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가톨릭 박해사
건륭제의 천주교 박해 2
재위 61년간 박해 지속…배교 신자 많아
선교사들, 산·동굴·배에 숨어 밤에만 사목
복건성의 주민이 서양 선교사들이 국가의 금령을 위반하고 선교를 한다고 고발하였다. 복건성 순무 주학건이 관원을 파견하여 교우의 집들을 수색하였는데 한 교우 집에서 순교한 신부의 유해 상자가 발견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어린이를 살해하고 두개골로「성약」을 만들어 여자에게 먹인다는 유언비어가 있었으므로 관원은 유해 상자를 그러한 것으로 간주하고 산 주교와 알코벨 신부, 세라노 신부, 로요 신부, 디아스 신부를 살인죄, 간음죄로 체포하고 교우도 9명을 체포하였다. 유해는 어린 아이의 것이 아니고 성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금령을 위반한 죄로 산 주교는 1747년 5월 26일 서문 외에서 참수시켰으며 알코벨 신부, 세라노 신부, 로요 신부, 디아스 신부 4명은 1748년 교수형을 시켰다. 예수회 헨리끄 신부는 1707년 6월 13일 포르투갈에서 출생하여 1727년 중국에 왔다. 헨리끄 신부는 1730년 마닐라로 돌아와 1737년 강남에서 선교하였으며 1744년 9월 15일 마카오에 왔으며 1745년에 남경에서 선교하였다. 아티미스 신부는 상숙에서 미사 직후 체포되었으며 헨리끄 신부는 1747년 12월 21일 체포되어 사설유포죄 선혹양민죄로 1748년 소주에서 교수치명하였다.
도미니코회 이태리 출신의 가레토 주교는 건륭제 때 중국에 왔다. 가레토 주교는 섬서성에 잠입하여 선교하다가 체포되어 광주로 구축되었는데 광주에서 배를 타고 하남으로 가서 선교하였다. 가레토 주교는 시계수리 기술이 있었으며 심한 간질병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박해를 피해 숨어다니며 선교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가레토 주교는 강주에서 선교하다가 홍동에서 서세하였다. 그곳에 교우들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주교의 묘를 보존하여 왔다고 하는데 그 묘가 가레토 주교의 묘가 아닌가 한다. 독일 출신의 본시들러 신부는 1725년 중국에 와서 광주에서 선교하였다. 본시들러 신부는 박해 때 산서성에서 선교하다가 감숙성까지 가서 동굴 속에 숨어 살며 밤에 교우집에 가서 성사를 주고 새벽에 미사를 하고 동굴로 돌아왔다고 한다. 본시들러 신부는 산서성에서 1744년 5월 26일 서세하였는데 중국인들이 성인으로 공경하였다고 한다.
서양 선교사들이 광주와 마카오로 구축되자 중국인 하천광 신부와 공상현 신부, 번수의 신부, 정유량 신부, 라병중 신부, 고약망 신부, 진성수 신부, 심동행 신부가 중국의 광활한 대륙을 다니며 성사를 주었다. 중국 신부들은 길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복주, 소주에서 선교사들이 사형된 후 다른 성에까지 교난이 파급되었다. 1754년 예수회 포르투갈 출신의 아리조우 신부와 비에가스 신부, 페레이라 신부, 피레스 신부, 실바 신부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았다가 감형되어 마카오로 구축되었다. 박해시대 중국에서도 평신도들의 역할이 상당히 컸었다. 1759년 호북성에서 선교하던 라마테 신부가 그의 서신 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지역의 교무가 상당히 발전되고 있는데 순회 전도원 때문에 발전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국은 전도원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세례만 줍니다. 전도원이 교리를 가르친 후에 우리가 세례를 줍니다』
평신도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광주로 구축되자 교우들을 돌보았으며 서양 선교사들의 길 안내 및 영입하는 일을 하였다. 로마 교황청에서 경공(敬孔)과 조상 제사를 금하자 교우들은 관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무역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회장들은 주택 내 은밀한 곳에 소경당을 만들어 기도 장소를 제공하였다. 관리들이 교우들을 적발해 내지 않게 하기 위해 관원들이 결혼이나 상을 당하면 경비 일부를 도와주었다. 이리하여 회장들이 파산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