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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항일문학의 우뚝 선 봉우리 김학철
심영의
(소설가 겸 평론가, 인문학자)
1. 기억 전쟁과 문학
뉴라이트(New Right)는 새로운 보수(新 右派)라는 뜻이겠다. 그렇다면 기존의 보수파(Old Right)와 무엇이 다른가? 아니 새로운가? 기존 보수우파의 핵심적 주장인 냉전적 반공주의를 대체 보완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그들의 핵심 주장이다. 1948년 건국절 제정 주장, 이승만·박정희 재평가 시도 등은 주장을 담보할 실천적 행위로 꼽을 수 있겠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기에 조선이 근대화로 나아갔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인사들, 이승만 학당 교장 이영훈 등은 2019년 저서『반일 종족주의』에서 노동자 징용과 성노예(위안부)의 강제성, 식량과 자원의 수탈 등을 부정한다. 또한 우리 영토인 독도를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으로 보는 등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조선 강제 병합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궤변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창자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이영훈 이승만 학당 교장 등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진지로 하는 저들 뉴라이트의 역사 왜곡과 부정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일본의 식민 지배를 미화하고, 친일파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을 넘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재식민화(Recolonization)가 그들의 목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일제 식민 지배 시기 조선인의 국적을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장관이 되고 8·15광복을 부정하는 자가 독립기념관장이 되고 광복절에 맞춰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을 테러리스트로 칭한 책을 발간하는 자가 나타나는 등 가히 기억(역사)전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저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침략과 저항의 역사로 기술한 기존 ‘한국사 교과서’를 민족주의, 자학 사관으로 비판한 바 있다. 그들의 활동은 박근혜 정부 시기 ‘국정 교과서’ 논란으로 번지기도 했다. 최근 검정을 통과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중에는 이승만 ‘독재’를 ‘장기 집권’으로 표현하는 등 역사에 대한 농단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국제관계를 침략으로만 보는 갈등 지향적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한국의 역사에 얼마나 이바지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소위 ‘실증주의’ 역사관을 강조한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관건이 된다. 뉴라이트 논자들의 주장은, 지금까지는 한국의 식민지화 문제를 한국사 차원에서만 인식하였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과 수탈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세계사적 차원에서 본다면 당시 세계가 제국주의나 식민지로 나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식민지화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결국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 지배와 수탈을 정당하다고 보는 그러한 관점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를 통해 나타났던 (일제를 포함한)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결코 필요하지 않게 된다.”
최근 국가안보실 차장 김태효의 발언이 적확하게 그들의 의중을 드러낸다. 2007년 ‘뉴라이트 100인 선언’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8·15광복절 윤석열 대통령 경축사에서 제국주의 침략 시기 일본의 사과와 반성의 부족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던 것에 대한 문제 제기에,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며 “마음이 없는 사람을 다그쳐서 억지로 사과를 받아낼 때 그것이 과연 진정한가?”라고 반문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수립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가 있었고, 그러한 사과가 피로감이 많이 쌓여 있다는 후속 설명은 저들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다른 유의점은 반공 반북의 기조를 더욱 분명히 하면서 한국 근대사는 ‘대한민국사’이기 때문에 ‘북한사’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남과 북을 따로 떼어놓고 한국 근현대사를 분석하고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저러한 주장을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대한 부정과 폄훼의 논리적 근거로 삼고자 하는 의도다.
2023년부터 육군사관학교 교내에 설치된 김좌진·홍범도·지청천·이범석·이회영 등 독립·광복 영웅 5인의 흉상 이전을 추진하면서 항일운동의 역사를 공공연하게 배척하며, 이승만과 박정희와 백선엽 등에 대한 재평가를 넘어 이승만과 박정희 기념관 동상 건립으로 그들에 대한 우상화를 진행한다. 동시에 중국에서 활동했던 음악가 정율성 기념 사업을 공산주의자에 대한 성역화라고 비난하면서 반대 집회를 조직적으로 진행한다.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와 엮어 자랑스러운 항일 투쟁의 역사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과 그 궤가 다르지 않다.
뉴라이트와는 다른 차원에서 해방 이후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되었는가를 질문하는 중요한 논저도 있다. 문학과 역사학을 넘나들며 『가족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2000), 『역사적 파시즘』(2005) 등의 저작, 그리고 공저인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2013) 등을 통해 연구 영역을 넓혀온 권명아는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탈식민화와 재식민화의 경계』(2009)를 통해 식민 지배를 벗어난 지 수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한국인이 그 내면에서는 식민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에게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는 일은 진정한 해방의 서사, 해방의 정치를 위해 필수적인 일일 것이라고 말한다. 권명아는 해방 이후 ‘나는 수난당한 자다’라는 기본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민족 수난 서사 방식에 대해 꾸준하게 비판적 견해를 드러낸 바 있다.
그는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탈식민화와 재식민화의 경계』에서 다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숙고한다. 곧, “수난사 이야기는 ‘식민지 이후’라는 감정을 통해 극화된다. 식민지를 겪었다는 데서 발생하는 이 감정은 한국전쟁의 ‘수난’을 경험으로 극화하는 식의 연쇄 반응을 통해 한국전쟁, 식민 지배, 분단 등의 경험을 모두 수난의 경험으로 동일화시키며 수난 체험의 역사 서술을 형성하는 것이다.”
권명아는 한국의 현대사가 국가폭력의 반복적 수행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또 이에 따라 우리는 줄곧 같은 서사를 반복하고 되풀이하고 재생산해왔다는 점에 집중한다. 또 국가폭력이나 지배적인 권력, 혹은 제도화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기획조차도 폭력적 기획이 생산한 서사들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는 단지 해방의 기획에 대한 불가능성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반복에서 벗어나 이제는 새로운 서사, 새로운 해방의 정치를 구상해야 한다는 것을 점을 제기한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핍박받는 수난자로 서사화하는 익숙한 관습에서 벗어날 때야 비로소 우리가 식민성 즉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차원이 서로 다른 뉴라이트의 지속적인 도발과 권명아의 문제 제기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민족주의, 민족에 대한 관념 혹은 민족 서사에 대한 거부감이다. 뉴라이트는 민족주의 담론을 폐기하고 그 자리를 이른바 세계주의로 채울 것을 강조한다. 그래야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보편주의적 세계사의 자리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권명아는 민족주의 담론을 가부장적 담론과 같은 위치로 보고 소위 수난 서사의 반복이 제국주의 혹은 가부장주의 남성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쓰는 식민의 상태에 머물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변이 페미니즘으로 향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렇게 정치 현실에서일 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역사와 문학은 상보적이기 때문이다. 허구로서의 문학은 사실로서의 역사의 결핍이다. 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적 진실이 역사적 사실과 반드시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은 사실로서의 역사를 동경하며 그것을 모방한다. 현실적·역사적 사실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허구로서의 문학의 특징이 있다. 따라서 문학은 역사보다 훨씬 포괄적인 동시에 탄력적으로 인간의 현실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또 한국의 독자들은 역사(history)를 소설(story)로 읽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사소설은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다. 역사소설에 대한 가치평가는 소설의 내용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근접성이나 거리의 원근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 의도와 객관적 현실을 재현하는 작가의 성실성에 있다. 지금은 그다지 인용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 루카치의 경우 장편소설에서 사회나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인식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작중인물의 “행위(Handlung)의 불가결한 계기”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작품 이전에 작가가 지닌 사상이나 인식이 아니라 작품에서 구현된 인식, 창작 과정에서 작가의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만 그의 진정한 본질, 그의 의식의 진정한 형식과 진정한 내용이 그의 사회적 존재를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의 우뚝한 한 봉우리이면서 항일문학의 뚜렷한 자취를 남긴 김학철의 작품 중 『격정시대』(풀빛, 1988)와『해란강아 말하라』(풀빛, 1988) 그리고 그의 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보리,2022)을 중심으로 그의 시대를 읽는다. 김학철은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의용군’의 타이항산 전투를 포함한 행적을 증언함으로써 ‘장소의 기억’을 통해 남북의 망각에 저항한 인물이다. 김학철을 읽는 까닭은 앞에서 다소 길게 서술한 것처럼, 자랑스러운 항일 투쟁의 역사를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지속적인 시도에 대한(남북 모두에 대한) 기억 투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대상 텍스트에서, 무엇보다 누가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서술 주체의 정치적 무의식에 주목한다. 라캉은 진정한 주체는 “말하는 주체를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의 주제”라고 말한다. 욕망과 무의식의 주체는 발화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2. 식민의 시대 투쟁의 역사,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1916-2001)의 본명은 홍성걸(洪性杰)이다. 김학철(金學鐵)이라는 이름은 상하이로 건너가 항일 독립투쟁을 하면서 지하공작에서의 필요 때문에 이름을 고쳤다. 김학철은 1916년 10월 30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누룩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원산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원산 시절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 1. 13)을 목격하고 민족의식에 눈뜬 그는 중학교 1학년 시절 광주학생독립운동(1929. 11. 03)의 전국적 확산에 맞추어, 특히 김봉구의 지도를 따라 시위에 참여한다. 그는 보성고보 재학 중이던 1935년 19세의 나이 때 국내에서 항일 투쟁의 어려움을 깨닫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김학철은 “태극기 휘날리는 상해 임시정부는 아예 내 마음의 메카가 되었으며, 조선 학생들도 당당히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황포군관학교는 내 마음속에서 아예 오매불망하는 예루살렘으로 돼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코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 투척 의거로 일경의 탄압과 체포를 피하느라 정작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없었다. 상해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이후 1940년까지 8년 동안 자싱·항저우·쑤저우·전장·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구이린·치장 등 10여 곳을 전전하는 고난을 겪는다. 그가 의열단 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과 상해특별구역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그러하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중국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교섭하여 조선인 청년 50명을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시켜 정규 교육을 받도록 했다. 김학철도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가 상해로 망명하면서 꿈꿨던 황포군관학교 입학이 실현된 것이다. 중앙육군군관학교의 전신이 바로 황포군관학교였다. 그는 주로 일본 군경에 대한 습격과 당 기관지《앞길》의 운영비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1938년 김원봉과 윤세주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용대가 1938년 10월 10일 무한의 중화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발족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최초의 조선인 무장 부대’였다. 그러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과 싸움을 회피했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6월 중국공산당 팔로군 타이항산 지구에 들어가는데, 이때부터는 조선의용군으로 불린다. 김학철은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무한에서 항일혁명 3대 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조선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에 입대한다. 조선독립동맹은 1942년 7월 중국 화북에서 조선 공산주의자의 독립운동 단체로 설립된 것으로, 만주 지방의 동북 항일 연군 아래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김일성 부대와 중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 휘하 광복군과 함께 중일전쟁 이후 조선 민족 해방 운동의 3대 세력 중 하나로 사실상 가장 큰 규모의 항일 투쟁 조직이었다.
김학철 문학은 조선의용대에 대한 기억의 서사가 한 축을 형성한다. 그는 남경 화로강에서 함께 생활했던 동료들과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고, 1938년 10월에 창설한 조선의용대에 함께 참가했으며, 호북성 전선에서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와 투쟁을 전개했다. 1941년 6월에 중국공산당 팔로군 타이항산 지구에 합류해 분대장(지금의 중대장)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화로강’은 남경 중화문 안에 있는 언덕배기의 지명이다. 여기에 ‘묘오률원’이라는 큰 사찰이 있는데 그 후원에 루관(樓館) 한 동이 서 있다. 이 누관 아래위층에 조선민족혁명당의 젊은 지사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레 민족혁명당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김학철은 이곳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윤세주 최창익 김두봉 등을 만나 교류하고 어울리며 항일 독립투쟁의 길을 모색하고 실천했다.
황포군관학교 시절 그는 “우리들 사이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탐구하는 학습열이 대단히 높았으므로 나도 ‘왕정복고’ 따위를 다시는 꿈꾸지 않았으며, 정반대로 나는 변증법적유물론 속으로 자꾸 파고들어 참신한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 무렵부터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또 스스로를 “우리 조선의용대는 혁명적 낙관주의로 충만한 애국자들의 집단이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하면 곧 비장함과 처절함에다 연결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면만을 너무 강조하거나 부각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우리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지 혈육과 친지들을 다 고국에 남겨두고 단신 외국으로 뛰쳐나와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5년씩 십 년씩 또는 15년, 20년씩 풍찬노숙의 간고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일년 열두 달 삼백예순날을 밤낮없이 우국지심에 잠겨만 있다면 사람이 과연 어떻게 견뎌 낼 것인가, 지레 말라 죽어 버리지.”하는 솔직 담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를 혁명적 낙관주의자의 모습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리쾨르는 한 개인의 정체성이란, 행동의 주체가 누구이며 당사자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며, 그러한 물음에 답한다는 것은 곧 자기 삶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야기된 스토리는 행동의 ‘누구’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의 정체성은 ‘서술적 정체성’이며 서술 행위의 도움 없이는 인격적 정체성의 문제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보았을 때 김학철 자서전『최후의 분대장』은 항일운동가이며 문학가로서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면모(정체성)를 잘 드러내 주는 중요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김학철에게 호가장 전투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41년 12월 12일, 호가장 전투는 일본군 점령 지대와 팔로군 점령 지대의 사이에 있는 유격구에서 벌어졌다. 조선의용군 대원 29명이 일본군 1개 중대와 황협군 1개 대대 병력인 500여 명에 맞서 싸웠다. 팔로군이 전투에 참여하여 조선의용군을 지원하면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팔로군 병사 12명도 희생되었다. 일본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군은 사망 18명에 부상 32명이었다. 호가장은 중국 팔로군의 타이항산 투쟁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장소였다. 중국 화북성 원씨현 호가장은 중국·일본·조선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역사의 현장이다.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군과 중국 팔로군, 그리고 일본군이 1941년의 정세 속에서 접전을 일으킨 국제전적 성격을 띤다. 조선의용군의 존재가 호가장 전투로 인해 뚜렷이 부각함으로써, 일본군 내의 조선 출신 병사들과 학병들에게도 심적 충격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의용군은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국제연합군의 성격을 띠었기에 항일전선에 조선인 독립부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군에 대한 정치 선전공작의 효과가 컸다.
호가장 전투에서 김학철은 심각하게 몸을 다쳐 포로가 된다. 육체적으로 훼손된 김학철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일본으로 압송되었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0년 형을 선고받아 나가사키 이사하야 본소에 수인번호 1454번으로 수감되었다. 그의 감옥생활은 일제강점기에 포로로 근 4년여 동안에 그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발생했을 때는 대약진운동을 비판한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홍위병의 자택 수색 도중 발각되어 반혁명죄로 연길 추리구 감옥에서 1967년부터 1977년까지 10년 동안 복역했다. 중국에서 복권된 시기가 1980년이었다. 1940년 8월 29일 타이항산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후에도 그는 당 권력을 쥔 자들의 해괴망측한 짓들을 무수히 보았고 그 자신 수많은 고초와 억울함을 겪었으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념은 변함없었다. 그는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두고 “정의로 두려움을 이겼다.”고 말하거니와 『20세기의 신화』는 절대 권력을 가진 자와 그것에 빌붙어 자신을 탄압하고 고발했던 자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내용으로 한다.
그런 까닭에 그의 문학은 감옥 체험을 그린 작품이 적지 않다.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는 주인공 ‘임일평’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하루 동안 겪은 일과 그 후 후일담을 그린 작품이기에 ‘감옥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편소설 「죄수 의사」는 추리구 감옥에서의 경험을 투영하여 감옥 내의 부조리한 상황을 풍자하고 있다. 나가사키 형무소와 추리구 감옥은 극단적 폭압의 공간이자 내면성으로 향하는 의지의 공간이기도 하다. 김학철은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극한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일제가 패망하리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성찰의 공간은 추리구 감옥에서였다. 김학철은 추리구 감옥에서 김일성 정권의 연안파 숙청으로 인해 조선의용대 동료들이 쓰러져 간 사건에 대해 되새겼고, 더불어 모택동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었다. 1987년 발표한 중편소설 「밀고제도」에는 최저한도의 인권도 보장되지 않는 추리구 감옥의 일상을 야유와 풍자의 필치로 그리고 있다. 죄수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고된 노역에 시달리고 빈대의 습격에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해 파렴치하게 상호감시와 밀고제도를 이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감옥이라는 인간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참된 인간애를 잃지 않는 인물의 형상화에 공들이고 있다.
김학철에게 ‘감옥’은 ‘화로강’과 ‘타이항산’의 옆자리에 위치함으로써, 폐허의 세계 인식 속에서 오히려 현실 비판적인 세계 인식이 강화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호가장 전투로 인해 다리를 상한 채 포로가 되어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3년 6개월 동안 복역하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했다. 형무소에서 왼쪽 다리를 잘라내고서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그는 이후 소설가로서 활동하며 장편소설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20세기의 신화』, 소설집 『무명소졸』, 『태항산록』등을 썼다.
타이항산 해방구에서 김학철은 예술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내면세계에 있는 또 다른 정체성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타이항산은 자유의 공간이자, 희망의 공간이면서, 비극의 기억이 머무르는 곳이다. 타이항산 지구에서 함께 투쟁했던 조선의용군 동료 대부분이 해방 이후 북에서 활동하다가, ‘연안파’ 숙청으로 희생당했다. 그렇기에 김학철 문학에 등장한 타이항산 지구에서 벌인 전투들은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동료들에 대한 헌사이자, 역사적 재현을 통한 현실 정치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타이항산에 대한 서사는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한 의도적 저항의 의미를 지닌다. 김학철은 항일혁명 투쟁의 전통을 북쪽의 김일성 부대가 전유하려는 것에 대해 기억을 통한 문학적 재현으로 저항한다. 그는 타이항산을 저항 공간으로 서사화함으로써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상대화하고, 중국공산당의 항일 투쟁을 국제주의적 연대 투쟁으로 확장했다. 김학철은 타이항산이라는 저항 공간을 통해 일제와 중국공산당, 북쪽의 공식 역사를 상대화하고 동아시아 역사를 다각화했다.
김학철은 조선의용군의 출신 혁명가로서 해방공간에서 소설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가 해방기 문단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가 출신의 소설가’였기 때문이다. 김학철은 두 번에 걸쳐 한국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 그 첫 번째는 해방공간에 ‘조선의용군 출신의 작가’의 등장으로 인한 격랑이었고, 두 번째는 조선족 문단이 1980년대 한국문학에 불러일으킨 울림이었다.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출신의 작가라는 측면에서 카프 출신의 좌파 문인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로 부상했다. 작가들은 ‘의용군’으로서 김학철을 존중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역량에는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김학철의 존재 자체가 해방기 문인들에게는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문학의 삶과 현실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김남천은 김학철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문학적 완성도 자체가 중요하다고 믿는 채만식과 이태준은 ‘작가의 손으로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작품’으로 비판했다.
1946년 11월, 김학철은 서울에서 좌우의 대립이 격렬해지자 월북한다. 그의 소설 10편을 묶은 단편집 『조선의용군』을 한성도서가 출간 예정이라는 광고까지 한 상황이었는데, 좌익 탄압을 피해 황급히 월북하는 바람에 작품집은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 김학철은 남쪽의 문학사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다. 북에서는 노동신문 기자로, 인민군신문 주필로 활동했고, 중편소설 「범람」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갔고, 중국의 소설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던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본격적인 문학 공부 및 창작활동을 했다.
1952년 9월에 연변에 조선족 자치주가 선포되자 이주하여 연변 조선족 문학 형성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첫 단편소설집 『새집 드는 날』이 1952년 인민문학출판사에서 간행되었고, 1954년에는 연변 최초의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가 간행되었다. 작가로서 김학철은 연변 자치주 성립 초기인 1952년부터 1957년까지 가장 활발하면서도 행복한 문학 활동을 했다. 1957년 이후부터는 중국 내에 반우파투쟁이 발생해 반동분자로 숙청당해 24년 동안 강제 노동을 했다. 계속되는 고난을 견디지 못해 1961년에는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관에 망명 요청을 하려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45년 조선의용군 출신 작가의 등장이 한국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다면, 1988년에는 연변 출신 노작가의 장편소설 『격정시대』(1․2․3권)와 『해란강아 말하라(상․하)가 출간되어 다시 한번 김학철을 주목하게 되었다. 『격정시대』는 ‘혁명성장소설’로 『해란강아 말하라』는 1930년대 만주의 ‘반봉건 민족해방투쟁’을 형상화한 소설로 의미화되었다.
3. 항일 빨치산 문학의 백미, 『격정시대』
김학철은 일생을 통하여 조선의용군의 역사를 작품화했다. 해방공간에서 시작하여 1950년대 중국에 뿌리내리고 80년대 다시 문학창작을 재개해서도 그의 조선의용군 체험은 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격정시대』이전의 항일 체험을 다룬 창작활동은 모두 『격정시대』를 창작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격정시대』는 항일 빨치산 문학의 백미이다.
『격정시대』는 존재 자체만으로 ‘북한이 자랑하는 항일 혁명문학의 전통을 위협’하는 ‘동아시아 국제주의 혁명문학의 날카로운 창’의 역할을 한다. 북한 문학이 전유하고 있는 ‘항일 혁명문학의 전통’은 김학철의 항일 빨치산 문학으로 인해 크게 훼손되면서 보완되고 있다. 김학철이 소설 속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 ‘서선장’은 작가의 분신이자, 다중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디아스포라적 존재이다. 김학철의 전기적 사실에 비춰볼 때 『격정시대』는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대한 경험을 소설로 재구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설은 ‘서선장’이 열서너 살 무렵에 겪은 원산총파업을 통해 민족문제와 사회문제에 눈 뜨게 되면서 서울에서 공부하던 때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맞추어 동맹휴업에 가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김학철은 소설을 통해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 현실을 성장소설의 각도에서 재현하고 있으며, 국제도시 상하이에서는 혁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호가장 전투 이전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입교, 국민당 군대에서 항일전쟁, 그리고 타이항산 지구 팔로군에서의 조선의용군의 활약상을 굵은 선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중국에 건너가 처음에는 국민당 군대에 편입되어 항일전에 나서지만, 그 한계를 느끼게 되고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군에 가담해서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서는 모습을 그리는 이 소설은 1941년 12월 타이항산의 호가장 전투까지를 다룬다. 소설의 마지막은 “타이항산에서의 이와 같은 전투의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서선장, 곧 김학철이 조선의용군 체험의 끝이 1941년 말 호가장 전투까지였기 때문이다.
이는 김학철의 항일무장 투쟁의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재현이면서, 조선민족혁명당 요원들과 조선의용군 대원들을 통해 펼쳐 보이는 민족해방투쟁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학철은 국민당 군대에 편입되어 항일 투쟁에 나선 것을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곁방살이 항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조선의용대의 심리를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일본 제국 군대와 싸우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마오의 홍군과 존망을 건 투쟁이 더 화급했기 때문이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는 열망으로 가득한 조선의용대원들은 타이항산으로 건너가 결국 팔로군의 손을 잡는다. 중국은 조선 민족 독립운동의 기지 역할을 하였으나, 항일 투사 상당수가 공산주의에 연계되는 과정이 『격정시대』를 통해서도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0-40년대 중국에서 전개된 항일 투쟁은 크게 세 갈래가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동북 만주에서 활동한 김일성 부대, 그리고 화북 타이항산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한 조선의용군이 그러하다. 그 가운데 조선의용군은 일본 제국주의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는 날까지 중국 땅에서 유일하게 무장 투쟁을 견지한 항일부대다. 그러나 해방 이후 남에서는 빨갱이라고 외면하고, 북에서는 연안파라는 딱지를 붙여 숙청했다.북에서는 김일성 항일신화 외는 그 어떤 항일부대도 용납하지 않았고, 남한 정권은 좌익 공산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격정시대』에서 그리고 있는 조선의용군의 투쟁사는 남과 북의 이런 정치적 현실에 대한 항의의 뜻도 담겨있다. 앞(2장)에서 언급한 “항일혁명 투쟁의 전통을 북쪽의 김일성 부대가 전유하려는 것에 대해 기억을 통한 문학적 재현으로 저항한다.”는 말의 의미가 그러하다.
다만 1928년부터 1941년까지 14여 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원산과 서울, 상하이와 난징과 타이항산 등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1929년 원산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 광주학생독립운동, 만보산사건, 9·18사변 등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면서 소설의 서술 주체를 아직 세계관이 형성되지 못한 어린 ‘서선장’으로 한 까닭에 당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내기보다는 한 인물의 성장(각성)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이는 시간의 경과와 공간의 이동에 따라 인물의 성장 과정이 제시되고 있고, 무엇보다 어린 인물이 항일의식을 지닌 투사로 자라나는 과정을 통해 작가의 항일정신을 중점적으로 드러내는 성장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관련하여 그의 “역사 기록에의 의지와 조급성”을 들어 소설의 형상화 수준을 문제 삼고 있는 이도 없지 않다.
김학철의 문학 생산의 주된 공간은 중국이었다. 중국 문학은 1949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부터 1946년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까지 기본적으로 마오쩌둥의 『옌안문예강화』를 유일한 정신이자 원칙으로 삼았다. 문학은 정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이는 도구로서의 문학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중국 문예 창작과 비평의 지침이었다. 1949년에서 1950년 초반까지는 문학의 이상화 경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했다. 그 당시 문학의 주된 특징이기도 했다. 이는 1840년 아편전쟁 이래 최대 과제였던 반제·반봉건을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실현하고 자주적 민족국가인 ‘신중국’을 수립하였다는 자부심, 건국 초기의 열정, 미래에 대한 낙관이 작가의 의식 속에 복합적으로 투영된 결과였다. 연변에 정착한 후 김학철은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맞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해란강아 말하라』보다 1년 전에 간행한 첫 소설집 『새집 드는 날』에 수록한 일곱 편의 소설은 어느 정도 현실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루카치가 말한 것처럼, “장편소설에서 사회나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인식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작중인물의 “행위(Handlung)의 불가결한 계기”라고 보았을 때, 소설 『격정시대』는 중심인물의 성장 과정에서의 각성과 행위의 계기를 잘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작품이 창작되던 당대의 제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소설의 형상화 방법의 미비만을 지적하는 것은 성실한 문학비평의 태도라고 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김학철은 영웅의 장거에 탄복하고(윤봉길 의사의 쾌거를 말한다) 그 비장한 최후를 애석해하고, 원수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지없이 통쾌해하는 애증이 분명한 평범한 전사였다. 그 자신이 “그 당시 우리의 세계관은 극히 단순해서 무릇 항일하는 사람은 다 영웅호걸이요, 안하는 년놈은 다 개돼지였다.”고 말하듯 그에게는 복잡한 자의식이 없다. 그의 모든 의식은 육체의 기억(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호가장 전투 등)을 통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이렇게 형성된 의식은 한층 더 높은 차원의 행동으로 나아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소설 『격정시대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사회의식에 눈 뜨고 항일무장투쟁에 나서면서 겪는 무수한 사건과 만나는 인물들을 소설의 형식을 통해 복원하고 있지만, 그 당시의 언어와 정서 및 풍속의 발굴과 재현에 이르기까지 민족사와 민족 정서의 뿌리를 마주하게 하는 성과로 연결되고 있다는 각별한 의미가 더해진다.
특히 김학철은 언어 구사에 있어 치밀함은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치밀함이란 언어 구사에 있어서 정확성을 기한다는 뜻일 텐데, 이때 그가 근거로 하는 우리말의 정확성의 준거는 표준어로서의 서울말이다. 그는 함경도 방언으로 대표되는 연변식 말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데, 그 정도가 “세상이 딱 귀찮은 생각까지 들”거나, 그렇게 말하는 남자를 보면 ”귀싸대기를 한 대 갈겨주고 싶“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이해영은 까닭에 대해, “그의 문학창작의 첫 단계, 습작기의 언어가 서울말이기 때문일 것인데, 서울말에 대한 애착과 고집, 서울말=표준어라는 자의식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충분한 근거는 없으나 그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평생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역사적 사실로 보아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폭력에 맞서기 위한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작용했을 법도 하다는 생각이다.
소설 『격정시대』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 혁명적 낙관주의도 특기할 만하다.
일제강점기 욱일승천의 기세로 제국을 확장하던 일본 군대는 항공모함과 잠수함 그리고 전투기 등으로 중무장한 최정예 군대였다. 그들을 상대로 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객관적으로 보아 승리의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학철은 그 암담한 상황을 비관적으로 그리는 대신 꺼지지 않는 열정과 독립에의 열망, 역사는 반드시 진보하여 제국주의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다는 혁명적 낙관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신경림도 『격정시대』서평에서, 그의 소설이 항일무장투쟁이라는 배경 속에서도 “피비린내 대신 건강하고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고 고평하고 있다.
또한 소설 『격정시대』는 영웅들의 일대기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중심인물 ‘서선장’은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조선의용대의 일개 평범한 대원이다. 부대에서의 직위도 높지 않고 아는 것도 거의 없다. 그의 눈에 비친 대원들의 형상 또한 장난기 많은, 재미있고 평범한 20대의 건강한 청년들이다. 소설에서는 전투 장면만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아기자기한 생활 모습, 개개인의 습성 들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항일무장 투사인 조선의용군의 형상을 불필요하게 미화하거나 폄훼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그리겠다는 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창작방법론에충실한 결과다. 실재했던 조선의용대의 무장 투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하면서도 의용대원들의 전투적이고 영웅적인 모습보다는 그들의 생동하는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을 그려냄으로써 자전적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나 전기 문학을 넘어선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의 완성도를 갖춘 것이다.
김학철은 1989년 11월, 43년 만에 서울에 다시 나타나 자신은 “군인이지 소설가가 아니다”(한겨레신문 1989.11.18.)라고 언급한 바 있지만, 이것은 자신이 조선의용군 소속 항일 투사였음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격정시대』는 자전적 소설이면서 동시에 조선의용군의 항일전쟁 참전 모습을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또한 라캉이 말한 바 진정한 주체는, “말하는 주체를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의 주제”라는 명제를 우리가 수긍한다면, 『격정시대』의 중심인물 ‘서선장’은 작가의 분신이자, 다중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인물로 작가의 정치적 무의식을 적실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4. 민중의 서사, 『해란강아 말하라』
『해란강아 말하라』는 1930년대 초 만주 조선족 민족운동의 형상화이자, 중국공산당과 조선 농민들의 연대를 그린 소설이다. 이 작품은 중국 조선족의 사회주의적 주체 형성 과정을 그렸다는 측면에서 1950년대 중국 조선족 사회가 열망했던 이데올로기적 이상이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김학철은 『해란강아 말하라』에 대해 “나 한 사람의 창작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소설은 김학철이 연변 조선족 농민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현장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나왔기에 풍부한 민중 서사가 잘 녹아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앞장(3장)에서 김학철이 언어 구사에 있어 근거로 하는 우리말의 정확성의 준거는 표준어로서의 서울말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가 연변 조선족 농민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현장을 성실하게 취재한 결과물이라 할 때 이 소설의 인물들이 구사하는 서울말은 소설의 리얼리티를 상당할 정도로 약화하는 취약점이 된다. 농민 한영수, 머슴 임장검, 허연아, 박서방, 박서방 댁 등 주요 인물이 구사하는 서울말은 공부도 하지 못했고, 서울과도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 사는 가난한 농민들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언어다. 이는 풍부한 우리 속담의 빈번한 사용과 재래 풍속의 재현 등과는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총 60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인 이 장편소설은 해란 강변에 있는 ‘버드나무골’을 배경으로 1931년부터 1932년까지의 농민 투쟁이 펼쳐져 있다. 소설에서 그 배경이 되는 버드나무골에 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버드나뭇골은 해란강 동안에 위치한 마을로, 나루터에서 두 마장 가량하여 버드나무 줄선 동네 어구가 보인다. 동네는 산꼴짜기에다 꼭대기를 틀어박고 조롱박 모양으로 가로 누웠는데, 그 위쪽 작은 데가 웃마을이고, 아래쪽 퍼진 데가 아랫마을인데, 그 허리 잘룩한 부분의 길이는 서너 마장 된다.”(28쪽)
해란강은 우리 조선 이주민들에게는 유서 깊은 땅이고 사연 많은 강이라 할 수 있다. 간도가 우리 민족 구성원이 살길 찾아 모여든 이국의 삶의 공간이라 할 때 그 중심에 해란강이 자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해란강아 말하라』에서 소설의 주요 공간인 해란강은 조선 이주민들의 수난사와 반일 투쟁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라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 점은 다른 한편에서 바라볼 때 이 소설이 얼마간 관념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1980년 광주의 5·18의 비극(혹은 민중의 성취)을 노래하는 작품들에서 “아,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라거나 “금남로여~ ”라는 광주의 상징적인 자연물 혹은 지명을 활용한 탄식의 수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격정시대』와는 달리 작가의 실제 경험을 대신한 취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의 얼마간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은 해방 후 1954년에 탈고하게 되는데, 중국 조선족 첫 장편소설로 당의 지시에 따른 창작이다. 작가의 문학 활동 범주에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작용에 영향받은 이 소설을 읽을 때 중요한 관점은, 당의 노선과 정책이 어느 정도로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창작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관건은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소위 주제 의식이, 그리고 인물을 포함한 서사의 형상화가 창작을 지시한 중국공산당의 이념을 담아낸 것인지, 작가의 주체적 의지가 반영된 역사에 대한 성찰인지 여부가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주요한 논점이 될 것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소설의 사건들은 대개 배경과 관련이 있으며 인물의 행동을 촉발하는 원동력이나 계기로서의 배경은 사건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따라서 작가가 해란강 동안에 있는 버드나무골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것은 1930년대 조선 이주민들의 활동과 생활을 반영하는 데 있어 우선 공간적 우월성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 이주민들은 만주 이주 후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도시보다 농촌지역에 많이 살았는데, 해란강 양안은 토지가 비옥하여 조선 이주민이 많이 모여 살았다.
『해란강아 말하라』의 기본 구도는 한영수, 임장검으로 대표되는 빈농들과 박승화, 최원갑으로 대표되는 친일 분자들의 대립과 충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에서 동요하는 김달삼 등 인물들도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전반부에서는 소작인들의 소작 투쟁일 추수 투쟁과 춘황 투쟁의 역사적 사실을 그린다. 두 사건 모두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그래서 작가 김학철은 머리말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오직 허다한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심지어는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귀중한 생명까지를 내바친 선열들에 의하여 이미 엮어진 역사 사실을, 그도 극히 적은 일부분을 추려내어 정리하여 알기 쉽게 하였음에 불과합니다.”라고 썼다. 이어서 그는 “중국공산당은 오늘에 와서 비로소 연변 인민의 생활을 관심하고 그를 이끌어 번영한 내일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오랜 예전부터 쪽박을 차고 고향에서 쫓겨난 우리의 선대들이 두만강을 건너서 이 땅에 흘러들어오던 그때부터 자기의 뜨거운 관심을 의지가지없는 그들에게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소설에도 기록된 간도 인민의 투쟁의 역사는 즉 중국공산당의 투쟁의 역사인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소설의 창작 배경과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으로, 조선 민족의 항일무장 투쟁의 역사적 사실을 그리면서도 한편으론 그것과 중국공산당과의 관계, 즉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라는 정치적 창작 배경을 염두에 두었던 것을 작가의 말(머리말)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 하여 소설 『해란강아 말하라』가 정치적 도구로서만 기능한 관념의 세계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다. 조선 이주민의 삶의 풍부한 내용을 그리면서 그 안에 이념의 육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설은 인민들의 소작 투쟁이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취득한 승리라는 당으로부터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소설에서 소작 투쟁에 나선 인민들이 처음부터 소작이라는 불합리한 제도를 깨닫고 자발적인 투쟁에 나선 것은 아닌 것으로 그린다. 그들은 “여적 안 그러구두 살아왔을라네!”라고 하면서 여전히 낡은 관습을 답습하는 빈농들인 것이다. 그러나 또 소설은 인민들이 간도 땅의 당당한 주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거나, 항일무장투쟁의 필요성과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함으로써 소설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게 이념을 육화하고 있다. 소설의 결말이 무장 투쟁의 승리가 아니라 실패로 끝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점도 역사의 진실성을 재현하고자 하는 작가 의지의 소산이다. 그는 소설을 창작할 때 자신의 실제 경험이든 성실한 취재를 활용하든 항상 진실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작가 스스로 이 소설에 대하여 “당의 지시를 받고 쓴 소설로 문학성이 결여된 부끄러운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해란강아 말하라』는 그의 첫 장편소설이자 중국 조선민족문학의 첫 장편소설로 문학사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해방 이후 중국 조선민족사회의 역사적 변동과 선택, 조선민족문학의 기본 주제라는 문맥 속에서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김학철은 인간주의, 민중주의적 윤리적 지향으로 강고한 억압 체제를 돌파한 ‘위대한 개인’이자 펜 끝에 힘이 넘치는 작가였다. 위대한 혁명가의 엄숙한 죽음은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위대한 혁명가의 죽음을 의미 있게 기록한 작가는 드물었다. 그 핵심에는 ‘화로강’ ‘타이항산’이라는 낭만적이면서 혁명적 공간에 대한 서사적 기록 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혁명의 순간, 혁명적 인물들에 대한 사적 기억을 공간 경험과 결합해 문학 속에서 재생해 낼 때, 그들은 현대사의 일부가 된다.
김학철은 문학을 통해 혁명을 기록하는 일, 망각에 저항하는 힘겨운 작업을 수행해 냈다. 그것은 개인숭배와 국가주의적 공식 역사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 국제주의의 감수성과 접맥하고 민중주의적 태도로 우애의 문학을 구현해 냈다. 문학은 그에게 상처이기도 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표식이기도 하다.
5. 망각에 저항하는 항일문학
김학철을 비롯한 월북 작가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책의 출판이나 연구가 허용되지 않았다. 남북이 분단되고 전쟁의 참화를 겪고 이후에도 적대적 공존 관계 속에서 체제를 유지하느라 상대를 악마화했기 때문이다. 1987년을 기점으로 월북작가들의 작품 연구가 가능해짐에 따라 작가로서의 김학철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젊은 시절을 항일 투쟁으로 보냈으며, 그가 남긴 작품들 모두 그러한 체험에 바탕하고 있다. 또한 해방기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을 작품에 담아내면서 조선 독립동맹의 빨치산 문학의 계보를 우리 문학사에 소개한 최초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2001년 9월 25일 연길에서 8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항일무장 투사요, 그러한 경험을 지닌 작가로서의 김학철의 존재는 자랑스러운 항일 투쟁의 역사를 삭제하고 일본 제국주의(혹은 군국주의)의 재식민화 위험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이 시대(문학)의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신응철의 소개에 따르면, 함부르크 대학의 바르부르크 연구소를 설립한 바르부르크(Aby M. Warburg 1866-1929)의 학문하는 방식은 항상 ‘역사가’의 방식과 ‘인간학자’의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바르부르크는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인식은 이 세계의 근원을 ‘기억(記憶)’하고, 이를 ‘재구성(再構成)’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김학철은 자신이 살았던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과 저항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면서 자신의 체험 세계를 문학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뛰어난 작가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때였다. 수많은 항일 투사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고단한 여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혹독한 고문으로 몸을 상했다. 가족을 돌보지 못했으며,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이국땅에서 냉대와 배척받는 삶을 견뎌야 했다. 많은 역사 서술이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으나, 김학철에 이르러 역사가 미처 담아내지 못하거나 누락 했던 항쟁의 역사는 물론 무엇보다 살아 숨 쉬는 인간군상을 구체적 감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 글의 마무리를 위해 다시 맨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보자. 소위 ‘뉴라이트(New Right)’ 계열 인사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조선 강제 병합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궤변을 넘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재식민화(Recolonization)를 추구하는 듯한 흐름 속에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마저 지우려는 역사 농단에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는 반공·반북주의다. 그런데 식민 지배가 남긴 부정적 유산과 반공 이데올로기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 후 한국에서는 동일시되어 작동하였다. 다시 말해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은 미군정에 재등용되어 미군정경찰 간부의 80% 이상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이렇게 친일과 반공 반북주의는 쌍생아처럼 짝패를 이룬다. 6·25 한국전쟁 후 반공주의는 다른 모든 정치적 이념을 압도하는 지배적인 정치이념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대상이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던 ‘반공(anti-communism)’ 개념이 ‘반북(anti-North Korea)’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찾고, 김일성을 대중적인 수준에서 국민의 ‘주적’으로 대상화하기 시작한 새로운 냉전의 시작을 알린 계기로 작용했다. 민간 독재와 군사독재는 지속해서 반공주의 이념과 감정을 동원했다. 그 결과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는 모든 정치적 논쟁과 정치적 비판을 억압하는 가장 중요한 이념적 원리가 되었다. 남한에 대한 북한의 위협과 함께 반공주의는 다양한 국가기구와 비 국가기구(특히 기독교회)를 통해 교육되고 내면화되었다. 이제 반공주의는 집단학살과 편집증적 광기의 표출을 가능하게 만든 메커니즘으로 변질되었다. 냉전 반공주의의 이분법적 특성상 ‘우리 아닌 그들’에 대한 강렬한 증오와 배제의 심성이 정서 속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히스테리로서의 반공주의는 모든 사람을 적과 나로 구분해 내부의 적을 색출하는 광기의 정치문화를 만들어 내는데, 이 경우 공산주의에 관용적인 자유주의자들까지 좌익으로 몰아붙이게 된다. 이런 자유주의나 노동운동의 자기검열은 결국 자유주의 세력이나 노동운동의 정치 사회적 입지를 위축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반공주의는 처음에 국가의 내부의 적을 사냥하는 논리로 시작하지만, 그것이 지속되면 이제 언론이 주도해 시민사회가 스스로 적을 찾아내는 캠페인으로 확산하고, 나중에는 모든 구성원이 자신이 국가나 사회가 지목한 적으로 간주되지 않기 위해 서로를 감시하며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위로부터의 통제가 없더라도 반공주의가 사회에 침투하고 착근하여 전체주의 문화로 정착하게 된다. 파시즘, 독재, 권위주의 지배가 물리적 통제 없이 유지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는 남한만의 문제는 아니다.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해 체제 안정화를 추구했고, 결국 분단구조를 활용한 적대적 공존은 남북 모두의 국가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아래로부터의 동의를 통해 가능했다.
우리가 오늘 일제강점기 항일문학에 대해 논의하는 중요한 이유는 결국 남북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는 점에 있다. 관련한 중요한 논점 하나는 안병직의 사상적 후예들인 ‘뉴라이트’ 인사들(『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저자들(박지향・김철・김일영・이영훈)과 『반일종족주의』(김낙년・김용삼・이영훈・이우연・정인기・주익종) 저자들, 그리고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등이 민족주의 담론의 폐기를 끈질기게 주장해 온 점이다. 민족주의 비판에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쓴 서강대 임지현 등 서양 사학을 공부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일본 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결과, 한국 민족주의와 일본 민조쿠슈기(民族主義)를 동일한 것으로 단정하면서 한국 민족주의를 ‘악의 근원’이라고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 불순한 의도와 무관하게 ‘민족’과 ‘민족주의’를 혼동하고 있는 데서 비롯한 학문적 오류라고 본다. 이상봉은, 민족과 민족주의의 성립과 발전에 관해 다음처럼 설명한다. “민족에 해당하는 라틴어인 나티오(natio)는 출생(의 공통성)에 관련된 개념, 즉 동향의 의미를 나타냈다. 민족은 본질적으로 근대적 현상이다. 나티오(natio)는 민족이라는 용어의 어원을 나타낼 뿐 주권적 국민의 의미는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논지를 길게 설명할 여력은 없다. 다만, “민족주의는 논자에 따라 특정의 이데올로기로 정의되기도 하고, 정체성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민족주의는 내부적 차이와 다양성을 억압하여 통합을 강제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적 배타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이다.”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엄연한 실체로 존재하는 ‘민족’을 폐기할 수는 없는 일이며, 저들이 비판 대상으로 삼는 민족주의는 허수아비 공격과 같은 논리적 오류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강조하는 남과 북은 대립과 갈등의 심화가 아닌 평화와 공존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 매개체가 민족 혹은 민족주의일 것은 부연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살핀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투쟁의 역사와 그러한 기억의 재구성인 김학철 문학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나아가 배타적인 민족 문학의 경계를 넘고 분단문학을 지나 통일문학을 지향하는 데 있어 민족해방투쟁과 민중연대에 기초한 김학철 문학의 의의를 다시금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문학은 현실 그대로의 반영이 아니라 일정한 굴절임이 분명하다. 작가의 세계관을 통해 작가가 보고 관찰하고 경험한 세계의 허구적 재배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학철 항일문학은 일제강점기 무장 투쟁의 역사와 당대 민중의 풍부한 삶의 내용을 혁명적 낙관주의와 사실적 재현을 통해 훌륭하게 그리고 있는 항일문학의 우뚝 선 봉우리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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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의(沈永儀)- 소설가 겸 평론가, 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