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귀의 한국禪 톺아보기
교학 수용해 선법 현창한 법안종
9. 법안종의 전래와 전개
광종 계획 아래 법안종 수입
중국 선진 문물 수입 의도도
법안종 조사 어록 거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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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초기 선종의 상황
고려 태조 왕건은
불교를 깊이 존숭하고 외호하였다.
그 결과 불법이 더욱 융성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고려 초기에 지속되었는데,
제3대 정종(定宗) 이후에는
선종과 교학이 병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광종(光宗)에 이르러서
국가제도의 정비와 함께
국사와 왕사의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에
오대에서 크게 발흥했던 법안종(法眼宗)이
광종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고려에 수입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그것은 불법의 순수한 전개보다는
복합적인 정치상황이 어우러진 결과이기도 했다.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중반에 걸쳐서
한국의 선법은
당으로부터 전승과 더불어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선법은
고려 초기에 중국으로부터
법안종을 비롯한 선종오가의 수입과 더불어
다시 번영을 구가하는 기회를 맞이하였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그 가운데 법안종의 경우는 시대가
약간 앞선 조동종(曹洞宗)의 수입에 뒤이어
고려 초기 선종의 발전에
주목할 만한 역할을 하였다.
그 까닭은
법안종이 선종이면서도
제반의 교학을 수용하였고,
또한 정치적인 후원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크게 풍미할 수 있는 상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법안종은
당 말기와 오대 초기에 걸쳐 형성된
선종오가 가운데 하나였는데
고려에 전승되면서
더불어 다양한 문화가 수입된 것은
정치적인 측면도 결부되어 있었다.
2. 법안종의 형성
중국 선종사에서
설봉 의존(雪峰 義存, 822~908)의 제자인
현사 사비(玄沙 師備, 835~908)는
설봉의 종풍을 적확하게 표현하여 널리 펼쳤다.
그리고 현사의 제자
나한 계침(羅漢 桂琛 , 867~928)은
보청(普請)과 작무(作務)하는 가운데서
불법을 구현하였으며,
그 제자로
법안 문익(法眼 文益)을 배출하였다.
법안 문익의
속성은 노(魯)씨이고 여항(餘杭) 출신이다.
7세에 속가를 나와
신정(新定)의 지통원(智通院)에서 삭발하였고
전위 선백(全偉 禪伯)을 의지하여 공부하였고,
이듬해 개원사(開元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명주 육왕사의
율사 희각(希覺)에게 참문하여 공부하였다.
이후 남방으로 유행하여
복주 장경원의 혜릉(慧稜)에게 참문하였다.
나아가서
성의 서쪽 지장원(地藏院)에 주석하며
나한 계침의 가르침을 받았다.
대오한 이후에
법진(法進) 등과 동행하면서
임천(臨川)에 이르렀다.
그 곳 주목(州牧)의 청에 응하여
숭수원(崇壽院)에 주석하였는데,
도성(道聲)이 더욱 높아져
사방의 운수납자들이 몰려들어
그 회하는 항상 1000여 명을 상회하였다.
이후 남당(南唐) 이변(李뷵)의 초청에 의하여
금릉 보은선원(報恩禪院)으로 옮겼다.
그 이후에
청량사(淸凉寺)에 주석하였는데,
금릉에서 세 차례 대도량에 앉아
조석으로 설법하여
그 선풍이 제방에 법안종풍으로 널리 알렸다.
958년 74세로 입적하였다.
득법제자 83인 가운데
천태 덕소(天台 德昭, 891~972)가 있고,
천태 덕소의 제자로
영명 연수(永明 延壽, 904~976)가 있다.
법안 문익이 저술한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은
940년부터 950년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선의 폐풍을 지적하여
그 올바른 길로 안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법안 문익·천태 덕소·영명 연수로
계승되는 이들 종풍은 법안종으로 현창되었다.
문익이 거양한 선풍의 성격은
선교융합(禪敎融合)으로 알려져 있듯이
법안종은 교학의 이치를 널리 활용하여
선법을 현창하였다.
특히 문익은
석두 희천(石頭 希遷, 700~790)의
명과 암(明暗) 그리고 이(理)와 사(事)가
상즉하는 묘용의 이치를 잘 해석하였고,
화엄의 원리(圓理)를 설하여
삼계유심(三界唯心)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만법유식(萬法唯識)의 도리로 깨침을 얻었으며,
유식학의 교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문익을 계승한 천태 덕소는
천태교학 및 정토교학을 크게 원용하였고,
제3세인 영명 연수도
정토교학을 비롯한 유식과 제반의 교학에도
널리 관심을 보였다.
이처럼 법안종풍은
선종이면서 제반 교학을 수용함으로써
한때 선종의 정체성이 희석되었지만,
이후로 송대에도 면면히 유지되어 갔다.
그 후손에 해당하는 도원(道原)은
〈경덕전등록〉을 편찬하여
법안종과 임제종 중심의
전등사서를 출현시키기도 하였다.
3. 법안종풍의 전승과 전개
이와 같은
중국 법안종이 해동에 전승된 것은
고려인으로서 법안 문익의 제자인
영국사의 도봉 혜거(道峯 慧炬),
원공국사 지종(智宗, 930~1018),
영명 연수와 도봉 혜거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연 국사 영준(英俊, 932-1014),
영명 연수의 제자인
진관 선사 석초(釋超, 912~964) 등
다수의 선승에 의거하였다.
고려국의 광종대왕이
영명 연수의 언교를 받고
사신을 보내서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이에 고려의 승려 36명을 보내
연수의 가르침을 받고 고려로 귀국하여
그 가르침을 홍포하게 하였다.
광종의 이와 같은 조처는
스승인 연수에 대한 보은이기도 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고려에 수입하여
국가의 문물을 일신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때문에 그 형식은
제자의 예를 취한 것이었지만
내용은 바로 국가를 통치하는
제도와 사상과 이념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것이 법안종풍을 수입했던
유학승들과 의기투합이 되어
마침내 고려 초기에는
법안종풍이 풍미하는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지종(智宗)의 자는 신칙(神則, 神明)이고,
성은 이(李)씨로서 전주 출신이다.
8세에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홍범 삼장(弘梵三藏)이 도래하여
사나사(舍那寺)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찾아가서 삭발하고
광화사(廣化寺)의 경철(景哲)에게 참문하였다.
후주(後周) 현덕 6년(958)에 중국에 들어가
구법할 뜻을 밝히자
광종대왕이 듣고서 격려해 주었다.
이에 바다를 건너 오월(吳越)에 들어가
먼저 영명사(永明寺)의
연수(延壽)에게 참문하였다.
연수가 지종에게 물었다.
“법을 위해서 왔는가,
아니면 무슨 다른 볼일
이라도 있어서 온 것인가?”
지종이 답했다.
“법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법은 본래 둘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에 편만한데
어찌 애써서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는가?”
“이미 사바세계에 변만하지만
제가 왜 애써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이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지종은 연수로부터 심인을 얻었다.
준풍 2년(961)에 국청사(國淸寺)로 가서
정광(淨光)에게 참례하고
〈대정혜론(大定慧論)〉과 아울러
천태교학을 공부하였다.
송 태조 개보 원년에
승통이었던 찬영(贊寧) 등이
지종을 청하여 전교원(傳敎院)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개보 3년(970)에 귀국하자,
광종대왕이 대사로 대우하고 연청하여
금광선원(金光禪院)에 주석토록 하고
중대사(重大師)를 가하였다.
경종(景宗)이 즉위하여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제수하였다.
성종의 시대에는
적석사(積石寺)에 주석하였고,
목종 시대에는
광천편소지각지만원묵선사
(光天遍炤至覺知滿圓?禪師)
라는 호를 가하였으며,
불은사(佛恩寺) 및
외제석원(外帝釋院) 등에 주석토록 하였다.
현종이 청하여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토록 하고,
법칭을 적연(寂然)이라고 하였고,
1013년에는
현종이 지종을 왕사에 책봉하였다.
이듬해 1014년에
보화(普化)라는 호를 가하였다.
1018년에 원주 현계산 거돈사(居頓寺)에서
89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원공(圓空)이다.
한편 〈동국승니전〉에 의하면
도봉산 혜거 국사는 법안 문익의 제자이다.
혜거가 발심을 하고
정혜(定慧)로 수행하고 있을 때
고려국의 황제가
사신을 보내 귀국하도록 하였다.
귀국하여 황제의 예우를 받았는데,
궁궐에서 법을 청하자 상당설법을 하였다.
혜거 국사가
황제의 옥좌를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옥좌를 그대들에게 보여주겠다.
그러니 만약 그대들이
이것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들 알고 있는가.
여러분들은 그 도리를 말하는데,
이 옥좌는 왜 그것을 모르는가.”
이들 법안종의 수입자들은
국내의 문헌과 중국의 선문헌 및
국내의 비문 등에 단편적으로 등장할 뿐이지
그들의 어록이 남아 있지는 않다.
따라서 종파로는
법안종의 수입자로 분류할 수가 있지만
그들의 몇몇 문답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국한되어 있다.
가령 연수와 지종의 문답에서,
불법을 추구하기 위해서
찾아왔느냐 하는 문답은
짐짓 그 의도가 분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질문한 것이었다.
너무나 식상한 질문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와
같은 성격의 질문으로서,
불법 및 선의 궁극적인 목적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지
점검하고 시험하는 문답에 해당한다.
이에 대하여 지종은
이미 국내에서부터
안목이 구비된 선사인 까닭에
매우 자연스럽게 극복하고
불법을 추구하기 위해서 왔다고 답변한다.
그 이외에 보다 분명한 답변은 없다.
그러나 연수는
그것으로는 흡족하지 않았다.
이에 사바세계 어디에도
불법이 항존하고 있는데
굳이 찾아온 이유를 재차 묻는다.
지종은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면서
바로 그 때문에 찾아왔다고 말한다.
직접 언설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불법은 다름이 아니라
그것을 체득해야
비로소 자기의 불법이 되는 까닭에
스승에게서
불법을 추구하고 싶다는 의향을 내보인 것이다.
그러자 이제야 연수는
그 말을 긍정하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문답의 내용은
특별히 법안종에게만 한정된 것은 결코 아니다.
도봉 혜거의 법어도 마찬가지이다.
옥좌는 왕을 상징한다.
따라서 옥좌를 안다고 하는 것은
황제의 본심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대단히 불경스러운 답변이 되고 만다.
이에 옥좌인 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 모여 있는 대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혜거는 이미
대중이 침묵하고 있는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답변을 다그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대중을
나무라는 말을 돌려서 옥좌에다 부여해준다.
옥좌는 말을 하지 못한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옥좌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가령 이러쿵저러쿵 옥좌가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것은
또 다른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여러분들은 그 도리를 말하는데,
이 옥좌는 왜 그것을 모르는가.’
하는 말로 결론을 짓는다.
이들 선문답은
지극히 단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선종계에서 크게 유행한
조사선풍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위에서 지종이 보여주었던 문답과
혜거의 상당설법 사이에는
아무런 간극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만큼 보편적인 선사상의 전개가
이미 고려의 선종계에도
고스란히 전승되어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한줄 요약
고려 초기
광종의 계획 아래 수입된 법안종은
선종이면서도
교학의 이치를 널리 활용하여 선법을 현창했다.
김호귀 교수
/(동국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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