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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933책 (탈초본 51책) 영조 17년 7월 15일 정축 15/20 기사 1741년 乾隆(淸/高宗) 6년
閔亨洙를 咸鏡道觀察使에 제수하며 내린 敎書
○ 敎咸鏡道觀察使閔亨洙書。王若曰, 人臣效鞠躬之誠, 何間于內于外? 國家審方面之寄, 最重之翰之屛。衆望攸歸, 予簡非偶。惟卿, 聖母親姪, 賢相佳兒。萬事傷心, 知遇憶童遊之日, 一念憂國, 忠勤認家傳之風。器度淵凝, 素負廊廟之重望, 性行剛確, 未免枘鑿於當時。前後之危言屢陳, 豈卿心之不諒? 南北之薄竄旋宥, 亦予意之可知。惟其曲保於始終, 蓋爲與共於休戚。銅章墨綬, 幾歎郡邑之棲遑, 白髮蒼顔, 久耐風霜之閱歷。蹤跡齟齬, 曾未數月在朝, 原隰驅馳, 纔經萬里奉使。伊素節不憚於夷險, 顧利器宜別於錯盤。言念塞北之關防, 實是吾東之根本。肇基王迹, 卽周之豳谷·漆沮, 遠接戎疆, 若漢之雁門·恒代。四陵佳氣, 護月遊之衣冠, 六鎭雄藩, 擁星羅之壕堞。米鹽渴商胡之谿壑, 邑弊難一二言, 貂蔘作窮民之阱機, 邊憂蓋千百計。素患聲敎之難曁, 重以荒歉之荐臻。移哺之政連年, 縱勤泛舟之役, 懷襄之災浹月, 更深塡壑之憂。苟非牧民禦衆之才, 曷膺宣化承流之責? 玆授卿云云, 卿其祗服寵命, 敬敷敎條。惟公明, 可以服人, 嚴黜陟而勵守宰, 惟寬仁, 可以鎭物, 勤勞來而惠民生。簿書錢財, 毋曰非儒者事, 禮義干櫓, 亦足張吾之軍。須體九重宵旰之憂, 先講一方賙賑之策。朝廷之艱虞溢目, 豈欲遣肺腑之親? 藩維之弊瘼關心, 所以托爪牙之任。於戲, 過虛州之路, 倘興長沙之舊懷, 瞻涪溪之祠, 應念文忠之遺化。范滂之按冀北, 可見列郡之澄淸, 韋丹之莅江西, 庶免遐氓之飢饉。予不多誥, 卿其往欽。故玆敎示, 想宜知悉。知製敎金漢喆製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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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집(一蠧集) 해제
숙종 | 12 | 1686 | 병인 | 康熙 | 25 | - | 金鼎昌 등의 上疏에 의해, 涪溪에 세워진 書院을 鍾山書院으로 賜額하고 禮官을 보내 致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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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三 / 附錄 / 讚述
問尤菴先生曰。關北儒生輩。欲以一蠹鄭先生,奇服齋。享祀于鍾山書院。其位次當竝享乎。先生曰。一蠹當主壁。服齋配享可也。雖以時勢言之。一蠹。卽戊午史禍賢人。服齋。己卯士禍人也。況一蠹從享文廟。尤何敢幷享乎。崔鶴菴華陽聞見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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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附錄卷十七 / 語錄 / 崔愼錄[上]
問鍾城儒生欲以鄭一蠹,奇服齋享祀于書院。其位次當並享乎。先生曰。一蠹當主壁。而服齋配享可也。雖以時世言之。一蠹卽戊午士禍賢者也。服齋乃己卯諸賢也。不可並享。況一蠹從祀文廟。服齋多過人也。何敢並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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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암집(鶴庵集) 최신(崔愼)생년1642년(인조 20)몰년1708년(숙종 34)자자경(子敬)호학암(鶴庵)본관회령(會寧)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문인
鶴庵集卷之二 / 華陽聞見錄 / 語錄
戊申(1668,현종9)春。先生入閣。
현종 | 9 | 1668 | 무신 | 康熙 | 7 | 62 | 李端相, 朴世采와 편지로 退溪의 物格說을 논하다. ○ 2월, 우의정에 제수되다. ○ 9월, 상이 溫泉에 행차하여 부르자 行宮에 입조하다. ○ 11월, 상소를 올려 하직하고 廣州로 물러나니 상이 閔鼎重을 보내 머물기를 권하다. ○ 체차된 뒤에 還朝하여 차자로 경계를 아뢰다. |
問。鐘城儒生。欲以鄭一蠧,奇服齋享祀于書院。其位次當幷享乎。先生曰。一蠧當主壁。而服齋配享可也。雖以時世言之。一蠧卽戊午士禍賢者也。服齋乃己卯諸賢也。不可並享。況一蠧從祀文廟。服齋多過人也。何敢並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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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官通考 春官通考 卷38 吉禮 [院祠] [咸鏡道]
鍾山書院, 在鍾城府。顯宗丙午(1666,현종7), 創建, 肅宗丙寅(1686,숙종12), 賜額。主享文獻公鄭汝昌見上景賢書院。謫本府。, 配享應敎奇遵見上文峯書院。謫本府。·文節公柳希春見上義巖書院。謫木府·文肅公鄭曄見上龜巖書院。曾莅本府。·忠貞公鄭弘翼見上老德書院。謫本府。·文正公金尙憲見上崧陽書院, 莅本府。·文簡公鄭蘊見上顯節祠。曾莅本府。·文孝公趙錫胤見上道山書院。·文忠公兪棨見上七山書院。以上八公, 肅宗丙寅, 幷追配。·文忠公閔鼎重見上石室書院。曾莅本道。肅宗戊寅(1698,24), 追配·文忠公南九萬。見上文會書院。景宗癸卯(1723,경종3), 追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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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二 / 附錄 / 鍾山書院春秋享祝文[金起泓]
倡道吾東。被遷塞北。七年雨化。千載血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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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여요선(北輿要選) / 상백두산 옛 사적에 대한 고찰〔白頭古蹟攷〕
지금은 무산 이하를 모두 두만강이라고 부른다. - 김기홍(金起泓)의 《관곡야승(寬谷野乘)》에 보인다. -
김기홍(金起泓) : 1635~? 자는 원잠(元潛), 호는 관곡(寬谷)이다. 저서로 《관곡집(寬谷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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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二 / 附錄 / 鍾山書院請額疏[金起泓]
伏以臣等所居。乃北鄙之鄕也。地與戎羯爲隣。俗以弓馬爲習。士之生乎其間者。其何所觀感而啓發其知識乎。惟幸先正諸賢。謫居斯土。不鄙夷而訓迪之。由是人皆興勸。始知有所謂詩書禮樂之敎。孝悌忠信之道焉。其垂惠於後學。有補於聖化。夫豈淺鮮也哉。蓋昔戊午史禍作。而
文獻公臣鄭汝昌謫鍾城。己卯士禍作。而
應敎臣奇遵謫鍾城。乙巳士禍作。而
文節公臣柳希春謫鍾城。有若
文肅公臣鄭曄。嘗爲鍾城府使。
忠貞公臣鄭弘翼謫鍾城。至于近世。則
大提學臣趙錫胤,
參判臣兪棨。
俱以一時恩譴。或守鍾城。或竄穩城。茲數臣者。皆以名世儒賢。遠斥荒裔。處困以亨。益肆力於經籍。推其緖餘。以訓蒙士。雖施敎有久近。收效有淺深。而能使俗習丕變者。其功甚大。有不可誣也。臣等遠則耳飫。近則親炙。高山景行之思。實有萬倍於他人者也。遂與數三同志之士。協謀鳩工。營立一祠于鍾城涪溪里。
以文獻公鄭汝昌主享。
而其與八賢配食。
以寓沒世之慕。兼作藏脩之所。列邑人士。聞風興起。坌集院中。群居隷業。仍相與謀之曰。
會寧。有元山書院。卽
文正公臣金尙憲,
文簡公臣鄭蘊之祠。而
大提學臣趙錫胤。亦竝享焉。
蓋金鄭。皆嘗通判鏡城。其精忠大節。尤足以聳動遐邇。則遺跡所在。咸宜俎豆之典。而見今元山。凋殘漸甚。灑掃亦缺。況會與鍾。疆界相接。趙錫胤。疊享於兩祠。又不無瀆祀之嫌。盍圖所以共享於一祠哉。於是撤元山而合於涪溪。移奉位板將有日矣。旣而。又相與謀之曰。此實斯文盛擧。而尤爲北方之大幸。誠宜亟聞於朝。請得恩額。以聳士林之觀瞻。以光聖代之儒敎。今者書院之設。殆遍國中。而若乃明川以北。則通八官。始有一焉。朝家苟不因此而別有激勵。則將必沮其興起之心。而無以革其鄙陋之習。其幾豈不重歟。惟其激勵之道。莫先表章。而表章之方。又無出於宣額。則何可自外於聖明。而不以此仰籲乎。臣等茲敢重繭百舍。投進一疏。此非臣等之私言。實一方多士之所同願也。伏乞殿下。勿以賤微而忽之。特命該曹。夬賜施行焉。今或以爲北方是用武之地。文敎非所當先。噫。其亦不思之甚也。誠以旣事驗之。當壬辰搶攘之際。潢池之變。猝起於北方。此無他。絶域遐遠。未添王化。被人誑誘。靡然趨赴。不復知君臣父子之倫。去就逆順之卞。故以至於此耳。當其時也。倘無一二倡義之士。則關北一道。必不能爲國家之有矣。爲今之計。尤以爲儒道培養之。俾固其根本也。況臣等雖在儒籍。亦編城丁。平居則粗習詩書。有事則悉就行伍。茲今之請。實非爲託院儒。自便身圖也。誠以欽仰先賢。旣出秉彝好善之心。仍欲得比君子之鄕。均被重道之化。庶幾由此而導率蚩氓。講論義理。皆知親上死長之道爾。惟聖明。留神而垂察焉。則豈勝幸甚。臣等無任惶猥祈懇之至。謹昧死以聞。伏惟天垂睿聰。以振作遐俗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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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집(畏齋集) 이단하(李端夏)생년1625년(인조 3)몰년1689년(숙종 15)자계주(季周)호연재(戀齋), 외재(畏齋), 송간(松磵)본관덕수(德水)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문인. 민유중(閔維重), 이민서(李敏敍) 등과 교유
畏齋集卷之三 / 疏箚 / 代北儒請鍾城涪溪書院賜額疏
伏以臣等所居。北鄙絶遠之域也。地與戎羯爲界。俗以弓馬爲習。士子之生于其間者。何所觀感而有所知識也。幸賴先正儒賢謫居斯土。以訓迪士子爲務。士子由是興勸。知有詩書禮法之敎焉。知有孝悌忠信之道焉。其有賴於民俗者。夫豈淺末也哉。仍竊伏念先正臣故
文簡公鄭汝昌。遭戊午史禍。謫配鍾城。其後有若
應敎臣奇遵。遭己卯士禍。配穩城。有若
副提學臣柳希春。遭乙巳士禍。亦配鍾城。有若
參贊臣鄭曄。嘗爲鍾城府使。此
四臣者。皆以名世儒賢。遭時不幸。竄斥邊地。素位而行。探討經籍。以其緖餘。敎訓蒙士。雖其設敎有久近。收功有淺深。而北方人士粗曉學業。免爲禽獸之歸者。惟諸賢敎澤是賴。而至于近世。有若
大提學臣趙錫胤。有若
參判臣兪棨。俱以一時恩譴。或守鍾城。或配穩城。惟此
兩臣者。皆以至誠敎育多士。數年之間。遠邇風動。臣等雖未知兩臣學術之爲如何。而以臣等耳目所覩記。論其師表成就之效。則亦無愧於古人矣。在昔鍾穩兩邑。各建祠宇一間於鄕校墻外。以祀奇遵,柳希春兩臣。後來多士之論。咸以此祔祀。於禮爲苟簡。遂協謀鳩工。營立一祠宇於
鍾城之涪溪里。以右
六臣者合享。而兼設書院。爲章甫藏修之所。而輟去鍾穩兩邑附建之祠。於是列邑人士莫不興起其慕賢向學之心。來集院中。群居肄業。庶有相觀爲善之地耳。或云北鄙用武之方也。儒敎非所當先。此甚不思之言也。昔在壬辰之亂。叛民之變。獨起於北道。此由遐遠之俗。不霑王化。一被姦人誑誘。靡然趨於叛亂之域。而不復知有君臣逆順之理。禮義廉恥之道。當是時。若無若干士子倡義討賊之擧。則關北一道。當不爲國家之有。由是觀之。雖在邊鄙。尤不可不培養儒敎之一脈。以爲根本之圖也。今者書院之設。殆遍國中。幾乎三代之國都閭巷。莫不有學之規模氣象。而獨惟關北通
一道九官。始建此一書院。此誠絶無僅有之擧也。然自國家若無表章之方。一道人士。其何能有所激勵而作興也。此臣等所以不遠數千里而來。敢有所陳籲於閶闔之下。伏願聖明勿以臣等遐遠微賤而廢其言。特賜院額。以副多士之望。不勝幸甚。臣等名編儒籍。亦編城丁。無事則粗習詩書。有變則悉就行伍。臣等實無托跡儒院。自便其身之圖。惟是秉彝之天。好善之誠。不以荒裔而有間。故俎豆數賢。以爲依歸之地。講明義理。率先氓俗。庶幾有裨於親上死長之道。故旣與之搆成院宇。復爲之來請扁額。雖甚猥越。實出誠悃。惟殿下留神矜察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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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臣等所居。乃北鄙之鄕也。地與戎羯爲隣。俗以弓馬爲習。士之生乎其間者。其何所觀感而啓發其知識乎。惟幸先正諸賢。謫居斯土。不鄙夷而訓迪之。由是人皆興勸。始知有所謂詩書禮樂之敎。孝悌忠信之道焉。其垂惠於後學。有補於聖化。夫豈淺鮮也哉。 蓋昔戊午史禍作。而文獻公臣鄭汝昌謫鍾城。己卯士禍作。而應敎臣奇遵謫鍾城。乙巳士禍作。而文節公臣柳希春謫鍾城。有若文肅公臣鄭曄。嘗爲鍾城府使。 忠貞公臣鄭弘翼謫鍾城。至于近世。則大提學臣趙錫胤,參判臣兪棨。俱以一時恩譴。或守鍾城。或竄穩城。茲數臣者。皆以名世儒賢。遠斥荒裔。處困以亨。益肆力於經籍。推其緖餘。以訓蒙士。雖施敎有久近。收效有淺深。而能使俗習丕變者。其功甚大。有不可誣也。臣等遠則耳飫。近則親炙。高山景行之思。實有萬倍於他人者也。遂與數三同志之士。協謀鳩工。營立一祠于 鍾城涪溪里。以文獻公鄭汝昌主享。而其與八賢配食。以寓沒世之慕。兼作藏脩之所。列邑人士。聞風興起。坌集院中。群居隷業。仍相與謀之曰。會寧。有元山書院。卽文正公臣金尙憲,文簡公臣鄭蘊之祠。而大提學臣趙錫胤。亦竝享焉。蓋金鄭。皆嘗通判鏡城。其精忠大節。尤足以聳動遐邇。則遺跡所在。咸宜俎豆之典。而見今元山。凋殘漸甚。灑掃亦缺。況會與鍾。疆界相接。趙錫胤。疊享於兩祠。又不無瀆祀之嫌。盍圖所以共享於一祠哉。於是撤元山而合於涪溪。移奉位板將有日矣。旣而。又相與謀之曰。此實斯文盛擧。而尤爲北方之大幸。誠宜亟聞於朝。請得恩額。以聳士林之觀瞻。以光聖代之儒敎。 今者書院之設。殆遍國中。而若乃明川以北。則通八官。始有一焉。朝家苟不因此而別有激勵。則將必沮其興起之心。而無以革其鄙陋之習。其幾豈不重歟。惟其激勵之道。莫先表章。而表章之方。又無出於宣額。則何可自外於聖明。而不以此仰籲乎。臣等茲敢重繭百舍。投進一疏。此非臣等之私言。實一方多士之所同願也。伏乞殿下。勿以賤微而忽之。特命該曹。夬賜施行焉。今或以爲北方是用武之地。文敎非所當先。噫。其亦不思之甚也。誠以旣事驗之。當壬辰搶攘之際。潢池之變。猝起於北方。此無他。絶域遐遠。未添王化。被人誑誘。靡然趨赴。不復知君臣父子之倫。去就逆順之卞。故以至於此耳。當其時也。倘無一二倡義之士。則關北一道。必不能爲國家之有矣。爲今之計。尤以爲儒道培養之。俾固其根本也。 況臣等雖在儒籍。亦編城丁。平居則粗習詩書。有事則悉就行伍。茲今之請。實非爲託院儒。自便身圖也。誠以欽仰先賢。旣出秉彝好善之心。仍欲得比君子之鄕。均被重道之化。 庶幾由此而導率蚩氓。講論義理。皆知親上死長之道爾。惟聖明。留神而垂察焉。則豈勝幸甚。臣等無任惶猥祈懇之至。謹昧死以聞。伏惟天垂睿聰。以振作遐俗焉。 | 伏以臣等所居。北鄙絶遠之域也。地與戎羯爲界。俗以弓馬爲習。士子之生于其間者。何所觀感而有所知識也。幸賴先正儒賢謫居斯土。以訓迪士子爲務。士子由是興勸。知有詩書禮法之敎焉。知有孝悌忠信之道焉。其有賴於民俗者。夫豈淺末也哉。 仍竊伏念先正臣故文簡公鄭汝昌。遭戊午史禍。謫配鍾城。其後有若應敎臣奇遵。遭己卯士禍。配穩城。有若副提學臣柳希春。遭乙巳士禍。亦配鍾城。有若參贊臣鄭曄。嘗爲鍾城府使。 此四臣者。皆以名世儒賢。遭時不幸。竄斥邊地。素位而行。探討經籍。以其緖餘。敎訓蒙士。雖其設敎有久近。收功有淺深。而北方人士粗曉學業。免爲禽獸之歸者。惟諸賢敎澤是賴。而至于近世。有若大提學臣趙錫胤。有若參判臣兪棨。俱以一時恩譴。或守鍾城。或配穩城。惟此兩臣者。皆以至誠敎育多士。數年之間。遠邇風動。臣等雖未知兩臣學術之爲如何。而以臣等耳目所覩記。論其師表成就之效。則亦無愧於古人矣。在昔鍾穩兩邑。各建祠宇一間於鄕校墻外。以祀奇遵,柳希春兩臣。後來多士之論。咸以此祔祀。於禮爲苟簡。遂協謀鳩工。營立一祠宇於 鍾城之涪溪里。以右六臣者合享。而兼設書院。爲章甫藏修之所。而輟去鍾穩兩邑附建之祠。於是列邑人士莫不興起其慕賢向學之心。來集院中。群居肄業。庶有相觀爲善之地耳。或云北鄙用武之方也。儒敎非所當先。此甚不思之言也。昔在壬辰之亂。叛民之變。獨起於北道。此由遐遠之俗。不霑王化。一被姦人誑誘。靡然趨於叛亂之域。而不復知有君臣逆順之理。禮義廉恥之道。當是時。若無若干士子倡義討賊之擧。則關北一道。當不爲國家之有。由是觀之。雖在邊鄙。尤不可不培養儒敎之一脈。以爲根本之圖也。 今者書院之設。殆遍國中。幾乎三代之國都閭巷。莫不有學之規模氣象。而獨惟關北通一道九官。始建此一書院。此誠絶無僅有之擧也。然自國家若無表章之方。一道人士。其何能有所激勵而作興也。此臣等所以不遠數千里而來。敢有所陳籲於閶闔之下。伏願聖明勿以臣等遐遠微賤而廢其言。特賜院額。以副多士之望。不勝幸甚。 臣等名編儒籍。亦編城丁。無事則粗習詩書。有變則悉就行伍。臣等實無托跡儒院。自便其身之圖。惟是秉彝之天。好善之誠。不以荒裔而有間。故俎豆數賢。以爲依歸之地。講明義理。率先氓俗。 庶幾有裨於親上死長之道。故旣與之搆成院宇。復爲之來請扁額。雖甚猥越。實出誠悃。惟殿下留神矜察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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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續集卷之二 / 附錄 / 鍾山書院 肅宗丙寅 賜額祭文。[知製敎製進。]
天荒一隅。曰惟關北。疆隣羯羠。性資鄙朴。家慙揖讓。人愧文學。一變而魯。伊誰之力。賴我忠賢。是牖是迪。以德以功。禮宜侑腏。予惟文獻。資稟卓絶。志在啓開。行務篤實。明體達用。知至物格。深探根窟。上接濂洛。直內方外。義精仁熟。翼儲道尊。分竹化洽。人知趣向。士軌正轍。功光聖門。五賢之一。德陽翹英。際會聖烈。學原藏修。忠存輔益。師友賢德。型範夔契。文敎蔚興。古道可復。危機夜駭。齎志而沒。仁祖有臣。文正直節。誠輸金石。操勵氷檗。尊周攘夷。義凜秋色。一心皇朝。三年燕獄。驚動華夷。煒煌簡策。亦惟文簡。挺特忠直。推孝扶綱。艱値栫棘。一介孤忠。千仞之壁。義不臣虜。刃沒于腹。由其充養。有此樹立。至如文節。博洽端愨。和能不流。威武難屈。長秋密旨。誰能批逆。獨唱公議。蹈禍不怵。不負所學。展也邦特。惟此文肅。行誼純篤。鼓篋函丈。樂群求益。棘棘不阿。群壬側目。進退以正。保身明哲。入孝出忠。不忝蛾述。往在昏朝。倫斁人瀆。西宮晝錮。變迫朝夕。幸有忠貞。挺身奮筆。三綱不絶。人紀以植。一代忠義。千秋事業。彼美貞臣。斯文攸託。家傳淸白。忠孝大節。疾惡若浼。赴義如渴。峻其風績。臺綱以肅。天嗇其年。位歉于德。杞溪有人。世效忠績。學有淵源。尙志義烈。南漢一疏。北塞三黜。秉銓賢進。持憲姦懾。展施未久。朝野悼惜。惟茲九賢。異世同躅。其光烈烈。其行卓卓。誰不景仰。誰不欽服。天其或者。要化荒域。一邦前後。或刺或謫。不謂蒙昏。幷加誘掖。新而化之。舊染皆革。親炙質變。逖聽俗易。絃誦不絶。俎豆是習。年代雖遠。瞻依如昨。宜爾章甫。思以矜式。鍾城之西。棟宇所托。山聳千鬟。水廻九曲。杖屨攸及。精靈是宅。撤舊合新。蓋慮其黷。邃學大節。班享血食。儒風益振。義路愈闢。涪溪鹿洞。程朱所適。地殊名同。人異道一。幷萃于茲。是亦奇績。緬想典型。怳爾如覿。恨不同時。資予毗翼。茲遣禮官。賁以嘉額。仍薦牲醴。敷予衷曲。不昧者存。尙來歆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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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유집 제2권 / 부록(附錄) / 포증사전(褒贈祀典)
숭정 57년 - 숙종대왕(肅宗大王) 10년 - 갑자(1684)
○ 관북(關北)의 사림이 선생의 덕을 추모하여 부계(涪溪)에 서원을 건립하고, 복재(服齋) 기준(奇遵),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동계(桐溪) 정온(鄭蘊), 문절공(文節公) 유희춘(柳希春), 문숙공(文肅公) 정엽(鄭曄), 충정공(忠貞公) 정홍익(鄭弘翼),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시남(市南) 유계(兪棨) 등 여덟 현신을 배향하였다. 이듬해 병인년(1686)에 원유(院儒) 김정창(金鼎昌), 주익(朱榏) 등의 상소를 인하여 종산(鍾山)이라는 액호를 하사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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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 숙종 11년 을축 > 10월 15일 > 최종정보
숙종 11년 을축(1685) 10월 15일(임인)
11-10-15[02] 함경 북도 유학 김정창이 종성의 부계 서원에 사액을 청하자 답하다
함경 북도(咸鏡北道) 유학(幼學) 김정창(金鼎昌)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ㆍ응교(應敎) 기준(奇遵)ㆍ문절공(文節公) 유희춘(柳希春)ㆍ문숙공(文肅公) 정엽(鄭曄)ㆍ충정공(忠貞公) 정홍익(鄭弘翼)ㆍ대제학(大提學) 조석윤(趙錫胤)ㆍ참판(參判) 유계(兪棨) 등을 위하여 서원(書院)을 종성(鍾城)의 부계(涪溪)에 세웠으니 사액(賜額)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뒤에 해조(該曹)의 복계(覆啓)로 그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원전】 39 집 4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영무 (역) |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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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 숙종(肅宗) 11년(1685) 11월 초5일
종성(鍾城)의 부계리(涪溪里)에 있는 사우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의 사연을 특별히 시행하는 건
1. 함경도(咸鏡道)의 유학(幼學) 김정창(金鼎昌) 등의 상소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유학 김정창 등의 상소를 보니, ‘종성(鍾城)의 부계리(涪溪里)에 사우를 건립하여 문헌공(文獻公) 신(臣) 정여창(鄭汝昌)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응교(應敎) 신 기준(奇遵), 문절공(文節公) 신 유희춘(柳希春), 문숙공(文肅公) 신 정엽(鄭曄), 충정공(忠貞公) 신 정홍익(鄭弘翼), 대제학(大提學) 신 조석윤(趙錫胤), 참판(參判) 신 유계(兪棨)를 배향(配享)하여 영원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아울러 학문을 연마하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여러 지방의 선비들이 이 소식을 듣고 흥기하였으며, 이어 서로 모의하기를, 「회령(會寧)에는 예전에 원산서원(黿山書院)이 있었는데, 이는 곧 문정공(文正公) 신 김상헌(金尙憲)과 문간공(文簡公) 신 정온(鄭蘊)을 모신 사우로서 대제학 신 조석윤도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하지만 지금 원산서원은 갈수록 재정이 악화되어 청소하는 일조차 못하는 형편이다. 게다가 회령과 종성은 경계가 서로 접해있어 조석윤을 양쪽의 사우에서 겹쳐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또한 제사를 번거롭게 한다는 혐의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부계리에 합쳐 위판(位版)을 옮겨 봉안한 지 여러 날이 되었다. 이 일은 실로 사문(斯文)의 성대한 일이자 북방(北方)의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속히 조정에 보고하여 사액을 받아 사림이 보고 듣는 것을 흥기시키고 성대(聖代)의 유교(儒敎)를 넓히도록 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상소하여 청합니다.’고 하였습니다. 궁벽한 변방 지역은 말갈(靺鞨)과 인접한 곳으로 오직 말달리고 사냥하는 데에만 힘을 써서 문교(文敎)의 교화를 입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여러 선정신(先正臣)이 외진 변방에 유배되어 변방의 백성들을 타이르고 진작시키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낡은 풍습을 혁파하여 일변지로(一變至魯)로 시ㆍ서ㆍ예ㆍ의(詩書禮義) 등을 터득하여 스스로 윗사람을 친근하게 여겨 어른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도리를 힘쓸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한 지방의 선비들이 감동하여 흥기해서 합사(合祠)하여 제사 지낸 것입니다. 이를 본다면 또한 여러 신하들이 이룬 공적의 효험이 크고 많은 선비들이 존경하여 흠모하는 정성이 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은액(恩額)을 하사하시어, 한편으로는 포숭(褒崇)하는 은전(恩典)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격려하고 권면하는 방도로 삼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입니다. 명천(明川) 이북 지역은 단지 이 서원 한 곳뿐인데, 변방 지역 선비들의 청원에 대하여 서원을 중첩해서 설립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한 가지 예에 구애되어 방계(防啓)한다면, 참으로 선비들이 낙담하는 한탄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금령이 있었고 은명(恩命)에 관계되니, 신(臣)의 조(曹)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희(康熙) 24년 11월 초5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박태손(朴泰遜)이 담당하였는데, 회계(回啓)한 대로 시행하라고 계하(啓下)하였다.
[주-D001] 일변지로(一變至魯) :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이르기를, “제(齊)나라가 한 번 변하면 노(魯)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 번 변하면 도(道)에 이른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고 하였는데, 이는 선정신(先正臣)의 교화를 입어 변방의 낡은 풍속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음을 말함.[주-D002] 스스로 …… 도리 :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이르기를, “임금께서 어진 정치를 행하기만 한다면, 이 백성들이 그 윗사람을 친근하게 여겨 어른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君行仁政 斯民親其上 死其長矣〕”라고 하였음.[주-D003] 적자(赤子)의 마음 : 천진하고 거짓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이르기를, “대인은 그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하였음.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박선이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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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 숙종(肅宗) 11년(1685) 11월 초6일
고(故) 현감(縣監) 이지함(李之菡)과 충간공(忠簡公) 이산보(李山甫)의 서원에 사액하는 건
1. 공홍도(公洪道) 보령(保寧)의 진사(進士) 최문해(崔文海) 등이 상소를 올려 고(故) 현감(縣監) 이지함(李之菡)과 충간공(忠簡公) 이산보(李山甫)의 서원에 사액을 청한 일에 대하여 특별히 사액하는 것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판하(判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교서(敎書)와 액호(額號)를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종성(鍾城) 부계리(涪溪里)에 있는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서원에 사액하는 건
1. 함경도(咸鏡道)의 유학(幼學) 김정창(金鼎昌) 등이 상소하여 종성(鍾城) 부계리(涪溪里)에 있는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일에 대하여 특별히 사액하는 것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판하(判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교서(敎書)와 액호(額號)를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박선이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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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 10 | 1684 | 갑자 | 康熙 | 23 | - | 關北 士林이 涪溪에 세운 서원에 享祀되다. |
숙종 | 12 | 1686 | 병인 | 康熙 | 25 | - | 金鼎昌 등의 上疏에 의해, 涪溪에 세워진 書院을 鍾山書院으로 賜額하고 禮官을 보내 致祭하다. |
春官通考 春官通考 卷38 吉禮 [院祠] [咸鏡道]
鍾山書院, 在鍾城府。顯宗丙午(1666,현종7), 創建, 肅宗丙寅(1686,숙종12), 賜額。主享文獻公鄭汝昌見上景賢書院。謫本府。, 配享應敎奇遵見上文峯書院。謫本府。·文節公柳希春見上義巖書院。謫木府·文肅公鄭曄見上龜巖書院。曾莅本府。·忠貞公鄭弘翼見上老德書院。謫本府。·文正公金尙憲見上崧陽書院, 莅本府。·文簡公鄭蘊見上顯節祠。曾莅本府。·文孝公趙錫胤見上道山書院。·文忠公兪棨見上七山書院。以上八公, 肅宗丙寅, 幷追配。·文忠公閔鼎重見上石室書院。曾莅本道。肅宗戊寅(1698,24), 追配·文忠公南九萬。見上文會書院。景宗癸卯(1723,경종3), 追配。
鍾山書院, 在鍾城府。顯宗丙午, 創建, 肅宗丙寅, 賜額。
主享文獻公鄭汝昌見上景賢書院。謫本府。,
配享應敎奇遵見上文峯書院。謫本府。·
文節公柳希春見上義巖書院。謫木府·
文肅公鄭曄見上龜巖書院。曾莅本府。·
忠貞公鄭弘翼見上老德書院。謫本府。·
文正公金尙憲見上崧陽書院, 莅本府。·
文簡公鄭蘊見上顯節祠。曾莅本府。·
文孝公趙錫胤見上道山書院。·
文忠公兪棨見上七山書院。以上八公, 肅宗丙寅, 幷追配。·
文忠公閔鼎重見上石室書院。曾莅本道。肅宗戊寅, 追配·
文忠公南九萬。見上文會書院。景宗癸卯, 追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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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함경도(咸鏡道)
종성(鍾城) 종산서원(鍾山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기준(奇遵)ㆍ유희춘(柳希春)ㆍ정엽(鄭曄)ㆍ김상헌(金尙憲)ㆍ정홍익(鄭弘翼)ㆍ정온(鄭蘊)ㆍ조석윤(趙錫胤)ㆍ유계(兪棨)ㆍ민정중(閔鼎重)ㆍ남구만(南九萬) 두분(二公)이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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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 / 함경도(咸鏡道)종성도호부(鍾城都護府)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종산서원(鍾山書院) 현종 병오년에 건립하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정여창(鄭汝昌) 문묘(文廟)에 보인다. 기준(寄遵) 고양(高陽)에 보인다. 유희춘(柳希春) 담양(潭陽)에 보인다. 정엽(鄭曄) 광주(廣州)에 보인다. 정홍익(鄭弘翼) 북청(北靑)에 보인다. 김상헌(金尙憲) 태묘(太廟)에 보인다. 정온(鄭蘊) 광주(廣州)에 보인다. 조석윤(趙錫胤) 개성(開城)에 보인다. 유계(兪棨) 임천(林川)에 보인다. 민정중(閔鼎重) 양주(楊州)에 보인다. 남구만(南九萬) 함흥(咸興)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