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14) 페레올 Ferreol, Jean Joseph(1808∼1853). 제3대 조선교구장.
▲ 페레올 주교
제3대 조선교구장. 1808년 12월 27일에 프랑스 아비뇽(Avignon)에서 태어나 1838년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1839년 5월초에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향하였다.
1840년 1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중국에 상륙하여 중국대륙을 횡단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다.
이때까지 그는 조선 교회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여 어떤 큰 불행이 일어났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 봉천에까지 왔으나 그 곳 요동지방의 푸대접 때문에 서만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지방은 원래 포르투갈 선교사의 관할구역이었으나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 그 관할권이 넘겨짐에 따라, 이를 시기한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이 그 곳 신자들에게 프랑스출신 신부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사주했기 때문이었다.
서만자에 돌아온 페레올 신부는 그 곳에서 앵베르 주교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고 그의 지시대로 조선 입국을 위해 양부(Yang Vou)로 가려고 했으나 요동지방 신자들의 적의로 말미암아 그 곳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1838년 8월 14일자로 벨리나(Bellina)의 명의주교로서 계승권을 가진 조선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1843년 12월31일 만주교구의 베롤(Verrolles) 주교로부터 성성식을 받았다. 이에 더욱 조선 입국의 길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여의치 않던 중, 때마침 그를 찾아온 김대건(金大建)을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되돌아갔다.
갖은 고생 끝에 조선 입국에 성공한 김대건은 주교와의 약속대로 배를 구입하여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주교에게 연락하니, 주교는 그때 프랑스로부터 새로 파견되어 온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거느리고 상해로 달려왔다. 이어 함께 배를 타고 모진 풍파를 헤쳐 간신히 한국 서해안에 다다라 충청도 나바위[羅岩)라는 곳에서 닻을 내렸다. 조선 입국을 시도한 지 6년만인 1845년 19월 12일이었다.
곧 서울로 올라와 전교활동을 전개했으나, 얼마 안 되어 그가 조선 입국에 앞서 상해에서 신품을 준 김대건 신부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는 가운데 1851년을 맞이한 주교는 거듭된 박해와 1만여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과로로 점차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 2월 3일 끝내 회복을 보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는 제3대 주교로서 조선 입국 이래 8년 동안에 폐허가 되다시피한 조선 교회를 소생시킨 큰 공을 남기었는데, 그의 유해는 4월 12일에 안성(安城) 미리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묻혔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15) 리델 Ridel, Felix Clair(1830-1884).
▲ 리델 주교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재위 : 1869-1884). 주교. 한국명 이복명(李福明). 1830년 7월 7일 프랑스 낭트(Nantes) 교구에서 태어난 그는 1857년 12월에 사제품을 받고 잠시 교구사제로 일하였다.
1859년 이방인에게 전교할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60년 7월 27일에 한국을 향해 조국을 떠났다. 1861년 3월 31일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베르뇌(Berneus, 張敬一)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보좌주교를 만나고 곧 충청도 공주(公州)의 진밧 지방을 맡아 전교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병인년(丙寅年)에 일어난 대박해로 두 주교와 5명의 동료신부를 잃게 되었으나 리델 신부는 다행히도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가 있었다. 이에 살아남은 페롱(Feron, 權) 신부, 칼레(Calais, 姜) 신부와 의논하여, 박해로 주교와 여러 성직자를 잃은 조선 교회의 사정을 알리고 새로이 성직자를 청하고자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중국으로 탈출키로 하였다.
연장자인 리델 신부가 그 임무를 맡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1866년 7월 7일 중국 치푸(芝罘)에 도착해서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를 만나 구원을 요청하였다. 리델 신부의 요청에 따라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를 구출코자 로즈제독은 3척의 군함을 이끌고 9월 20일 인천 앞바다에 이르니 이것을 병인양요(丙寅洋擾)라 일컫는다.
이 때 칼레와 페롱 두 신부는 군함이 왔음을 알고 탈출한 길을 찾고자 했으나 군함을 만나지 못하고 따로 청국으로 피신함으로써, 이제 조선땅에는 한 명의 신부도 없게 되었다.
그 뒤 리델 신부는 다시금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새로이 조선교구에 배속된 여러 신부들과 함께 일본 · 만주 등 여러 곳을 찾아갔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1869년 6월 25일 조선교구의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주교로 임명된 리델 주교는 1870년 초에 로마로 가 그곳에서 6월 5일 주교 성성식을 갖는 동시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 1871년 7월에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조선 입국 시도를 잠시 중단하고 한불자전의 완성과 교리문답책을 편찬하는데 전심하였다. 1876년 4월에 블랑(Blanc, 白圭三) 신부와 드게트(Deguette) 신부를 데리고 조선 입국을 위해 다시금 배를 타고 조선을 향해 떠났다. 5월 8일 서해안에 닿은 주교는 조선 교우들의 요청에 따라 신교의 자유를 얻도록 하는 일에 전심하기 위해 상해로 되돌아가기로 하고 두 신부만을 상륙시켰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10년 만에 다시 목자를 갖게 되었는데, 중국에 돌아온 리델 주교는 일본 · 만주를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조선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트고자 애쓰던 때에 새로 두세(Doucet), 로베르(Robert), 뮈텔(Mutel), 코스트(Coste)의 네 신부를 새로 배속받아 그중 두세, 로베르 두 신부와 함께 중국배를 타고 조선으로 건너와 9월 23일 황해도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을 떠난 지 11년 주교로 임명된 지 8년 만에 서울에 들어온 주교는 감시의 눈을 피해가면서 전교에 전심하였다. 그해 10월, 이러한 교회 형편을 알리기 위해 한 교우에게 편지를 주어 만주로 가서 코스트나 뮈텔 신부에게 이를 전하도록 하였던 바, 불행히도 잡히게 되어 주교의 입국사실이 탄로되었다.
이 때문에 1878년 1월 28일 그는 잡히는 몸이 되어 5개월 동안 옥중에 갇혔으나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교섭으로, 중국정부의 주선에 의해 6월 5일 옥에서 풀려나, 7월 12일 만주로 추방되었다.
그간 코스트 신부에게 맡겼던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이 완성되어 일본 나가사끼(長崎)로 건너가 이를 인쇄에 붙이니, 1880년말과 1881년 봄에 걸쳐 두 책이 다 나오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중풍의 치료를 위해 홍콩으로 건너갔으나 별 효과가 없었으므로 블랑 신부를 보좌주교로 선정하고 그해 11월에 고향인 반느(Bannes)로 돌아가 1884년 6월 20일 54세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16) 메스트르 Maistre, Joseph Ambroise(1808-1857).
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메리곤호에 승선한 메스트르신부 [탁희성 작]
나. 구합덕 성당 경내로 이장된 메스트르 신부의 묘소 [사진제공: 한국교회사연구소]
다.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성전
한국성 이(李). 조선교구 선교사. 안느시(Annecy) 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1832년에 신부가 된 후 7년 동안 교구사제로서 활약하다가 1839년 이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마카오의 경리부장이 그의 임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마침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 편으로 우리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를 떠났다. 이 때 그는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육로로 또는 해로로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선교사의 입국이 불가능하게 보이자 그는 김대건만이라도 입국시키고자 김대건과 하직하였고, 1846년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동북 국경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만주 군인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고, 간신히 풀려나 만주로 돌아왔다.
드디어 1852년, 1847년에 난파한 프랑스 군함들의 유물을 철거한다는 구실 아래 중국 배를 타고 조선 서해안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상륙하는 데 성공,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더구나 연장자였으므로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아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聖孀會)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나 기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자 그는 성영회의 도움을 얻어 외교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을지라도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사업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堤川)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오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德山) 황무실에 묻혔다. 그는 특히 그의 착하고 양순한 성격 때문에 최양업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17) 페롱 Feron, Stanislas(1827∼1903).
▲ 페롱 신부
조선교구와 인도의 퐁티세리에서 전교한 선교사. 한국성 권(權). 프랑스의 세즈(Sez)에서 태어나 그 곳 대신학교를 나와 연령미달이었지만 특별배려로 1850년 12월 21일 사제서품을 받고, 플레르(Flers)와 아르장탕(Argentan)의 사제로 일하였다.
1854년 10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한 다음 1856년 1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14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가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다블뤼(Daveluy) 신부를 그의 후임으로 삼았을 때였다.
그는 곧 몽소승천지방 즉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박해의 불꽃이 타올라, 2명의 주교와 7명의 성직자가 순교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요행히도 살아남게 된 페롱 신부는 한국 교회의 장상이 되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료인 칼레(Calais)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스스로는 한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달리 정해졌다. 본국으로 송환된 그는 1870년 인도(印度)의 퐁티세리로 파견되었고, 그 뒤 30년간을 그곳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다가, 젊은 시절 그가 봉사했던 한국 교회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걸 보고 만족해 하면서 1903년 6월에 77세의 고령으로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18) 랑드르 Landre, Jean-Marie-Pierre-Eliacin(1828~1863).
▲ 합덕 황무실 성지
조선교구 선교사. 한국성(姓)은 홍(洪). 프랑스 태생인 그는 일찍이 성직자 되기를 원하여 사제품을 받은 다음, 소신학교 교사, 본당 보좌신부 등으로 본국에서 봉사하다가, 1856년 10월 5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58년 3월 21일 한국 전교를 위해 고국을 떠나, 1861년에야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내포(內浦) 지방으로 파견된 그는 그 곳에서 전교활동 중 1863년 봄 중병을 얻어 9월 16일 충청도 황무실에서 선종하였다. 그가 입국한 지 불과 3년만의 일이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19) 조안느 Joanno, Pierre Marie(1832∼1863).
▲ 공주 황새바위 성지
조선교구 선교사. 1832년 2월 9일 코트 뒤 노르(Cote du Nord)의 멜이오네(Mellionnee)에서 태어나, 1856년 1월 3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 1857년 12월 19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1858년 3월 21일 한국으로 떠난 그는 1859년과 1860년에 걸쳐 두 번씩이나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1861년 세 번째만에 비로소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성모영보구역인 충청도 공주(公州) 지방에 파견되어 전교활동을 계속했으나, 불과 2년 후인 1863년 4월 13일 충청도 둠벙이[公州郡 新下面 造平里]에서 병을 얻어 선종하였다. [가톨릭대사전]
파리외방 전교회 조선파견 선교사 행적
20) 칼레 Calais, Alphonse(1833∼1884).
▲ 칼레 신부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강(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뒤 1860년 7월 5일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의 선교사로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의 서부지역에서 전교활동을 벌였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로 여러 차례 위험을 넘기고 산 속에 피신해 있다가 이해 10월 페롱(Feron, 權)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부터 여러 번 한국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부득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벡(Maubec)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마쳤다. 주요 저술로는 ≪강신부 훈계≫(필사본)가 있다.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