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트롯 대세
김제권
코로나19 해일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오랫동안 지속해온 전통적 삶의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집회와 단체모임이 금지되고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이 제한되어 대부분 시간을 가정에서 보내다 보니 권태와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낯설었던 사회적 거리두기 초기엔 평소 애청하던 <삼시세끼>, <나는 자연인이다>, <세계테마기행>, <걸어서 세계 속으로> 등의 TV 프로를 시청하면서 보내는 것도 싫지 않았다. 특히 여행 작가가 진행하는 세계여행 프로그램은 소개되는 해당 국가를 검색하여 그 곳의 위치와 그 나라의 역사적 배경을 찾아보면 더욱 유익했다.
우리 속담에 ‘듣기 좋은 꽃노래 듣는 것도 한두 번이다’라고 했다. 날마다 반복되는 재방송프로그램을 보는 것도 지겨웠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느니 커피 한잔에 격조 있는 음악을 감상하며 귀라도 즐겁게 보내면 좋겠지만 음악에 재능이 없는 내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나는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을 보면 매우 부럽다. 직장 다닐 적에 회식이 끝나고 분위기에 휩쓸려 노래방에 갈 때면 곤혹스러웠다.
‘이번엔 차분하게 잘 불러봐야지.’
마음을 가다듬고 숨을 고른 후 마이크를 잡는다. 전주곡이 흘러나오면 발가락으로 박자를 맞춰 첫 소절을 들어간다. 갑자기 숨이 차올라 첫 음도 잡지 못한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돼지 멱따는 소리하다 마친다.
이처럼 음치인 내게 가요와 가까워질 수 있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방송사가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는 트롯경연 프로그램 중 목요일 밤에 방영되었던 ‘미스터트롯’ 경연이었다. 참신하고 기발한 기획으로 힙합과 랩에 밀려 침체되었던 트롯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오디션에 만 오천 여명이 참가했고 시청률 30%를 넘겼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도 현란한 몸동작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아이돌이 대세였다. 그러나 이번 미스터트롯 경연은 노래에 재능은 있지만, 가요계의 장벽을 뚫지 못했던 무명가수들이 그들끼리 겨뤄 순위를 가렸다. 다양한 경연방식은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 번의 시합으로 순위를 가리는 것이 아니고 후보자가 다양한 과정을 거치도록 구성했다. 나처럼 트롯을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원로가수가 심사평을 친절하게 해주었다.
나는 트롯 마니아가 되었다. 미스터트롯 경연이 없는 날은 왠지 허탈해서 안절부절못하며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나를 포함한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청소년 시기였던 70년대 초반은 남진이 부른 ‘가슴 아프게’와 나훈아가 부른 ‘해변의 여인’이 선풍적인 히트를 쳤다. 두 사람은 영남과 호남에 연고를 두고 2인 체제로 영원한 라이벌을 이루며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가요계를 대표했다. 남진은 팝스타일과 빠른 템포의 트로트로 세련미를 선보였으며, 나훈아는 정통 트로트로 노련함과 안정감을 내세워 훗날 국민가수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70년대 중반에는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과 송대관의 ‘쨍하고 해뜰날’이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70년대 후반에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를 치면서 현재까지 가왕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트롯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가사와 곡조 속에는 우리 삶의 애환이 녹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경연이 시작되면 채널을 고정하고 온몸이 TV 속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예선을 거쳐 선발된 후보자들이 노래 부르면 원로가수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심사평도 각양각색이다. 심사평은 후하게 해주며 출연자를 안심을 시켜놓고 점수는 인색하게 주는 얄궂은 심사위원도 있다. 심사위원단과 청중평가단 점수를 합산하여 순위가 결정될 때마다 참가자의 희비가 엇갈렸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노래 실력뿐 아니라 율동 솜씨도 현란해진다. 오랜 세월 무명가수로 전전하다 설욕전에서 상위권에 진입한 행운아도 있고, 탁월한 실력을 갖추었지만 선곡을 잘못했거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기대 이하의 점수를 받고 탈락한 참가자도 있다. 무엇보다 박진감 넘치는 점입가경의 방식은 두 사람이 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점수가 낮은 한 사람이 바로 탈락하는 것이다. 먼저 호명 받은 사람이 곧바로 상대를 지명한다. 시청자는 누가 자리를 지키고, 탈락할 것인가 가슴 조이며 지켜본다. 한 공간에서 고락을 함께하며 경연을 준비했던 후보와 일대일로 겨뤄야 하는 데스매치는 냉정한 한판 대결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최종 선발된 결승 무대는 일곱 명이 겨뤄서 진선미를 뽑는다. 구사일생으로 좁은 관문을 뚫고 올라온 결선인 만큼 경연방식도 이채롭다. 심사위원으로 나온 작곡가에게 받은 곡과 자신이 선택한 곡 등 두 곡을 부른 후 종합 점수로 순위가 확정된다. 순위 결과는 예상을 크게 빗나가질 않았다. 역시 초반부터 내가 기대하며 마음속으로 지지했던 후보가 마지막까지 선전했기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구수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흥겹게 불러 트롯의 진수를 보여준 후보, 해맑은 표정과 우렁찬 목소리로 청중의 가슴을 시원하게 틔워준 후보, 입담이 좋고 끼가 많은 꽃미남 후보, 풍부한 성량의 유학파 성악가 출신 후보가 상위에 올랐다. 아울러 아직 햇병아리로 보이지만 무슨 곡이든 거뜬히 소화해 내는 트롯신동 꼬마 후보, 날렵하고 애교스럽게 춤을 추며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던 후보, 편안한 표정과 눈웃음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후보가 그 뒤를 이었다.
참가자들이 트롯을 새로운 창법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서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트롯의 맛을 느꼈다. 공정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모든 국민이 인정해준 인기가수가 된 그들이 각 방송국의 예능프로에 출연하여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국민들은 코로나19의 확산 기간이 길어지자 IMF 때보다 경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아름답게 달라진 모습이 있다. 경연기간에 열렬한 응원을 보냈던 시청자들이 경연이 끝났지만 팬클럽을 조직하여 곳곳에서 선행하는 모습은 코로나19가 덮친 어둠 속에 한 줄기 빛과 같다. 팬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스타덤에 오른 그들이 초심을 잊지 않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는 많은 이웃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주는 보석이 되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