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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나는 청주에서 대학을 다닐 때 형편이 어려워, 수동 용화사에 1년간 학생법회를 보아주면서 지낸 일이 있다.
당시 함께 계시던 대원스님이 자신이 겪은 영험담을 말해 주었다.
이 스님은 6.25 당시 청주 사직동에 있는 구 용화사에 계셨는데, 미군기가 이 구용화사를 폭격하여 건물은 완전히 파괴되고, 자신은 폭탄의 바람에 날려 뚝을 넘어 무심천 물위로 날아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물이 별로 많지 않은 곳에 떨어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은 기적적으로 다친 데가 없었다.
자기는 늘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는데, 그 영험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내 추측으로는 최소한 50-150m 정도는 날아갔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는 관음경에 있는 대로 불에 들어가도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한 경우로 생각되었다.
『현장삼장전』에는 현장법사가 엄빈국이라는 곳에서 노승의 병환을 치료해 주고 노승으로부터 반야심경을 받았다고 하며 이후 많은 가피력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양사람들 중에도 위급한 경우 Avalokitesvara(아발로키테스바라: 관세음보살)를 염하여 많은 사람들이 위급에서 벗어난 영험을 얻었다고 한다. 이차대전 당시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늘‘관세음보살(아발로키테스바라)를 외웠는데, 기적적으로 죽음에서 면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세음보살님의 도움을 받은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사실 필자가 이 회보를 지금까지 계속 발간할 수 있었던 것도 관세음보살님을 염불한 가피가 아닐까하고 늘 생각하고 있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고 나 자신에게도 있을 것으로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 천태종의 교세가 급격이 확대되는 이유 중 하나는 관세음보살 신앙을 존중함에 있다고 보여진다.
출처: 산림불교(cafe.naver.com/buddhistforest) 제25호 사천왕님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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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000년 여름, 인천 앞바다에 큰 태풍이 불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경기도 화성 신흥사에 다니는 한 거사님이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거사님은 풍랑이 너무 심해 자기 배가 떠내려 갈 것 같아 밧줄을 잡아매는 도중에 밧줄을 파도에 놓쳐버렸다고 합니다. 밧줄을 놓쳐버리고 나자 거사님의 몸이 큰 파도에 휩쓸려 가는데, 그 위급한 순간에 관세음보살님을 정신없이 불렀다고 합니다.
그 거사님의 어머니께서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늘 입으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염불을 했었는데, 그 거사님도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하시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배웠던 것입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 상황에서 거사님은 얼마나 간절하게 불렀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파도에 떠밀리면서 물에 휩쓸려 들어가기 직전 그 절 부처님이 그 거사님 곁을 휙 스쳐지나가더랍니다. 바로 그 순간 다시 밧줄이 파도에 떠밀려 자기 앞으로 오게 되었는데, 거사님은 순간적으로 그 밧줄을 다시 잡게 되었고 그 거사님은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그 거사님이 죽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 사례와 비슷한 내용이 법화경 제25품인 관세음보살 보문품(관음경)에 있습니다.
"가령 폭풍이 일어 배가 나찰귀들의 나라에 들어갔을지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나찰의 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위급한 상황을 나찰로 이해한 것입니다.
출처: 대흥사 홈페이지 http://www.daeheungsa.com 한북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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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옛날에 통도사에서 나오는 사보로 '등불’이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오는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그 잡지에는 신도들의 영험록을 정기적으로 싣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18살 된, 한 신도의 딸이 무단히 시름시름 아픈 것이었습니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는 말도 할 수 없이 식욕을 잃고 삐쩍 마르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이 사람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으나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용하다는 의사라면 양의·한의를 불문하고 다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병의 차도는 보이지 않고 점차 건강이 더 나빠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리고 죽어가고 있던 중 기왕 죽을 거면 기도나 한 번 해보고 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100일 관음기도였습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오직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자면서도 관세음보살, 깨어서도 관세음보살, 걸어가며 관세음보살, 절을 하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모진 게 사람의 목숨이라,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삐쩍 말라 있었지만 용케 100일을 견뎌냈습니다.
100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던 처녀가 잠시 졸았던지 하얀 옷을 입은 귀부인이 한 분 나타났습니다. 그 부인은 옷을 아주 잘 차려입었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천녀들이 입는 하늘거리는 의상이나 한복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양장이나 정장 정도로 기억합니다.
그 귀부인은 약병 하나를 손에 쥐어주며 이 약을 먹으면 나을 거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 병에는 영어로 뭔가가 써져 있었는데, 몸이 아픈 그 처녀는 약병에 붙어있는 그 이름을 읽어 기억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녀의 가족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그 약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약을 구할 수 없어 깊이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꿈꾼 지 일주일 쯤 지난 날, 몸이 아픈 처녀는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오빠의 소포를 받습니다. 그 소포를 열어보았더니 놀랍게도 처녀가 꿈속에서 받은 그 약이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포에는 오빠의 편지가 들어있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오빠도 일주일 쯤 전 어느 날 밤늦게 공부하다가 잠이 와서 책상에 앉아 잠시 졸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난 데 없이 하얀 옷을 입은 한 부인이 나타나 말을 하는데, 어느 병원에 가면 이러이러한 이름의 약이 있는데, 그 약을 빨리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보내주라는 내용이었답니다. 정신을 차렸으나 여느 꿈과 달리 마치 생시를 본 것처럼 선명하였답니다.
다음날 아침, 꿈에서 가르쳐준 병원으로 가서는 이러이러한 약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의사는 깜짝 놀라며 그 약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하더랍니다. 처녀의 오빠는 꿈 이야기를 하고, 한국에 있는 여동생이 이러이러한 증상으로 시름시름 앓아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지금 100일 기도를 하는 중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인 의사가 말하기를, 이 약이 막 개발되어 아직 시중에는 유통이 되지 않고 있고, 이제 처음으로 이 약을 내놓는 것인데 이 약을 찾는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여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랍니다. 더구나 이 약은 여동생이 앓는 것과 같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약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처녀의 오빠는 그 의사의 도움으로 약을 구해서 서둘러 사연을 적어 한국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약을 먹은 처녀는 하루하루 병세가 호전되더니 마침내 병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20년 쯤 전에 본 내용이라 세세한 표현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강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워낙 충격적인 글이어서 오랜시간 제 기억의 바다에 그렇게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대흥사 홈페이지(www.daeheung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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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내가 학창시절 영주 관음사에서 한 철을 보낸 적이 있다.
그 때 창건주 노보살님 한 분이 당신의 관세음보살 영험담을 자주 들려주셨다.
한 때 당신의 외아들이 노름에 빠져 제 정신이 아닌 적이 있었다. 초저녁에 십만원을 가지고 가서 몽땅 잃고, 두 번째도 만회를 실패하고, 세 번째 찾아왔길래 노보살님이 아들한테
“ 이제는 나를 죽여도 더 이상 돈을 못 주니 알아서 해라”고 말하고, 워낙 분하고 원통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관음주력을 약 한 시간 반이나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잠에 빠져 들었다고 했다.
이때 꿈에서 고깔 쓴 할머니가 나타나더니 돼지새끼 세 마리를 “옛다!” 하면서 던지는데 한 마리는 치마폭에 싸이고, 한 마리는 무릎에 떨어졌다 방바닥으로 구르고, 마지막 한 마리는 방바닥에 바로 떨어졌다.
이 보살님이 약 두세 시간 잠을 자고 깨어보니 어느덧 새벽인데 조금 있으니까 아들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여기 있소”하면서 십만 원짜리 세 뭉치를 던지는데, 한 뭉치는 치마폭에 떨어지고, 또 한 뭉치는 무릎을 맞고 방바닥에 떨어지고, 마지막 한 뭉치는 바로 방바닥에 떨어지더란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날 이후 아들은 노름하는 버릇을 완전히 끊었다고 했다.
오늘도 살아계신 관세음보살님은 지척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출처: www.amita.net 영락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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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탄성큰스님 (전 법주사 주지, 전 조계종 총무원장, 전 조계종 원로위원) 법문 중
삶이 힘들고 허망한 것이라 할 지라도 그 속에 무궁한 법이 있고 그 법을 알
면 최상의 열락이 있으니 열심히 참선하여 마음자리를 흐트리지 않도록 하십
시오. 그런 가운데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까 인연 얘기를 했지만 기도는 선한 인연을 만드는 불가해한 힘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자리에 좋은 인연의 씨가 싹트는 것입니다.
밥을 얻어 먹으며 안면도로 가다가 전쟁을 만나 다시 계룡산으로 돌아 왔는
데 나는 그 난리통에 기도의 인연으로 죽을 목숨이 살아나는 걸 체험했습니
다.
하나는 나의 얘긴데 인민군에게 잡혀 계룡면 면소재지의 좁은 방에 갇혔
습니다. 다른 곳에서 잡혀온 사람들 30여명이 그 좁은 방에 쪼그린채 닷새를
지냈는데 나는 관음주력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저 관음주력만 하며 닷새를 보내고 나니 해거름에 소장(지서장)이 나를 불러
절로 돌아가라더군요. 뒤 돌아볼 겨를 없이 절로 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어느
스님이 지서로 와서 사정사정한 덕에 내가 방면이 되었더군요.
나는 관음주력의 영험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나머지 사람들은 공주로
끌고가 길에 죽 세워 놓고 따발총을 난사해 다 사살해 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등에
식은땀이 흘러 내리더군요.
그런데 그 무자비한 사살에서 딱 한 사람이 살아났는데 그는 갑사 위에 사는
스님(대처승)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끌려간 후 아버지는 스님된 입장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했겠습니까.
닷새밤을 지새운 아버지의 기도가 그 아들을 살렸는데 더 놀라운 것은 아들이
총알을 여섯군데나 맞았는데 모두 살갗을 스치기만 했더라는 것입니다.
전쟁통에는 그런 기적도 있는 것인데 나는 그 아버지의 기도가 아니었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잡혀온 30여명 가운데 한사람은 잡혀 오자마자 어머니의 부음을 듣
고 풀려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대학생이었고 어머니는 신원사
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를 만나러 와 절에 있다가 인민군에게 잡
혔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이 잡혀가고 바로 타계를 했으니 어미의 목숨을 아들의
목숨과 바꾼 격이 아닙니까. 실로 눈물겨운 일이어서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 대학생의 형은 인민군에 잡혀 대전교도소에 있었는데 어느날 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서 “내일 밖에 나갈일이 생기는데 나가는 즉시 뒤돌아 보지말고 도망가라”고
했답니다.
정말 아침이 되니 모두 마당으로 집합하라고 난리를 치는데 그 틈에 도망을 쳐서
살아났다는 얘기도 뒷날 들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지성으로 기도를 하고 몸을 버려
아들을 구했고 또 다른아들은 영혼이 되어서 구했던 셈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불가해한 인연의 힘인 것입니다.
칼로 자르듯 구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내 마음자리를 편케 하는 것이 참선
이고 내 몸을 안위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둘다 중요한 불자들의 실천 사항입
니다. 누구에게나 성불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루하루 마음자리를 잘 조절하여 편케하고 몸을 함부로 하지 아니하여 좋은 인연의
실체를 영위하는 지혜를 가꿔야 합니다.
출처: 현대불교신문(www.budhda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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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내가 부른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카페 靑松님 (2007.12.11) 글
한적한 시골길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친구가 애써 정비해준 나의 애마를 몰고 시운전을
나왔습니다.
왠지 모를 불안한 감정들을 뒤로하고 시속 90km가 넘은 찰나 갑자기 운전석이 주저앉더니
타이어가 빠져 나온 채, 차는 중앙선을 따라 방향을 잃은 채로 미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순간 관세음보살을 세 번 크게부르자, 제멋대로 미끄러지던 차는 멈춰섰습니다.
차의 방향이 도로 난간의 전주(전봇대)를 1m 앞에 두고말입니다.
전주 아래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낭떠러지였습니다.
1m만 더 나아갔으면 아무도 없던 한적한 도로에서 죽어갔을지 모를 일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정말 믿을 수 없는 순간앞에서 또 한 번
관세음보살을 부릅니다.
워낙에 글솜씨가 없어서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간절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정말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함께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마음속으로 버릇처럼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작은 습관들이 고통의 순간들에서
한없이 약한 나를 건져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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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나무아미타불카페 이름모를 꽃잎님 글
관세음보살님은 간절함에 따라 바로바로
응답을 주시지요
저는 어느 한때 버스안에서 한10여분간
그야말로 창자가 끊어질듯 온몸을 쥐어짜듯
그렇게 간절히 불렀는데 그 짧은 기도에도
기적같은 가피를 입었었지요
물론 그외에도 많은 가피를 입었지만
그럴때마다 그 간절함은 항상 죽는 사람마냥
절실하고 애절했답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잘 아시겠지만
급한 소원이 생겼을때는 목숨을 내놓고
기도해 보세요 그러면 즉시 응답이 있습니다.
가피를 입었다면 더욱 열심히 평생토록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도해야겠지요
하루도 거르는 날 없이^^
저는 일만일 기도 발원하고 실천 중이예요
모든 회원님들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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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www.82cook.co.kr ..님 글
제가 예전 유명한 점집에서 점을 봤는데
저보고 종교믿으라고 종교가 큰도움이 될꺼라고 했었어요.
그 기억이 나네요. 제가 종교적인 사람이 못되고
여러종교다녀봤지만, 지금은 불교가 저하고 맞는것같아서
불교 믿고싶은데 잘 안되는사람이예요. 게을러서..
제가 몇년 전 굉장히 아팠어요.
별짓 다하고, 죽다살고 파란만장했는데
불교 도움을 받았어요. 오늘 내일하고 그럴 때도 위로가 되고..
저위해서 기도해주시는 분들 많았고
저도 잘 모르니까 관세음보살을 많이 외웠어요. 마음이 급하니까
지금도 아직 완치는 아니지만, 많이 나아서 사람답게 살게되기시작했어요.
의사가 저에대해 논문쓰고 싶다고 할정도이고,
어떤의사는 저보고 그어려운 병을 어떻게 이정도까지 고쳤냐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가피인지 모르겠지만, 어려울때 위로와 힘이되어준것 같습니다.
나으시기바랍니다. 잘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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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관세음보살 칭명 가피 경험
법광 김광삼
1995년 6월 5일에 출국하여 파리에 도착한 다음 날, 루브르 박물관 4층에서
사진기 필름을 교체하던 중 동료들과 헤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갑작스런 상황에서
당황한 채로 일행을 찾으러 각 층을 뛰어다니며 찾았지만, 수만 명의 인파 속에서
일행을 찾기란 무척 어려웠다. 언어 소통조차 어려웠으니 초비상이 걸린 셈이다.
평소에 귀의하였던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나도 모르게 염송했다.
몽유병자와 같은 무의식상태에서 오로지 한 생각, 관세음보살님만을
애타게 부르며 헤맨 지 약 40여 분, 박물관 어느 입구에 서 있는 수위 근무자에게
짧은 영어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 오면 프랑스어만
사용하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기여서 그들은 짧은 영어와 몸짓, 손짓을 하는 여행객을
고자세로 대하기만 했다.
한참을 수위근무자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의 등을 두드렸다.
돌아보니 신체 건장한 40대의 잘 생긴 신사였다.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일행을 찾고 계십니까?"
나는 정말 반가워서 "예."하며 일행을 꼭 만나게해달라고 사정했다.
자신을 파리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이라고 소개한 이 신사는 지하 3층 주차장으로
내려가면 동료들과 만날 수 있다며 엘레베이터까지 안내해주었다. 지하 3층에 내렸더니
30여 미터 앞에서 초면인 수염많은 외국인이 손짓으로 나를 오라고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100여 미터 정도 주차된 버스들을 지나서 어느 버스의
문을 열더니 나보고 타라고 한다. 승차했더니 나의 여행가방이 선반 위에 얹혀있는 것이 아닌가!
버스의 번호도, 색상도, 기사님의 얼굴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렇게 기막히고 진귀한 현상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불가사의한 불보살님의 가피에 형언할 수 없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의 기쁨을 느꼈다.
비록 40여 분이라는 짧은 시간의 기도 염불이었지만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무의식 상태에서 그토록 간절하게 부처님을 찾았던 것이다.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대자대비 천수천안관세음보살께서 응신하셔서 나에게 현증가피를 주신 것이라고 확신한다.
출처: 가피 도서출판 모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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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거리에 나앉게된 여섯 모녀를 구해주신 관세음보살의 가피
부산에 살았던 김미순(金美順)이라는 보살은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 다섯을 키우며 힘들게 살았습니다. 재산이라고는 남편이 남겨준 집 한 채뿐인데,
그것도 친척의 보증을 섰다가 차압을 당할 위기에 놓여있었습니다.
그 때가 1975년 가을, 혹독한 추위는 다가오고 있는데, 돈 6백만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아이들과 함께 거리로 나앉을 판이었던 것입니다. 친구, 친척할 것 없이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돈을 빌리려 하였지만,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인지라
쉽게 빌려 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절망 속에서 나날을 보내었지만 묘안은 생겨나지 않았고, 마침내 그 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세 밤만 자면 저 아이들을 데리고 이 집을 떠나야 하는구나.
정말 이렇게까지 살아야하는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않을까?'
그러나 죄없는 다섯 아이가 불쌍하여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합장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저는 모진 고생을 해도 좋고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 어린 자식들은 어떻게 합니까?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
제발 저 아이들만이라도 잘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절망 속에서, 그리고 뜨거운 모성애로 그녀는 관세음보살께 빌고 또 빌었습니다.
밥맛도 나지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마냥 관세음보살만 불렀습니다.
어느새 사흘이 지나 어둠이 걷히면서 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쑥 빠지는 것이 그녀는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엉엉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그때 누가와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조그맣게
두드리더니 점점 거칠고 세게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정한 사람들, 아침도 먹지 못한 이른 시간에 사람을 쫓아내려 몰려오다니...'
그녀는 마지못해 대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말을 약간 어눌하게 하는
50대의 남자가 아주 정중한 자세로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가 김미순씨의 댁입니까?
"그렇습니다만....."
"미순아! 나를 몰라보겠느냐? 큰오빠, 내가 바로 너의 큰오빠다."
그녀는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큰오빠는 대동아전쟁 때
징집당해 일본으로 끌려가서 죽었다고 들었고, 또 제사도 여러 번 지낸 적이 있는데
찾아온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부모형제들의 이름, 고향의 여러가지 상황들을 질문하여 보았고,
그는 조금도 틀림이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오누이는 끌어앉고 한동안 울었습니다.
"오라버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의 큰오빠가 살아서 돌아오다니!"
"그래, 네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그동안 조총련과 깊이 관련이 되어
고국에 돌아오는 것은 고사하고 소식조차 전할 수가 없었단다."
그리고 그해(1975년) 추석을 기하여 주일 공관과 거류민단의 주선으로 조총련계
동포의 첫 모국 방문이 실현되었고, 그것도 조총련의 간부들에게 우선권을 준다고
하기에 얼른 신청하여 귀국하게 되었다는 것, 며칠 전에 와서 고향을 찾았더니
가족들은 모두 죽고 막내 여동생 하나만이 부산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며칠을 수소문하다가 이제 비로소 찾아오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미순아. 조금 전에 문 밖에서 매우 슬픈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집안에 큰일이라도 일어났느냐? "
그녀가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하자, 큰오빠는 가방에서 현찰 7백만원을
꺼내어 하나 남은 여동생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다행히 일본에서 돈을 조금 벌었단다. 그래서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호강이라도 시켜드리고,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기위해 조금 가지고 왔지.
이제 너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 돈은 모두 너의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으니 사양하지 말고 받아라."
이렇게하여 그녀는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거리로 나가 앉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처럼 사람이 살다보면 다급한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다급한 일이 발생했지만 내 마음대로도 할 수 없고
남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면 그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다급한 생각에 음식맛은 커녕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게됩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지극히 기도를 하면 느닷없이 좋은 일이 찾아들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게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증가피(顯證加被), 불보살께서 현실에서 바로 자비를 나타내어
가피력을 증명해 보이는 현증가피인 것입니다.
출처: 일타스님의 기도성취 영험담 모음집 '기도' 도서출판 효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