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덤에서 태어났습니다. 반백발의 남자로.
세상 이치대로 가장 낮고 불쌍한 대통령부터 인생을 시작합니다.
국민이라는 이름의 선배들을 잘 모셔야 합니다. 그것은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국민 선배들은 극단에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정치, 종교, 지역, 이념, 재산, 문화 등에서의 극단.
다른 나라 같으면 벌써 내전이 발생했을 법도 한데, 참 신기하게도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아마 고유의 예절문화가 완충 작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신경이 덜 쓰이지만, 앞으로 인터넷, 휴대폰, 카톡, 메신저, 밴드, 이모티콘 등의 비대면 매체 발달로 예절문화가 파괴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예절문화 파괴 후의 파장은 예상하기도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나는 극단의 선배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쏜 비난의 화살을 맞고 고통과 고뇌와 스트레스가 범벅된 새빨간 피를 흘립니다.
선배들이 머리를 쥐어박을 땐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제발 골 때리지 마세요!
국회의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의사당 혈투에서 살아 남으려면 싸움도 잘 해야 하고 빠루 다루는 실력도 출중해야 하는데, 참 걱정입니다.
국민 선배의 뜻을 거스르면 다시 대통령 자리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 선배들에게 늘 머리 조아리고 거지 같이 빌어야 합니다.
국회의원은 선배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법을 잘 만들어야 하는데, 지문만큼이나 성향이 다른 선배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어 항상 욕을 먹고 얻어 터집니다.
폭력과 투정 일변도의 국민 선배들이 미워, 한번은 선배 뜻을 거스르고 국회에서 얻은 고급 정보로 부동산 투기해서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국민 선배들로부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무자비한 폭행을 당해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역시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게 하늘의 이치인가 봅니다.
부당하게 번 돈을 모두 국민 선배에게 환원하고 나니 이제 빚을 갚은 느낌입니다.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무덤에서 먼저 태어난 자식이라는 이름의 선배는 지나칠 정도로 저를 괴롭힙니다.
딸 선배는 독화살을 쏘고 아들 선배는 언월도를 휘두르는데, 나는 손톱만한 방패로 이리저리 힘겹게 막아내곤 합니다.
특히 무덤 동기인 아내는 나를 돈 버는 기계 이상으로 보지 않고, 자꾸 냉기 가득한 거리로 몰아붙입니다.
가정과 가족과 생활에 대한 근심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과 다름 아님을 느낍니다.
직장에서는 사장 직함을 받았는데, 선배 종업원들이 폭력적인 데모를 남발해서 늘 고통스럽습니다.
‘데모’는 거역할 수 없는 선배 종업원들의 의사결정방법이거든요.
사장인 나는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어 정말 곤혹스럽습니다.
가정과 직장의 선배들 틈에 끼어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
빨리 아버지 인생을 탈피하고 싶습니다.
청년이 되어 안개 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겨우 직장을 마련합니다.
그동안 함께 살던 무덤 동기 아내와 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후배 부모를 다그쳐 집을 마련하지만, 새카만 후배 정치인의 실정으로 해마다 집세가 올라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 선배의 구박이 심하여 늘 조바심 어린 마음으로 극진히 모십니다.
선배의 추상 같은 명령으로 말이 되고 멍멍이가 되고 골키퍼가 되고 심부름꾼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대선배인 아기의 땡강을 겨우 겨우 감당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소망하던 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대학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 중학교까지 치열하게 경쟁해야 합니다.
공부 못해 진학에서 탈락하면 바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자리로 되돌아가는 급행열차를 탈 수 있습니다.
그건 지옥보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책상과 숨막히게 씨름해야 하지요.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학교, 학원, 도서관, 교과서, 참고서, 교육동영상의 무게에 짓눌려 올빼미가 되어갑니다.
가끔 후배 선생과 후배 학생을 놀리는 재미가 있지만, 대체로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인생입니다.
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기 위해 가끔 사고를 치면, 후배 부모가 꼼짝 없이 해결해 주어 그나마 견딜만합니다.
지긋지긋한 학교를 끝내고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악했습니다. 공부는 초등학교에서 모두 끝난 줄 알았더니 유치원이란 게 기다리고 있더군요.
영어·수학·피아노·미술·태권도·웅변·논술학원 등 학원을 다섯 개 이상 다녀야 한다는 법 때문에 무척 피곤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가장 낮은 자리인 대통령과 국회의원 시절에 선배들을 위해 법을 바꾸지 않은 게 후회됩니다.
그리고 후배 부모가 아기 선배를 더 많이 챙겨서 속상합니다.
가끔 부모를 훈계하며 나의 존재를 부각시키지만, 부모의 눈길은 아기에게 더욱 많이 갑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기가 대선배이므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아기가 되었습니다.
나이가 적어져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그토록 소망했던 인생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대선배입니다. 그래서 요람의 왕이라고 하지요.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후배들이 나를 씻기고 먹이고 입히면서 정성껏 모시는데,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아 연신 방글거립니다.
가끔 맘에 들지 않는 부모라는 이름의 후배에게 “응애!”하고 명령하면 금방 달려와 머리 조아립니다.
아, 그런데 착각했습니다.
나에게도 선배가 있다니! 후배 엄마의 뱃속에 있는 대대선배.
후배 엄마는 자궁 속의 대선배를 모시느라 가끔 나를 홀대하는 경우가 많아 너무 속상합니다.
만세! 이제 후배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더 이상의 선배가 없는 큰선배가 되었습니다.
나를 위한 전용병원이 있고, 전철에도 내 자리가 특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후배들은 이 큰선배를 위해 정말 정성을 다합니다.
자궁 속의 따뜻한 양수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인 고통을 한순간에 씻어내는 듯합니다.
자궁 바깥에선 아름다운 선율이 흐릅니다.
태교음악을 들으면 천국보다 더 천국다운 천국에 간다지요.
아, 정말 이 안온함이란!!
이제 천국이 보이는 듯합니다.
어디선가 형언할 수 없는 빛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내 곁으로 서서히 다가옵니다.
의식과 육체가 슬며시 이완됩니다.
마지막 의식의 끝자락을 붙잡고 다시한번 살아온 과정을 돌아봅니다.
그래, 그래도 살면서 치열한 고통과 슬픔만 있었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장 낮고 불쌍한 대통령과 국회의원 시절에 선배 국민이 보내준 격려와 박수,
회사체육대회에서 선배 종업원이 쳐주던 헹가레,
생일 때마다 선배 자식이 마련해준 정성스런 선물,
아픈 나를 정성껏 간호해 주고 늘 곁을 지켜주던 아내의 사랑.
그리고 후배 선생의 칭찬에 우쭐해 하던 나의 모습,
선배 동생이 공부에 지친 나를 위로하며 과자를 챙겨주던 일,
어린아이 시절 내가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잠을 자는 척해 준 선배 아기의 세심한 배려,
자궁 시절에 내가 후배 엄마의 배를 발로 찼을 때 아픈 표정을 짓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로 대해 주던 후배 엄마의 모습.
가족 모두 식구라는 이름으로 식탁에서 여행에서 산과 들과 바다에서 함께 웃음 날리던 때도 많았지.
그래서 인생을 애환의 굴곡이라고 했던가.
슬픔과 기쁨의 파장. 침체, 성장, 성숙, 쇠퇴의 경기순환처럼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따르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따를 수 있다는 이 인생의 본질.
인생은 슬픔과 기쁨의 교차점에서 의미화된다는 것을 이제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갑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머물 것인지 무덤을 통해 다시 환생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제 나에게 주어지는 슬픔과 고통을 흔쾌히 감내할 자신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의 길에 기쁨과 행복과 웃음이라는 반전이 있음을 알기에. (끝)
첫댓글 역발상의 극치네요.
엄마의 자궁이 천국인걸
아기도 엄마도 그땐 잘 모르지요.
엄마 뱃속이 있을 때가 정말 천국이라는 생각..
세상에 나오는 순간 지옥과 싸워야 하는 인생이라는 생각...
이건 복지국가도 아니고...
어쨌든 역순으로 엮어놓으니 재밌군 ^^
재미있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시다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군요ㆍ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좋겠습니다ㆍ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 보았습니다. 비슷합니다. 영화 이전에 거꾸로 가는 세상을 추리 형식으로 엮고 있었는데 영화가 나와 김 샌 기억이 있지요.. 세상이 거꾸로 간다면 흥미있을 것 같습니다.
거꾸로 가는 인생이 어쩌면 더 감동적입니다. 저도 거꾸로 가는 그림여행 구상하고 있어요. ㅎㅎ
거꾸로 가는 그림여행, 아이디어 좋습니다..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처음 보는 대단하고 멋진 글입니다. 삶이 고달플 때 이 글을 기억하면 큰 위로가 되겠습니다.
극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거꾸로 젊어지시기 바랍니다.. 엄마 자궁 속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답니다.(상상)ㅎㅎ 늘 건강하시구요..
해학과 역설이 꿀맛입니다
선선한 바람에 벌써 한기를 느끼는 아침,
~키득키득 며찰만에 웃어봅니다
시인님의 미소와 웃음이 온통 느껴집니다..ㅎㅎ
인생을 거꾸로 돌아봤습니다..
이 신산한 세월에, 아기가 되어 포근한 엄마 품에 안겨 봤으면 좋겠습니다..
와우~ 어머나 저 또 와우 를 첫 자로 썼네요. 거꾸로의 삶. 쉽게 술술 써내려가신건 아닌거 같은데... 너무나 기발한 발상. 너무나 재밌게 잘 엮어나간 글 잘 읽었습니다.
단편으로 만들어도 아주아주 재미난 글이 되겠어요. 인생 동기 아내가 없었다면 거꾸로의 삶도 구멍이 났을 겁니다.
잘 읽었습니다. 대단하세요!
작가님도 남편이 없었다면 삶이 구멍 났을지도..ㅎ
사랑(!?)하는 조보경 작가님, 오래된 작품 읽고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은 현재 위치의 소중함을 모르는 경향이 있어, 그걸 일깨워 보려고 거꾸로 인생 써보았습니다.
작가님 덕분에 산문 부문이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스마트 소설> 코너도 생기고... 스마트 소설 올리시는 분도 생기고~^^ 작가님은 엄청난 독서와 습작으로 역량이 잘 갖추어졌는데, 너무 강한 열정으로 인해 안에서 밖으로 나올 때 병목현상이 좀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염려 없어요.. 세월가면 절로 해결됩디다.. 제 경험으로...ㅎ 그러니 너무 조급히 생각할 필요는 없구요..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구요.. 문봄 '출석메모'나 '끝말잇기'를 통해 한줄이라도 쓰는 버릇하여 맥을 놓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구요.. 워킹맘으로 신산스런 세월에 놓여 있을 텐데, 늘 건강 유의하시고 문운이 활짝 열리길 바랍니다..
병목현상 이라... 네 잘 새기고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선생님께 처음 들어보는 말씀 이니 제겐 아주 중요한 포인트 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요... 엄청난 독서량이나 습작이 매우매우 없는 사람 입니다. 창피할 정도로... 열심히 읽고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