 일을 맡길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이 생긴다.
“W전자 유 부장이 우리 회사에 덕을 주지는 못해도 해는 충분히 끼칠 수 있는 인물이다. 원수를 가까이 껴안는 것도 병술의 한 방법이니......”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다. 유 전무가 W전자를 나와서 우리와 같은 공장을 차리겠다는 소문이 퍼지자 할아버지는 대수롭잖게 ‘유 부장이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은 게로구먼’ 이라는 말로 서두를 꺼내 내게 경영지침을 들려주셨다. 월급을 아끼지 말고 그런 인물 하나는 안고 있어야 원청과의 사이에 윤활 역할이 되에 매끄럽게 돌아갈 거라는 거였다.
할아버지는 집에 계시지만 냄새 하나로 회사 돌아가는 걸 정확히 읽고 계신다. 역시 창업자로서 통찰력하나는 믿을 만하다. 그러나 유 전무를 우리 회사로 영입하고 첫날부터 납품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할아버지께서 잘못 보신 걸까? 아니면 W전자에 유 전무가 아닌 제 3의 걸림돌이 하나 더 박혀 있는 걸까? 쉬 풀리지 않는 수수게끼 같다.
나는 술상이 들어오는 것도 잊은 채 생각에 빠진다. 빈속이 더욱 쓰려온다. 어쩌면 유 전무의 장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첫 출근하는 유 전무의 장난일 수도 있다. 나는 내심 무릎을 치고 유 전무 쪽으로 생각을 모은다.
“총각 사장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뭔 고민 있어? 내가 한잔 따라드릴까?”
평소에 안면이 있는 주인아주머니가 따라주는 청하 한잔을 받아서 시원하게 털어 넣는다. 빈속에 목울대로 넘어가는 시원한 술이 식도에 짜르르하게 자극을 준다. 나는 잔을 비우고 빈 잔을 주인아주머니께 내밀었다.
“대작하자구? 멀건 대낮부터? 이거 오늘 장사 다했네.”
싫지 않은 내색을 하며 받아서 다소곳이 마시고는 잔 언저리를 손바닥으로 스윽 문지르고 다시 잔을 내민다.
“혼자 오신 건 아닐 테고 몇 명이 더 오실 거예요?”
나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 넘기며 잔을 들고는 고심에 빠진다.
유 전무의 장난이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유 전무가 회사에 처음 출근하고 뭔가 실적을 올리기 위해 애초부터 맹 차장이나 품질 관리부에 누군가를 시켜서 이런 시놉시스를 만들어 놓고 출근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 유 전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유 전무를 너무 믿어서도 아니 될 일이고 그에게 힘을 너무 실어주어서도 회사에 이로울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일이다.
“몇 명이 더 오실 거냐구요?”
주인아주머니가 밉지 않은 목소리로 재차 묻는다. 나는 어디엔가 풍덩 빠져있던 생각을 화들짝 걷어 올린다. 내가 두 명이 더 온다고 대답을 하지 않았던가? 나는 손가락 둘을 들어 보이고 들고 있던 잔을 입술로 가져간다.
“뭔 생각을 그리 깊이해요? 총각사장님 장가 갈 생각인가.......”
혼잣소리를 하며 주인아주머니가 방을 빠져나간다.
유 전무에게 의심이 간다. 오늘 처음으로 출근하면서 W전자의 누군가에게 품질관리와 결재에 브레이크를 지시하고 출근했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는 시치미를 떼고 출근하고 내가 불려 들어가서도 통과되지 않는 제품을 자신이 들어가서 통과를 시키는 혁혁한 공로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하수인 노릇을 한 인물이 맹 차장인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맹 차장의 눈치가 이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맹 차장이 한 잔 사겠다며 이집에서 기다리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유 전무는 우리 회사에서 원청과의 사이에 윤활제 역할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는 암적인 존재이다.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유 전무를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한다. 10년째 과장을 달고 있는 한 과장을 부장으로 승진시켜 하극상을 충동질하여 유 전무의 위치를 다소 위태롭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렇다. 자극이 필요한 인물이 유 전무다. 아니, 내친김에 한 과장을 상무이사로 등재시켜서 유 전무와 비슷한 위치에 얹어놓고 유 전무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 나는 무릎을 친다. 한 과장을 상무로 등재시켜 공장안의 일을 몽땅 맡기고 유 전무는 W전자만 관리하는 원청회사 관리에 초점을 맞춘다?
이상적인 경영방법이 될 수 있다. 유 전무가 회사 안에서 미주알고주알 간섭을 하면 잘 돌아가는 공장에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안주를 먹는 것도 잊은 채 청하 한 병을 자작으로 비웠다. 빈속에 마신 술기운만큼이나 한 과장을 상무로 등재시키겠다는 생각이 달아오른다.
그런 생각에 빠지면서 술을 한 병 더 시켜 반병쯤 마셨을 때 W전자의 맹차장이 들어왔다.
“소 사장! 오늘 고생했지?”
맹 차장은 사석에서 나에게 반말을 한다. 자리를 잡으며 맹차장이 뭔가를 실토하기 위해 말을 꺼낼 때 맹 차장의 뒤를 따라 한 과장이 들어선다. 나는 맹 차장의 말을 무시하고 한 과장에게 돌아보며 말을 건넨다.
“한 상무! 오늘 고생 했어요. 이 쪽으로 앉으세요.”
상무라는 호칭에 한 과장은 동작 그만! 그대로 얼어붙어 서서 어쩔 줄을 모른다.
& nbsp;
& nbsp;
& nbsp;
5. 설씨
& nbsp;
& nbsp;
수위실 근무의 낙이란 오로지 직원들 출근 마치고 한가한 시간에 조간을 뒤적이는 게 유일하다. 오늘 아침, 사원들 출근 체크를 마치고 햇살이 수위실 앞마당에 퍼질 즈음 여유를 가지고 조간을 읽고 있을 때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정문으로 들어왔다. 그 시간대에는 납품차량이 아니면 들어올 게 없는데 웬 차인가 싶어 내다보니 차에 탄 작자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새로 전무이사가 들어온다는 말을 한 과장한테 얼핏 들었는데 혹시나 싶어 다가갔다. 역시 새로 오는 전무이사였다.
진한 칼라필름이 덧붙여진 된 차창이 열리는 순간, 세상에 이럴 수가....... 죽은 재석이의 얼굴이 스윽 올라오는 것이었다. 재석이! 하고 목울대까지 올라오는 외침을 간신히 삼키고 이성을 찾았다.
어디서 오셨냐는 정중한 물음에 새로 오는 전무이사라면서 사장을 찾았다. 나는 사장이 나가고 없다고 말하고 한과장이 있는 사무실을 안내하며 그 작자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유재석의 아들 녀석이다.
재석이 죽었을 때 아들 녀석이 대학 졸업반인가 그랬으니 저 녀석의 나이도 마흔 초반쯤은 되었을 게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지만 저렇게 아비를 닮을 수가 있나? 재석이를 보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울컥 앞서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었다.
“사람 처음 봅니까?”
시건방지고 찬바람 이는 말투를 툭 던지는 것까지도 유재석이 영판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닮는 게 부자지간이라는 말이 들은 적이 있던가. 어투와 목소리까지도 시쳇말로 붕어빵이다. 유전인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놀라울 것도 없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머뭇거리는 순간, 차는 사무실 쪽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벌써 40년 저 쪽의 얘기지만 유재석은 사범학교 다닐 적에 한께 한방을 쓰며 자취를 한 사이다. 같은 학교에서 함께 근무한 적은 없지만 마음을 열어놓고 호형호제했던 사이다. 이십년이 지났지만 그의 얼굴이 어찌 가슴 속에 남아있지 않겠는가.
나의 친구 유재석, 이 친구 죽은지가 벌써 이십년이라....... 진부한 얘기지만 살아있는 세월은 참 빠르고 죽은 자의 기억은 아득하다. 민주화 투쟁과 노조파업으로 하루도 말짱한 날이 없이 최루탄 가스가 하늘을 뒤덮던 그해 가을에 그는 순직했다. 중등학교 교사가 순직할 일이야 뭐 있겠는가만 그는 분명 순직이다. 수학여행을 다녀오다가 브레이크 파열된 버스에서 학생 세 명과 명을 달리했다.
세상이 참 좁다. 이 공장에서도 나의 존재에 가려진 익명성의 두께가 자꾸 옅어지는 기분이다. 친구이자 친사돈인 정식이가 사장으로 있을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외손자가 사장이고 제자가 과장이고 친구 아들 녀석이 전무로 들어왔으니 여태까지는 철저히 비밀에 묻혀있던 수위의 존재였지만 언젠가는 나의 신분이 밝혀지겠다. 그러면 더 이상 근무하기도 힘들어지겠지.
어쩌면 내 입으로 내가 누구라는 걸 밝혀야 할지도 모르겠다. 녀석이 꼭 저 애비를 닮아서 말버릇 하나는 참으로 고약하다. 애비의 친구인지 몰라보고 수위실에 근무한다는 이유만으로 전화통에다 대고 반말투를 찍찍 뱉는 것만은 고운 눈으로 봐 주기 힘들 거 같다.
‘나 유 전문데........ 근무 잘 하라구?’
녀석이 전화통에다 대고 지껄인, 반토막은 잘라먹은 목소리가 귀에서 살아난다. 전무실로 쳐들어가 뒤통수부터 한대 쥐어박고 내가 누구라고 밝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당분간은 참자. 공장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오늘은 참아야 할 일이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공장 분위기가 착잡하다. 일흔이 가까우면 세상일에 있어서 반은 귀신이 된다. 회사 돌아가는 냄새만 맡고 있어도 오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이라는 감이 온다. 사장이라는 녀석이 아침부터 초조한 몰골로 원청회사로 들어갔고 한 과장도 종일토록 뭔지 모르게 허둥대다가 나갔다.
사장이라는 녀석은 나이가 이제 서른둘의 애송이다. 그런대로 기반이 잡힐 때까지는 수위실이라도 지키고 있어야 맘이 놓일 거 같다. 아직 경험이 없어서 허둥대는 것이겠지만 뭔지 모르게 공장 분위기가 친구이자 사돈인 정식이가 공장을 지킬 때만큼 탄탄해 보이질 않는다. 유리판 위에 계란을 올려놓은 형국이랄까. 움직이는 모습들이 뭔지 모르게 위태롭다. 오늘도 녀석은 아침을 굶은 채로 나갔다. 제 딴에는 새로운 경영 방식으로 공장을 끌어가겠다고 발버둥치지만 경험이 쌓이면 저절로 체득하는 게 자기방식의 경영이다. 지난봄에 쓰러졌으니 병석에 누운 사돈이 공장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지가 벌써 육 개월이 넘었다. 그 동안 공장을 끌어가는 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사위인 소 서방은 교환교수로 나갔다가 딸과 함께 로스엔젤레스 주립대학에 눌러 앉았다. 공장은 자연 옳은 직장이 없이 들락거리던 외손자인 수환에게 물려졌다. 녀석 태어날 때부터 귓밥이 도톰한 게 한 재산은 지닐 것 같더니만 생긴대로 논다고 대학 강사자리를 기웃거린 것을 빼면 첫 직장의 첫 출근이 할아버지 회사의 사장 자리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저 녀석 낳았을 때 귓밥이 도톰한 게 한 재산 할 것 같았는데 경영계통을 전공했어야 하는 건데 저 녀석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너도나도 유행처럼 예술계통으로 나가길 원했으니....... ”
녀석이 사장실을 차지하자 아내가 가장 먼저 뱉은 말이다.
미술대학에 거뜬히 들어가고 예술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는 것까지는 성공한 셈인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학계로 나가고 싶어 이곳저곳 시간강사로 기웃거리다가 결국은 제 조부가 하고 있는 공장으로 들어왔으니 사람 팔자는 다 정해진 데로 간다는 말도 영 빈말은 아니라고 아내는 주석을 달았다.
녀석이 태어나서 백일 무렵 귓밥이 하도 도톰해서 한 재산은 할 것 같더라고, 해서 녀석을 안고 나중에 커서 그룹의 회장님이 되면 할애비에게 수위 한자리를 부탁한다고 했던 농이 현실이 되었다. 기막힌 약조였다.
그렇다. 이 녀석과 나의 이야기를 소설로 옮기면 어떨까? 녀석이 어릴 적 이야기부터 사돈이 된 정식의 이야기를 잘 버무려서 쓰면 중편하나는 거뜬하게 우려먹을 수가 있겠다. 학교에 있을 적에는 그래도 적잖이 써서 더러는 발표도 하곤 했는데 정년하고 삼 년 동안 여행을 다니며 쓴 게 고작 단편 두어 편이다. 요즘 소설이라는 게 워낙에 서사성이 없어서 읽는 것마저 등한시 했는데 이 기회에 이 녀석과의 관계를 소설로, 사실적으로 옮겨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 중간에 한 과장의 이야기와 유 전무 저 녀석의 이야기까지 고루 버무리면.......
소설을 구상하는데 너무 깊이 빠져 있었던가.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 수위실입니다.”
버릇처럼 수화기를 들고 이곳이 수위실임을 상대에게 알렸다.
“아! 나 유전문데, 사장이나 한과장이 들어오면 바로 전무실로 보고하라구.......”
아무리 들어도 뒷말을 잘라먹은 반말이다. 녀석의 말을 듣던 순간 뒤통수의 핏줄 한가닥이 불끈 솟았다. 녀석을 더 이상은 못 봐줄 거 같다. 나는 불끈 솟은 뒤통수를 한손으로 쓸어내리며 수화기를 조용히 책상위에 내려놓고 수위실을 나와 전무실을 향했다. 녀석의 뒤통수를 갈기지 않고는 내 뒤통수가 배겨내질 못할 요령인 모양이다. 깨알처럼 여문 가을 햇살이 전무실을 향해 내달리는 내 어깻죽지에 내려앉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