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창세기 4:3-12】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말씀 나눔】
살다보면, 황당한 일도 경험하고, 내 잘못도 아닌 일로 내가 피해를 당하는 등의 억울한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한탄하지만 정작 그들은 양심에 가책은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떵떵거리며 잘 사는 모습을 봅니다.
독립유공자 가정과 그 후손들의 삶이 친일파 후손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의 후손은 호의호식하고 살아가는데,
나라를 구한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가난이 대물림하여 하루를 걱정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성경에서도 억울한 사연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한 창세기 4장에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가해자는 형 가인이고 피해자는 동생 아벨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자가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습니다.
자신의 제물을 거부당한 가인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동생 아벨과 자신을 비교할 때, 질투가 끓어올라서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가인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살인 사건 이후로 아벨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간혹 우리들이 간과하는 것이 가인과 아벨 두 사람 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였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두 사람 다 교회 열심히 다니는 성도였습니다.
그리고 살인자인 가인은 신앙생활에 열심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질투심과 경쟁심으로 인해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11:4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라고 아벨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의인이 살해당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들판으로 불러내서 죽인 사건을 보는 독자들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어떻게 의인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수하는 분들을 보고 천수를 누린다고 합니다.
하늘의 복을 받아서 장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은 것은 요절한다고 해서 부정한 것, 저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 중의 하나가 ‘장수’의 복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인 아벨은 당연히 장수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습니다.
이러한 의인의 고난에 대한 의문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지는 난제 중의 하나입니다.
의인의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가치관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래서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히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의는 모든 종교에 녹아져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보다 죽음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종교들의 공통점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태어나서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세상이 돌고 도는 원형적인 사고인가 아니면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직선적인 사고인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질 뿐입니다.
우리나라 무속 신앙을 비롯한, 유교, 불교, 도교를 비롯한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들은 죽음을 이야기 합니다.
불교에서의 이승과 저승, 도교의 이생과 차생, 유교의 황천이라는 개념들은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한 단어들입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 이후에 극락, 또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판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으로 인해서 지옥과 천국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심판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장례식장에서 많이 사용하는 명복(冥福)이라는 단어도 심판에 관한 용어입니다. 조문을 가서 ‘삼가 고인의 명복(冥福)을 빕니다’ 라고 말하는데, 명복을 빈다는 이 말은 불교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불교에서 죽은 사람이 심판받는 곳을 명부(冥府)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서 염라대왕에게 심판받지 말고 좋은 곳으로 가도록 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도 심판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세상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음을 경험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 대한 삶에 대해서 누구도 자신 있게 이것이라고 확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서 되돌아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험하지 못한 죽음은 막연한 공포이며 한편으로는 저주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가운데 의인의 죽음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충격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속담이 있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 세상이 있는데, 죽음 이후의 삶이 현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도들은 죽음을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죽음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 뿐 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와 산자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롬14:8-9에 보면,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믿음이 죽은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살아서 영접한 주님은 죽어서도 여전히 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였고 자신들도 주님께서 살리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1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죽은 우리의 몸을 살리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동일한 의미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6).
사도바울과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 가지 죽음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죽음은 육신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5:12에서는 이 죽음의 원인을 아담의 불순종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이 정한 이치이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발버둥을쳐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제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요단강을건너야 했듯이 성도들은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신앙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아벨은 육신의 죽음으로 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단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사 가는 것뿐입니다.
두 번째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로 인해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성도들을 언급할 때 이 죽음은 대부분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에서 시작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정녕 죽게 된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 즉 하나님과의 단절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영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요한 1서 4:9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3:16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확증하십니다. 따라서 영적인 죽음은 이미 피할 길이 열려 있습니다.
세 번째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은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한 계시록 20:12에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이 죽으면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또한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계20:14-15). 이것이 영원한 죽음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즉, 세상에서 영적인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적 죽음을 극복한 의인들은 생명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마25:30).
데살로니가후서 1:9에 보면,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 계시록에서 말씀하시는 둘째 사망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 동생 아벨을 죽인 죄를 회개하지 않은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아서 평생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11-12절).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감으로 인해 그는 방금 살펴 본 세 가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첫 번째 죽음에 대해서는 자유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음을 책망하시는 것으로 보아 아벨은 죄를 다스리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11:4에 아벨의 믿음의 증거가 계속되고 있다는 말씀을 고려하면 아벨은 두 번째, 세 번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죽음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만나는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 담대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믿음의 유언을 남겼습니다.
야곱의 삶을 보며 믿음의 삶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마지막 그의 모습 때문입니다.
얍복나루를 건너 벧엘에 이르기 전까지 그의 모습은 믿음의 사람이라 하기 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디나 사건을 통해 본 야곱은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험난한 세월을 통해 믿음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으며, 죽음 앞에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야곱의 생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아론 역시 죽음의 때를 하나님이 알려주셨고 그것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론은 죽음을 위해 호르산으로 올라가 자신의 거룩한 옷을 벗어 그의 형제와 아들에게 넘겨주고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모세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연하게 죽음을맞이했습니다.
모세는 죽을 때 그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신34:7).
다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기 때문에 비스가산꼭대기에서 죽어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마17:3).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벨의 죽음은 불행하고 비참하다, 그리고 억울하다 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허락하시고 하나님 안에서누리는 평안의 안식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 떠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의학협회지에 따르면 개신교인들이 죽음을 앞두고 적극적인 연명치료를 선택하는 경향이 불신자에 비해 3배다 높다고 합니다. 공격적인 항암치료도 더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 이전에 신변정리에는 소극적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불치병을 치료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가지고 있어서 연명치료를 하는 동안 기적 같은 치유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전히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늘 묵상했을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둔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앙을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특히 카타콤에서의 삶은 죽음과의 경계가 종이 한 장 차이로 죽음과공존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카타콤 자체가 거대한 지하무덤이기 때문입니다.
늘 죽음을 마주하며 살았던 그들은 덕분에 더욱 신실한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면 중앙 조형물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
중세 유럽에서는 ‘모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 이유는 전 유럽의 1/3인구가 죽음을 마주했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성도들이 죽음을 앞두고도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15세기 흑사병으로 인해서 죽음이 전 유럽을 휩쓸 때, 성직자가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다 방문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죽음의 기술」이라는 목판화집이 대량 보급되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던 환자들은이 「죽음의 기술」이라는 책자로 인해서 죽음 이후에 일어날 부활을 소망하는 마음으로죽음의 과정을 큰 두려움 없이 잘 견뎌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 전쟁과 평화는 정 반대의 개념이지만 동시에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오늘 우리가 죽음에 대해 언급하며, 죽음에대해 깊이 생각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상기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생명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일구어내신 주님을 깊이 묵상함으로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나의 죽음도 유익하다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도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성도들이 죽음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다면 죽음은 성도들에게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죽음은 오히려 안식이 됩니다.
일례로 통계적으로 볼 때,
기독교 호스피스를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가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호스피스 사역을 통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해 줌으로 인해서 죽음 앞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임종 직전의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됨으로 인해서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대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죽음을 대면한 환자는 극히 편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천국에 소망을 두는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죽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 죽음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 대신 죽음을 감당하신 주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지금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누림으로, 예수님의십자가 은혜가 헛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생명을 누릴 때 누릴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첫 번째 죽음인 육신의 죽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시작 할 때 제기한 어떻게 의인인 아벨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가?아벨의 죽음은 억울하다 했던 이의 제기는 오늘 우리가 살펴본 죽음의 개념으로 볼 때 아벨의 죽음이 억울하다고만 평가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이 땅의 삶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육신의 삶에 매어서 영원한 천국의 삶을 놓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서로 경계하고 믿음으로 권면하여 사랑으로 서로 세우는귀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 찬양】
내 안에 사는 이, 이제 내가 살아도, 십자가의 전달자, 주님 가신 길, 생명 나무
찬송가: 298장 속죄하신 구세주를(Ab), 490장 주여 지난밤 내 꿈에(Ab), 352장 십자가 군병들아(Bb),
260장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Bb),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Eb),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Eb)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Bb), 492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